중국 산동성에서 5일(3-3)
(니산과 부자동)
瓦也 정유순
3-3. 니산부자동과 니산 성성경공원(2023년 8월 4일)
삼(공(三孔)을 둘러보고 산동성 곡부시 동남족 30㎞ 지점 창평(昌平) 니산 동쪽 기슭에 있는 니산(尼山)을 찾아간다. 니산(尼山)은 산동성 남부 북경(北京)∼상해(上海)선 철도 동쪽의 사수(泗水) 이남의 구릉(丘陵)지대로 최고봉은 봉황산(鳳凰山, 649m)이다. 니산은 공자의 부모가 이곳에서 기도를 한 후 공자를 얻었다 하여 공자의 이름을 <구(丘)>, 자를 <중니(仲尼)>라 하였고, 후손들은 이 산을 <니산(尼山)>이라고 부른다.
<니산 부자동(夫子洞) 가는길>
먼저 찾은 곳은 공자가 태어났다는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 산동성 곡부)의 니산(尼山) 부자동이다. 부자동(夫子洞)은 중국이 만세사표(萬世師表)로 추앙하는 공자(孔子)가 태어난 곳으로 겨우 두 세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마한 석굴(石窟)이다. 이 석굴에서 아기를 출산하기엔 무척 좁고 낮은 동굴로 두어 명이 겨우 앉을 만한 편편한 돌덩이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부자동 표지석>
<부자동>
공자(孔子, BC 551년∼BC 479년)는 춘추 전국시대에 노나라에서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안징재는 갓 출생한 아기의 괴상한 생김새에 놀라 신생아를 그곳에 두고 마을로 내려왔다가 그래도 모정(母情)에 끌려 다시 그곳을 찾았더니 봉황과 호랑이가 젖을 먹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아이의 울음소리가 지금까지도 세상을 깨우치는 사표가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부자동 유적 표지판>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의 두 아내인 시씨(施氏)와 안징재, 첩 하나로 시씨와의 사이에 딸 아홉, 첩한테 아들 맹피를 낳았으나 맹피는 절름발이라 대를 잇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숙량흘은 66살에 10대의 안징재를 부인으로 들여 71살에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예수가 마구간 말구유에서 태어났다면 공자는 조그마한 동굴에서 태어났다. 산동성 사수(泗水) 이남의 산 동쪽 기슭에 공자묘(孔子廟)·공모사(孔母祠) 등이 있다.
<니산서원 입구>
부자동 뒤에 있는 니산서원은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로 앞쪽에 제사공간인 대성전을 배치하고 뒤쪽에 배움의 공간인 명륜당을 배치하는 형식이다. 우리도 성균관과 전주·나주향교 등이 전묘후학의 배치를 하였고, 대부분의 향교나 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취했다. 이는 평지에는 전묘후학의 형태이고, 경사진 곳에서는 전학후묘를 취한다. 이는 묘(廟)에 모시는 분이 세상을 더 널리 보시고 높은 가르침을 주시라는 의미라고 한다.
<니산서원>
<공자 영정>
대충 니산서원을 둘러보고 이번 여행의 알찬 지식을 제공해 주시는 고려대 신창호 교수의 지인 초청으로 <니산성원서원>을 방문하는 보너스를 챙긴다. 그 지인은 니산성원서원에 고위직으로 봉직하시는 분으로 시원한 차와 수박으로 반갑게 맞이해주셔서 더위와 여독을 해소한다. 8월의 무더위에 정말 사막을 헤매다가 오아시스를 만나는 기분이다. 고마운 일이고 덕분에 문화공정으로 뻗어 나가는 중국의 현실을 엿볼 수 있었다.
<니산성원서원>
니산성원서원(尼山聖源書院)은 중국내외 문화계의 저명한 학자와 사회 저명인사들이 설립하여 유교문화를 주체로 하는 우수한 중국 전통문화를 진흥하고 인류문명의 조화를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개방적인 문화학술 기관이다. 서원의 위치는 공자의 출생지 부자동으로부터 약 1㎞ 떨어진 곳에 2008년 10월 8일 이곳에서 설립되었으며, 2009년 6월 23일 공식 학술 교류 및 교육 활동을 시작으로 출범하였다.
<니산성원서원 잔디밭>
서원의 기능 목표는 학술 포럼, 훈련기지, 유학캠프, 연구요충지로, ‘원본으로 돌아가 새로운 것을 열자’라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중국 문화의 근원을 이어가는 한편,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마음으로 각 학설과 각종 문명의 성과를 흡수하고, 다른 문화를 존중하며, ‘각자 아름다움과 함께 현대 유학의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여 조화로운 사회와 조화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데 기여한다고 설명한다.
