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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풋볼뉴스(Football News) 원문보기 글쓴이: 블루문
지난 11월 9일은 축구국가대표팀이 올해 마지막으로 소집되는 날이었다. 같은 날 포항 시내에서 신화용을 만났다. 포항스틸러스의 No.1 GK(그의 인스타그램 아이디기도 하다)인 신화용은 현재 K리그 최고의 골키퍼다. 기록이 그것을 증명한다. 무실점경기(17회, 1위), 경기당 실점(0.81골, 2위), 유효슈팅 선방율(64%, 1위) 등 주요 지표에서 선두 혹은 2위를 달리고 있다. 특히 최근 15경기에서는 단 4경기에서만 1실점씩을 허용하고 11경기를 모두 무실점으로 막는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쳤다. 같은 기간 포항은 6연승을 포함해 15경기 연속 무패(9승 6무)를 기록하며 리그 2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신화용은 대표팀 소집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번에는 신화용이 이름을 올리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건 비단 포항과 신화용의 팬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신화용은 대표팀과는 늘 한 걸음 혹은 두 걸음 이상 거리가 멀었던 선수다. 예비 엔트리에는 들어간 적이 있지만 그를 대표팀으로 부른 감독은 아직 없었다. 2009년을 기점으로 정상급 골키퍼로 올라섰고, 최근 3년 간 K리그에서 가장 꾸준하고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는 선수라는 평가와는 동떨어진 결과다.
실제로 대표팀 명단 발표일이 되면 신화용의 주변에서는 난리가 난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될 거다’라는 기대로 시작했던 요란스러운 분위기는 여지 없이 ‘왜 화용이는 대표팀이 안되는거냐’는 실망으로 끝나는 레퍼토리로 반복된다. 선수 본인은 어떤 마음일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대표팀에 대해 생각하는 게 손해라고 생각했어요. 안 하면 안 할수록 소속팀에 몰입하고 그게 더 나은 결과로 나오니까. 대표팀을 의식했던 건 2009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했을 때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때는 저도 ‘나는 왜 못 가는 거지, 왜 안 될까?’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는 ‘계속 내가 뛸 곳은, 내게 팀이란 결국 포항 스틸러스 하나 뿐이구나’라고 생각해요.
“정작 내 자신은 신경을 안 쓰는데 친구들이 난리에요. 그런 거 자체가 스트레스긴 하죠. 내 할 거 알아서 찾아 가는데 안 되는 걸 자꾸 하라는 거 같으니까. (대표팀은) 내 힘만으로는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거 같아요. 내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요.”
“(대표팀에 못 가는) 제일 큰 원인은 기량 부족이고 그게 가장 문제죠. 빈말이 아니에요. 대표팀에 가려면 지금보다 더 완성도가 높아져야 해요. 뭐가 부족한지는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스스로 만족할 만큼의 기량을 갖춘 적은 아직 없어요. 지금도 완전체가 되기 위해 가는 과정이고요. 아직 멀었어요. 경기 끝나면 늘 아쉬운 게 있거든요.”
그런 얘기를 하는 신화용은 하루 전날에도 성남을 상대로 무실점을 기록했다. 성남의 최전방에는 국가대표 공격수 황의조가 있었고, 그 뒤에서는 여전히 리그 정상급 플레이메이커인 김두현의 송곳 같은 패스가 날아들어왔다. 하지만 신화용은 뛰어난 판단, 수비 리드, 중요한 순간의 선방으로 또 한번 무실점경기를 추가했다. 그 경기로 신화용은 2005년 김병지가 세웠던 포항의 한 시즌 최다 무실점경기 기록을 경신했다.
최악에서 시작해 최고로 돌아온 2015년
1983년생, 우리나이 서른셋인 신화용은 지금 전성기로 접어들었다. 30대가 된 뒤 3개의 트로피(K리그 1회, FA컵 2회)를 직접 머리 위로 들어올렸고 기량과 기록 양면 모두 우수하다. 특히 올해는 기록으로 다른 골키퍼들을 압도하고 있다. 하지만 신화용은 2015년이 가장 만족스러운 시즌은 아니라고 얘기했다. 무실점 경기가 많고 실점율도 낮지만 그에게 2015년은 최악의 출발을 해서 더 기억에 남을 시즌이었다. 홈구장인 스틸야드에 모인 만원 관중 앞에서 실수를 했던 그 장면은 하루도 빠짐 없이 그를 괴롭힌다.
