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규한 신부와 함께하는 기도 따라하기] (2) 나를 위한 하느님의 준비(사랑)
■ 성경 구절: 창세 1,1-23 천지창조(첫째 날에서 다섯째 날까지)
■ 청할 은총: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 선물에 대한 감사의 은총을 청합니다.
기도 요점:
1.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보면서 나라면 어떻게 창조했을까를 상상해 보며 내가 창조한 것은 누구를 위한 창조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에게 주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미리 인간을 위한 것들을 준비하고 계셨음과 비교해 보세요. 그리고 하느님과 나의 창조 이유가 다르다면,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2.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4절)고 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셨을까를 상상해 봅니다. 빛이 없으면 지구상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으며, 광합성 작용을 하여 포도당과 산소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빛은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생각해 봅니다.
* 광합성 작용: 6CO₂+ 6H₂O+빛 -> C₆H₁₂O₆+6O₂
3. 하느님께서 좋아하심은 어떤 종류의 좋아하심일까를 상상해 봅니다. 요술쟁이와 같은 사람으로서의 좋아하심일까요 아니면 지금 창조하고 계신 것을 인간에게 주시기 위한 좋음일까요?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 부모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씩 준비하는 ‘아기를 위한’ 좋아하심임을 숙고해 봅니다.
4.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시는 소리를 직접 들어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피조물인 빛, 하늘, 바다, 식물, 동물 등을 느껴 봅니다.
5. 세상 만물을 보면서 자신에게 있어서 “보니 참 좋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돈, 권력, 재물, 사랑, 자식, 등)이 있을까를 상상해보고 이것을 하느님의 마음과 비교해보고 느껴봅니다.
6. 셋째 날은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말을 왜 두 번씩 하셨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장)에서 ‘사흘째 되는 날’은 창조의 셋째 날에 축복을 두 번씩이나 한 날이기 때문에 결혼식을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말씀을 축복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느님께서는 창조하시면서 축복을 내리고 계시는 것을 상상해보고 느껴봅니다.
7. 하느님의 이러한 창조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으로 우리가 있기 전에 창조한 것을 주시기 위해 미리 준비하셨고, 준비된 것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보라는 것이며, 이러한 사랑을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에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고 계심을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현대 영성] 초연함의 영성 (1) 융통성 없는 경직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삶에서 마주 오는 시련이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의 원인 중에 하나는 ‘집착(attachment)’이다. 연인 사이나 부모와 자식 사이에 참된 사랑이 아니라 집착하는 경우 얼마나 서로를 힘들게 하는지 우리는 체험으로 잘 알고 있다. 집착은 물건, 재물, 건강, 능력, 직위, 사람 등에 대한 외적인 것에서부터, 과거 기억, 칭찬, 실수, 미운 사람 등에 대한 심리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무엇보다 자아에 대한 집착은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게 하여 그곳에 묶이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를 외적, 내적으로 고착되게 한다. 사막 교부, 조시무스 아빠스는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것이 해로운 것이 아니다. 그 무엇인가에 애착심을 갖게 되는 것이 해롭다”라고 했다. 애착심이나 집착은 우리 영성 생활에서도 아주 큰 걸림돌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집착의 반대되는 말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초연함(detachment)이다. 초연함은 도달하기 힘들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성이다. 근본적으로 초연함은 ‘분리(separation)’를 뜻한다. 영적 여정에서 초연함은 창조물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인데, 이는 자신이 창조된 목적과 자신의 최종 행복을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기 위해서이다. 물질적 소유, 명예, 유명세, 권력, 건강 등을 우리가 찾으며 살고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인간의 완전한 성취를 이룰 수 없다. 창조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본래의 창조된 영역 밖, 즉 하느님께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초연함은 사람들과 세상을 물러나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다. 초연함은 창조물에 대한 애착, 심지어 하느님의 선물에서도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아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런 자유로움 속에 있는 이들은 모든 망상들을 내려놓고 진정한 실재를 볼 수 있게 되는 초연함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초연함에 도달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도 『새 명상의 씨』에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한두 사람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고 우주의 붕괴를 막는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이기심과 애착은 마지막까지 ‘우리 힘으로 넘을 수 없는 산’인 것 같다. 또한 머튼은 초연함에 도달하기 힘든 이유 중에 하나로 융통성 없는 경직성을 들고 있다. “내적 순결과 섬세한 양심의 초연함과 정화에도 진정으로 거룩한 사람들조차 대부분 전혀 알지 못하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가장 엄격한 수도원에서도, 완덕을 닦으려고 있는 힘을 다하는 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자기도 모르는 이기심에 얼마나 지배를 받고 있는지, 그들의 덕행이라고 하는 것이 편협하고 인간적인 이기심에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는지 생각조차 못합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초연해지지 못하는 것은 사실 흔히 열심하다는 사람들의 이런 융통성 없는 경직성 때문입니다.”(『새 명상의 씨』)
융통성 없는 경직성을 벗어나 진정한 영적 자유로움을 위해서는 우선 초연함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초연함은 핵심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초연함은 사랑을 품고 진실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 주며 진실로 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게끔 자유로울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께 뿌리를 둘 때 진정 가능하다.
