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일 연중 제22주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5년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 것에 관한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하시어 해마다 9월 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지내기로 하셨다. 이날 교회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의미를 묵상하고, 창조 질서를 파괴한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며, 생태계를 보호할 것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진다.
오늘은 연중 제22주일입니다. 파스카를 기념하는 이날 함께 모인 거룩한 백성인 우리를 주님께서는 굽어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입술로 드리는 찬미가 마음 깊은 곳에서도 울려 퍼지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심어 주신 주님의 말씀으로 온 삶이 거룩하고 새로워지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시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8.14-15.21-2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1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 (2024년 9월 1일)
피조물과 함께 희망하고 행동하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피조물과 함께 희망하고 행동하십시오.’ 2024년 9월 1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주제인 이 문구는 바오로 성인이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8장 19-25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에 따라 사는 삶의 의미를 설명하며, 믿음에서 생겨나는 구원의 확실한 희망, 곧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 생명에 초점을 맞춥니다.
1. 간단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봅시다. 이 질문에 곧바로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믿음을 지니게 된 것은,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인 어떤 것을, 곧 멀리 떨어져 계시고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이름 붙일 수 없는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를 우리가 믿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오로 성인이 우리에게 알려 준 대로,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그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로마 5,5)에 우리는 믿는 이들이 된 것입니다. 이제 성령께서는 참으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에페 1,14)이 되시어, 예수님의 아름답고 선한 인성의 충만함을 따라 우리가 영원한 보화를 쌓는 데 힘쓰도록 끊임없이 재촉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믿는 이들이 창의적이고 주도적으로 애덕을 실천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영적 자유의 위대한 여정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여정에서도 성령의 논리와 세상의 논리 사이에 투쟁이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정반대의 열매를 맺습니다(갈라 5,16-17 참조). 우리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성령의 첫 열매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5)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나아가 믿는 이들은 더 이상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이들로서 자유를 누리며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희망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것을 이겼고 지금도 계속 이기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기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육신의 죽음에 직면하여도, 성령의 새 생명으로 사는 이들에게는 미래의 영광이 이미 보장되어 있습니다. 다가오는 희년을 선포하는 칙서에서 되새겨 본 대로,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1)
2.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며 사랑으로 행동하고 희망으로 가득한 믿음의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파루시아(parousia)가 지연된다고 문제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입니다. 믿음은 은총, 곧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현존으로 영그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여 자유로이 맡는 임무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증언해야 하는 복된 희망입니다. 그러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증언해야 하는 걸까요? 고통받는 인간의 육신을 돌보며 이 복된 희망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담대히 꿈꾸는 사람으로서, 모든 이를 위한 사랑, 형제애, 우정, 정의에 대한 열망에 이끌려 두 눈을 크게 뜨고 꿈꾸어야 합니다. 세상은 인류만이 아니라 온 우주와 자연 그 자체, 그리고 인류의 집이자 삶의 터전인 오이코스(oikos)를 품어 안습니다. 또한 모든 이를 위한 기쁨의 자리이자 행복의 약속이 되어야 하는 ‘지상 낙원’인 어머니 지구로서 피조물을 품어 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러한 세상 고통의 가장 깊은 데까지 들어갑니다. 그리스도교 낙관주의는 살아 있는 희망에 기초를 둡니다. 곧,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향하도록, 그분의 평화 안에서 최종 완성을 향하도록, ‘영광에서 영광으로’ 건너가 의롭게 되는 육신의 부활을 향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고통과 괴로움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이 탄식합니다’(로마 8,19-22 참조).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탄식하고(로마 8,23-25 참조) 성령께서도 몸소 탄식하고 계십니다(로마 8,26-27 참조). 이 탄식은 갈망과 소망과 더불어 불안과 고통을 표현합니다. 탄식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 현존에 대한 우리의 의탁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 안에서의 기쁨과 사랑과 평화라는 당신 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사랑이 가득하시지만 또 한편으로 요구도 하시며 현존하십니다.
