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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장성택 숙청을 보면서,
문두식동기가 오래전에 발표한
논문내용을 옮겨봅니다.
역사를 바꾼 첩보전
-투하체프스키 원수의 숙청-
한국군사학회 회장 문 두 식
Ⅰ. 서 론
1937년 10월, 소련의 참모총장이었던 ‘투하체프스키’ 원수의 숙청은 제2차 세계대전을 목전에 두고 권력 기반에 불안을 느낀 스탈린과, 장차 소련과 사활을 건 전쟁을 계획하면서 우수한 적국의 장수를 제거하여 전투력을 약화시키려는 독일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독⋅소 양국의 첩보기관을 통한 모략으로 위대한 장군을 사형에 처한 케이스로 전쟁을 연구하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투하체프스키 원수의 숙청을 기화로 소련은 적국인 독일의 전략전술을 이해하고 있던 군사 전문가를 70% 이상 제거함으로써 독⋅소 전쟁 초기에 우수한 전쟁지휘관의 부재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반면에 독일은 적국의 손을 빌려 적국의 최고 지휘관을 비롯한 대다수의 전문 직업군인을 제거함으로써 초기 작전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독일로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첩보공작이었고, 소련으로서는 비록 내부 숙청과 맞물려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초기 전투에서 참패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전반에 걸쳐 570만 명의 소련군을 포로로 잡았는데 대부분 개전 첫해인 1941년에 획득하였다. 그 결과 소련은 수도인 모스크바는 물론,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 일대를 목전에서 위협당하는 대 재앙을 초래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전쟁을 앞두고 투하체프스키 원수를 비롯한 군 고위 엘리트를 숙청하게 한 첩보공작은 그야말로 역사를 바꾸게 할 정도로 중요한 공작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첩보공작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매우 비열하게 생각하고 금기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병이사립(兵而詐立)이나 병자궤도야(兵者詭道也)라고 하며 전쟁은 적을 속이는 것으로 성립한다는 손자의 경구처럼 전쟁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첩보공작에 대해 군인이라면 반드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아울러서 손자는 병법의 완결편인 13편 용간편(用間篇)에서 간첩의 분류와 첩보공작의 요령을 현대적 관점에서도 감탄할 만큼 잘 정리하고 있다.
전쟁이 국가의 흥망을 가르는 큰일이라면 첩보공작에 대해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하겠다.
Ⅱ. 투하체프스키는 누구인가?
1914년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소위로 참전하여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5번째 탈출을 시도 성공하여 1917년 10월 러시아로 돌아와 볼셰비키 혁명 후에 공산당에 입당하여 적군(赤軍)의 장교가 되었다.
뛰어난 능력으로 급속히 승진하여 적군(赤軍)과 백군(白軍)의 내전(內戰)기간 동안에는 모스크바 방위를 담당하였고, 1919년에는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트로츠키에 의해 26세에 5군의 지휘권을 담당하였을 뿐 아니라 백군으로부터 시베리아를 탈취하기 위한 작전을 지휘하였다.
1920년에는 야전사령관으로서 폴란드의 침공을 효과적으로 물리친 후에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를 공략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때 그의 부대 정치 지도원이 스탈린이었는데 그들은 상호 견해 차이로 불화를 빚어 일생을 통해 신뢰하지 못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집권 후에 그의 군사적 재능을 인정하여 요직에 등용하기도 한다.
1921년에는 크론슈타트 반란과 농민반란을 진압하였는데 당에서는 그의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붉은 나폴레옹’이라고 칭송했다.
1924년에 정권을 잡은 스탈린은 무능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보로실로프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하면서 그의 무능함을 보완하기 위해 32세의 젊지만 출중한 능력을 지닌 투하체프스키를 참모총장에 임명하였다. 투하체프스키는 열성과 경험 면에서 보로실로프를 압도하였기 때문에 그로 인해 무능한 상관인 보로실로프와의 관계는 끝까지 원만하지 못했다.
