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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 <펌 글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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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이 돈과 무관 할 수 없고,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돈의 위치와 영향, 그 가치는 지식, 철학, 문화, 예술, 과학, 정치, 심지어 신앙(종교)까지도 돈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어서 자연히 신앙행위의 절대적 영향, 또한 돈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헌금문제가 교회개혁에 절대적 관건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헌금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교회개혁 운운하는 것은 무의미 한 것이 되기 때문에, 헌금에 대한 바른 이해와 교정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헌금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려고 합니다.
1. 제물과 헌금에 대한 이해 헌금에 관한 문제를 논하려면 먼저 제물과 헌금에 관한 이해가 우선 되어야 할 듯 합니다 우리는 지금 헌금과 제물에 관한 성격마저도 분명한 이해 없이 헌금 생활을 하고 있고
교회 에서는 신자가 되면 헌금을 하나님께 받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신자들 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물과 헌금에 관한 성격은 전혀 다른 것이며, 만약 제물과 헌금이 동일시되거나 혼돈 된 개념에서 헌금 생활이 될 때는 돌이여 화를 부르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분명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1) 제물에 관해서 제물은 자기가 믿는 신께 바치는 제사 제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경우는 인간들이 임의로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된(명령된) 방법 에 따라 드려지는 것이 제물이 갖는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요구(지시) 하심에 어긋나는 제사나 제물이 되었을 때는 하나님은 받지 않으시거나 진노 하셨습니다. (창4:4-5, 15:10-14, 삼상13:8-14) 그래서 제사 제물은 엄격한 규정에 따라 드려지도록 된 것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제물 규정은 제물을 받으시는 하나님 편에서 직접 규정들을 정 하시고, 지시 하셨다는 것을 주목 해야 합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제물의 경우와 하나님께 드리는 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 : 출 29장, 레위기서 전장을 통해 제사 제물 규정들에 대해 기록 하고 있습니다)
(2) 헌금에 관해서 이번에는 헌금 혹은 헌물에 관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헌금에 관한 기본 개념도 이해되지 않은 채 무분별한 헌금 생활을 하거나 가르쳐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헌금 생활을 해 왔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개념이고 성격이고 따질게 뭐있는가 라고 불평 할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게 검토 되어야할 문제 인 것입니다.
오늘날 헌금을 가지고 마치 하나님께 바친다, 드린다는 식의 헌금 생활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제물과는 전혀 구별이 된 것이고 또 구별되어야 합니다. 헌금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명확한 이해를 위해서 영어에서 헌금에 관한 단어들을 찾아보면서 그 의미를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 gift of money - 돈을 선물한다, 돈을 기증하다. * Contribution - 기부, 기증, 기고, 공헌하다. * Donation - 주다, 기증하다, 기부하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단어가 Donation입니다.
헌금이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상대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나, 국가나, 어느 특정단체를 상대로 주는 기부금에 해당된 것입니다. 이것은 제물처럼 신(하나님)의 요구에 의한 규정에 따라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 주는 자(사람)의 자의적(恣意的)판단에 의해 행하는 것입니다. 자의적 판단에 기초한 헌금이란 낼 수도 있고, 내지 않을 수도 있고, 양(액수)의 많고 적음에 있어서도 어디까지나 주는 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제물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문제가 심각한 것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주일날 예배를 드리면서 드려진 헌금들, 그 속에는 주일 헌금, 십일조, 감사헌금 등 여러 가지 이름들이 붙은 헌금이나 회비들을 포함해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예물(禮物)로 인식한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수 년 전 필자가 뉴욕에 갔을 때 경험한 일입니다. 주일 설교를 부탁 받고 간 교회에서 헌금 순서를 따라 헌금들을 냈고, 황금빛 놋 쟁반에 거둬진 헌금들은 사회를 맡아본 목사님께 전달되고 목사님은 받아든 헌금이 든 황금빛 놋 쟁반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강단 뒤 벽에 걸린 십자가를 향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기 당신의 백성들이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이 예물을 당신께 바치오니 이 예물을 받으시고 예물을 드린 손길들을 기억하사 크게 복을 주옵소서", 성도들은 아멘, 아멘 하고.... 참으로 기막힌 광경 이였습니다. 헌금은 제물이 아닙니다. 제물이 아니기 때문에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 이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목회가 뉴욕의 교회와 같은 의식 속에서 행해 온 교회 일수록 더욱 이해가 안 될 것이며,이해를 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2. 신(神)께 바치는 제물들 앞에서 제물과 헌금에 관한 성격 혹은 개념들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폈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여기서 자연히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제물)은 어떻게 해서 드려져 왔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몇 가지 그 이유들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출발 한다는 것 인간은 신(神)을 향한 믿음을 갖게 되면 신앙심의 표현의 하나로 자기가 믿는 신을 향해 어떤 제물을 드리게 됩니다. 이것은 믿는다는 표현인 셈입니다.
그래서 지구상의 어떤 종교라 할지라도 헌금수단이 없는 곳은 단 한곳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신앙이 헌금(제물) 이라는 것으로 표현될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인간의 본성이 작용을 하게 되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A. 첫째는 보상심리(報償心理)에서 비롯된 현상 인간의 심성(心性)중에는 남(他人)에게 신세를 졌거나 은혜를 입었으면 그것에 대해서 갚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배가 고플 때 밥을 한 끼 얻어먹었다거나, 목마를 때 물 한 컵 얻어 마셨다거나, 죽게 되었을 때 구원을 받았다면, 그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지 하는 생각이 보상심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할 때, 그 은혜에 대한 보답방법으로 헌금을 바치게 되는 현상이 보상심리에서 생긴 것이란 것입니다. 목사가 병든 성도를 위해 간절한 기도를 드려서 병이 났게 되었다거나, 기도를 부탁해서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 될 때, 마땅히 헌금을 바치게 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가리켜 인간의 보상 심리에서 온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B. 둘째는 투기심(投機心理)에서 된 현상 투기심리란 더 받고자 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섬기는 신께 "이렇게 정성을 다해, 이만큼 바쳤으니 신께서는 나의 정성을 기억하시고 몇 배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혹은 내가 이만큼 헌금을 했으니, 이번 기도(소원을)를 들어주시리라" 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개업을 하면서, 사업 시작 때, 혹은 공사를 시작하면서, 자녀 수능시험을 앞에 놓고, 취직 시험을 앞에 두고 사찰이나 교회당을 찾아 제물(헌금)을 바치는 경우, 어떤 대가를 기대하고 바치는 경우들이 투기 심리에서 비롯된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심리를 부추겨 헌금을 내게 하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가령 “온전한 십일조를 잘 내면 창고가 넘치리”한다거나, “열심히 잘 믿으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될 꺼다” 하는 설교들이 투기 심리를 부추기는 대표 적인 것들 일 것입니다.
