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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라톤의 초기 저작.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당시의 사회, 윤리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플라톤 저작 중 유일하게 대화편 형식이 아닌 법정 변론문의 양식을 띄는 글이다.
2. 줄거리
2.1. 첫째 항변 : 유무죄 판결
2.1.1. 세간에 떠드는 부정적 평가에 대한 항변
멜레토스를 필두로 한 3명의 아테네 시민이 소크라테스를 불경죄 등[1]으로 기소했다. 에우튀프론 이후 시점, 소크라테스는 법정에 서 자신의 무죄를 변론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항변 연설을 시작하며 자신을 고발한 이들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지만 그들의 말은 전부 사실이 아니고 반대로 자기는 진실만을 이야기하겠다고 한다.[2] 대신 자신은 이러한 법정이 익숙하지 않아 그렇기 미려하게 말하지 않고 평소 대화하듯 말할거고 아테네 대중들[3]에게 이에 대한 양해를 구한다. 그리고 자기 발언에 흥분해 소란을 피워 말을 끊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4]
우선 멜레토스와 아뉘토스[5]의 고발에 변론하기에 앞서 더 오래되고 무서운 고발, 즉 세간에 퍼진 그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에 먼저 항변해야겠다고 한다. 그 소문은 '소크라테스라는 지혜로운 이가 신을 부정하며 하늘 위와 땅 속을 탐구하고 말을 마음대로 강하게도 약하게도 만들며 이를 가르치며 불의를 퍼트린다'는 내용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 <구름>을 비롯한 비방을 통해 들은 사람이 많을거라 하고 이러한 오래된 고발이 멜레토스가 자신을 고소한 근본적 원인일 거라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이게 전부 사실이 아니라며, 자기 대화를 들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자신은 자연철학적인 주제를 다룬 적이 없고 또 자기가 소피스트들 처럼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 좋겠으나[6], 자신은 인간의 지혜, 즉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만 알고 있다고 답한다.[7] 그리고 자신이 이러한 무고를 받게 된 이유를 얘기한다.
그의 친구 카이레폰[8]이 델포이에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이가 있는가'라는 신탁을 넣자 신탁은 '없다'는 답변을 내렸다. 소크라테스는 무식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할 리 없다며 그보다 현명한 이를 찾아 신탁을 반박하기 위해[9] 현명하다고 추앙받는 정치가들을 찾아 얼마나 지혜로운지 검토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무지하면서도 그걸 모른다는 점만 드러났고 소크라테스는 그나마 자신은 자기가 무지한 줄은 아니 그들보단 조금은 더 현명하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소크라테스는 뒤이어 시인들을 찾아갔으나 시인들은 지혜롭다기보단 예언자처럼 영감이 있는 쪽에 가까웠고 시인들은 오히려 자신의 시 짓는 능력때문에 자기 무지를 더더욱 모른다는 사실만 알아낸다. 수공예 장인들도 사정은 비슷해 그들이 잘 하는 분야는 소크라테스가 배울 면을 느낄 정도로 잘 알았지만 다른 분야에는 무지했고 역시 시인들처럼 자기 능력때문에 무지를 인정 안할 따름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럼에도 자신의 행동을 신의 명령이라 생각해 멈추지 않았고 대화 상대가 무지함을 알아내면 그들의 무지함을 밝혀내는 산파술을 해왔다. 이로 인해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그를 모함했고 마치 그가 소피스트나 자연철학자인 것처럼 말을 꾸며냈다고 소크라테스는 주장한다.
2.1.2. 멜레토스의 고발에 대한 항변
소크라테스는 뒤이어 멜레토스가 한 고발, 즉 이 재판의 원인을 반박하겠다고 하며 평소 하던 대화 방식대로 멜레토스에게 질문을 걸며 항변을 이어나간다. 고변 내용은 '소크라테스가 국가가 믿는 신들을 부정하고 대신 다이몬[10]을 가르치며 젊은이를 타락시킨다.'이다.
