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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믿나이다] (19) 초대 교회 성장의 장애물들
황제 숭배와 밀교 · 미신 성행에 맞서 복음 선포한 교회
예루살렘에서 태동한 그리스도교는 1세기 말 팔레스티나 지역은 물론 시리아·이집트·그리스·이탈리아 일부, 갈리아(프랑스) 남부, 에스파냐 일부까지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로마에서는 교회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이토록 짧은 시기에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로마 제국이 통일돼 있었고, 둘째,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했으며, 셋째, 로마 제국 전역에 깔린 도로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이러한 지리·사회 문화 환경보다 종교 환경이 그리스도교 선교와 성장에 더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정합니다. 당시 종교 환경은 황제 숭배·밀교 의식·가정 미신 성행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이러한 배경은 사실 복음 선포에 가장 큰 장애였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장애들을 삶으로 잘 극복하면서 교세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룬 로마의 황제들은 제국 내 수많은 민족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수단으로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며 숭배하게 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은 황제를 세상 구원자로 여겨 그에게 제사를 지냈고, 주화에 황제의 초상을 새겼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저술할 시기에 로마 제국을 통치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81~96년)는 자신을 ‘주님이요 신(domonus et deus)’으로 불렀습니다. 그는 로마인들에게 자신을 ‘신들의 아버지’(도미티아누스)로 숭배하게 하고 로마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상을 자신의 흉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신의 어머니’로 선포했습니다. 그녀의 주화는 왕홀을 손에 들고 왕관을 쓴 채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데메테르 여신의 모습에 ‘신성한 카이사르의 어머니’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를 결코 신으로 받들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구원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황제 숭배에 맞선 초대 교회의 흔적을 신약 성경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요한 묵시록은 황제 숭배가 성행하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상황을 보여줍니다.(묵시 1―3장) 당시 페르가몬은 로마의 여신과 황제에게 신전을 봉헌한 첫 번째 도시였습니다. 에페소 역시 페르가몬에 이어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기리는 거대한 신전을 지었습니다.
사목 서간은 스스로 신이라 하는 세속 황제에 맞서 하늘의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위엄을 드러내는 신앙 고백을 관용어처럼 표현합니다. 일례로 티토에게 보낸 서간 2장 13절을 들 수 있습니다.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주십시오”라는 말씀에서 그리스도 대신 황제를 대입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다신교 사회였던 로마 제국에선 밀교 의식이 성행했습니다. 밀교의 사제들은 마법을 행하거나 환각에 취해 무절제한 광란의 제의를 거행했습니다. 당시 미트라스를 최고 신으로 숭배하던 밀교에선 생산력을 늘린다며 황소를 죽여 피를 나눠 마셨습니다. 또 일부 밀교에서는 무아경에 빠지기 위해 자기 몸에 피가 흥건해질 때까지 채찍질하고 칼로 자해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밀교와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교회의 성찬 예식은 밀교의 제례 의식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경건했습니다. 전례 인식의 차원이 달랐습니다. 기도할 때 손을 들거나 허리를 굽히거나 무릎을 꿇거나 하는 것은 단지 동방에서의 공통된 종교적 표현 방식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각 가정과 가문에선 각종 미신이 행해졌습니다. 집안 곳곳에 나무나 돌로 만든 형상을 모셔다 놓고 기름을 바르고 향을 피우고 절을 했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서는 공공 축제에 참여하거나 이교도의 집을 방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우상 숭배와 관련된 직업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교회는 황제 숭배를 공공연히 해야 하는 정치인·교사·신상을 만들거나 신전 벽화를 그리는 조각가나 화가는 물론 사람을 죽이는 군인과 검투사 등을 교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 직업을 포기해야만 세례를 청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빌미가 돼 당시 로마 시민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조국이 없는 무리’ ‘인간 혐오자’라 비난하며 반사회적 사람으로 여겨 이교인과 유다인 다음의 가장 하층민으로 취급했습니다.
반면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혐오와 우상 숭배에 물들 모든 위험 속에서도 더더욱 세상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이교도들, 이방인들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 가정,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를 일구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땅끝까지 온 세상에 전파된 교회가 사도들과 그 제자들에게서 이어받은 가르침과 신앙을 교회는 충실히 간직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온 세상 곳곳에 퍼져 있지만 같은 한집안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온 교회는 마치 한 영혼과 한마음만을 지니고 있듯 이것을 믿고, 또한 흡사 하나의 입만을 가진 듯 일치된 목소리로 그것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또 전수합니다.”(성 이레네오 「이단 논박」 1,10,1-2)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43) 전례 주기 ①
구원 역사 되새기며 신앙생활하는 전례주년
재의 수요일, 세례받은 지 3개월쯤 된 자매님이 머리에 재 얹는 예식을 하고 난 후 “선생님, 머리에 재는 왜 얹는 거예요?”라며 살며시 묻습니다. 미사 전례가 다 끝나고 전례주년에 따른 고유한 전례 예식과 관습을 자세히 설명해줬습니다.