C. 세번째는 경외심의 표현으로 드리게 되는 심리입니다 자기보다 우월하고 존경스럽고 사랑하고 흠모하는 대상이 있을 때, 그 대상에게 무엇인가를 선물을 하고 싶어지고, 높으신 이 앞에 나아가면서 빈손으로 가는 것을 민망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경외심리라하고 경외심에서 헌금(제물)을 드리게 된 다는 것입니다.
(2) 승려(제사장)들이 만든 유전 헌금(제물)을 드리게 된 제도는 승려들(제사장)이 만든 유전이란 설입니다. 기독교 조직신학(교의신학)에 보면 종교 출발에 관한 몇 가지 이론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승려(제사장)들이 "자기들의 돈벌이를 위해 만든 것이 종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 중에는 막연하나마 신을 찾고자하는 심성(心性)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힘 앞에, 또는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는 불가항력적 사건 앞에서 인간은 신의 존재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심성을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어떤 종족일지라도 신을 찾고자하는 본성은 한결같다는 것입니다.
신을 찾고자하는 열망에 근거해서 종교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종교라는 것을 통해 승려(제사장) 혹은 성직(직업종교인)자들이 존재하게 되고, 그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종교를 통해서 소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심산 수려한 골짜기에 사찰(寺刹) 혹은 암자 하나만 잘 지어 놓으면 심심치 않게 불자들이 찾아와 시주(施主)를 하게 되고, 몫이 좋은 곳에 교회당(敎會堂)하나 잘 지어놓으면 신자들이 찾아와 헌금을 바치게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여기서 봉사하는 스님이나 목사(성직자)의 먹고사는 문제는 자연히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종교라는 것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승려나 성직자들의 돈벌이를 위해서 만든 것이란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돈벌이를 위해 승려를 비롯한 성직자들은 신도들에게 신(하나님)의 이름으로 제물(헌금)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3) 종교적 전통으로 내려온 관습(慣習) 지구상의 모든 종교생활에는 반드시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예물을 드리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기독교 역시 오랜 세월 동안 신앙생활의 하나로 헌금 생활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것은 지극히 보편적인 관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면 하나님께 헌금을 바치는 것은 오랜 세월을 거쳐 온 당연한 관례였습니다.
더구나 성서 안에는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야 된다는 충분한 성경구절들이 있고, 신자들은 그 성경 구절들을 배워왔고 그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지 않는다면 그가 어찌 믿는 자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라고 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최초의 사람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에게서부터 출발되어, 그 후 수많은 성경기록에서 제물을 요구해왔고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이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것으로 훈련되어 왔습니다. 구약시대를 거쳐 신약 초대교회, 로마교회가 되면서 훨씬 보완된 제도로 정착이 되었고, 개혁교회가 되어서도 조금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강화되면서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당연한 제도로 자리를 공고히 한 셈이 되었습니다.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혹 있다 해도 그 사람은 정신병자 취급을 받거나, 노도처럼 흐르는헌금제도란 물결에 흔적도 없이 빛을 보지 못한 채 묻혀온 세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계속된 헌금제도는 성경의 본 뜻과는 상관없이 유전적 관습에 의한 전통적 유산(遺産)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유전적 관습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을 가리고 성경의 본 뜻을 볼 수 없게 만들었으며, 헌금을 바치는 것이 믿음의 바로메타로 까지 여기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보다 더 확실한 이해를 위해 구약 교회의 제사 제물들에 대해 검토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3. 구약 교회(종교)의 제사 제물들 오늘의 헌금 제도를 명확하게 규명해 내기 위해서는 자연히 구약의 제물 제도부터 검토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헌금 제도가 거의 구약 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최초(원시)의 제사 제물 성경에 입각한 최초의 제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기 때문에 농산물로, 아벨은 양치는 자였기 때문에 양(짐승)으로 제물을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열납(받으시고) 하셨다고 했습니다.(창 4:1-5) (주: 이 내용은 앞의 발행된 편지들에서 언급된 것이지만 헌금과 관계된 내용이기 때문에 재론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벨의 제사만 열납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은혜언약에 근거한 피의 제사란 점이 있고(창3:15, 21),
둘째는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는 인간 편의 열심이나 정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기초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성을 다해 헌금을 바친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거란 생각은 착각 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을 분별하는 일이 훨씬 중요 한 것임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족장들의 제단 이번에는 족장들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가나안에 이르러 단을 쌓은 것을 시작으로(창 12:7) 여러 모습으로 제단을 쌓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약속의 증표를 위해서(창 15:9-19) ·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키 위해서(창 22:1-13) 이 제단의 제물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밖에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자기에게 이르러 확인시켜 주신 후 하나님께 제단을 쌓게 되고(창 26:25), 야곱에게 이르러서는 형의 복을 가로챈 일로 형의 낯을 피해 도망치는 피난길의 브엘세바 에서, 또는 20년 후 돌아오는 길에서, 서원의 자리 벧엘에 올라가 쌓은 단도 있습니다.(창 28:16-22, 34:20) 여기서 브엘세바 들에서 기름병을 부어 드린 제단(약속 성격의 제물이며 기름에도 피의 의미가 있음)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피 흘림의 제사들 이였다 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3) 율법에서 요구하는 제사 제물들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후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전달된 율법에서 요구된 제사 제물들에 대해서 간략한 검토를 하려고 합니다. 사실 이때부터의 제사 제물들이 구체적인 규정들이 정해집니다. (출 29:1-42) 제사절기에는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순례절기와 정경절기라는 것입니다. 순례절기란 남자들이 1년에 세 번 이상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와 제물을 받치는 제사를 말합니다. (출 23:14-17, 34:21-24) 순례절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