3. 피조물 전체가 이 새로운 탄생의 과정에 동참하여 탄식하며 그 해방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마치 ‘큰 나무로 자라는 겨자씨’ 또는 ‘밀가루 반죽 속의 누룩’처럼 보이지 않고 감지할 수 없는 성장 과정이 수반됩니다(마태 13,31-33 참조). 그 시작은 미약하지만 기대되는 결과는 더없이 아름다운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의 탄생, 곧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희망은 환난의 시기나 인간의 악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역경 속에서도 굳건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부끄럽게 하거나 속이지 않습니다. 피조물과 그리스도인들과 성령의 탄식은 이미 진행 중인 구원을 미리 맛보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바오로 성인이 묘사한 그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로마 8,35 참조)을 지금도 계속 감내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때 희망은 역사와 인간사를 읽는 대안이 됩니다. 희망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의 현실성을 지닙니다. 이 희망은 아브라함의 기다림처럼 인내하는 기다림입니다. 저는 위대한 예지력을 지닌 신앙인인 칼라브리아 대수도원장 피오레의 요아킴을 떠올려 봅니다. 그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말처럼 “예언의 영을 받은”2) 사람이었습니다. 교황과 제국 사이의 폭력적인 충돌이 빚어지고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으며 이단들이 속출하고 교회 안에 세속화가 증가하던 시기에, 요아킴은 복음 정신에 따른 삶의 열매인 보편적 형제애와 그리스도교 평화를 바탕으로 사람들 사이에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새로운 마음가짐이라는 이상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에서 이러한 사회적 우애와 보편적 형제애의 마음가짐에 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의 이러한 조화는, 우리 공동의 집과 그 안에 사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인 인간다운 통합 생태론에 대한 책임 의식과 “상황에 맞는 인간 중심주의”(「하느님을 찬미하여라」, 67항)로 피조물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어야 합니다.
4. 세상에는 왜 이렇게 악이 많을까요? 불의가 왜 이렇게 많고, 아이들을 죽이고 도시를 파괴하며 환경을 오염시키고 어머니 지구를 유린하고 황폐하게 만드는 동족상잔의 전쟁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요? 바오로 성인은 아담의 죄를 함축적으로 상기시키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22).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 투쟁은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로마 8,20) 든 이래로 피조물의 ‘탄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온 우주와 모든 피조물이 현재의 상태를 극복하고 원상태로 회복되기를 ‘간절하게’ 탄식하며 갈망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해방은 다른 모든 피조물, 곧 인간 조건과 결부되어 종살이의 멍에를 메고 있는 모든 피조물의 해방을 포함합니다. 인류처럼 피조물도 자기 탓 없이 종살이를 하게 되어 계획된 본연의 항구한 의미와 목적을 성취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피조물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남용으로 가속화되는 소멸과 죽음에 매여 있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의 구원은 피조물에게도 확실한 희망이 됩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로마 8,21)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께서 몸값을 치르신 덕분에 희망 안에서 인간과 다른 모든 피조물을 서로 이어주고 있는 연대의 끈에 관하여 묵상할 수 있습니다.
5. 성령께서는 우리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다시 오심에 대한 희망에 찬 항구한 기대 안에서 깨어 있게 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인도하시어 우리가 회개하도록 곧 삶의 방식을 바꾸도록 부르십니다. 환경 파괴에 저항하고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증거가 되는 그러한 사회 비판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에는, 타인과 자연을 조종 대상으로 치부하며 지배하기 원하는 이들의 교만을 버리고 다른 이들과 모든 피조물을 돌보는 이들의 겸손을 받아들이는 것이 수반됩니다. “하느님을 대신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인간 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최악의 위험이”(「하느님을 찬미하여라」, 73항) 됩니다. 아담의 죄가 우리의 근본적인 관계, 곧 우리가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과, 우주와 이루고 있는 관계를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관계는 온전히 회복되고 보존되며 ‘올바르게’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관계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가 미흡하면 다른 모든 것도 실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6. 피조물과 함께 희망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힘을 모으고 선의의 모든 이와 함께 걷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힘 그리고 그 의미와 한계에 관하여” 다시 생각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힘은 지난 몇 년 동안 거의 광적으로 커졌습니다. 우리는 인상적이고 놀라운 기술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매우 위험한 존재가 되었으며 많은 생명체의 생명과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하느님을 찬미하여라」, 28항). 통제되지 않는 힘은 괴물을 만들어 낸 뒤 우리를 배반합니다. 그러하기에 오늘날 인공지능의 개발에 관하여 윤리적 한계를 정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인공지능의 계산과 시뮬레이션 능력이 평화와 온전한 발전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인류와 자연을 지배하는 데에 악용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2024년 세계 평화의 날 교황 담화 참조).