투하체프스키의 포부는 의용군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소련의 군대를 개혁하여 서구, 특히 독일군대와 유사한 전문성 있는 현대군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그는 1926년에 군사교리의 전면 재검토를 명하여 그 결실로 1928년 5월에 [미래 전쟁]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그 골자는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항공기가 결합되어 엄청난 속도로 공격을 가하여 괴멸적인 힘으로 적을 타격한다는 사상으로 독일의 [전격전] 사상과 거의 유사한 것이었다.
이는 1922년부터 이루어진 소련과 독일의 군사협정에 의해 독일군이 소련 영토에서의 훈련을 통해 상호 발전한 결과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군사부문에서 한번 혁명을 일으켜보자는 그의 생각은 소련의 낙후된 경제체제로 인해 실현되기에는 시기상조였으며 그가 건의한 항공기 및 탱크 생산계획은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해서 기각되었다.
특히 순수한 군인으로서 그는 군대내의 정치지도위원을 배제하거나 역할을 격하시키는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투하체프스키 이전에 군의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다가 사망한 프룬제 장군이나, 그의 후임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 주코프 원수의 견해와 모두 동일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은 당의 방침을 거스르는 것으로, 이로 인해 세 사람 모두 많은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성향과 독립적이고 권위적인 업무추진으로 인해 정적(政敵)을 얻어 1928년 스탈린과 보로실로프는 그를 참모총장 직에서 해임하여 한직인 레닌그라드 관구사령관으로 좌천시켰다.
한직에 있으면서도 그는 소련군의 현대화를 위해서는 4만대의 항공기와 5만대의 탱크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강하게 주장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스탈린은 그를 ‘붉은 군국주의자’로 비난하고 그의 생각에는 반혁명 사보타주의 기미가 있다고 넌지시 비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남았다.
스탈린의 강력한 경제정책으로 인해 소련 전체의 생산력이 늘어나자 투하체프스키의 군사사상은 받아들여져 1934년 다시 참모총장으로 복권된 후, 그를 포함한 5명이 함께 소련군 최초로 원수로 승진하였으며, 더불어 군의 현대화는 탄력을 받았다. 그러나 그에 의한 군의 개혁은 1937년 6월, 그가 반역죄로 체포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사회는 반혁명, 체제불만 자, 반 스탈린주의자 등, 의심스러운 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투하체프스키는 상관인 보로실로프 장관을 비롯한 당의 군사 아마추어들의 개입을 싫어했고, 소신있게 말을 했으며, 군대내의 정치선전을 줄이고자 노력하여 스탈린과 당의 심경에 거부감을 주게 된 것이 체포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투하체프스키는 스탈린이 죽은 후에 후르시쵸프에 의해 복권되었다.
Ⅲ. 독일과 소련의 투하체프스키에 대한 딜레마
1. 독일의 입장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한 군축규정 아래서 군비를 비밀리에 증강시키려는 기지(基地)로서 소련이 필요했고, 소련 역시 공산주의를 금기시 하는 분위기로 인해 국제적인 외톨이로 취급되어 국제협력이 제한되자, 서방의 군사과학기술의 습득이 절실히 필요하여 두 나라는 1922년 비밀리에 군사협약을 체결하였으며 1926년부터 본격적인 협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모스크바 남동쪽 500㎞ 떨어진 온천 도시 [리페츠크]에는 비행장이 만들어져 신형 항공기의 성능검사와 독일 공군 조종사들의 훈련이 이루어졌고, 볼가 강 인근의 [카마]에는 전차학교가 세워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눈부신 전략적 결실을 맺은 기갑부대를 위주로 한 전격전 전술이 시험되었다. [볼스크]에는 화학전을 위한 훈련장이 건설되어 가스 공격과 방호를 시험하는 등 양국은 군사기술은 물론 교리에 관해서도 상호 자유롭게 교환하였다.
이때 독일 측의 주요 인사는 카이텔, 부라우히츄, 모델, 구데리안, 만쉬타인 등으로 제2차 세계대전 시에 독일군의 가장 우수한 군사지도자들로 성장한 중추 핵심세력이었으며 소련에서도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한 전문 장교단이 교류하면서 상호 많은 발전을 이루었으나 소련 측은 투하체프스키의 숙청과 함께 우수한 장교집단 대부분이 제거 되었다.