유월절 : 문설주와 기둥에 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한 날을 기념한 절기로, 무교절 이라고도 합니다. 본래 무교절은 출애굽 때 누룩 없는 떡, 먹은 것을 기념하여 했던 것인데 후에 유월절에 포함시켰다고 합니다.(레 23:4-14, 민 28:16-25, 신 16:1-8) · 칠칠절 : 칠칠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로 7일간 드린 절기입니다. 오순절, 초실절, 맥추절로 불리어 지기도 합니다.(출 34:22, 민 28:26, 출 24:16) · 초막절 : 초막절은 장막절, 혹은 수장절 이라고도 불리어 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 40년의 장막 생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로 지켜진 절기입니다.(레 23:33-36, 39:43, 출 23:16, 34:22) 이 밖의 절기들은 정경 절기라 해서, 순례를 통한 절기가 아니라 율법에서 지키도록 명시된 날들로 안식일, 월삭, 안식년, 희년, 등이 있는데, 이때는 제물을 드림보다는 노동을 멈춘다거나, 토지를 쉬게 한다거나, 노예를 풀어준다거나 하는 것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비정경적 절기로는 부림절 이라 해서 B.C 473년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민족의 대학살 직전에 반전되어, 이 일을 꾀했던 하몰을 나무에 달게 했던 날을 기념한 절기가 있고, 수전절 이라 해서 B.C 164년 유다 마카비가 성전을 정결케 하고 봉헌했던 것을 기념했던 절기가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제물은 순례절기에 드려졌고, 제물들은 제단(Altar)위에 받쳐서 드렸습니다. 본래 제단은 "짐승을 잡는다"란 뜻이 있는데 초기에는 돌 제단 위에서 짐승을 잡았으나, 성막 성전이 되면서 짐승 잡는 장소가 따로 구별되면서, 제단 위에는 잡은 짐승만 제물로 드려지는 곳으로만 사용됩니다. 제단은 성소구성의 기본이 되며, 솔로몬 성전을 건립했을 때는 제단은 성소 앞에 설치되었습니다.
제물로는 주로 피 있는 제물이 되었으며 때론 곡물 제물이 요구되기도 했지만 곡 제물은 종속적 혹은 보조 제물로 드려졌고,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제물을 드려야 할 자가 능력이 없을 때 곡 제물로 대신하기도 했습니다.(레 5:11-13) 이밖에도 피 있는 짐승의 제물을 드릴 때 은, 금, 향 등이 포함되기도 했습니다.(민 7:12-19) 제물의 종류로는 소제물과 번제물, 속제제물, 화목제물(수은제) 등이 있고, 속죄제에는 죄제와 건제로 구별이 되는데, 죄제는 태만의 죄에 해당되고, 건제는 이미 범한 죄를 위한 제사였습니다.
번제에는 헌신제의 성격이 있고, 화목제는 친교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제물로 사용된 짐승은 소, 양, 비둘기, 등이 있고, 초태생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돌리도록 명합니다.(출 13:12) 초태생의 숫컷은 희생의 제물로 드려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속 한 것이라 합니다.(출 13:12-16, 34:19) 여기까지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제물입니다. 율법이 있기 전의족장들이 제물로 드린 것을 비롯 율법으로 규정된 제사 제물들(순례절기에 사용된), 그리고 생축의 초태생 등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들 입니다.
왜 이렇게 복잡한 구약의 제사 제물들을 늘어놓아야 하는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도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설명해야 오늘의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복잡한 제사 제물들(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하나로 묶어 그리스도가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영원히, 아주 온전하게 드려버렸다. 다시 또 드릴필요가 없다” 고 히브리서 기자는 못박아 말하고 있습니다.(뒤 에 가서 다시 설명함)
4. 구약 교회의 헌물(獻物)들 이번에는 구약에 기록된 헌물들에 대해서 언급을 하려고 합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 한 바대로 제물과 헌물은 그 성격과 의미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분명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헌물을 제물처럼 둔갑시켜 "하나님께 받쳐라 혹은 드려라" 하고 모순을 진리처럼 가르치게 됩니다. 헌물에 속한 것은 무엇이며 그 의미와 성격은 무엇인가?
(1) 족장들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들 처음 십일조 이야기는 아브라함에게서 나옵니다. 소돔 땅에 살고 있던 조카 롯이 시날왕을 중심 한 연합 병사들에 의해 가족과 재물을 약탈당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가솔들을 이끌고 뒤쫓아 가서, 그들을 파하고 빼앗아간 것들을 되찾아 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만나,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그에게 줍니다.(창 14: 20) 다음은 야곱의 서원 기도에서 언급됩니다.
야곱이 형의 복을 가로챈 일로 형의 낯을 피해 도망치는 길에 브엘세바 빈들에서 밤을 만나 돌을 베개 삼고 잠들었을 때 꿈에 천사들을 만나게 되었고, 꿈에서 깬 야곱이 베개 삼던 돌로 제단을 삼고, 지참했던 기름병을 취해 그곳에 붙고 서원 기도를 합니다.
"나에게 축복해 주셔서 나를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이곳에 하나님의 전을 짓겠으며,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창 25:19-22) 이 무렵의 십일조 개념은 고대 부족들 사이에서 땅의 세금처럼, 소출의 십분의 일을 떼어 신(神)께 바치는 일은 널리 행했던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십일조 언급들은 율법의 요구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된 것이 아니고 고대인들의 관행에 의한 것들이며, 동시에 사람 편에서 조건적 성격을 가진 언급들이란 점이 율법의 요구와도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2) 율법이 요구한 십일조 이번에는 출애굽 후 율법에서 말하고 있는 십일조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민수기 18장 22-32절까지를 보면 십일조를 내도록 명령합니다. 여기서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레위인 들로 회 막 봉사를 하게 하려는 것이라 말합니다. 일반 이스라엘은 회 막을 가까이 말라 죄를 당하여 죽으리라고, 주의를 합니다.