바로 리그 2라운드, 울산과의 홈 개막전이었다. 그 경기에서 신화용은 4실점을 허용했다. 1만9,227명이 모여 근사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지상파 중계까지 된 그날 신화용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며 2-4 패배에 고개를 숙였다. 김신욱이 넣은 마지막 골은 강했지만 먼 거리에서 날렸기에 신화용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슛이었다. 하지만 신화용의 손 안에 들어왔던 공은 뒤로 빠지며 골라인을 넘어갔다. 그에 앞선 세번째 실점에서도 센터백 김준수의 백패스를 하는 순간 커뮤니케이션 미스로 공이 지나갔다. 양동현이 유유히 골을 넣을 때 신화용은 뒤를 쫓아가야만 했다. 1라운드에서 수원을 상대로 보여준 무실점 선방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됐다.
“1년 내내 머리 속에 떠올라요. 다들 축구 시작한다고 기분 좋게 잔치 즐기러 우리 팀을 응원하러 왔는데, 그 많은 2만여명 앞에서 그런 걸 보여줬다는 게… 지면 어깨가 무겁지만 그때는 더 그렇죠. 그걸 넘어서 가슴이 쓰렸죠. 시즌을 치르면서 실수가 한번도 안 나온 적은 없지만, 하필 왜 그날 그런 참사가 벌어졌는지.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특히 마지막 실점은 분명 손에 들어왔고,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할 정도로 손에서 빠져나갔어요.”
그 뒤로도 신화용은 4경기 연속 실점을 했다. 모두 1실점이었다. 좀처럼 흐름을 끊지 못했다. 신화용 본인도 “꾸준히 안 좋았다”고 표현한 시기다. 설상가상으로 포항은 주축 수비수 김광석이 부상으로 빠지며 수비진이 흔들렸다. 5월까지 13경기에서 16실점을 기록했다. 그 시기를 극복하고 지금을 만들었다는 게 신화용, 그리고 포항 수비가 자부심을 가질 만한 부분이다. 신화용은 부진의 터널을 어떻게 뚫고 나왔을까? 프로 12년차가 된 베테랑은 알고 있었다. 이상한 상황을 빠져 나오기 위해선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을 잘해야 함을.
“1경기 1경기에 몰입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어요.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 타이밍, 박자를 분석하고 수비 조율을 하고. 특별히 더 할 것도, 덜 할 것도 없죠. 늘 하던 대로 그 한 경기에 완벽히 최선을 다하는 거죠. 만일 다음 경기를 준비하면서 앞선 경기에서 부족한 게 있다면 그 훈련은 해야죠. 그 정도면 돼요. 그 외에는 늘 비슷한 리듬으로 가야 해요. 골키퍼는 한 경기 반짝 잘하는 게 아니라 꾸준해야 하는 자리라는 걸 이제 아니까요.”
골키퍼는 골을 막아야 하는 포지션이지만 필연적으로 골을 먹는 포지션이기도 하다. 신화용은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올 시즌 그에게 분기점이 된 건 21라운드 제주전(홈)과 22라운드 서울전(원정)이었다. 제주전에서 그는 다시 한번 4실점을 허용했다. 그날은 제주의 외국인 공격수 로페즈가 펄펄 날았다. 상대가 너무 잘하면 골키퍼는 도리가 없다. 그리고 다음 경기에서 신화용은 안정적인 경기를 하며 서울 원정에서 3-1 승리를 이끌었다. 그 이후 신화용은 단 한번도 1골 이상 허용한 적이 없었다. 올스타전 브레이크와 A매치 휴식기 동안 집중적으로 실시한 팀의 수비 강화 훈련이 더해지며 신화용과 포항은 후반기에 뚫리지 않는 방패를 구축했다.
“골키퍼는 혼자서 다 막을 수 없어요. 실점을 한 뒤의 상황이 요즘의 숙제에요. 계속 머리 속에 실점한 장면이 리마인드가 되고 있거든요. ‘왜 먹었지, 어떻게 먹었지.’ 그걸 지우고 다음 상황을 준비해야 하는데, 얼마나 빨리 지우느냐가 관건이죠. 그런 흥분 상태를 가라앉히는 것도 능력이고. 실점을 한 뒤에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가 좋은 골키퍼를 평가하는 진짜 기준이에요. 매번 다 막을 순 없다는 걸 깨달으면 그 단계로 넘어가더라고요.”