초연함에는 외적, 내적, 영적인 레벨이 있다. 물론 인간의 삶을 획일적으로 구별할 수 없고 외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이 하급 단계의 수준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결국 ‘자아에 대한 집착’이 어떤 이에게는 외적인 물건이나 재물에 대한 집착으로, 어떤 이에게는 인정받고 싶거나 심리적 만족에 대한 집착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영적인 은사를 많이 받고자 하는 것에 대한 집착으로 고상하게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머튼은 초연함에 도달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넘어 내적인 감각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나아가 영적인 좋은 것들로부터도 초연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범위 안에서 물질적, 정신적 사물들을 소유하고 즐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순수하게 소유하고 즐기려면 모든 기쁨을 초월하고 모든 소유를 넘어야 합니다.”(『새 명상의 씨』) 외적인 집착에서 시작하여 내적인 자아를 온전히 그리스도께 맡길 때 주님의 은총은 우리를 망상적 자아에서 벗어나 영적인 자유로움으로 인도할 것이다.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극단주의자의 심리
사고방식의 지나친 순수함은 좋은 것인가? 극단적 환경보호운동을 비롯한 자연주의자들은 건강한 마음인가?
얼핏 이들은 오염되지 않은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스페인 철학자 페르난도 사바테르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는 자기 의문의 근거로 독일의 히틀러를 예로 듭니다. 그는 동물보호법과 대지보호법을 처음으로 공표한 사람이 독일의 히틀러였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범으로 아주 잔인무도한 사람으로 교양이라곤 전혀 없는 전쟁광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모습은 달랐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채식주의자, 담배혐오가, 예술애호가였다고 합니다. 또 극단적으로 깔끔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저지른 일들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광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 극단주의 때문입니다. 심리상담에서는 극단주의를 경계합니다. 지나치게 무엇인가를 혐오하고 지나치게 순수함을 지향하는 것은 그 내면에 정반대의 것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고, 자신 안의 부정함을 수용하지 못한 채 극단적인 깔끔함과 혐오의식을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성숙한 상태가 아니라 미성숙한 상태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이들이 배설물을 보고 자기 안에는 그런 것이 없는 양 혐오스러워 하는 심리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들이 정치· 종교계 안에서도 빈번히 일어납니다. 캄보디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크메르 루즈. 프랑스 유학파인 그들은 전 국민이 똑같이 입고 먹고 일하길 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농촌 사람들을 모델로 삼고 도시 사람들을 혐오해서 강제로 집단수용소에 가두고 심지어 나중에는 고문과 살인행위까지 저지른 자들입니다.
중세 가톨릭에서 자행한 마녀사냥도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일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지한 자들이 마녀사냥을 했을 거라고 추측하지만 사실은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사건들입니다. 즉 이념이건 종교적 신념이건 지나치게 편향적이고 지나치게 극단적일 경우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혐오감이 생기면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제거대상으로 여기는 병적인 심리현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극단주의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오늘날에도 극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순수함 자신들의 정의로움만이 유일무이한 양 하면서 자신들과 반대되는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언제라도 피바람을 불러올 사람들이기에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현대 영성] 초연함의 영성 (2) 영적 쾌락 역시 집착이다
많은 신실하다는 신앙인 가운데 영적인 것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 기도 때 느꼈던 평화로운 감정, 미사 때 맛보았던 뜨거운 느낌에 집착하다 보면 다시 그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때는 마치 기도를 잘하지 못하고 있고, 하느님께서 멀어지신 것은 아닌가 걱정을 하게 된다. 토마스 머튼은 이러한 영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영적인 쾌락을 좇은 것이라고 말한다. “침잠과 내적 평화, 하느님 현존에 대한 느낌은 영성의 쾌락이고 다른 것들은 물질의 쾌락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것에 대한 집착은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과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하느님의 무한한 기쁨에 절대 깊이 빠져들지 못합니다. 관상의 초보자들에게나 주어지는 보잘것없는 위로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새 명상의 씨」)
왜 영적인 쾌락에서 오는 집착이 영성 생활에서 해로울까? 영적인 기쁨이나 평화를 맛보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닌가? 그 이유는 기도와 침잠을 통해 우리 영혼이 오직 하느님께만 집중해야 하는데, 은총의 선물에만 집착함으로써 결국 자기만족에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머튼은 “침잠(recollection)이라는 것도 결국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적 평화에 대한 느낌 역시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포도주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적 ‘의식’은 맥주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또 하나의 피조물일 따름입니다”라고 영적 쾌락에 대해 경계를 한다(「새 명상의 씨」). 하느님과의 만남의 결과는 흔히 깊은 평화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 평화에 집착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기도 가운데 찾아오는 평화스러운 느낌은 항상 관상이 가져오는 뜻밖의 결과이다. 그런 ‘느낌’이 없다고 해서 하느님과의 만남이 끝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평화를 ‘체험’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하느님과 우리 영혼의 참되고 본질적이며 생생한 일치를 위협하는 것이다. 머튼은 오히려 “우리가 평화나 하느님의 현존을 전혀 느끼지 못할 때에 하느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 참으로 현존하신다”고 말한다.