양국은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쟁취하기 전까지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다가 히틀러가 군비를 급속히 증강시키자 이에 위협을 느낀 소련의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한 군사 지도자들은 점차 독일을 멀리하고 영국, 프랑스와 협력관계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심기가 불편해진 나치스는 그렇지 않아도 독일의 군사교리를 꿰뚫고 있으며, 독일의 전술교리와 아주 유사하게 소련군을 개혁하려는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한 소련군의 엘리트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차에 본격적으로 그를 파멸시키려는 공작을 펴게 되었다.
이러한 독일의 첩보공작은 뒤에 기술하는 바와 같이 소련 내부의 갈등에 힘입어 소련군의 주요 간부를 모두 제거하는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러한 결과를 보고 히틀러는 전쟁 직전에 소련 공산주의의 중심이 텅 비었다고 공언하였는데 이는 어느 정도 사실로 입증되었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히틀러가 폴란드를 병탄했던 해의 끝자락인 1939년 12월에 붉은 군대라는 소련의 거인이 핀란드라는 난쟁이를 상대로 엄청난 피해를 당하는 한숨 나오는 성적을 거둔 것으로 한마디로 소련군의 수준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물론 핀란드의 총사령관 만네르하임 장군을 위시한 핀란드의 대비태세를 경시했던 결과이기도 하였지만 덩치만 컸지 작전수행 능력이 형편없었던 소련군의 실력을 적나라하게 들어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본격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몇 개월 후에 항복에 가까운 강화를 얻어냈지만 핀란드를 점령하기 위한 희생은 장차 독⋅소 전쟁의 참화에 비해 매우 경미한 것이었다.
이는 투하체프스키 원수를 필두로 1937∼1938년에 걸쳐 스탈린이 자행한 군의 고위층에 가한 테러는 과거 어느 전쟁이 가져왔던 피해보다도 훨씬 처절한 붉은 군대의 희생을 요구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소련을 침공하려는 히틀러에게 한층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2. 소련의 입장
1930년대에 들어 강력한 경제개발 정책으로 인한 어려움은 먼저 농민들에게 닥쳤다. 집단 농장 제도에 익숙하지 못해 광범위한 저항의 분위기가 되살아났고 1932년에는 남부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20세기 최악의 기근이 발생하자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농민의 저항이 일어났는데, 스탈린은 이 지역 주민을 완전히 봉쇄하여 아무도 떠나지 못하게 통제함으로써 1933년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420여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처럼 생활고에서 비롯된 농민의 저항은 체제수호를 위해 철저히 보복되었다.
무섭고 집념이 강한 스탈린은 정치적으로 반대파는 물론 반혁명의 이름으로 수많은 무고한 국민을 숙청했는데 1939년에는 여러 수용소에 약 350만 명의 수감자가 있었다.
심지어 그는 소련 권력의 핵심인 당과 군대, 그리고 NKVD 자체에 테러의 망치를 겨눴다. 국가 테러가 한창일 때 스탈린은 유능한 공범 2명의 보좌를 받았는데 검찰총장 브이신스키와 NKVD 총수인 예조프로서 이들은 힘을 합쳐 당의 주요 간부들을 낫질하듯 베어버렸는데 예를 들어 1934년 제17차 당 대회 대의원 1,966명 중 1,108명을 인민의 적으로 총살했다.
테러로 유발된 공포는 스탈린의 개인숭배의 초석이 되었다.
