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의 경제계를 지배하는 원동력은 말할 나위 없이 그 특산물인 인삼이다. 그 제조량은 매년 1만 5000근을 내려가지 않고 그 가격은 약 100만원이다. 개성의 경제적 세력은 단지 개성 부근에 머물지 않고 멀리 진남포, 인천, 서울 방면에 미친다.” (재무주보 48호, 1908)
제국의 황혼기에 일본 상인이 한국 상인을 압도하였지만, 이에 가장 굳건히 대응한 상인은 개성상인, 곧 송상이었다. 1910년 출간된 ‘조선산업지’에 의하면, ‘개성상인은 모두 이재에 밝고 그 운용에 교묘하며, 각종 무로하는 이본 또는 서울·인천 지방에서 구입하여 사방에 행상하여 이익을 얻었다.’ 그래서 일본인은 개성상인을 자국의 대표적인 행상인 근강(近江)상인에 비유하였다.
당시 개성에 자산 1만원 이상의 상인이 50호, 1만원 이하의 상인이 203호나 있었다. 1913년 인삼업에 투입된 고정자금은 180여만원에 달하였다. 당시 서울시내 고급주택 가격이 1만원 정도였으니, 개성상인의 자본력을 짐작할 수 있다.
1908년경 일본 상인은 한국 상인을 거치지 않은 채 미곡을 매출하고 또 수입품을 판매하여 개성상인의 세력권을 현저히 침식하였다. 그러나 ‘고래의 관습상 개성상인이 각지에 고객을 가지고 그 기반이 멀고 깊기 때문에 일조일석에 파괴되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였다.
송상이 이처럼 외국 상인에 굳건히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개항 이전부터 상업을 발달시켜왔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뀐 후 관직 진출이 곤란해진 개성의 엘리트는 일찍부터 상업에 전념하였다. 그래서 송상은 상술이 뛰어났고, 사개치부법이란 복식부기를 일찍부터 사용하였다.
개성에는 상당한 가문에 자제도 유력 상인의 휘하에 사환으로 들어가 상업을 배웠다. 사환의 우두머리인 수사환(首使喚)은 7~8년 정도 열심히 일해 주인의 신임을 얻으면 차인(差人)으로 상승하여 주인을 대신하여 점포를 맡거나 타지로 가서 행상업 또는 금융업에 종사하였다.
개성상인 사이에는 환도중(換都中)의 중개를 통해 월 이자 1.5%이하의 시변(市邊)이라는 신용대출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송상은 송방을 통하여 전국적인 상업망을 형성하였고, 의주의 중국 무역과 동래의 일본 무역에도 활발히 참여하였다.
이들의 절약 정신이 워낙 투철해 ‘개성상인이 지나간 자리에는 풀도 자라지 않을 정도’ 라고 했다. 1920년대 전반에도 ‘개성상인의 지방 행상 활동은 놀랄 만하여 그 족적이 전 조선에 미치고 그 수를 정확히 알기 어려워도 2000~3000명으로부터 가장 많을 때에는 1만명 이상에 달하였다’ (조선인의 상업)고 한다.
대표적 개성상인은 송봉상, 최익모, 공성학 등이었다. 손봉상은 인삼밭을 토대로 1918년 자본금 20만원의 고려삼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최익모는 상표 부착 등 혁신적인 판매법을 창안하였다. 공석학은 가업인 인삼밭을 기반으로 1912년 상업·금융회사인 영신사를 설립하고, 1917년 개성전기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하여 근대적 기업가 되었다.
[이헌창 고려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