전례주년이란
교회력(敎會曆), 또는 전례력이라고 하며 1년의 과정에서 그리스도 안에 실현된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기념하는 것입니다.(「전례헌장」 102항) 여러 항목과 주제별로 일정한 기간을 분배해 고유한 주기를 정하게 됩니다. 1년을 주기로 구원 역사의 순서에 따라 ‘대림-성탄-연중-사순-부활-연중’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전례주년의 역사
1~3세기에는 그리스도의 사건을 경험한 후 파스카 신비 자체와 축일 거행에 중점을 뒀습니다.
이후 주일과 파스카 축일이 생겼고, 50년대 주간 부활로 생각해 정기적으로 모여 성찬례를 거행했던 주일이 1세기 말에 와서 정기적인 전례 거행일이 됐습니다. 4세기부터 파스카의 수난과 부활을 하나로 기념해 3일간의 파스카 성삼일이 정착됐고, 4세기 말에는 성주간으로 확장됐습니다. 그리고 성탄 축일이 생겼고, 여기서 사순 시기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대림 시기와 성탄을 준비하는 과정이 생겨났습니다.
전례주년의 목적
‘은총의 현재화’, 즉 과거의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함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열어주신 시간을 묵상하고, 구체적으로 지금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연중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의 신비를 집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안에 현존케 하고, 교회 구성원 각자가 구원의 은총으로 풍요해지도록 합니다.
대림 시기(待臨時期)
예수 그리스도 탄생 전 4주간을 말합니다. 구세주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시기로, 구약 시대 4000년 동안 구세주를 기다린 것을 뜻합니다.
전례적으로 대림절은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탄생하심을 의미합니다. 둘째, 세상 종말 때 심판을 위한 재림을 뜻합니다. 여기서 대림은 기다림의 기쁨과 심판의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① 대림 시기의 전례
대림 시기 첫 주일은 전례주년의 시작이며 교회력으로 새해 첫날입니다. 제대 주위 화려함을 피하고, 대영광송을 하지 않으며 사제는 회개와 보속의 뜻으로 보라색 제의를 입습니다. 이 시기 독서는 메시아를 예언한 구약의 예언서들이 봉독됩니다. 복음은 “깨어 준비하라”는 말씀과 요한 세례자의 이야기, 예수님의 탄생 직전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대림 시기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는 시기로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주님 탄생을 맞이합니다.
② 대림환(待臨環)
대림 시기 동안 푸른 나뭇가지와 4개의 초를 꽂아 대림환을 만들고 구세주께서 가까이 오셨음을 뜻하는 의미로 매주 촛불을 늘려 켭니다. 푸른 나뭇가지는 우리에게 내려질 새로운 하느님 생명을 뜻합니다. 둥근 원은 하느님(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함)을 의미합니다. 4개의 초는 이스라엘 백성이 구세주를 애타게 기다리는 4000년을 상징합니다.
초의 색깔은 진한 보라색과 엷은 보라색·엷은 분홍색·흰색을 사용합니다.
초를 켜는 순서는 진한 보라색부터 시작해 4주간 이어지며 흰색 초를 마지막으로 삼습니다. 이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려는 우리 마음의 정화 상태를 나타냅니다.