레위인 들에겐 따로 기업을 주지 않고 일반 이스라엘이 낸 십일조가 기업이며, 회 막 봉사의 수고 비라합니다.
레위인 들은 받은 십일조 중에서 다시 십일조를 떼어 하나님께 거제 물로 드리고, 그것은 아론에게 주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거제 물로 드리는 것은 레위인 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일반 백성이 드리는 것 아님) 다음은 신명기 12장 6-14절에서는 모든 제물과 함께 십일조를 드리게 하고, 그것을 택한 곳에서 자녀와 노비와 레위인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특히 레위인은 다른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을 역설하고 레위인 을 저버리지 말도록 당부합니다.(신 12:19)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가족과 노비를 챙기도록 했다는 점입니다. 다음은 신명기 26장 12-13절에서는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도록 명합니다. 여기서의 십일조는 레위인 들은 물론이려니와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도록 한 것은, 구제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다음은 사무엘상 8장 15절에서는 소산의 십일조를 관리와 신하에게 주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십일조는 왕이 세워지고 국가조직이 될 때 내야하는 세금의 성격을 담고 있습니다.
다음은 느혜미야 10장 37절에서는 더 명확하게 레위인들의 몫임을 명기하고 있으며(느 12:44), 13장 5절에서는 십일조는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에게 주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몇 군데에서 십일조의 성격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이것을 요약정리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의 몫으로 · 객(나그네)과 고아와 과부의 구제비로 · 정부 조직이 될 때 관리들의 인건비로 ·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와 문지기들의 임금으로, 지출할 것을 명기하고 있습니다.
(3) 말라기 3장에서 언급한 십일조 끝으로 말라기 3장 8-10절에 기록된 십일조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은 교회에서(목회 현장에서) 가장 강력하게 활용되는 말씀입니다. ·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 ·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곡간이 차고 넘치도록 축복하신다. ·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이보다 더 매력적인 메시지가 또 있겠는가?
그래서 본문을 십일조의 경전 중의 경전이라고 말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본문을 말하게 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라기선지가 본문을 기록할 당시는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황폐된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삶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기 삶의 정착하는 일에 바빴고, 자기기반(재산)을 늘리는 일에 열심 일뿐,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로 지켜야할 최소한의 의무(규례)들마저도 제대로 지키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자기들 집을 꾸미는 일에만 바빴을 뿐,(학1:4) 십일조를 내서 레위인 들로 하나님 섬기는 일에만 전념 할 수 있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레위인 들은 백성들이 의무이행(십일조 헌납)을 하지 않음으로 자연히 자기들 스스로 생활비를 마련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기 위해 일반 백성들처럼 양이나 소를 키우며 직업 활동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말 1:14) 이러한 상황이 되다 보니, 자연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 까지도 번폐스럽게(귀찮게) 여기게 되었고,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도, 실하고 좋은 것은 뒤로 감추고, 도적질한 것, 저는 것, 병든 것들로 제물을 삼아 드리는 짓을 하게 된 것입니다.(말 1:8, 13-14)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잘잘못을 판단(재판)하는 일도 뇌물 주는 쪽에 기울게 된 것입니다.(말 2:9)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선지자는 속이 상하고 애가 탄 것입니다. 백성은 백성들대로 의무 이행을 하지 않고(십일조 의무), 제사장들은 제사장들대로 제사장의 직무 수행하는 것을 피곤해 하고 귀찮게 여기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급된 말씀이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서의 십일조 언급은 율법 제정의 기본 뜻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신약에 와서도 여자 적으로 해석 적용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도, 백성도 속이는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속인다는 뜻은 범죄 행위란 뜻이기도 합니다. 이미 중세교회 시대에도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바쳐라"하는 식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교구민들에게 세금으로 십일조는 징수한 일은 있었지만(소 십일조, 대 십일조 등으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 바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없어 중보자(제사장)가 필요하다는 뜻이 됩니다. 당신은 지금도 죄인입니까? 십일조는 우리가 죄인으로 있을 때 제사장(중보 역할자) 혹은 레위인 들이 따로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것으로 헌물에 속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어떤 이 들은 목사가 제사장 아닌가? 하고 무식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가 제사장 인가요?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죄인입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내야하는 헌물은 분명한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십일조는 구약에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헌물에 속한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야하는 세금과 같은 성격의 것 이란 걸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4) 구약에서의 연보 구약에서 연보로 번역된 말씀으로는 역대하 34장 9절 또는 14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연보는 성전수리비로 쓰기 위해 연보 궤를 두어 그곳에 사람들이 돈을 넣게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성전이 있을 때) 까지도 예루살렘 성전, 여인들의 뜰, 내부 벽에 연보 궤를 놓고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그 궤에 연보를 넣게 했습니다. 과부의 엽전 두 푼, 이야기도 바로 연보 궤에 넣은 것을 예수께서 보시고 하신 말씀이며, 이때의 연보들도 성전 수리비로 사용키 위한 것이었습니다.(막 12:41-44)
고궁이나 유적지 등지에서 입장료를 받아서 고궁이나 유적지의 유지 보수비로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제도로 보면 될 것입니다.
이 밖에 이스라엘의 남자가 성전을 갈 때는 반 세겔의 성전 세를 내게 했던 것도 맥락이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마 17:24-27) * 성전 세를 로마의 관리들이 착취 수단으로 삼기도 했음. 여기서 구약의 연보제도 역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아니란 걸 명심 해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돈에 관한 것이라면 무조건 하나님께 란, 터무니없는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5) 포로 이후의 고르반 (Corban) 우리는 지금 신앙생활에 필요했던 제물과 헌물(헌금)에 관한 것들의 성격들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명확한 이해가 필요한 것은 올바른 헌금 생활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헌금 생활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르반 제도가 생기게 된 것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어 정확한 설명은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 이방인의 땅에서 살게 되면서부터, 본국에서처럼(율법의 규정) 하나님께 제사제물을 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닌지라, 짐승을 잡아 드리는 대신에 헌금으로 예물을 대신한 것이 "고르반" 제도가 아닌가 합니다.