작은 골키퍼가 살아온 투쟁의 역사
신화용은 최근 활약하는 골키퍼의 주된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 선수다. 바로 체격 조건이다. 그의 프로필상 신장은 182cm다. 세계적인 골키퍼들은 190cm 내외의 신장을 자랑하는 것이 근래의 흐름이다. 점점 체격조건이 좋아지는 필드 플레이어들을 상대해야 하는 페널티박스 안에서의 전쟁과 긴 리치를 이용한 선방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케일러 나바스나 클라우디오 브라보, 다비드 오스피나처럼 185cm 안쪽의 골키퍼들도 활약 중이지만 신화용은 거기에도 미치지 못한다. 성남의 박준혁과 더불어 K리그에서 가장 작은 축에 속하는 선수다.
초등학교 4학년에 축구를 시작할 당시에도 신체조건으로 어필한 경우는 아니었다. 단거리 육상 선수였을 정도로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그의 점프력과 순발력을 높이 본 초등학교 시절 지도자가 스카우트를 했다. 키는 선수로서 성장하는 내내 신화용의 장래성을 평가하는 데 지장을 줬다. 포철공고를 졸업할 당시 그의 키는 179cm였다. 대학에 진학하고서 조금 더 자라 180cm를 넘었다. ‘작은 골키퍼’라는 숙명과 내내 투쟁해야 했다. 대학 진학부터가 싸움이었다.
“골키퍼로 축구를 시작했고 쭉 같은 포지션을 봤어요. 어렸을 땐 잘했어요. 그때도 키 작다 얘긴 들었는데 키 작은 애가 참 잘한다는 의미가 주였죠. 중, 고등학교 때는 그런 축은 아니었죠. 포철공고를 다녔지만 바로 프로로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신장과 실력 여러 면을 봐도 구단에서는 밑에 학년 후배를 바로 뽑을 생각이었으니까요. 관심 밖에 있었던, 대학 진학도 쉽지 않은 선수였죠. 누가 180cm도 안 되는 골키퍼를 쓰고 싶어하겠어요. 고3이면 다 큰 건데.”
그때 신화용을 부른 곳은 최상국 감독이 이끌던 청주대였다. 포항에서 선수로 활약했던 최상국 감독은 친정팀에 골키퍼로 쓸 선수를 보내달라고 했고 신화용이 선택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청주대는 지금과는 달리 강호도 아니고, 제대로 팀이 운영되던 상황도 아니었다. 단지 사범대(체육교육과)에 들어갈 수 있어 선수로서 성공하지 못해도 다른 진로를 모색할 수 있다는 게 부모님과 학교를 비롯한 주변에서 추천한 메리트였다. 축구에 더 비중을 두고, 선수로서 승부를 내고 싶었던 자신의 바람과는 다른 현실까지도 신화용이 싸워야 했던 대상이다.
“그래도 축구의 꿈을 안고 갔는데 가 보니 저처럼 축구에 미련이 있는 선수는 1명 정도였어요. 거의 10명도 채 되지 않는 수가 운동을 나왔으니까요. 고등학교랑 경기를 해서 지는데 앞에 있는 선수들이 의지가 없어 보이는 게 속상해서 4학년 선배에게 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혼났죠. 자존심 상했어요. ‘고등학생들한테 이렇게 당하는데 다들 아무렇지 않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온 제 생각과는 너무 달라서 짐 싸서 나왔어요. 최상국 감독님이 다시 불렀어요. 쉬고 싶은 만큼 쉬고 돌아오라며 다독여 주셨죠.”
“당시 청주대는 축구부원들이 수업을 다 들어가야 돼요. 수업 참여를 하고, 출석률 완벽해야 하고, 시험도 봐야 하고, 훈련은 새벽에 밖에 할 수 없는 한정적인 현실이었죠. 그래서 다들 이런저런 핑계로 축구에 대한 꿈을 접었던 거죠. 그런데 너무 아쉽잖아요. 10년 동안 해 오던 거, 맨땅에서 뒹굴며 멍들어가며 보낸 시간을 쉽게 놓기 싫었어요. 축구라는 끈은 잡고 있었던 거죠. 실업팀에서 주전자를 들더라도 끝은 보고 싶었어요. 누가 날 데려갈 지 확신은 없었지만 포기하고 싶진 않았어요. 돈 10만원이라도 축구를 통해 벌어보고 싶었고, 내 기량을 펼칠 기회를 한번은 잡아야 후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프로는 그때 생각도 안 했고요. 청주대학교서 프로로 간 케이스가 10년에 1명 있을까 말까였으니까. 그때도 최상국 감독님 이후엔 없었거든요.”