[알려지지 않은 하느님, 성령] 성령에 대한 성경의 진술들
저번 원고에서는 얼굴도 목소리도 드러내시지 않기에 성령의 ‘위격성’을 파악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성경의 진술에 근거하여 성령의 위격성에 대해 알아보려합니다. 신약에서 ‘영’을 가리키는 ‘프네우마’는 그리스어로 ‘중성’인 단어로 ‘숨’, ‘숨결’, ‘공기’, ‘바람’, ‘영혼’ 등을 가리키며, 구약에서 ‘영’을 가리킬 때 쓰이는 ‘루아흐’는 대부분 신약에서 ‘프네우마’로 번역됩니다. 구약에서 378번 쓰이는 루아흐는 이브 콩가르 추기경에 따르면 첫째로 ‘바람’, ‘숨결’의 의미로, 둘째로 인간에게 있어 ‘생명의 힘’이자 ‘근원’으로, 셋째로 ‘하느님의 힘’이며 ‘생명’의 의미를 지닙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여러 상징들에 대해 살펴보면 저번 호에서 말했던 대로 ‘비인격적인 특성’이 많이 드러납니다. 그 상징들은 ‘물’, ‘불’, ‘하느님의 손가락’, ‘바람’, ‘불혀’, ‘빛나는 구름’, ‘비둘기’, ‘기름부음’ 등인데 모두가 인격적인 특성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성령의 위격성에 대해 긍정할 수 있는 진술들은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는 예수님의 마태복음의 세례에 대한 명령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이 나란히 기술되는 것과 코린토1서 12장 4-6절에 ‘성령’, ‘주님(그리스도)’, ‘하느님(성부)’에 대한 언급, 에페소서 4장 4-6절에서 ‘한분 성령, 한분 주님, 한분 하느님’처럼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게 언급되는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성령이 성부나 성자께서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힘과 권능에 불과하다면 이렇게 성부와 성자와 나란히 불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란히 세 위격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그분들의 동등성을 보여주며 베르나르 세스부에에 따르면 성령을 다른 두 위격과 같은 주체로 파악하게 합니다.
또한 이브 콩가르는 요한복음에서 성령께서 행동의 주체로 등장하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성령은 제자들 주위에 머무르시며(14,17), 그들 안에 계시고(14,17), 예수님에게서 받으십니다(16,14). 그분은 들으시고, 가르치시기도 하고(16,13; 14,26),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끄시며(16,13), 죄를 이기십니다(16,8). 가장 분명하게는 성령은 예수님에 이은 ‘다른 보호자’(14,16)이십니다. ‘프네우마’라는 단어가 본래 ‘중성’인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다른 보호자이신 성령을 언급할 때 그분을 ‘남성명사’로 지칭함은 보다 명확하게 성령의 위격(인격)성에 대해 알게 합니다.
이렇듯 성령은 ‘행위’의 주체로서 소개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로마 8,16), 우리는 그분을 “슬프게 해 드릴”수 있습니다(에페 4,30). “행위는 존재를 따른다”라는 유명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씀이 있습니다. 식물이 할 수 있는 일과, 동물이 할 수 있는 일, 그중에서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다릅니다. 더 넓게는 ‘피조물’이 할 수 있는 일과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동등하게 언급되며 세상에서 성자께서 이루신 구원 업적을 이어가고 ‘완성’해 나가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이루시는 ‘구원 업적’을 완성하신다면 그 ‘신적인 행위’ 자체가 그분께서 ‘하느님’이심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하느님, 성령] 성령, 얼굴도 목소리도 없으신 하느님
성령은 ‘위격’을 지니신 ‘누구’이신가? 아니면 ‘하느님의 힘’ 혹은 ‘권능’으로서 세상 안에서의 하느님의 활동이신가? 성령에 대해서 떠올릴 때면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달리 많은 모호함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성부와 성자와 달리 성령께서는 고유한 ‘얼굴’을 지닌 채 성경에서 나타나시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얼굴’은 사람의 ‘인격성’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성부께서는 구약에서부터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셨습니다.
탈출기에서 하느님의 ‘얼굴’이란 표현은 여러번 등장하고, 구약에서 인간의 가장 큰 열망은 바로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며,(시편 42,3 참조) 우리가 기다리는 마지막 보상과 희망 역시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뵙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1코린 13,12). 성자 예수님에 대해서는 이 ‘얼굴’은 더 분명합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기에 사람들은 그분의 얼굴을 보며 대화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얼굴’을 지니신 성부와 성자께 ‘나와 너’라는 ‘대화’의 형식으로 기도 안에서 ‘인격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단 한번도 ‘얼굴’을 지닌채 나타나신 적도, ‘얼굴’을 지닌 피조물을 (성자처럼) 취하신 적도 없으시기에 성령의 ‘위격(인격)성’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성령은 성경에서 당신의 고유한 ‘말씀’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여 더더욱 그분의 위격성을 파악하기 어렵게 합니다. 성부는 구약에서 여러차례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그분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하시는, 소통하시는 하느님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말’이 우리 안에 감추어진 생각들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하느님의 감추어진 신비들을 ‘말’로서 계시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성부와 성자가 서로 대화하시는 모습도 신약에서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성부께 기도드렸고, 세례때 성부의 목소리는 성자에게 들려왔습니다. 이처럼 성부와 성자께서는 ‘얼굴’을 지닌 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위격(인격)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위격(인격)성’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은 신 안에서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 대화하시고 인격적 만남을 가지시며 또 인격적 관계의 극치인 ‘사랑’을 하실 수 있다는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신안에서 이미 성부와 성자는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그분들은 이 세상에서도 영원에서처럼 소통하시고 인격적 만남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요한 16,13) 성자에게서 들으신 것만을 이야기하시며 자신의 말씀이 아니라 성자의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스스로의 얼굴도, 목소리도 드러내시지 않은 채 신비롭게 우리에게 주어지시기에 우리는 그분의 위격성에 대해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우리가 성령께 ‘나와 너’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기도’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묻게 합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께는 ‘대화’와 ‘만남’을 통해 기도할 수 있지만, 성령께는 ‘오소서 성령님!’이라는 다른 형태의 기도를 드립니다. 앞으로는 거의 ‘비위격적’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분께 기도할 수 있을지 계속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빛과 소금] 믿음 · 희망 · 사랑 : 사랑의 촛불 밝히기 (2) 인물 편
그동안 믿음과 희망을 이야기하며 성경 속 수많은 인물 중 굳건한 ‘믿음’의 인물로 아브라함과 다윗을, 뿌리 깊은 ‘희망’의 아이콘으로는 요셉과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 보았습니다. 오늘은 성경 속 ‘사랑’의 사람들을 찾아볼까요?