우선 멜레토스가 자신을 고소한 것을 보니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참 애국자 같다고 비꼬며 그럼 너는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만드는 참된 이를 알고 있겠네? 하고 묻는다. 멜레토스가 당연히 알고 있다고 답하며 그건 법률이라고 답하자 소크라테스는 법률 같은 제도 말고 사람을 말해달라고 답한다. 멜레토스는 이에 여기 있는 배심원들, 민회, 그리고 시민들이 젊은이들을 옳은 길로 이끌어준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럼 모든 아테네 시민들이 젊은이들을 바르게 이끌어주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그들을 의도적으로 타락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냐고 묻자 멜레토스는 그게 바로 자신이 그를 고발한 근거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기가 차서 그럼 자기가 나쁜 영향을 끼치면 상대방에게 안좋은 영향이 있을거라 생각도 못할 정도로 무지하다고 여기는 거냐고 하면서 자신은 절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려 든 적 없고 만일 진짜 타락했다면 그것은 자기 의도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설령 자기 의도에서 벗어나 진짜 자신을 따르는 젊은이들이 타락했더라도 그건 개인적으로 고쳐줘야 할 문제이지 멜레토스가 그런 시도도 안하고 법정에 고발했다는 것을 비난한다.
이어서, 국가가 믿는 신들을 부정한다는 것을 걸고 넘어지며 멜레토스에게 자신이 신을 믿지 않는다 생각하는지, 아니면 기존 신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신을 새우려 했다고 여기는지 묻는다. 멜레토스는 물론 신을 믿지 않는 쪽이고 해와 달이 신이 아니라 돌덩이와 흙덩이라고 주장하며 젊은이를 타락시켰다[11]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정하면서 어떻게 다이몬이란 신령을 따를 수 있냐면서 이를 반박한다. 다이몬 역시 신적인 존재이니 신의 일종이거나 신의 자식[12]일텐데 신을 부정하면서 다이몬을 긍정할 수 있냐는 것이다. 또, 해와 달이 신이 아니라 주장한 건 자신이 아니라 아낙사고라스고, 그의 가르침을 쉽게 구할 수 있는데 함부로 자기 생각인 것처럼 말하겠냐며 이 또한 자신을 음해하는 헛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리고 고발 내용이 너무 형편없어서 이 정도 반박만으로도 항변이 충분할 것 같다 하고, 그럼에도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비방이 잦아들진 않겠지만 자신은 계속 진리를 탐구하는 길을 가겠노라고 한다.
2.1.3. 예상 반론에 대한 항변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와의 논답을 끝마치고 다시 변론 연설을 이어나간다. 그리고는 사람들 중에 왜 죽을 지경이 되어서도 자기가 하던 일을 멈추지 않으려 하냐고 묻는 이가 있을 것 같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자신의 반박을 시작한다. 만일 훌륭함과 정의보다 생사의 문제를 먼저 두면 아킬레우스 같이 비겁하게 살기보다 용감하게 죽기를 택한 이들은 뭐가 되냐며, 자신은 죽는 것 보다 부끄러움을 더 두려워하겠노라고 한다. 그리고 죽음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불의를 저지르는 것과 자신보다 더 훌륭한 이에게 대항하는 것은 확실히 나쁜 것인줄 알지 않느냐면서 만일 죽음이 나쁜 것이라고 확신하며 두려워 한다면 그것은 자기 무지를 인정 못하고 지혜로운 척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거라 한다. 죽음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자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리고는 만일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설득이 먹혀서 사면 판결이 나더라도 대신 지혜를 탐구하며 사람들을 붙잡고 캐묻는 것을 금지당하는 상황이 되더라도 자기 행동은 델포이 신탁을 통해 내려온 신의 명령이니 아테네 판결의 명령보다 우위에 있으니 만일 진짜 이런 판결이 나더라도 그만두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자신이 하는 일은 아테네 시민들에게도 유익한 일이니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에게 대화를 걸며 절대 놔주지 않고 캐물어서 만일 상대방이 사실은 무지하다면 무지함을 깨닫게 해줄테니 만일 이런 판결을 내리고 싶다면 이를 고려하고 현명하게 판단하라 촉구한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에게 소란을 피우지 말아달라 다시 한 번 당부하며 자신을 고발한 멜레토스와 아뉘토스는 자기에게 절대 해를 끼칠 수 없다고 자부한다. 형편없는 이가 훌륭한 이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가로 혹자는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을 당하는 것이 형편없고 나쁘다고 생각할 지 몰라도 사람을 부정의하게 죽이려 시도하는 것이 훨씬 나쁘다고 한다.[13]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잠든 말의 엉덩이에 들러붙은 등에에 비유하며 자기가 아테네 시민들의 무지를 일깨우고 있고 이를 행하느라 자기 집안도 돌보지 않고 있다고 항변한다. 자신의 가난이 아테네에 대한 헌신의 증거라고 하면서.
