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심기/조인혜
일을 시작하려면 계획이 필요하다. 농사일도 계획을 잘 세운다면 한 해 농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농사의 시작은 시기에 맞게 파종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적절한 파종 시기에 맞추어 농작물을 심고, 알맞은 퇴비를 한다. 잘 자란 가지나 잎을 잘라 내는 안타까움을 겪어야 수확량이 많아질 때도 있다. 새싹이 언 땅을 밀어 올려 움트는 봄이면 농부는 밭에 씨앗을 뿌리기 시작한다.
안부 전화라며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조만으로 금방 뜻을 알아챘다. 몇 해 전, 언니는 시골에 새집을 짓고 이사했다. 텃밭이라기에는 너무 넓고, 전문 농사꾼의 농사라고 보기에는 좁은 밭이 생겼다. 신장 이식을 한 형부와 허리 수술을 한 언니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크기였다. 그런 이유로 나는 주말이면 달려가 이 일 저 일 도울 때가 많았다. 밭일이 손에 익은 나에게는 신명 나는 놀이터가 생긴 셈이다. 긴 가뭄 끝에 때맞춰 가을비가 내렸으니 양파를 파종하기에 적절한 시기였다. 언니와 미리 주말 일정을 계획했다.
밭에 양파를 심기로 했다. 많은 작물이 있지만, 손이 덜 가는 양파가 초보 농사꾼에게 안성맞춤이다. 늦가을에 밑거름만 해서 심어 놓으면 까탈스럽지 않게 자라 봄이면 수확한다. 양파는 실처럼 가늘고 여리여리한 비늘줄기로 모질고 긴 겨울 추위를 이겨낸다. 겨울 들판의 초록 수호신같이 하얀 눈까지 뒤집어쓴 자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당차게 버티고 서 있는 양파 순을 보고 있자면, 세상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배우게 된다. 양파는 날씨가 추워질수록 움츠리거나 위축되지 않고 땅으로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그 힘이 가냘픈 겨울 양파에서 나온다니 사뭇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봄에 파종하는 작물이 많지만, 양파나 마늘 같은 인경鱗莖채소는 가을에 파종한다. 다른 작물과는 파종 시기가 반대지만, 채소로서의 가치나 영양분은 부족함이 없다. 기원전부터 양파는 부적으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불멸의 의미를 담아 장례식 제물로 이용했다고 한다. 미이라를 만들 때 사용하였다는 흔적도 찾을 수 있다. 로마시대에는 여행할 때 필수품으로 가지고 다녔다 하니 채소의 대접치곤 최고의 자리가 아니겠는가. 요즘은 당당히 밥상의 주인공까지 되고, 음식의 맛을 배가시키는 조연도 톡톡히 해낸다. 즙이나 액기스를 만들어 음료로 먹는 만큼 건강식품의 자리매김도 탄탄하다.
비가 온 뒤의 땅은 촉촉해서 흙을 만지는 손길과 마음도 순순해졌다. 비닐멀칭을 하고 구멍 난 곳에 양파 모종을 심었다. 심어 놓은 땅으로 자꾸만 꼬꾸라지는 여린 순이 사름을 할까 걱정스럽다. 스스로 몸을 곧추세워 땅심을 받기에는 연약하게만 보인다. 문득 아침에 어깻죽지가 흘부들한 채 집을 나서던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들은 크게 속을 썩이지 않고 자랐다. 학교 다닐 때도 성적이 뒤처진 적 없었고, 남자애답지 않게 잔정이 많았다. 딸보다 더 애교를 떨며 수다스러워 핀잔을 줄 때가 많지만, 애미 눈에는 듬직한 맏이의 역할도 해내는 아들이다. 그런 놈이 서른을 눈앞에 두고 제 밥벌이를 못 하고 있다. 뜻한 분야의 공무원 시험에 여러 번 응시했다. 필기시험은 거뜬히 합격하는데 체력 시험이 늘 문제였다. 그것도 세 번이나 같은 일을 겪었다. 조바심이나 걱정은 애써 숨기고 지지하고 격려하는 목소리를 전했지만, 아들도 나도 조금씩 지쳐가고 있다.
모종을 심을 때도 작물마다 잘 자라는 조건이 있다. 양파 모종은 너무 얕게 심으면 뿌리가 땅 위로 올라와 안 되고, 너무 깊게 심으면 계란 모양, 감자 모양의 길쭉한 기형 양파가 된다. 양파는 특별하게 아주심기를 해야 잘 자란다. ‘아주심기’란 양파가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파종한 곳에서 다시 한번 다른 곳으로 이식移植하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옮겨 심지 않고 완전하게 심는다는 뜻이다. 그렇게 심은 양파는 빨리 자리를 잡고 잘 자라 더 달고 맛나다고 한다. 활착을 최대한 도우려는 정식 방법이다.
“엄마, 제 삶의 방향을 조금 바꿀까 합니다.”
며칠 잠을 설친 듯 충혈된 눈으로 아들이 꺼낸 말이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지금껏 공을 들인 공부를 포기한다니 불안하기는 했지만, 도전하고자 하는 분야의 의지가 확고해 보여 안심이 되었다. 어쩌면 내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결정이었다. 매번 시험에서 반복되는 실패는 세 번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옛말에 ‘한 우물을 파라’는 속담도 있지만, 우물을 파다가 물이 안 나오면 다른 곳으로 옮겨 파는 지혜도 필요하다.
아들은 스스로 결정하고 행로를 바꾼 목표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전공자도 한두 번 좌절하고 딴다는 자격증 시험에 용케 합격했다. 짭조름하고 고소한 소식이 눈을 번쩍 뜨게 하였지만, 오랜 공복에 바스락 씹어 먹은 김 한 장의 충만이었다. 한 개의 김은 허기진 나의 배를 채우지 못했다. 어미인 나보다 더 불안한 감정과 방황에서 ‘옯겨심기’를 한 아들은 더욱 열심히 자신의 부족함을 머드리고 있다. 더 견고해지고 단단한 땅에 뿌리를 내리려는 ‘아주심기’를 한 것이다.
농작물은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이면 수확한다. 그런가 하면 양파같이 가을에 심기를 하고 긴 동절기를 지나 결실을 보는 작물도 있다. 옮겨 심은 뿌리가 잘 내려서 알곡의 열매를 맺을 아들의 봄을 꿈꿔 본다. 애미로서 할 일은 다른 선택을 한 아들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는 일이 전부다. 젊어서 하는 경험에는 아무 잘못이 없지 않은가. 멈추지 않고 다시 일어나 좌절하지 않는 아들은 어떤 항구인지 몰라도 꼭 도착할 것이라 믿는다.
아주심기로 옮겨심은 양파는 강하다. 혹한의 추위에도 휘청거릴지언정 여린 싹을 지켜낸다. 성장을 멈춘 듯하나 땅에 뿌리를 내려 단단히 고정하는 일에 집중한다. 속을 텅텅 비워내면서 높이 뻗어 오르려는 의지 하나로 푸르름을 잃지 않는다. 허겁지겁 빈속을 채우려 했다면 순식간 부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 기다린 봄 햇살을 만나면 대나무의 올곧은 기세 마냥 숨죽였던 성장을 힘차게 시작한다. 오월이 되면 기죽지 않고 쭉쭉 자라고 있는 양파밭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때가 되면 알뿌리에 영양을 주고 일순간 시들어 버리는 헌신까지 숭고하게 보인다.
아들이 굴하지 않고 양파처럼 꼿꼿이 홀로서기를 했으면 한다. 아들의 아주심기도 풍작이기를 기다린다.
양파 수확이 멀지 않은 오월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