이후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은 고르반의 성격을 갖게 되었고, 그 영향은 어쩌면 지금의 헌금 제도의 기초 문화를 제공하게 된 듯 합니다.
5. 신약 교회의 제물과 헌물들 지금까지는 구약에서의 제물과 헌물들에 대해서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신약에서의 제물, 그리고 헌물에 관한 것을 검토하려고 합니다.
신약에서의 제물은 이미 앞에서 언급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셔서, 또 드릴 것이 없이 완전한 제사를 드려 버리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새삼스럽게 또 무엇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은 없어진 것이란 말씀입니다.
다시 강조를 하는 것은 그것이 헌금(돈) 일지라도 "하나님께 바친다" 혹은 "드린다" 했을 때는, 그것이 곧 제물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헌물(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의 필요를 위해서 헌금, 곧 Donation을 하는 것뿐입니다.
(1) 연보에 관해서 신약성경에는 단 한번도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성격의 헌금을 요구한 기록이 없습니다. 특히 십일조를 하나님의 것이니 바쳐라, 운운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다만 연보로 번역된 내용만 여러 곳에 있습니다. 특히 바울 서신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연보를 여러 가지 단어들을 들어 연보에 대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 로기아 : 모금한다, 수금한다 의 뜻(고전 16:1) · 하플로테스 : 기쁨으로(고후 8:2) · 하드로테스 : 풍성한, 큰 선물, 관대함(고후 8:20) · 율로기아 : 좋은 모금(고후 9:5) · 코이노니아 : 교제(고후 9:13) 이와 같은 연보를 요구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심히 곤경에 처해있으므로(기근을 만나), 예루살렘 교회를 돕자(구제)고 해서 이방인 교회들에게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행 11:27-30, 롬 15:25-26)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구제 비 모금을 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 연보는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고 한 것(고후 9:5,7 몬 14)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을 갖고 "억지로", "인색함으로" 이런 말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다른 이들에게 흠 잡히지 않도록 조심성 있게 해야 한다고 주의를 하면서 모금을 한 것입니다.(고후 8:20-21)
이일은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에 벽을 허무는 좋은 역할이 되기도 했습니다.(고후 9:12, 롬 5:27) 여기서 우리가 확실하게 인식해야할 것은 신약시대에는 단 한번도 예물 성격의 헌금에 대한 요구가 없을 뿐 아니라, 위에서 살펴본 대로 연보로 번역된 말씀들은 “수금, 모금, 거둬 들인다”의 의미일 뿐이란 사실을 주목 해야 합니다.
돈에 관한 것이라 해서 무조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개념의 해석이나 적용을 하려는 것은 성경을 왜곡시키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5-18절까지에 기록된 말씀은 바울의 전도여행비를 보태 준 것을 두고, 바울이 감사의 표로 "주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란 표현을 쓴 것 뿐, 실지로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오히려 구제비(히 13:16)나 전도비를 제물이요 제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실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란 뜻에서 써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한 것에 대한 소중성(所重性)을 표현한 말인 것뿐입니다. 혹 고린도교회의 연보나 빌립보교회의 향기로운 제물(빌 4:18), 히브리서의 구제비(히 13:16)등은 헌금이란 말에 포함시킬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개념이 되어서 "예물을 드리오니 받으소서"하는 식은, 큰 오류를 만들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2) 십일조와 관련된 언급하심에 대해서 이번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일조와 관계해서 언급하신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엉뚱한 해석과 아전인수(我田引水)식 적용을 하려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 지상에 계실 때의 교훈입니다.
그동안 헌금문제, 특히 십일조를 요구하면 안된다고 하면 일부 목사님들 중에는 혈압을 올리고, 분해하면서,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하신 말씀을 들어 대면서 무식한 반박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지상에 계실 때 하신 말씀을 명확하게 살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마 23:23-24) "화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 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 찌니라"(눅 11:42) 여기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찌니라"하셨기 때문에 주께서도 십일조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이 옳은 주장일까요?
성경해석이나 적용에 대해서, 배경과 성경전체에 기록된 기본 의도(意圖)와 대상과 시제(時制)등을 참고해서 포괄적, 또는 구체적 해석과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강조점이 십일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함에 있는 것입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은, 십일조 잘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하루살이),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지키는 것(약대/더 중요한 것이란 뜻)이 더 중한 것이란 걸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일조 챙겨내는 것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바리새인들아! 그것보다 더 중한 의와 인과 신을 더 중요하게 챙겨라" 하심에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본문말씀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인가? 아니면, 율법을 잘 지켜 십일조생활을 철저하게 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십일조 생활을 자랑으로 여기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란 걸 분명히 해야 합니다. 보다도 중요한 것을 버리고, 하루살이에 불과한 십일조 잘 낸다고 자랑삼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에게 십일조 요구를 하신 적이 있었던가? “율법에 명시했으니 너희도(제자들) 내게 십일조를 내거라" 하셨습니까?
아니 제자들을 향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하셨습니까?
예수를 믿고 따른 자들은 사도행전에서는 모두 예수의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만이 제자고 오늘의 성도들은 "평신도" 입니까? 그래서 평신도는 십일조를 내야 하는 건가요?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오늘의 신약백성들도 지켜야 하는 걸까요? 터무니없는 성경적용을 하려는 것은 심각한 죄에 해당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 참고: 평신도란 말은 중세교회가 사제(司祭)그룹을 구별하면서, 일반백성(성도)들에게 부쳐준 명칭입니다, 이것 때문에 개혁자들이 만인 제사장설을 부르짖으며 종교 개혁운동을 벌린 것입니다. 개신교회에서 다시 평신도란 말을 사용 한다는 것은 개신교회도 개혁 전 교회들이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6.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서는 안되는 이유 앞에서 간헐적으로나마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서는 안된 다는 것을 말해 왔습니다. 이제는 그 구체적인 것들을 논하려고 합니다.
일단은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서는 안 된다 하니까, 처음부터 마음을 닫아버리고, 적개심을 품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란 생각도 듭니다.