사랑의 마음으로 매일 눈물이 마르지 않은 예언자가 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우상 숭배에 빠져 하느님을 거스른 백성들에게 닥칠 파국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 내 머리가 물이라면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 살해된 내 딸 내 백성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울 수 있으련만!”(예레 8,23)
예레미야는 하도 울어서 눈물이 마를 지경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머리가 물이었으면, 눈이 눈물의 샘이었으면’ 하고 고백했을까요? 후에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회복의 말씀을 내려주십니다.
“네 울음소리를 그치고 네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라. 네 노고가 보상을 받아 그들이 원수의 땅에서 돌아올 것이다.”(예레 31,16)
온갖 슬픔과 위로를 다 겪고 난 예레미야는 마침내 슬픔의 노래인 ‘애가’를 씁니다. 그리고 슬퍼하는 자의 마지막 희망을 노래합니다.
“주님의 자애는 다함이 없고 그분의 자비는 끝이 없어 아침마다 새롭다네.”(애가 3,22-23)
여리고 섬세하면서도 규모 있고 장중했던 예레미야의 사랑은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 가슴을 울립니다.
사랑의 사람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습니다.(루카 8,2 참조) 그녀는 예수님께 대한 오롯한 사랑으로 은혜를 갚고 싶었던 걸까요? 그래서 예수님 가시는 곳마다 함께하며 충실한 모습을 보입니다.
“왜 그녀에게 나타나셨는가?”
의아해하며 묻는 사람들에게 마리아 막달레나는 답합니다.
“나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머리 둘 곳조차 없이’ 고생하며 돌아다니실 때 나는 그곳에 함께 있었지요.(루카 8,2-3 참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그곳에 있었어요.(마르 15,40 참조) 요셉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실 때도, 요셉이 예수님을 무덤에 안치할 때도,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에도 나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빈 무덤 그곳에 가 있었지요. 물론 베드로와 요한이 황망 속에 다시 숙소로 돌아간 후에도 나는 그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답니다.”(요한 20,11 참조)
만약 우리가 하느님이라면,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라면, 꼬박 밤새우면서 동이 트기까지 기다렸던 사람에게 나타날까요, 아니면 쿨쿨 자는 사람에게 나타나서 “일어나!” 하면서 깨울까요? 당연히 깨어 기다리는 사람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 희망은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려 할 때, 바로 이처럼 하면 된다는 희망입니다. 목마른 사슴처럼 간절하게 또 애타게 예수님을 기다리면, 그분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이 순간에도 예수님은 항상 가장 절박하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가셔서 함께하십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성찬 제정 축성문(Narratio institutionis et consecratio)
‘성찬 제정 축성문’은 감사기도는 물론 미사 전체의 핵심을 이룹니다. 사제는 최후의 만찬 때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던 말씀과 동작을 반복함으로써 빵과 포도주를 주님의 몸과 피로 축성합니다. 그래서 사제가 다른 성사에서 교회를 대신해(in persona Ecclesiae)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과는 달리, 이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in persona Christi) 성사를 거행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성찬 제정 축성문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최후의 만찬 대목(마르 14,22-26; 마태 26,26-30; 루카 22,14-20; 1코린 11,23-25)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고정된 본문 없이 미사 주례자가 자율적으로 바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고정되었으리라고 봅니다.