2학년이 되고 청주대는 감독이 교체됐다. 지역 명문인 청주상고를 이끌었던 유인권 감독이 부임했다. 별명인 호랑이 감독답게 유 감독은 축구부의 패배의식을 바꾸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새벽부터 실시했다. 의지가 없는 선수들에겐 고역이었겠지만 그 고된 순간이 신화용에게 모처럼 느끼는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1학년 도중 입은 허리디스크 부상으로 고비를 맞았지만 그 위기를 넘긴 신화용은 강한 훈련을 통해 변화의 시간을 맞았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기회가 온다.
“1학년 때 15명으로 시합을 나갔어요. 그때도 허리가 안 좋은 상태인데 골키퍼가 저랑 1살 위 선배 둘이었어요. 선수가 없으니까 그 형이 센터포워드를 뛰어야 해 저도 아픈데 뛰었어요. 결국 디스크가 터져서 서울 경희의료원에 가서 검사 받는데 이런데 축구 할 수 있겠냐는 진단을 받았죠. 겨우 잡고 있던 지푸라기까지 끊어지는 심정이라 울컥했어요. 비슷한 증상의 프로농구 선수를 수술시킨 경험이 있는 의사 분이셨는데 수술 후 얼마 안 지나서 은퇴했다고 솔직히 얘기하더라고요. 다행히 전 그 고비를 잘 넘겼어요. 몇 달 동안 고생했어요. 팀에서 나와 치료하고. 그 사이 감독님이 바뀐 거죠.”
“그때 상대팀이랑 워낙 기량 차가 많이 나니까 지금 프로에서 방어하는 거 10배 이상을 막았어요. 킥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제 앞으로 공이 왔으니까. 아마 축구를 하면서 가장 돋보였던 때가 그때일 거에요. 그렇게 위기가 계속 나오는데 스코어가 많이 난 적은 없었으니까요. 훈련 제대로 못하고 수업 받다가 대회 나갔지만 많이 막고, 실점도 하면서 배웠어요. 살아남겠다는 강한 의지 하나로 버틴 시간이었어요. 2학년 말에 진주로 전지훈련을 가 있는데 포항에서 연락이 왔어요. 조준호 선배가 좋은 기량에서 불구하고 당시 김병지 선배에 밀려 백업이었는데 새로운 팀을 찾아서 나가게 돼 급히 선수가 필요하다고. 포항에서 오라고 하더라고요. 실업에라도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프로라니, 얼떨떨했죠.”
극적으로 프로에 오게 됐지만 신화용을 기다린 것은 행복한 드라마가 아닌 처절한 생존 경쟁의 한복판이었다. 당시 포항에는 김병지라는 최고의 골키퍼가 골문을 지켰고 팀이 기대하고 키우고자 했던 송동진, 그리고 서귀포고를 졸업하고 온 정성룡이 있었다. 백업 자리를 놓고 펼치는 경쟁만 해도 살벌했다. 2004년 입단한 신화용은 2005년까지 1군 출전 기록이 아예 없었다. 김병지의 백업 역할을 했다. 대신 2군 경기에 나섰다. 신화용은 “대학에서 최악의 환경을 경험하고 왔기 때문에 그래도 행복했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신화용은 그 치열한 경쟁을 버티며 살아 남아 지금 포항의 No.1이 됐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게 강한 자라는 기준을 대입하며 신화용은 강한 선수였다.
“병지 형님이 2006년이 끝나고 서울로 가시고, 2007년부터는 저랑 성룡이가 엎치락뒤치락했죠. 보통 골키퍼 포지션은 그런 경쟁은 잘 없는데… 경쟁이 싫었던 건 아니에요. 다만 2007년에 경기를 꾸준히 나갔는데 플레이오프 때부터 성룡이가 뛰었어요. 그때는 씁쓸했죠. 열심히 했는데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우승하고 성룡이가 성남으로 많은 이적료를 받으며 이적했는데 그때 얻은 교훈이 있죠. ‘아 언제라도 내가 빠질 수 있구나. 지금 계속 출전하고 있지만 그 다음 경기를 못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해야 한다.’ 골키퍼는 절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는 자리에요. 그 뒤로는 경기에서 빠져도 흔들리거나 상처 받지 않았어요. 이미지 트레이닝을 늘 하는 거죠.”