오늘날과 같은 교회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성경으로 규명을 한다 할지라도 이해하거나 받아드릴 수 없는 상황이며, 또는 아무 탈 없이 오랜 세월동안 전통적 헌금문화에 익숙해져 온 탓에 일단은 거부감이 생기는 것 은 당연한 현상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늦게 라도 바른 뜻을 알게 되었다면 고쳐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성경을 기본으로 출발하고, 유지되고, 성장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경의 가르침을 외면한 채 전통적 유전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벌써 기독교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개서 멀 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숭배하는 도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지키느니라.
너희가 너희의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도다"(막 7:6-9)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 이대로는 안 된다"고했을 때는 대승적(大乘的) 차원에서 검토하고 잘못된 것은 우리의 생사(먹고사는 일?)가 달린 일일지라도 과감히 버리고 교정하는 것이, 신앙이요, 주님 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교회 개혁을 이루는 것 아니겠는가 합니다. 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면 안 되는가?
(1) 제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논제는 이미 앞에서 언급 해 왔습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린다, 혹은 바친다고 할 때, 그것은 곧 제물의 의미(祭物意味)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때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이 불완전한 제물이 된다는 뜻이 되어, 우리의 신앙행위는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불신한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는 앞의 말씀처럼 입술로는 믿는다 하면서 행위로는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요구했던 제사는 피의 제사가 중심이 되었고(히 9:11-22) 피의 제사는 그리스도가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제사를 드린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여러 피의 제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비유요, 모형이요, 그림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히 8:5, 9:9-10) 그래서 어떤 것으로든 하나님께는 드린다, 바친다, 하고 예물처럼 드릴수가 없고 드려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 히브리서 기자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全體)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시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였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쫒아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8-14)
·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 · 제사장들은 매일 같은 제사를 드리지만 사람의 죄를 없이 하지는 못한다. ·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 ·
그리스도로 제물되어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히 9: 11-12)고 하셨으며 자기를 단번에 제사를 드려 죄를 없게 하시고(히 9:26-28), 다시는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다(히 10:18)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는 그리스도로 완성된 것입니다. 제사는 더 드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주 완벽하게 완성된 것입니다.(참고 레 17:11, 막 14:24, 요 6:53-54, 롬 5:9, 엡 1:7, 2:13)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헌금을 제물처럼(예물개념) 드린다면,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제사를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거나, 뒤엎는 것과 같은 불신앙의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드린다/바친다)을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예배를 드리면서 마치 하나님께 드리는 것처럼 헌금을 요구하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도 아니요,
하나님의 뜻과도 무관한, 오히려 십자가 사건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기망(欺罔) 하는 행위요, 성경지식에 무지한 성도들을 속이는 행위가 될 뿐이란 겁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 행위를 해 온 것은 성경의 깊은 검토 없이 전통적으로 전래(傳來)되어온 유전에 따른 것 뿐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2천년 기독교 역사가 반복적으로 어둠에 처하게 된 듯 하며, 또 다시 교회가 개혁을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 아닌가 합니다.
지금 목회 하는 목사님들께는 다소 황당하고 불편케 생각될지 모르나, 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일 것입니다. 비록 이제라도 모순을 발견했다면 지금의 교회 구조만을 보존하려는 것보다는, 어떤 희생이 따른다 해도 주님의 뜻을 쫒아 행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개혁을 말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보존하려는 것은 믿음이 아니요, 용기를 갖고 버리는 것이 오히려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헌금?) 드려야 한다?" "우리가 정성을 다해 바치오니 이 예물을 받으 소서 " 이런 기막힌 노릇이 어디 있습니까? 신약에 와서는 단 한번도 "예물(헌금)을 하나님께 받쳐라 혹은 드려라" 고 말씀 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과 같은 교회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설명을 하고 성경으로 확인 시켜도 쉽게 이해를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사람의 유전이 만든 전통에 굳어있는 오늘의 교회구조 속에서는 오히려 변명의 이론(理論)을 만들어 반박을 할 찌라도 수긍하고 받아 드리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전적 전통 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뒤에 가면서 더 설명을 하겠습니다. (2) 우리가 주안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헌금을 주께 드려 서는 안 되는가?"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居) 하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안에, 주가 내 안에 거 하심"으로 주님과 우리는 한 몸(同體)이 된 자들입니다. 주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는 뜻은 내 것이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것이 내 것이란 뜻인데, 누가 누구의 것을 갖고 누구에게 드린다는 말입니까?
만약에 헌금을 주께(하나님께) 드린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주안에 거 하지 못한 사람(주 밖에 있는 자)이란 뜻이고, 자기 소유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 밖에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적 행위(헌금 내는/ 선행?)를 갖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면, 천박한 초등학문(율법) 혹은 종교행위( 헌금행위)를 버리고 믿음으로 주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입술로는 믿는다 하면서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이 된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주안에 거(居)한다는 뜻은 우리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뜻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의(믿는 자) 신분(身分)이 바뀌게 되면 우리의 머무는 위치도 달라져야 합니다. 과거에 종(노예)으로 있을 때는 행낭채나 문간방 같은 곳에서 기거를 할 것입니다. 구라파 문화권에서는 하인들의 처소를 아예 집밖에 만들어 주었습니다.