소크라테스는 이번엔 사람들을 일깨우려 하면서도 정치에 나가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한다.[14] 어렸을 때 부터 그의 마음속에서 다이몬의 목소리가 들려와 정치참여를 막았다는 것이다. 정치판에서 자기 신념과 정의를 지키려 들면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하고 그만큼 사람들을 일깨우지 못할게 뻔했으니 다이몬이 맞았다고 주장하며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드물게 정치에 관여했던 두 사례를 이를 뒷받침하는 예시로 든다.
첫번째 사례는 민주정 하에서 평의회[15] 의장을 맡으며 아르기누사이 해전 전후처리와 관련된 장군 10명의 재판에서 홀로 반대 의견을 던졌던 것이다.[16] 두번째 사례는 민주정이 잠시 망하고 30인 과두정이 들어선 시기의 것으로 과두정 참주들이 살라미스 사람 레온이라는 이를 잡아오라 명령했을 때 이를 거부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던 일이다.[17] 자기는 어떤 상황에서나 정의를 추구해왔고 심지어 제자라 자청하는 이들이 부정의한 행동을 할 때에도 반항해왔다고 자부한다.[18]
이에 이어서 사실 자신은 제자를 둔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 자기는 무언가를 가르친 적이 없고 그저 대화를 원하는 이들이 찾아오면 대화를 나누며 진리를 탐구해 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러 젊은이들이 찾아와 제자를 자청한 이유는 그저 앎을 추구하는 것이 즐겁고 의미있는 일이라 그런 것이고 만일 자신이 젊은이들에게 진짜로 해를 끼쳤으면 그들 본인들이 멜레토스 편에 증인으로 서 고발에 앞장섰을 거라 말한다. 하지만 그 젊은이들 본인은 물론 그들의 나이든 친척들도 그를 돕고 있는 것을 한번 보라면서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 중에 동정을 사려 노력하지 않는 그의 태도를 뻔뻔하고 건방지다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며 그에 대한 항변도 시작한다. 우선 이는 부끄럽고 명예롭지 못한 일이고, 법과 진실을 가려야 되는 자리에서 동정심에 호소하는 것은 정의롭지도 못하고, 무엇보다 신들 앞에 떳떳하지 못하니 불경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신을 믿는다는 것을 강조해 불경죄를 반박하면서 아무쪼록 현명한 판결 부탁드린다고 하며 변론을 마친다.
2.2. 둘째 항변 : 형량 판결
배심원 표결 결과 280:220으로 유죄 판결이 났다. 고발자 측은 사형을 구형했다.[19] 소크라테스는 무죄표가 자기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고 너스레를 떨면서[20] 자기 형량을 구형하는 연설을 시작한다.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냐고 군중들한테 반문하며, 자신은 사람들과 사회를 돌보고 진정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으니 올림피아 우승자처럼 영빈관에서 향응을 받아야 하지 않냐고 한다. 그저 사람들을 행복하도록 보이게 만들어 줬을 뿐이고 부양도 필요없는 올림피아 우승자보다 자기가 그 영예에 어울리지 않느냐면서.[21]
자기가 뻔뻔하고 예의없다고 보는 이들도 있겠지만 사실은 항변 시간이 부족해[22] 자신의 옳음을 충분히 증명하지 못해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자기는 불의를 행하고 있지 않으니 나쁜 것임이 확실한 추방형, 벌금형, 징역형을 요구하기보단 차라리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아직은 모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노라고 한다. 그러면서 벌금형은 자신이 가난해서 낼 돈이 없고, 징역형은 감옥을 관리하는 이들의 종살이를 해야하니 확실히 나쁘고, 추방형은 자신이 목숨을 구걸하는 비굴한 이가 될 뿐더러 아테네 시민들도 자기 논변을 이렇게 싫어하는데 딴 폴리스 사람들은 어느정도겠냐고 하며[23][24] 하나하나 그 형량들이 나쁜 이유를 말한다. 추가로, 아테네에 계속 거주하되 진리를 탐구하며 대화를 거는 행위를 금지하는 형벌을 다시금 화두로 꺼내들며 자기 행위가 신의 명령이라는 점과 검토 없이 사는 삶은 살 가치가 없기 때문에 이는 나쁘지만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쉽진 않겠지 하며 자조한다.