정성룡이 떠나고도 신화용은 끊임 없는 경쟁을 했다. 2009년을 기점으로 우위를 잡았지만 후배들의 도전은 계속 됐다. 경쟁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하지만 무한경쟁 끝에 항상 승리하는 것은 신화용이었다. 지금 포항에서 신화용의 입지는 절대적이다. 3명의 백업 골키퍼는 다 합쳐서 K리그 출전 기록이 1경기에 불과하다. 김진영 외의 2명의 젊은 골키퍼는 아예 실전 경험이 없다. 그래도 신화용은 안심하지 않는다. “경기는 제가 뛰지만 후배들이 다 뒤에서 칼을 갈며 쫓아오는 중이죠. 예전에 저도 그 위치에 있었으니까요. 늘 경쟁하고 있어요. 방심하지 않아요.”
신화용이 분석하는 신화용
신화용은 단지 키만으로 단점을 꼽기엔 가진 것이 많은 골키퍼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골키퍼 신화용의 이미지는 빠른 반응으로 승부차기에서 절대적인 강점을 보여준다가 아닐까? 골키퍼가 확실한 주연으로 설 수 있는 승부차기에서 신화용은 많은 선방을 기록하며 팀에 중요한 승리를 안겼다. 토너먼트에서 신화용의 그런 강점은 특히 빛난다. 강렬한 인상으로 남겨 빛나는 요소 외에 신화용은 어떤 골키퍼인지 자체 분석을 요청했다. 그는 자신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갖춰진 거… 제일 큰 장점은 수비 리딩 능력과 반사 신경이겠죠. 상황 판단력도. 남들이 뭐라고 해도 저는 제 판단을 존중해요. 그 상황에서는 제일 좋은 판단을 했으니까 그걸 믿는 거죠. 골키퍼 입장에서 필요한 수비 리딩은, 늘 원하는 위치에 선수들이 가 있을 순 없지만 제일 방어하기 좋은 위치로 자리를 잡아주는 거죠. 지금 포항에서 좋은 게 수비수들이 제가 요구하면 빨리 그 위치를 잡아주는 커뮤니케이션이 잘 된다는 거에요. 그리고 나서 실점을 하는 건 온전히 제 책임이니까 안고 가야죠. 그게 잘 되면서 최근 실점율이 줄었어요.”
“갖춰야 할 거는 빌드업 부분. 제가 생각해도 매끄럽지 못해요. 좀 더 침착함이 필요하고. 빌드업은 최근에 특히 요구되는 건데, 완벽해지려면 뭐든지 빠지지 않고 갖춰야죠. 공격의 시작은 골키퍼니까. 첫 패스와 골 킥, 잡고 피드해서 원활하게 살아나가야 하는데 아직 미진해요. 그리고 최종 수비수 역할을 하는 것도 잘 해야죠. 감독님이 뒷공간 얘기를 정말 많이 하세요. 가령 성남이랑 할 때 의조가 돌아들어갈 때, 두현이 형 패스가 정말 의조 속도와 동일하게 들어왔거든요. 그때 뛰어나가서 반 발자국 정도 차이로 걷어냈어요. 그 장면은 만족스러웠죠. 선수들도 경기 끝나고 그 얘기를 많이 했고. 조금만 늦어서 실점을 했다면 왜 나왔느냐고 얘길 들을 수 있는데, 안 나오면 불리해지니까 그때는 제 판단을 믿고 가야죠.”
신화용은 단점인 신장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간다. 순발력과 점프력, 거기에 판단력이 더해져 자신보다 큰 장신 선수보다 앞서서 적극적으로 공중볼을 처리한다. 20대의 신화용은 공격적으로 방어하는 골키퍼였다. 그런데 30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중이다. 그 장점에 차분하게 기다리면서 막는 방법도 터득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 10년 간 포항의 전성기를 양분한 파리아스 감독과 황선홍 감독의 철학을 모두 흡수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다.
