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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국외 항일운동
국외 독립운동 기지는 주로 만주와 연해주다.
현재 중국은 만주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만주는 동북 3성(둥베이 3성)으로 불리고 있는데, 행정구역상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의 3개 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지도상으로는 만주와 동북3성이 딱 일치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두산 백과 사전>
간도는 우리나라 국경과 인접해 있는 만주의 남동쪽 지역으로 현재 이 명칭도 사라졌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69>
좀 더 분명하게 그려놓은 사진도 인터넷에는 많다.
물론 자료마다 조금씩 지형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충 엇비슷하다.
간도에는 이미 19세기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건너가 살았다.
자연재해와 삼정의 문란으로 조선 땅에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국경을 넘었고, 이 지역의
농경지는 대부분 이들 조선인들에 의해 개척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간도 관리사가 파견되고, 통감부가 파출소를 설치할 정도였으니 실효적 지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간도가 법적으로 청으로 넘어간 것은 1909년 청과 일본 사이의 간도협약에 의해서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은 대한제국은 입 한번 뻥긋 하지 못하고, 일본이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대가로
간도를 넘겨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간도를 둘러싼 청과 조선간의 영토 분쟁은 숙종 당시 세워진 백두산정계비의 해석을 두고 후대에 와
이견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서위압록 동위토문”이 청과 조선의 국경에 대한 정의인데, 도무지 이 토문이 어디냐를 두고 대한제국
시기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본의 손에 의해 뺏겼다.
여하튼 이런 역사를 가진 간도이니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독립 운동가들에게 1순위의 국외 독립
운동 기지였음에는 틀림없다.
연해주는 1860년 러시아가 2차 아편전쟁의 강화조약( 베이징 조약)을 중재한 대가로 청으로부터 넘겨
받았다.
러시아는 여기에 블라디보스톡(동방을 정벌하라! 혹은 동방의 등불...뭐 이런 의미가 있다고 한다)을 건설하였다.
조선인이 처음 연해주로 건너간 기록은 1863(4)년 무렵으로 나와있다.
대여섯 가구가 살길을 찾아 이름도 낯선 러시아 땅으로 넘어갔는데, 러시아는 연해주를 개척하기 위해
조선인의 이민을 적극 받아들였다.
그 결과 1880년대까지 연해주에는 조선인이 러시아인보다 많았다.
물론 이후에는 러시아인들이 훨씬 많이 진출했다.
이 조선인들이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대거 중앙아시아로 옮겨가야 했다.
여하튼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연해주 역시 독립 운동가들에게는 또 하나의 훌륭한 선택지였다.
간도와 연해주 !
이리하여 복잡다단한 항일 독립 운동의 계보는 여기, 간도와 연해주에서 시작된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15>
한일 병합 후 1910년대는 나라밖에 독립 운동의 기지를 만들어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나라 안의 움직임도 비밀 결사의 형태였다. 이런 작업이 3.1 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1911년 이회영 육형제 등이 서간도의 삼원보로 집단 이주하였다. 경학사와 부민단이라는 자치조직을
만들고,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 학교를 세웠다.
여기서 활약한 독립군 군대는 서로군정서이다.
북간도에는 중광단과 대한 국민회가 조직되었다.
한일합병 이전에 이미 서전서숙과 명동학교 같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군대조직으로는 중광단의 지원을 받는 북로군정서와 대한 국민회의 지원을 받는 대한 독립군이 있었다.
연해주에는 권업회와 성명회가 있었다. 이후 이상설이 주도한 대한 광복군 정부와 3.1운동 직후 손병희가
주도한 대한 국민 의회가 만들어 졌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30>
1919년 고종의 인산일을 맞아 드디어 3.1 운동이 터졌다.
일제 강점기 최대의 독립 운동은 일본의 통치형태를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어 놓았다.
더 큰 영향은 국내와 국외의 항일 운동에 불을 붙였다는 것이다.
1920년대의 각종 대중운동과 노동자․ 농민의 쟁의, 그리고 국외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무엇보다 독립 운동을 위한 통일된 지도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결과 1919년 9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33>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32>
이후 임시정부의 행로는 순탄하지 않았지만, 끝내 김구가 지켜낸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0년 충칭에서
조직을 재정비하여, 건국 작업을 착착 진행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51>
3.1 운동 한 달 전,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 운동 인사들은 무오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여 3.1 운동을 촉발했다. 3.1 운동 직후 이들 지역에서는 20여개의 독립군 부대가 지역의 한인 단체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활동하였다. 그 중 독립 운동사에 길이 남는 전투가 바로 1920년의 청산리 대첩이다.
1920년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이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봉오동 전투,20)
일본군은 만주로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 훈춘사건(20)을 조작하였다.
마적단과 짜고 만주의 일본 관공서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일본은 대규모의
군대를 만주로 진입시켰다.
일본군의 공격을 예상한 독립군 부대들은 협력하여 대항하였고,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이 연합한 부대는 엿새 동안 청산리 부근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청산리 전투,20)
봉오동과 청산리의 빛나는 승리로 독립군은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국내의 민족 운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51>
그러나 상황은 매우 심각해졌다.
일본군이 독립 운동 근거지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간도의 양민을 대량 학살했다.(간도 참변,20)
더 이상 간도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된 독립군은 러시아를 향해 떠났다.
<최태성의 근현대사 1400제>
밀산에서 독립군 부대들은 대한 독립 군단을 형성했다.
서일의 지도 아래 김좌진과 홍범도의 군대도 합류 하였으나, 김좌진은 도중에 만주로 돌아오고, 홍범도는
러시아로 들어갔다가 자유시를 거쳐 연해주에 정착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홍범도는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여 생을 마쳤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47>
밀산을 거쳐 러시아로 들어간 대한 독립 군단은 러시아 군대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고, 학살당하는 참변을
겪었다.(자유시 참변, 21)
러시아 혁명 후 어지러운 러시아 군부 내의 권력 다툼 과정 중 일어난 참변이었다.