그나마 벌금형은 자기가 형편이 괜찮았다면 아무런 해가 없었을테니 벌금형을 제시했겠지만 형편 문제로 은화 1므나밖에 제시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크리톤 등 친구들이 보증을 서며 벌금 30므나[25]를 구형하자고 설득하니 영빈관 향응 대신 이를 주장하겠다고 하며 둘째 연설을 마친다.
2.3. 사형 판결 후 마지막 연설
표결 결과 360 대 140으로 소크라테스의 사형이 확정되었다.[26] 소크라테스는 시민들이 아테네를 비난하려는 이들에게 지혜로운 소크라테스를 사형시켰다고 헐뜯을 구실을 넘겨주었다고 한다.[27] 혹자는 그의 항변이 부족해 사형당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항변이 아니라 몰염치가 부족했을 뿐, 앞서 말한대로 동정심에 호소하며 목숨을 구걸하진 않겠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비겁하게 목숨을 구하려는 행위가 정의롭지 못하듯, 재판에서 비겁하게 의견을 굽혀 살려 드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이고 죽음에게 사로잡히는 것 보단 악에 사로잡히는 것이 더욱 빨리 다가오는 나쁜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은 늙어서 느린 것(죽음)에 붙잡혔지만 젊고 방자한 멜레토스는 더욱 나쁜 악에 사로잡혀 파멸할 것이라 평한다. 마지막으로 죽을 때가 다가오니 예언을 하나 하겠다고 하며 시민들이 그가 귀찮게 구는게 싫어서 자신을 사형시키지만 자기가 떠난 이후에는 젊은이들이 더욱 혹독하게 캐물으며 그들을 응징할 것이라 한다.[28]
한편 자신에게 무죄판결을 던져준 이들에게는 그들이야말로 진짜 재판관들이라고 치켜세우며 이렇게 된거 감옥으로 이송되기 전까지 죽음에 대해 잠시 논의해보자 한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마음속에서 다이몬의 목소리가 들려와 무언가 나쁜 일을 겪을 때마다 막아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번에는 의외로 모든 재판 과정에서 다이몬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마 사형을 당하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을 말리지 않는 것 아니겠냐면서 어째서 죽음이 나쁘지 않은 것인지 자기 생각을 말하기 시작한다. 죽음은 분명 영원히 잠들어 무로 사라지는 일이던가 아니면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 저승으로 향하는 것일텐데 만일 전자라면 세상에서 가장 개운하고 행복한 잠을 영원히 누리는 것이고 후자라면 저승에 만나 신들과 영웅들, 역사속의 여러 인물들을 만나보고 대화를 만날 기회일 것이라고 하며 그러니 죽음이 딱히 나쁠 일 없지 않냐고 한다.[29] 자신은 그러니 사람들이 사형 선고를 내린 것 자체에 악감정을 품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를 죽이려 한 것 행위보단 해를 끼치려 한 의도가 비난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무죄표를 던진 시민들에게 자기 자식들이 크면 자신이 그들에게 한 대로 아이들에게 꾸준히 참된 삶을 일깨워달라고 당부한다. 감옥으로 갈 시간이 되자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죽으러가고 여러분은 살러 가는데 어느 쪽이 더 좋을 지는 신들만이 알지 않겠냐는 말로 작별 인사를 대신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크리톤 - 파이돈으로 이어진다.