이 때 투하체프스키는 군대 내의 정치선전 문제를 놓고 스탈린의 심기를 거슬렀다. 군대에서의 정치선전을 줄이고자 하는 투하체프스키의 태도가 스탈린의 심정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도록 직접적으로 자극했다고 보이지는 않지만 당시 외국에서 떠도는 ‘군이 믿을 만하지 않다’는 근거 없는 풍문과 합쳐져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붉은 군대의 나폴레옹’이라는 칭호는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정권을 차지하는 위험성을 시사하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어 투하체프스키는 독일과 소련의 공공의 적이 될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스탈린에 대한 군의 충성심에 대한 의구심과 투하체프스키 개인에 대한 의심, 그리고 소련 전체에 만연한 숙청이 맞물려 군 전체에 대한 숙청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Ⅳ. 투하체프스키 제거를 위한 음모 공작
투하체프스키를 위시한 소련 군부 엘리트에 대한 숙청은 독일 경찰보안대(SD)장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투하체프스키가 독일군부와 내통해서 스탈린을 배반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는 데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이드리히는 이 첩보를 니콜라이 스코블린이라는 정보원으로부터 입수한다. 스코블린은 원래 러시아 백군(白軍)의 사단장 출신으로 소련의 내전에서 패하자 파리로 망명하여 숨어 지내면서 독일과 손잡고 소련을 전복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독일과 교섭하는 과정에서 하이드리히에 포섭되었다. 스코블린은 중대한 정보라면서 하이드리히에게 투하체프스키가 독일의 군부지도자와 결탁되었으며, 투하체프스키가 스탈린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는 음모를 제보하였다.
하이드리히는 이 정보를 나치에 유리한 쪽으로 활용하기 위해 검토하여 히틀러에게 보고하자 히틀러는 기뻐하면서 스탈린이 붉은 군대를 궤멸시키도록 부추기는 공작을 하게 하였으며, 필요하면 첩보를 위조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코블린은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을까? 놀랍게도 그는 소련의 스파이였다. 반 소련파였던 그는 유명한 여배우와 결혼하는 등, 돈에 쪼들려 독일과 소련의 이중 스파이 역할을 했던 것이다. 소련 쪽에서도 이미 그가 독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역이용하려 한 것이다.
최초로 투하체프스키의 음모라는 정보를 흘리라는 명령을 한 사람은 NKVD의 외국과장인 세미렌스키였다. 그의 심복인 미하일 슈피겔(Mikhail Spiegel)은 파리에서 스코블린을 만나 하이드리히와 연결되었음을 알고 있다면서 투하체프스키에 관한 정보를 흘리라고 지시했다.
이런 경로를 통해 투하체프스키의 음모에 관한 정보는 하이드리히에게 흘러들어갔으며, 하이드리히는 정보를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나치를 위해서 이를 교묘히 이용했다.
그는 투하체프스키가 독일 군부와 관련되었다는 첩보 내용에 착안하여 독일 군부 내에 남아 있는 나치의 저항세력도 한꺼번에 제거할 생각을 한 것이다. 양국 정보기관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하이드리히의 주도하에 독일 장군과 투하체프스키가 내통하고 있다는 문서가 위조되었다.
그렇다면 위조된 정보가 어떤 경로로 스탈린에게 전달되었을까?
아마도 독일 측에서 첩보를 소련 측에 직접 전달했다면 스탈린은 투하체프스키를 의심했을지라도 함부로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하이드리히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정보 전달 경로로 활용하기로 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슈데텐 지방에는 게르만 인이 300만 정도 거주하고 있었는데 히틀러는 ‘한 민족 한 국가’라는 모토 아래 체코슬로바키아로 하여금 슈데텐 지방을 독일에 할양하도록 압력을 가하면서 평화적으로 해결이 불가하면 무력으로 점령하겠다고 압력을 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엄청난 불안 속에서 프랑스, 영국과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독일과 협상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이때 독일 대표는 엉뚱한 말을 흘렸다. ‘히틀러 수상은 체코와 우호적인 조약을 원하고 있지만 소련의 군부가 독일 군부와 결탁하여 반 스탈린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기 때문에 교섭이 조심스럽다’는 것이었다. 이에 깜짝 놀란 에드바르트 베네슈(Edvard Benesh) 체코 대통령은 프라하 주재 러시아 대사에게 첩보를 통보했다고 그의 회상록에 기록하고 있다. 그의 속셈은 소련에 좋은 정보를 제공하여 소련으로부터 히틀러를 억제할 수 있는 모종의 지원을 얻으려는 생각이었다. 자신이 역이용 당하는 것을 몰랐던 베네슈 대통령은 사실 입이 가볍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자기가 만들어 유포한 위장된 첩보가 확대 재생산되어 독일과 체코를 거쳐 신빙성을 갖고 되돌아온 것을 NKVD의 해외첩보부장 미하일 스피겔글라스(Mikhail Shpigelglass)는 이를 진짜 음모로 다뤘다.