“프로에 와서 2009년과 2013년이 가장 기억에 남죠. 2009년엔 방법을 배우지 않고 열정과 패기만 갖고 뚝심 하나로 싸우던 시기였어요. 그렇게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했어요. 2013년은 배우고, 단련하고 기술도 익히고, 그러는 과정에서 더블(K리그, FA컵 우승)이라는 결과를 얻었죠. 파리아스 감독님은 ‘페널티 박스 안은 네 것이다. 나와라. 내가 책임질 테니 니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셨죠. 황선홍 감독님은 ‘차분하게 기다려라. 수비와 함께 하라’고 하시고요. 장단점은 서로 달라요. 결국 판단은 제가 하지만 파리아스 감독님에게서는 자신감과 용기를 주셨어요. 반면 제 스타일 상 득이 된 건 황선홍 감독님이죠. 좀 더 믿고 기다리고 해도 기회는 오더라고요. 차분함을 갖추게 됐죠.”
“학창 시절엔 너무 급하다고 혼이 났어요. 성격이 공격적인지 공을 잡으면 막 집어 던지고, 차고, 빨리 공격 나가고 싶었어요. 그거 고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황선홍 감독님 오고 나서 꽤 시간이 지나서야 고쳤어요. 템포 조절인데, 그게 성격을 바꿔야 하는 거라서. 성격 바꾸기 쉽지 않잖아요. 공중볼 처리할 때 늘 적극적으로 나와서 싸우는 선수였는데 지금은 안에서 기다리며 제일 좋은 타이밍을 잡아요. 그게 잘 섞여야죠. 너무 기다려도 안되고, 너무 튀어 나가도 안 되고. 그 사이의 답을 찾는 중이죠. 정답은 없어요. 0.5초 차이의 판단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게 골키퍼의 숙명이니까.”
신화용이 포항이다, 레전드의 자격
신화용은 포항에서 태어났고, 포항에서 자랐다. 대학 시절 2년 말고는 포항을 벗어난 적이 없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스틸야드로 와서 그라운드에서 뛰는 자신의 영웅처럼 되길 꿈꿨다. 언젠가부터는 볼보이가 돼 좀 더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지금은 자신이 그 그라운드 위에 서 있다. 12년의 시간 동안 리그만 262경기를 소화했다. 누구보다 포항의 레전드가 될 자격을 갖춘 선수다. 리버풀에서 태어나 리버풀의 선수를 꿈꿨고, 주장이자 에이스로서 리버풀을 위해 뛴 스티븐 제라드처럼 전세계를 봐도 흔치 않은 레전드의 조건이다.
“(포항 외의) 다른 유니폼을 입는다는 상상을 안해봤어요. 스틸야드에서 꿈을 키운 아이였고, 지금도 제 뒤에는 같은 입장의 아이들이 볼보이를 하고 있죠. 대표팀은 사람들이 언급할 뿐이지 단 한번도 소속된 적이 없으니까요, 포항은 태어나서 축구를 시작해서 선수 생활을 줄곧 이어 오고 있고. 아무리 대표팀이라 해도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죠. 경쟁을 이기면서 이 자리를 잡았고, 늘 이 자리를 지키고 싶었어요. 후배들과의 경쟁은 은퇴하는 그날까지 있겠죠. 여기서 주전 자리가 확보 안 된다고 다른 데로 가는 일도 상상하기 싫고요. 주전에서 밀려도 성격상 여기서 그걸 되찾으려 덤빌 것 같아요. 다른 데서 편하게 주전 확보한다는 생각은 한 적 없어요.”
포항에는 당연히 신화용의 가족도 있다. 어머니는 최근 그의 중요한 징크스다. 심장이 약해서 승부를 가르는, 특히 골을 먹느냐 안 먹느냐의 갈림길에 선 아들의 경기를 보는 걸 늘 두려워 하던 어머니는 최근 계속 경기장을 찾고 있다. 홈 경기도 잘 찾지 않던 어머니는 올해 아들이 시즌 초반 부진하자 걱정이 돼 경기장을 찾았는데 그 뒤로 포항은 무패 기록 중이다. 수염을 기르면서 시작된 무실점 징크스(최근 제주와의 홈 경기에서 수염을 밀었는데 1실점을 한 뒤 다시 길렀고, 성남전에서 무실점을 했다)와 더불어 가장 무서운 징크스가 됐다. 최근에는 전주, 제주까지 따라가며 아들을 활약을 지켰다. 경상도 남자답게 늘 과묵하게 경기장을 지키는 아버지도 있다. 신화용은 최근에 그런 아버지가 실제로는 뒤에서 아들 자랑하기 바쁜 분이라는 걸 알았다. 처음엔 부끄럽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낙이라는 지인들의 얘기를 들은 뒤부터 감사해 한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가족, 아내 홍지혜씨다. 대학교 2학년 말미에 만나 2009년 결혼을 하기까지 6년 간 장거리 연애를 한 아내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다. 신화용도 경상도 남자다 보니 아내 자랑을 좀처럼 하지 않지만 계속되는 성화에 입을 열어 감사를 표시했다.