3. 상세[편집]3.1. 무지의 지[편집]3.2. 소피스트[편집]
당시엔 변호사가 없었기 때문에 법정에서 자기 자신을 변호해야했다. 이를 위한 웅변술을 수업료를 받으며 가르치는 사람들이 바로 소피스트 였다. 허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수업료를 받지 않고 가르쳤기에(심지어 소크라테스가 말도 더 잘한다)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을 배우러 많이 찾아왔다. 이것 또한 훗날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운 원흉이 되었고. 신을 믿지 않고, 사람들에게 안좋은 지식을 설파한다는 이유로 고발을 당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1차 변론이 끝나고 1차 투표로 유죄 혹은 무죄인지 판결을 받았는데 280 : 220 의 표차로 유죄를 선고 받았다. 그 후 2차 변론이 진행되었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잘못은 없지만 기꺼히 벌금을 내겠다는 식으로 말하자 이에 분노한 배심원들이 360 : 140 의 표차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제목의 apologia라는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 지에 관해 학자마다 이견이 있다. 플라톤 번역으로 유명한 박종현 교수를 비롯한 이들은 법정 변론문인 이 글을 소크라테스의 '변론'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암학당 번역의 경우, 소크라테스를 부정적으로 보던 당시 아테네 대중들의 눈에는 소크라테스의 항변이 그저 변명으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과 그런 대중들을 향해 플라톤이 자기 스승을 이 글을 통해 변명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변명이라는 번역을 고집했다.
소위 소크라테스 3부작이라고 부르는 소크라테스의 변명 - 크리톤 - 파이돈 중 가장 처음을 장식하며[30]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다루는 이 세 작품이 국가, 향연 등과 함께 플라톤 저작 중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이다. 특히 변명의 경우 학자들 사이에서도 플라톤 사유의 시작점으로 많이 지목된다.
[1] 신을 믿지 않고 이를 가르치며 젊은이를 타락시킨 죄. 하지만 이는 명목상 이유고 사실은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 등 아테네에 해를 끼친 제자들 때문에 정치적으로 밉보인게 컸다.[2]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고발자들의 설득력있지만 거짓인 수사학과 자신의 투박한 진실을 대조한다. 이 주제를 더 심도 깊게 다룬 대화편이 고르기아스이다.[3] 아테네 민주주의 사법 체계는 일반 민중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표결로 판결을 맡는 형식이었다.[4] 당시 아테네 법정은 정숙을 요구하지 않고 현대 영국 의회와 비슷하게 배심원들이 반응을 표출해 쉽게 시끌시끌해질 수 있는 구조였다.[5] 고발자 셋 중 한사람. 새파란 젊은이였던 멜레토스가 명목상으론 대표 고발자였지만 실제 고발을 주도한 이는 아뉘토스로 추정된다.[6] 자신이 진리를 깨우쳤다고 거들먹거리며 돈을 벌던 당시 소피스트들을 꼬집는 말이다.[7]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라고 부르는 생각이며 소크라테스 사상의 핵심중 핵심이다.[8] 소크라테스의 죽마고우이자 숭배자로 다른 대화편에서도 등장한다. 변명 시점에선 이미 고인.[9] 고발과는 반대로 신을 믿는 면모를 드러내는 소크라테스지만 한편으론 신탁마저 검토하려 드는 그의 태도를 볼 수 있다.[10] 소크라테스는 자기 마음 속 소리를 다이몬이라는 신령의 목소리로 표현했다.[11] 신을 부정하는 가르침을 전수함으로써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주장이니 신을 부정했다는 전제를 논박하면 젊은이 타락 혐의도 벗을 수 있게 된다.[12]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과 인간, 타이탄, 님프등의 혼혈을 일컫는다.[13] 고르기아스에 나온 불의를 당하는 편이 행하는 편보다 차라리 낫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14] 아테네 직접민주주의 체제는 민회나 배심원 등의 방법을 통해 일반 시민이 정치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지만 소크라테스는 민회와 법정 모두 잘 참여하려 하지 않았다.[15] boule. 민회에 제출될 법안을 발의하고 폴리스의 일상 업무를 처리하던 아테네의 기관. 아테네를 구성하던 10개의 부족에서 각각 50명씩 선출되어 500인 회의라고도 부른다. 각 부족이 1년의 1/10을 돌아가며 주관하는데 하루에 한번씩 의장을 뽑는다. 중요한 국가 기관이었지만 아테네 시민이라면 한번쯤 참여해 볼 기회가 있었다.