독립군은 다시 간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55>
독립군은 일본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한인들로부터 예전처럼 긴밀한 협력을 받을 수는 없었다.
독립군은 조직을 재정비하여 비슷한 시기에 남만주에 참의부와 정의부, 북만주에 신민부를 결성하였다.
이들 3부는 독립군이 만주의 한인 이주민과 함께 생활하고 이들의 권익을 지키면서 독립 전쟁을 모색한
사실상의 군정부였다.
민정과 군정을 함께한 자치 정부라 할 수 있다.
1925년은 국내외에 중요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을 탄핵하고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 개헌을 했고, 의열단을 만든 김원봉은 중국인 군관 학교인 황포 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국내에서는 조선 공산당이 수립되었고, 사회주의자를 표적으로 하는 치안 유지법이 제정되었다.
한편 만주에서는 만주 군벌과 일본 사이에 미쓰야 협정이 체결되었다.
우리 독립군을 체포하거나 신고하면 포상을 하겠다는 것이다.
자유시에서 참변을 겪고 돌아온 독립군은 중국과 일본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사태에 직면했다.
1920년의 빛나는 승리 이후 1920년대는 만주의 독립군에게는 시련의 시기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74>
이런 상황에서 1920년대 말 3부 통합 운동이 일어났다.
비록 완전한 통합에는 실패했지만, 북만주의 혁신 의회와 남만주의 국민부로 재편되었다.
30년대 초 이들 조직은 각각의 당과 군사 조직도 갖추었다.
혁신 의회는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을,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과 조선 혁명군을 조직하였다.
30년대 초에 한국 독립군은 북만주에서, 조선 혁명군은 남만주에서 각각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1920년대의 국외 독립운동은 3.1운동 직후의 빛나는 승리와 이어지는 시련, 그리고 30년대를 준비하는
조직 개편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78>
1929년 세계 대공황을 겪으며, 그 타개책으로 일본은 침략 전쟁을 선택했다.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점령하였다.
미쓰야 협정으로 격화된 20년대 중국과 독립군 사이의 적대적 감정이 일제의 만주사변으로 인하여 돌변했다. 중국과 독립군이 드디어 진정한 적,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1932년 김구가 결성한 한인 애국단의 윤봉길이 홍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
상하이를 점령하고 승전 기념식을 올리던 일본군 수뇌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중국 정부를 이끌던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 고 높이 평가
했다.
이를 계기로 한중 연합의 분위기는 급상승 하였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각 독립군들도 중국 군대와 연합하여 치열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78>
북만주(혁신 의회)에서는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와 대전자령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남만주(국민부)에서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이 중국 의용군과 함께 영릉가 전투와 흥경성 전투
에서 승리하였다.
<최태성의 근현대사 1400제>
<최태성의 근현대사 1400제>
1930년대 중반에는 더 이상 만주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상당수의 독립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복잡한 이합집산을 거쳐 중국 관내로 이동한 독립군 세력은 민족 혁명당(35)을 수립하였다.
<최태성의 근현대사 1400제>
그러나 민족 혁명당을 구성한 여러 정파는 곧 분열되었다.
당시 상하이에서 이동 중이던 김구의 임시정부는 35년에 민족 혁명당에 들어가지 않고 독자적으로 한국
국민당을 만들었다.
민족 혁명당에서 탈당한 정파들은 40년에 김구의 한국 국민당과 결합하여 충칭에서 한국 독립당을 구성
하였다.
<최태성의 근현대사 1400제>
민족 혁명당의 중심 세력이던 김원봉은 여러 정파들이 탈당한 이후 조선 민족 전선 연맹으로 재정비하고
38년에 한커우에서 조선 의용대를 창단하였다.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군사조직이다.
조선 의용대는 41년 호가장 전투를 거치면서 나누어 졌다.
김원봉이 이끄는 일부는 충칭으로 이동하여 42년 임시정부의 직할부대인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였다.
다른 일부는 중국 화북지방인 옌안으로 이동하여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는데, 이름을 조선 의용군
으로 바꾸고, 조선 독립 동맹 산하로 들어갔다.
한편 30년대 후반까지 중국 관내로 내려가지 않고,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군대가 있었다.
주로 사회주의자인 이들은 동북 항일 연군을 조직하여 국경 부근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다가 러시아로
넘어갔다.
동북항일연군은 연합군의 성격이었고 여기에 조국광복회가 속하였는데 그 중심인물이 김일성이다.
조국광복회의 보천보 전투는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의 주요 내용 중 하나이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208>
1945년 해방되기 직전 나라 안팤에는 새로운 나라를 준비하는 다섯 개의 주요 건국 세력이 형성되었다.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화북의 조선 독립 동맹, 러시아의 동북항일연군, 미국의 이승만과 국내의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 동맹이 그것이다.
김두봉이 중심이 된 조선독립동맹의 조선 의용군은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화북지방에서 활약하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20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과 협력하여 항일 투쟁을 벌이다 이후 연합군의 요청으로
인도, 미얀마 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고, 미군과 협력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1945년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김구는 이렇게 탄식하였다.
“아, 왜적이 항복 ....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해 온 것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백범일지>”
「급박하게 이루어진 일제의 항복 선언으로 유격대 출신 인사들 가운데 일부가 소련과 함께 국내로 진격
하였을 뿐, 준비해 온 해외 무장 세력의 통일도, 대대적인 국내 진격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자력으로 이루지 못한 해방, 김구의 탄식은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우려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209> 」
한국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성공했더라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
(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