본 채 에는 절대로 기거처소를 만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으로 있던 자를 양자로 받아 드렸으면 이젠 주인의 자녀요, 주인의 상속자 신분이 되어서(롬 8:15-17) 기거하는 처소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종으로 있을 때는 집밖에 머물러야 했지만, 자녀(양자)가 되어서는 집 안채로 옮겨진 것이고 안방에서 살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전에는 예수님과 제자(믿는 자)들의 위치는 개체(個體)관계 이지만, 오순절 성령강림 하심으로(예수의 영) 우리는 그분 안에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게 되어, 이때부터는 예수님과 우리(믿는 자)는 한몸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것은 너무나 중요한 위치 변화인 것입니다. 예수를 저만치 떨어진 예배당에 모셔두고(?) 주일이나 혹은 집회 시간에 찾아가서 섬기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안에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는 한 몸 된 삶은(요 6: 56-57) 천지개벽보다도 더 큰 사건이요 중요한 위치(거처) 변화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있을 때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었기 때문에(죄인이 하나님을 보면 죽음), 이 때는 할 수 없이 제사장(중보자)을 사이에 두고 하나님을 섬겨야 했고, 그 때문에 제물이나 헌물 곧 십일조 같은 것을 내야 했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가 의인이 되었고 오순절 성령 강림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몸은 성전이 되었으며(고전 6:19) 우리는 그와 더불어 먹고 그분(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먹는, 하나 된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받치며 사는 관계가 아니란 것입니다.(계 3:20)
주님은 우리 안에 우리는 주님 안에 있는 삶으로, 주와 한 몸 된 자들 이라면 실제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여기서 적당치는 않지만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백화점에 여자 종업원(점원)이 있다고 합시다. 점원으로 있을 때는 시간 맞춰 일을 해야 하고, 월급 받아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백화점 주인이 그를 미쁘게 보고, 그로 자기 아내를 삼았습니다. 여점원은 이제 점원이 아니라 남편과 더불어 백화점 주인이 된 것입니다. 그는 신분이 바뀌게 된 것이고, 월급 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젠 주인으로서 다른 이들에게 월급을 주는 자가 된 것입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신 분이 있습니까? 헌금을 하나님께 바친다 했을 때는, 그 분은 밖에 계신 분이란 뜻이고, 아직은 예수와 한 몸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며, 아직은 그리스도의 지체요 가족(권속)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헌금을 내도록 가르치고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신자사이를 자꾸만 갈라놓는(떨어지게 하고), 일이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잘 내도록 가르치고 설득하고 독려하는 짓은, 훌륭한 종교인은 만들 수 있어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엡 3:6-7)
(3) 받는 자와 주는 자 세 번째 "왜,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면 안 되는가?"
혹자는 무엇을 그렇게 구별하고 따질 필요가 있는가, 어떻게든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쓰면 되지, 하고 생각할 이도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고(思考)를 갖고 있는 분들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개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 하는 일에는 목적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헌금을 드리면 안 되는 것인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먼저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무엇이라고 증언하고 있는가? 를 들어보겠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제시니 손으로 지은 전(殿)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인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심이라"(행 17:24-25) 이 말씀은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언급 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니 하나님께서 어찌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殿)에 계시겠는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도 호흡도 만물도 친히 주시는 분"(행 7:48-50)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시인의 말씀도 들어 봅시다 "산림의 짐승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10-12) 바울의 또 다른 곳의 증언도 들어봅시다.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후 12: 14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고, 먹이시고, 살게 하시는 것이지,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 하셔서, 인간들이 무엇을 드려, 하나님이 존재하시거나 하나님의 일을 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들의 오만에서 비롯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은 우상을 섬기는 어리석은 인간들처럼 자기의 신께 제물이나 헌금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물을 원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 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주는 자(드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 라는 사실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신 예물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관계라는 것을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미6:6-8, 삼상15:22-23, 마9:13,12:2 등) 인간들이 하나님의 선한사업을 위해서 무엇을 드린다, 혹은 받친다, 하는 것은 인간들의 오만(傲慢)이거나, 우상 신을 섬기는 이방 종교인들과 다를 바 없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헌금생활을 해온 것은 구약교회와 로마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종교문화의 탓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고 또 말씀드립니다. 호세아선지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헌금을 원하심이 아니라, 당신이 만물(萬物)의 주가 되신 분이란 사실을 알기를 원하시고, 인정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호 6: 6 /잠 3: 6)
(4) 제자(백성)들의 신분이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으로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제사를 드리셨음으로 우리는 다시 제사를 드릴 것이 없다고 앞에서 살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제사를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되었는 가란 우리의 신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우리의 신분을 바로 이해하게 될 때 헌금문제도 바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는 죄 없는 자가 되었다. (히 10:14 / 속죄함 받은 자)
우리는 의인들이 되었다.(롬 4:5, 6:7, 8:32-34, 3:28) ·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벧전 2:9)
우리는 이제 담대히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히 10:19, 14:16)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후사가 되었다.(롬 8:17) ·
우리는 주님 안에 주님은 우리 안에 있어 한 몸이 되었다. (요 6:56-57, 고전 6: 17)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 (고전 3:16, 6:19)
죄인 되었던 우리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제물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분이 이렇게 바뀐 것입니다.
바뀐 신분을 가졌으면서도, 다시 초등학문(율법)으로 돌아가 율법에 매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죄인으로 있을 때처럼, 중간에 제사장을 두고 그에게 십일조나 바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이제도 살려고 하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헌금이나 몇 푼 교회당에 내면서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후사(상속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피 흘려 우리의 처지(신분)를 바꿔 주신 것은
천박한 초등학문(율법)으로 돌아가 율법의 종노릇이나 하라고(헌금이나 몇 푼씩 바치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첫댓글 다 읽었으니 무슨 상이라도 없나요? ㅎㅎㅎ 그러나 내 자신을 위하여서라도 읽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딱 맞는 믿음의 글이라고 믿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그렇지만...우리들의 헌금(모금)이 주님(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명하신 전도와 이웃사랑의 귀한 힘(자원)이 되기도 한다는것을 저희들은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헌금이 마치 하나님께 드리는 것같은 그런 믿음을 가르친다는데는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너무너무 자세한 말씀으로 많은 분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구속을 안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샬롬♡
아멘, 전적으로 성경적인 글입니다.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잘못된 사상에 세뇌가 된 기독교종교인입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 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심이라(행17:24,25) 이 처럼 성경은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여서 사람에게 무엇을 받아야 할 잡신이 아니라 만물과 생명과 호흡을 친히 주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돈이나 바치면 기뻐하며 큰 회당을 만들어 바치면 좋아하는 잡신 정도의 수준으로 격하 시키고 비하시키는 목사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으리라,(고전16:21 갈1:8,9))
저도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아주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항상 좋은 글로 우리들의 마음에 용기를 주시는 yes24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올바른 글은 많이 읽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현실이 무척 아쉽네요. 저도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이 쓰이기 원하시는 곳에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보람은 느끼며 감사를 더욱 느끼면서 앞으로도 계속 할려고 합니다.