“동갑내기에요. 캠퍼스 커플인데, 2학년 말미에 연애하자마자 제가 포항으로 내려오게 돼 고생을 했죠. 제가 쉴 때도 포항 밖으로 안 나갔거든요. 다음날 훈련에 지장 있을까 봐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았어요. 프로에 온 게 정말 좋은 기회인데, 벤치에 앉아보고, 경기에 나가보니까 계속 뛰고 싶고, 축구 그만두고 힘들게 지내는 친구들 보면서 저렇게 안되어야겠다는 독한 마음에 여자친구는 뒷전이었죠. 그 마음 때문에 연애할 때 아내가 힘들었겠죠. 그런데 제가 잘 되어야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운동에 지장이 되는 행동은 안 했어요. 3일 이상 쉴 거 같아도 휴가 계획을 미리 짠 적이 없어요. 욕 먹을 일인데(웃음), 그런 제가 축구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 준 여자에요. 스트레스를 전혀 주지 않는, 이런 여자 세상에 없어요. 다른 일반 부부는 아빠가 해줘야 하는 역할까지 아내가 해주니까, 늘 고맙고 미안한 사람이죠.”
그런 가족들의 전적인 성원에 신화용의 노력이 더해지며 또 하나의 대기록이 써지고 있다. 전경기 풀타임 출전이다. 신화용은 올 시즌 포항이 치른 리그 경기에 단 1초도 빠지지 않았다. 서울의 오스마르와 더불어 리그에 단 둘 밖에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기록이다.
“고비는 홈 개막 경기 이후였던 것 같아요. 솔직히 다음 경기에 못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2007년부터 그런 마음은 먹었으니까. 그런데 황 감독님이 오히려 믿음을 주시더라고요. 이전에 부상에서 돌아왔을 때도 제 대신 뛰던 선수가 있는데 그래도 믿고 저를 기용해 주셨어요. 그런 믿음에 보답하려고 노력할 수 밖에 없죠. 기회를 주는데 선수가 그걸 져버리면 안되잖아요.”
신화용에게 지금이 자신의 전성기냐고 물었다. 우문에 돌아온 것은 현답이었다. 지금 신화용이 어느 레벨에 올라와 있는 선수인지를, 정중동에 가까운 자세를 보이는 선수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환상적인 시즌이 레전드의 길을 걷는 신화용의 끝을 향해 가는 게 아니라 어쩌면 거대한 발걸음의 출발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전성기란 지나고 나서야 아는 거 아닐까요? 지금일 수도 있고 내년일 수도 있고, 그 뒤일 수도 있고. 그건 아직 말씀 못 드릴 거 같아요. 분명한 건 내년에도 더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할 거란 거죠. 프로는 냉정하니까요. 언제 어떻게 될 지는 모르는 거고. 도태될 수도, 버려질 수도, 경쟁에서 밀릴 수도 있어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1년에 1경기든, 30경기든 최선을 다하는 거죠. 언젠가 끝은 나겠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할 필요 없어요. 평가는 밖의 몫이고, 저는 당장 눈 앞의 그 1경기에 최선을 다 하는 거죠. 시즌 중 1경기가 나중에는 성적을 가르는 중요한 1경기일 수 있어요. 어제 1경기에 전북은 우승을 하고, 우리는 실낱 같은 희망이 날아갔죠. 그 중에는 놓친 게 아쉬운 1경기도 있었고, 다행히 이겨서 희망을 키운 1경기도 있었고, 그게 다 합쳐지면 시즌 말에 평가를 받고, 그 시즌이 합쳐져서 제가 나중에 평가를 받는 거겠죠.”
글=서호정 기자
사진=FAphot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