[16]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밀리고 있던 아테네는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기적적인 승전으로 한숨 돌리는 데에 성공했으나 폭풍우와 지휘권 문제 등이 겹쳐 전몰자 수습에는 실패했고 아테네 시민들은 이에 분노해 당시 책임자 장군 10명 중 망명간 2명을 제외하고 전부 사형시켰다. 하지만 이로 인해 군을 이끌 장군 인재풀이 말라버리며 몇년 후 전쟁에서 최종 패배했고 아테네 시민들 역시 분위기가 가라앉은 후 무리한 재판이었다고 후회했다.[17] 민주정에 비판적이었던 플라톤과 대화편 속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실제 소크라테스가 민주정에 우호적이었다는 근거로 여겨지는 대목이지만 반대로 두 사례를 한번에 봐서 민주정에서도 참주정에서도 부정의에 대항하는 모습이라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18] 불경죄는 사실 명목에 불과하고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가장 큰 원인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배신자 알키비아데스와 30인 참주들의 지도자 크리티아스를 제자로 뒀다는 점이라는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이 대목은 이에 대한 변론으로 볼 수 있다.[19] 아테네 법정은 판사나 성문 형법 없이 배심원 표결로만 이루어져 유무죄 표결이 끝난 후 원고와 피고측에서 각각 형량을 구형해 어느 쪽을 선고할지 표결에 붙이는 방식으로 형량을 결정지었다. 피고 측은 원고 측에서 잡은 형량보다 너무 낮은 처벌을 요구하기는 힘들었고 멜레토스 또한 피고측이 최소 추방형을 구형하는 것을 의도해 사형을 주장했다고 추측된다.[20] 아무리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가 아테네에 끼친 해악이 많고 이로 인한 피해자가 잔뜩 있다지만 그들과 관련 있다는 이유로 거기에 동조하지도 않았던 스승을 처벌하는 것이 당대 윤리 기준으로도 그다지 합당하진 않아서 무죄 의견도 생각보다 많았다는 증거이다.[21] 여기서 상식적으로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할 만 했네 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의 행보와 제자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 관련으로 감정이 쌓인 와중에도 무죄표가 꽤 많은 상황에서 자기는 오히려 보답받아야 한다고 어그로를 끌어버렸으니.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든 남들에게 좋게 보이기 보단 옳은 말을 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발짝 떨어져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배심원들 속 긁는다고 진짜로 유죄가 정당해지는게 아니기도 하고.[22] 소크라테스는 변론 연설 초반부터 항변 시간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스파르타에서는 사형 판결같은 중요한 재판은 며칠동안 심리를 진행했는데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스파르타를 동경하는 증거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23] 소크라테스 사형 재판 시기는 전쟁의 패전과 과두정 수립, 민주정 회복 등의 혼란기를 거치며 여유가 많이 없어진 상황이었지만 원래 아테네는 풍자성 희극이나 반민주정 사상가의 활동 등을 폭넓게 용인하는 표현의 자유가 강한 사회였다.[24] 크리톤에서 크리톤이 소크라테스에게 탈옥 후 망명을 가자 부추기지만 소크라테스는 여러 이유를 들며 거부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이때 추방형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이를 거부한 것이다.[25] 여러 사례를 미루어보아 당시 기준으로 적절한 벌금이었을 것으로 예상된다.[26] 유죄 표보다 사형 판결 표가 80표 더 늘었다. 영빈관 어그로가 배심원들을 효과적으로 열받게 했다는 증거.[27] 이 예언은 사실이 되어 소크라테스 사형 재판은 플라톤에게 박제되고 소크라테스가 직접 반대했던 아르기누사이 해전 당시 장군들의 재판과 함께 중우정치를 상징하는 사례가 되었다. 지금도 엘리트주의자들과 반민주주의자들의 주장 근거로 톡톡히 이용되고 있으며 현대 민주주의가 아테네식 직접민주주의가 아닌 법치주의에 기반한 의회제 대의민주주의로 발전한 근거로 꼽히기도 한다.[28] 사형 직후에 직접적으로 이러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으나 얼마 안가 소크라테스적 대화라는 장르가 유행하고 소크라테스와 그 제자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된 사유가 지금까지 서양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의 사형 재판 사건은 아르기누사이 해전 전후처리 재판과 더불어 중우정치의 대표적인 사례로 역사에 길이길이 남아 고대 아테네의 불명예가 되었다.[29] 소크라테스 사형 집행을 다룬 파이돈에서 죽음과 영혼에 관한 더욱 자세한 논증이 나온다. 파이돈에서의 소크라테스는 후자에 가까운 사상을 주장한다.[30] 변명 바로 직전 시간대를 다루는 에우튀프론도 가끔 엮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