<부장동 고사목>
유가문화(儒家文化)는 ‘중국 전통문화의 기초이며 중화민족의 정신세계를 뒷받침한다. 역사가 발전할수록 유교 문화는 왕성한 생명력과 불멸의 가치를 점점 더 부각시키고 있으며, 오늘날 서로 다른 문명의 충돌과 대화의 시대에 유교문화는 다시 세계로 나아가 인류의 화합을 촉진하는 동방의 빛’이 되었다며, 유교문화의 창시자인 공자의 탄생지로서 유학을 널리 보급하고 중국문화가 외국과의 문화교류를 촉진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 같다.
<니(구)산>
다시 버스로 약 5분가량 이동하면 니산성경공원이다. 니산성경공원(尼山聖境公園)은 2018년에 완공된 것으로 또 하나의 공자 명소로 등장했다. 공자상이 세워졌고, “대학당”이라는 공자를 선전하는 거대한 전각이 자리한다. 대학당(大學堂)은 65m의 높이로 9개의 층으로 이루어진다. 구성은 인청(仁廳)·의청(義廳)·예청(禮廳)·지청(智廳) 등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되어 있고, 내부의 큰방에서는 서예를 체험 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니산성경공원 대학당>
대학당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고산앙지(高山仰止)’라는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차할편(車舝篇)에 나오는 글로 “높은 산은 계속 우러러 보게 되고(高山仰止) 큰 길은 계속 걸어가게 된다.(景行行止)”는 글에서 따온 것이다. 큰 길과도 같은 공자의 수준에 비록 이르지 못할지언정 그렇게 되고자 하는 마음만은 계속 그분을 향해 길을 갈 뿐이다.’라는 뜻 같다.
<대학당 이구 '고산앙지'>
그리고 벽에는 <대학(大學)>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인 ‘大學之道(대학지도)는 在明明德(재명명덕)하며 在親民(재친민)하며 在止於至善(재지어지선)이니라’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다. “큰 배움의 도는 밝은 덕을 밝게 하는 데 있으며, 백성을 친애하고, 지극한 선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다.”라는 뜻이다. 그 옆으로 행단 그림이 분위기를 띠운다. 행단(杏壇)은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서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곳이다.
<대학지도 재명명덕>
공자의 제자가 너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뛰어난 제자 72명을 ‘72현(賢)’이라 부른다. 이 중에서 유명한 제자로는 자로(子路)·염유(冉有)·유약(有若)·안회(顔回)·중궁(仲弓)·자공(子貢)·자하(子夏)·자유(子遊)·증자(曾子) 등이 손꼽힌다. 《논어》〈선진〉편에 따르면, 공자의 제자는 ‘선진(先進)그룹’과 ‘후진(後進)그룹’으로 나뉜다. 이 72현이 긴 복도 같은 중앙홀에 도열해 있다.
<72현 전시실>
선배 그룹은 공자와 나이 차이가 20여세 정도인 사람들로, 자로·자공·유약 등이다. 후배 그룹은 공자와 40세 정도 차이가 나는 사람들로 안회·증자·자하·자유·자장 등이다. 이들 선배 그룹과 후배 그룹을 ‘제자(弟子)’라고 하는데, ‘아우 벌(弟)인 사람과 아들 벌(子)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들 벌인 후배 그룹들이 공자의 사상을 후세에 전했다. 증자를 이은 맹자·자하·자유 등을 이은 순자가 그들이다.
<행단(杏壇)>
다른 한 벽에는 <논어(論語)>의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子曰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자왈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문자가 지혜(智慧)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이는 “공자께서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지혜이니라.”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쥐꼬리만 한 자존심 때문에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하는 것이 큰 병폐가 아닌가? 이는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무엇을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스스로 안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 같다.
<논어의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글>
그 넓은 대학당을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돌아보고 밖으로 나오면 순간 눈에 띄는 건 금색의 거대 공자상이다. 공자상 자체 높이만 72m이고, 기단석까지 합치면 90m에 이른다. 높이 72m는 제자 72현을 상징한다고 하며, 공자 동상도 크기를 자랑하는 중국인답게 건립한 것 같다. 공자상을 기준으로 뒤편으로 니산(尼山)이 있고 앞으로는 사수(泗水)가 펼쳐진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동상이라는 공자(孔子)상을 바라보며 성인의 발자취를 되새겨 본다.
<공자상>
<사수(泗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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