7. “성령께서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에 거행된 첫 번째 세계 어린이의 날에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든 소년 소녀들은 이 말씀을 명확히 이해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함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시고, 모든 이의 친구이며 구원자이신 아드님이시며, 애덕의 길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성령이십니다. 사랑의 성령에 대한 순종은 우리의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곧, 우리는 ‘약탈자’에서 동산을 가꾸는 ‘정원지기’로 바뀌게 됩니다. 땅은 우리의 돌봄에 맡겨졌지만, 여전히 하느님의 것입니다(레위 25,23 참조). 이것이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의 특징인 ‘신학적 인간 중심주의’입니다. 제멋대로 자연을 조작하면서 자연에 대한 소유권과 지배권을 주장하는 것은 우상화의 한 형태입니다. 이는 기술 지배적 권력에 도취되어 교만하게도 땅을 하느님 은총을 빼앗긴 ‘모욕당한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은총은 돌아가시고 되살아나신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이 말씀은 참된 울림을 줍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인간은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26항). 인간은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그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참조). 피조물은 정적이거나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미래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오늘날에는 현대 물리학의 발견 덕분에 물질과 영의 연관성이 드러나 우리는 이를 더욱더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8. 따라서 피조물 보호는 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인간의 신비와 하느님의 신비가 만나는 접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만남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그 사랑의 행위에서 비롯되기에 ‘창조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행위는 모든 인간 활동에 자유와 윤리성을 부여하고 그 토대가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자유를 지닙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피조물의 ‘대표’입니다. 초월적인(신학적 윤리적) 동력은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재화의 보편적 목적을 통하여 세상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증진하는 데에 헌신하게 합니다. 피조물이 진통을 겪으며 탄식하는 가운데 기다리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 지상의 삶만이 위태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우주의 주인이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사랑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우리의 미래, 지극히 복된 종말, 평화 가득한 낙원이 위태로워지고 있습니다.
9. 그러하기에 피조물과 함께 희망하고 행동하는 것은 강생의 믿음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주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에게 예정된 육신의 부활에 대한 기대를 공유함으로써, 고통을 겪고 있지만 희망으로 가득 찬 다른 이들의 ‘육신’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영원하신 성자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성부의 자녀입니다. 믿음과 세례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우리의 삶이 시작됩니다(로마 8,2 참조). 곧,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 사는 거룩한 삶(로마 8,14-17 참조)이 시작됩니다.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입니다(갈라 2,20 참조).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삶은 하느님을 위한, 인류를 위한, 피조물과 함께 피조물을 위한 사랑의 노래가 될 수 있고, 거룩함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3)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4년 6월 27일 프란치스코
1) 프란치스코, 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Spes Non Confundit), 2024.5.9. 참조. 2)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Divina Commedia), 천국편 제12곡, 141. 3) 로스미니회 사제인 클레멘테 레보라(Clemente Rebora)는 이를 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피조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께 들어 올려질 때, 신비한 방식으로 모든 것이 출산의 고통이 됩니다. 생명이 태어나려면 얼마나 많은 죽음이 필요합니까! 그러나 거룩하신 어머니, 이 한 분으로부터 우리는 행복하게 빛으로 나옵니다. 우리는 사랑이 눈물로 낳은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이 지상에서 그 갈망은 시입니다. 그러나 오직 거룩한 분만이 이 노래를 끝맺을 수 있습니다. 이 노래의 마침은 성덕에 이르는 것뿐입니다”(Curriculum vitae, “Poesia e santità”, Poesie, prose e traduzioni, 밀라노 2015, 297면).
[내용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42293?gb=K120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