헌금과 제물을 크게 오해한것 같네요.가난한 과부의 두렙돈에 대해서 설명부탁해요.
772번 게시물을 읽어보세여
글 연구하여 쓰신다고 수고는 많이 하셨는데, 헌금(예물)과 제물(오늘날 제물은 예배에 임하는 성도들 자신임)을 크게 오해하시고 쓰셨네요...맗씀처럼 예수님 이후 매일, 또는 제사 때마다 드려지는 구약시대의 제물 같은 것은 더 이상 필요 없고, 다만 예물의 성격을 가진 헌금 또는 헌물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금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한 사업에 사용돼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정을 합니다. 이 점은 앞으로 교회 개혁을 통해서 꾸준히 바로 잡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말장난 좋아하시는 분이 나타 나셨네요. 무어가 복잡하게 헌금과 제물을 구별하고 계십니까 ? 그렇게 구별해야 바치고 또 거두어 들이는 정당성이 보장 됩니까 ? 그래서 헌금의 종류를 그렇게 많이 만들어 놓으셨네요. 십일조, 감사헌금, 구제헌금, 계절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 등등 더 많이 있는데 이제는 더 만들어야 겠네요. 감사제물, 구제제물, 선교제물 이렇게 말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내는 헌금이 올바로 쓰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교회보다 더 올바르게 사용되어지는 곳에 바쳐야(드려야) 합니다. 과거에는 교회에 바치고 교회가 대신 섬기는데 사용하는 것으로 했으나 앞으로는 교인들이 직접 판단하고 선택하여
직접 올바로 사용되어지는 곳에 드려져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결코 올바로 쓰여지지 않는 교단에는 더 이상 바쳐서는 아니됩니다. 이점을 우리 교인들은 자각하고 실행을 해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에게는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권리는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권리 입니다. 즉 양심의 자유 입니다. 스스로 할수 있는 양심의 자유와 권리 입니다. 이제는 교인들도 이런한 권리를 주장하고 행동으로 옮길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참 개혁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거지로 만들고 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부자로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고 하는데 교회는 바치지 않으면 당장 굶어 죽을 하나님으로 만들고 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 = 필요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고 그들에게 주는것이 곧 하나님께 주는 거이라고 하고 지극히 적은자에게 하는 것이 곧 내게 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하지 않는자를 왼편에 세우고 염소들이라고 하는데 돈을사랑하는 자들을 향하여 강도라고 하고 아버지의 집을 시장터로 만들고 있다고 하는데 양의옷을 입고 나오나 노략질하는 이리떼들이라고 하는데 지금 교회는 바로 강도의 소굴이고 이리떼들의 은신처이다. 바울은 그들은
헌금과 제물을 구별해야 한다는것이 말장난이라구요? 일부러 구별을 안하시고, 자기 주장만 하시는 건지..아니면 정말 오해한 상태에서 그러시는건지 알 수가 없군요. 윗분의 논리는 교회의 근본을 부정하는 위험천만한 자기주장일 뿐입니다.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고 보기 어렵네요. 하나님 이외의 분을 따르는 분 같군요....더 이상 말할 필요성이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여기들어와 십일조와 헌금에 관한 글들을 읽으면서. 내가슴을 쳤습니다. 나의 어리석은 믿음과 생각들이 얼마나 무모한지요. 처음엔 많은 혼란으로 정신이 없었지요 도대체 어느것이 진실인지~~ 지금 각 교회마다 전하는 설교말씀들이 십일조 와 헌금을 강요하며 말씀을 들이대는데 안그러는 교회도 있나요? 안그러는 목사님도 있나요? 지금 이것이 진실이라면 이런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요? 나는 이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어찌해야 하나요? 나는 두렵습니다. 진리를 아는것이 두렵지만 알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찌해야 합니까? 입을 다물어야 하나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신다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그리고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를 구하시면 주님께서 선한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교회사를 보시면 언제나 대다수 종교인들이 타락하여 소수의 참된 믿는이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기 까지 했습니다.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고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 하는 자는 사랑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8,19)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7) 주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두려움이 없습니다.두려움은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불신과 사랑이 없음을 주님께 고하고 믿음과 사랑을 주시기를 구하세요,그리고 진리를 위한 믿음의 용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샬롬,
당신은 신학자입니까? 종교 자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얼나가 있고 성경은 몇 백번 읽었습니까?? 성령의 감동은 받아 본적이 있습니까?? 행17:24~25은 16절에 보면 온성이 우상이가득한 것을 보고 하였습니다. 그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착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다 이루었다 하나는 사람이 외 구약 호세아 선지의 말을 쓰며 시편이 저자의 말씀을 쓰십니까??? 호세아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백성이 멸망이 입박하였는데도 알지 못하고 음란에 빠져 있기 때문에 경고의 말씀입니다. 시편에서도 16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악을 행하면서도 제물을 받치니 하나님께서는 원치하니 하였습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여러 그리스도인들이여 어떤 이단의 말을 듣지 말고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며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으시며 깨달음 입기를 기도합니다 말세가 되면 나라가 나라를 아들이 아버지를 ........ 교회가 교회를 핍박하며 대적합니다. 종교 개역은 종교자들이나 하는 것이지 우리 기독인들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두려움과 떨림)하며 예수님의 재림 때를 기다리야 합니다. 미혹 받지 맙시다. !!!!!!!!! 많은 기도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냥 읽기가 아까워서 인쇄해 가요
헌금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맞지요.우리에게 일할수 있는 건강주시고 소산 주신 것에 대한 감사. 기타 등등ㅎ감사거리가 참 많죠. 아직 죄인이어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헌금의 기본 바탕은 감사함입니다.그런 감사함이 없다면 헌금 안하시는편이 낫죠.헌금한 후에는 우리의 손을 떠났기때문에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드렸다면 거기까지가 우리의 몫인거죠.. 그 돈을 잘못 쓴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 앞에 가서 그들이 심판 받을 부분일것입니다..하지만 헌금할때 감사함이 아니라 억지로 또는 계산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헌금이란 당연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