이러한 영적인 쾌락은 특별히 수도자들이나 영적인 체험을 많이 한 이들에게 치명적인 유혹이다. 물질적 쾌락이나 세속적 욕망을 포기하고 하느님을 위해 기도와 단식, 신심활동이나 봉사, 영적 서적이나 영성 체계에 몰입하여 다양한 영성 공부와 온갖 좋다는 피정과 세미나 등에 참여하여 영웅적인 덕행을 쌓고, 모르는 묵상 혹은 관상 기도 방법이 없을 정도로 대단해서 마치 성인처럼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이러한 것에 대한 무절제한 욕심과 집착으로 결국 교만의 영에 휩싸이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진정 초연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결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통제할 수 없는 결과들에서 적당히 물러서야 하며 사랑의 나눔에 대한 즉각적인 보상이나 기대 없이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끊임없는 외적·내적 활동과 성취욕으로 결과에 연연하는 모습은 교회 내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성과 위주가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실현해야 하는데,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결과에 만족하지 못해 자신을 비하하거나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경우, 초연함의 영성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초연함은 세상의 불의에 대해 방조하는 것이 아니다. 초연함은 역경을 마주할 때 도인처럼 희미한 미소를 짓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랑과 진리를 위해 몸과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진리, 곧 하느님에게 집중할수록 결과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다. 초연함을 유지하면 우리는 낙담하는 가운데에도 신실하게 행동을 이어갈 수 있다. 초연함은 자비에 비례한다. 하느님 사랑을 위해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충실함과 굳은 결의, 인내와 겸손을 통해 초연함에 도달하면 할수록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을 더욱 완벽하게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초연함은 결국 어떤 결과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더 큰 선과 자비를 믿고 온전히 그분께 의탁하여 그분의 마음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머튼은 “너의 영혼이 지옥에 있을지라도 절망하지 말라”는 러시아 수도자, 스타레츠 실루안이 받은 계시를 인용하며 우리가 지옥이라는 결과에도 초연함으로써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려야 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기도 가운데 초보자에게나 주어지는 평화에 대한 집착을 버리자. 하느님의 현존이 가져다주는 감미로움에 대한 집착도 포기하자. 결과에 대한 집착도 주님께 맡겨 드리고 초연한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어 드리자.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1. 연재를 시작하며
‘온유의 아이콘’ 살레시오 성인에게 삶의 길을 묻다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이 세상 때문에 하늘을 잃지 마십시오.”(「신심 생활 입문」 중에서)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평신도들을 열성적으로 일깨운 목자. 온유의 성인이자, 애덕의 박사로 불린 주교. 올해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67~1622년) 성인 선종 400주년이다.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가난한 이를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그는 이탈리아에서 교회법, 민법, 신학 등을 공부한 뒤 사제가 된다. 개신교 칼빈파가 융성하던 16~17세기 스위스 제네바의 주교로 임명돼 다양한 선교 활동을 전개하고, 교회 재건에 앞장서면서도 많은 이와 영적 친교로 주님 안에 하나가 됐던 평신도 영성 지도자였다. 평신도들에게 수천 통의 편지를 쓰며 주님 사랑을 전했던 성인을 다시 만나고자 한다.
살레시오 영성 안에 살며 「영성이 여성에게 말하다」 「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어야 할까」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고, 현재 강연 활동과 함께 CPBC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 ‘참 좋은 오늘, 은빛 수녀입니다’ 진행자로 영성의 가치를 전하는 김용은(제오르지오, 살레시오수녀회) 수녀가 성인이 남긴 문헌과 기록을 토대로 가상 편지 등 여러 형식의 연재를 통해 성인과 소통을 시작한다.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흐르는 성인의 숨결과 말씀을 통해 나의 삶과 신앙을 반추해보자.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시공의 물결을 타고 400년 전 성인의 삶이 지금 여기, 함께 마주할 수 있어 설레고 떨립니다. 너무도 현실적이고 동시대인처럼 가까이 느껴졌던 성인과의 만남은 17년 전, 미국 버클리신학대학원(GTU)에 있는 살레시오영성센터(ISS)에서 영성 공부를 하면서였지요.