사제가 축성된 성체와 성혈을 높이 들어 올리는 관습은 중세 후기에 도입되었습니다. 당시 사제는 신자들을 등지고 미사를 드렸기에, 제대에서 진행되는 일이 신자들에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잦은 영성체를 금지하던 시기라 신자들은 눈으로라도 축성된 성체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이러한 바람에 응답하여 성체를 들어 올리는 예식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13세기에는 성작(성혈)의 거양과 경배도 도입되었습니다. 성체와 성혈의 거양 때, 신자들은 눈을 들어 성체와 성혈을 바라보고, 사제가 제대 위에 내려놓고 허리 숙여 깊은 절을 하면, 함께 깊은 절로 경배를 드립니다.
그렇다면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성변화의 시점은 언제일까요?
이 점에 관해서는 동방 전례와 서방 전례의 견해가 엇갈립니다. 동방 전례에서는 성령을 청하는 ‘축성 기원’을 성변화의 시점으로 간주하고, 그래서 성령 청원 기도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반면, 서방 전례에서는 ‘성찬 제정 축성문’으로 성변화가 이뤄진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은 동방 전례가 더 합리적이라고 평가하지만, 성찬 제정 축성문이 성사를 이루는 형상(forma)이라는 점에서 서방 전례도 상당히 타당성을 지닌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성변화는 감사기도 전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굳이 시점을 말하자면, 사제가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하면서 두 손을 예물 위에 펴드는 것(축성 기원)에서부터 예수님의 성찬 제정 축성문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8)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다, 「교회헌장」 1 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의 제1항의 제목은 “교회, 그리스도의 성사”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빛은…”으로 첫 문장을 시작합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을 열면서 “인류의 빛이신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빛난다.”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시메온이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노래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루카 2,32)와 사도 바오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2코린 4,6)이라는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공의회는 성 요한 23세 교황의 이 말씀으로 「교회헌장」을 시작합니다: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모인 이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모든 사람을 교회의 얼굴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어 주기를 간절히 염원한다”(1항). 「교회헌장」의 이 언급은 교회에 대한 가르침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조에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빛 외에 다른 빛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 빛의 전달은 교회를 통해서, 곧 교회의 얼굴에서 이 빛이 빛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교회가 태양 빛을 반사하여 빛을 내는 달과 같다고 말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48항 참조).
「교회헌장」 1항은 이어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신비로서의 교회’의 특징을 뜻합니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 곧 성사인 것입니다. 교회라는 도구를 통해서 인류가 하느님과 공동체를 이루고 인류 상호 간에 일치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사명임을 의미합니다. 이를 위해서 공의회는 교회가 현대 세계와 대화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신앙 유산을 비롯하여 교부들의 가르침과 이전 공의회들에서 전해 받은 교회론을 바탕으로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정립하고, 그것을 교회 안의 신자들에게만 아니라 ‘온 세상’에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현대 세계의 상황 속에서,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사명임을 강조합니다.
「교회헌장」 1항의 이러한 언급은 거부되었던 「교회헌장」의 초안이 투쟁하는 교회(Chiesa militante)의 본질과 그 구성원에 집중한 것과 대비됩니다. 중세를 연상시키는 투쟁하는 교회란 현세에서 순례하는 교회를 의미하는데, 개선한 교회(천국) 및 단련하는 교회(연옥)와 구별됩니다. 이에 대해 새로운 초안을 준비한 수에넨스 추기경은 「교회헌장」에 ‘안을 향한 교회’(ecclesia ad intra)와 ‘밖을 향한 교회’(ecclesia ad extra)가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곧 교회의 직무는 세상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며, 그것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사인 이유입니다.
[교회의 언어] Incarnation and Redemption(강생구속)
죄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로 거듭 태어나는 사순절(Lent)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 동안 우리를 속박에서 구해내신 예수님 구속(redemption; ‘구’를 길게, ‘p’는 묵음)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우리를 위해 희생되었고 우리는 구원(salvation)을 얻었습니다. 이는 예수님 성탄과 밀접히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신비를 강생(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옛말에 강생구속이라 했습니다. 사자성어 같은 이 말은 하느님 구원의 역사 전체를 요약한 말입니다. 주님의 탄생과 죽음은 밀접히 연결됩니다. 탄생하신 목적은 수난받고 부활하시기 위함이고, 수난과 부활은 탄생으로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강생과 구속이 밀접히 연결됨을 보여주는 대축일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annunciation)입니다. 천사의 아룀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알게 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3월 25일은 주님 성탄으로부터 9달 전입니다. 공교롭게도 사순 시기 한가운데 성탄을 예고하고 준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