성인은 400여 년 전 최고의 교육을 받은 학자였지만, 철학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어렵게 표현하지 않으셨지요. 주변의 학자들에게 가볍고 여성적이라는 비난까지 받으시면서요. 예수님처럼 쉬운 언어로 비유와 이미지로 글을 쓰고 강연하면서 평신도와 수도자들 특히 여성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셨지요. 성인께서는 세상과 가장 가까이 지낸 마음의 마술사, 온유함의 아이콘이셨습니다. 다정다감한 친구처럼 마냥 선량한 것 같지만 강인했고요. 인간의 욕망을 거부하기보다 오히려 손을 내미는 당당함과 자신감도 느껴졌어요. 인간 본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포용력, 인간관계에 대한 구체적이고 섬세하기까지 한 현실감각까지 지니셨음에 놀랍기만 했답니다. 게다가 디지털 세상 한가운데서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성인의 메시지는 동시대인이라 착각할 만큼 혁신적이었고요.
성인의 삶과 영성의 길을 물으면서 우리 독자들과 함께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 지상의 여정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첫 편지라 말이 많아진 거 같은데 그래도 질문은 해야겠지요? 제 가슴에 한가득 쌓인 질문이 많거든요. 주변에서 자주 듣는 질문이기도 하고요. 신심의 대가이신 성인께 이 질문으로 시작하고 싶어요.
“저 사람은 신심은 깊은 것 같은데 하는 행동을 보면 이기적이에요.”
“그런데 신심생활이 일상생활보다 우위에 있어야 하나요?”
저 역시 성당에서 기도할 때는 순교까지 하고 싶을 정도로 거룩한 열정이 불끈 찾아올 때가 있는데요. 그런데 분주한 현실로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 싶게 다른 사람에게 불친절하고 쉽게 판단하는 오류에 빠지곤 하거든요. 그러면 다음 편지를 기약하며 저와 우리 독자들의 일상에서 성인의 영성이 꽃처럼 피어나길 소망하며 굿바이 미소를 보냅니다.
온유의 성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많이 사랑하는 김 수녀 올림
사랑하는 김 수녀에게
반가워요. 편지는 나에게 고향처럼 편안하고 아늑한 소통 매개이지요. 나 역시 기분 좋은 설렘과 떨림으로 펜을 들었네요. 우선 질문에 답하기 전에 나도 몇 가지 질문해도 될까요?
만약 인도에 가서 순교하기를 바라면서 지금 해야 하는 일에는 소홀히 한다면 과연 신심 있는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은 매일같이 다양한 기도문을 열심히 바쳐요. 그러고 나서는 불쾌하고 거만하게 모욕적인 말들을 내뱉기도 해요. 또 어떤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지갑을 열어 선뜻 가진 것을 내놓으면서도 이웃의 작은 결점을 참아내지 못하고 불친절하게 대해요. 이러한 사람들이 과연 신심을 사는 사람이라 할까요?
제가 좋아하는 꿀벌 이야기를 할까요? 꿀벌은 꿀을 마실 때 조금도 꽃을 상하게 하지 않아요. 참된 신심은 더욱 그러해요. 신심은 그 어떠한 자신의 직무나 가족에 대한 의무를 손상시키지 않지요. 오히려 신심은 가정의 평화는 더욱 커지고 부부간의 애정은 깊어지면서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에 대한 애정도 두터워지면서 즐거운 일상을 살게 해요. 그것이 참된 신심입니다. 분명한 것은요. 만약 신심으로 인하여 가정에 평화가 깨지거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애정이 식는다면 그것은 진짜 신심이 아니겠지요. 중요한 것은 사랑 자체가 신심은 아닙니다. 기도나 봉사활동도 신심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그것도 자주 애덕의 행위로 드러날 때 그것을 참된 신심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어렵다고요? 앞으로 이어지는 편지에서 더 재미있게 구체적으로 이야길 나누면서 함께 길을 찾아가요.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요. 바닷속에서 살면서 진주조개 속의 진주는 한 방울의 짠물도 삼키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해요. 그리고 불 속을 날아다녀도 불나방의 날개가 타지 않고요. 그렇게 우린 지상의 온갖 욕망 속에서도 신심의 샘을 찾으면서 거룩하고 희망찬 날개를 달 수 있다고 믿고 싶네요.
다음 편지 기다리며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굿바이 사랑을 보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