군사 쿠데타의 우려가 있다는 조작된 상황 하에 크레믈린으로 통하는 통행증은 모두 무효로 처리되었으며 NKVD는 경계상태에 들어갔다. 군사 쿠데타의 주요 사찰대상은 과거부터 독일의 군대와 친분이 있었던 투하체프스키 원수를 비롯한 고위 군사 엘리트들이었다.
스탈린은 투하체프스키를 즉시 체포하라고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이 다루었으며 NKVD가 증거를 찾기 위해 미행을 비롯한 각종 감시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1937년 5월에 영국 국왕 조지6세의 대관식에 투하체프스키가 소련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바르샤바를 거쳐 런던으로 가는 도중에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적발되었다는 이유로 갑자기 취소되어 볼가 군관구 사령관으로 아찔한 강등을 명받았다. 이때 이미 메드베데프(Medvedef)라는 여단장이 NKVD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끝에 상관들의 반역 음모를 허위 자백했는데 그것이 결정적인 숙청의 근거로 조작되었다. 그 뒤에 그는 진술을 번복했다가 NKVD가 필요한 자백이 나올 때까지 다시 고문을 받았다.
투하체프스키는 상황을 감안하건데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두 달 만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었다고 한다. 보직을 받아 새로운 임지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역의 정치 장교회의에 호출되었으며 그 이후로 죽을 때까지 NKVD를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주로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소련 군인들이 독일을 수차례 방문한 것과 연관된 것이었다. 그의 부인과 두 형제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으며 누이들은 노동수용소로 보내지고 어린 딸은 성인이 되자 역시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수많은 고문과 허위자백은 엉터리 증거와 강압에 의해 연루자가 끝없이 늘어났다.
그를 재판하기 위한 심판관 여덟 명 중에 다섯 명이 함께 처형되었다.
예고로프 원수의 부인이 폴란드 첩자였다고 자백한 뒤 예고로프가 1938년 3월에 처형되었다. 불류헤르 원수는 1938년 10월에 체포되었으나 끝까지 자백을 거부하다가 구타를 당해 눈알이 하나 빠졌으며 결국 11월 9일 감옥에서 죽었다.
그 결과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1938년 가을까지 원수 5명 가운데 3명, 군사령관 15명 가운데 13명, 사단장 195명 가운데 110명, 여단장 406명 가운데 186명이 죽었다. 그 외에 당 지도위원의 대다수, 국방차관 11명 전원, 군사위원회 80명 가운데 75명, 군관구 사령관 전원이 총살당했다.
1935년에 정해진 편성표에 의해서 임명된 대령에서 원수까지 837명의 지휘관 중에 720명을 포함해서 육⋅해군의 고위 장교 및 정치장교 45%가 처형되거나 면직되었다.
상기와 같은 군부 지도자들의 대대적인 숙청이 핀란드와 전쟁에서 초기에 대 참패로 이어지자 스탈린은 국방장관 보로실로프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는데 무능하지만 충직한 부하였던 보로실로프도 이때 만큼은 자신의 과오를 모르는 스탈린의 행태에 화가 나서 식탁위의 식기를 스탈린에게 집어 던지며 “당신이 소련군의 훌륭한 지휘관 동지를 모조리 처형해 버렸는데 어떻게 제대로 싸울 수 있겠는가?”라고 대들었을 정도였다.
보로실로프의 주장대로 소련군은 총체적 위기에 빠졌고, 이를 제대로 인식한 스탈린은 고민에 빠졌다. 이 때 대 숙청기간에 화를 면한 몇 안되는 지휘관 중에 스탈린에게 소신껏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인 주코프가 아직 사형당하지 않고, 감옥에 살아 있는 유능한 지휘관을 백의종군 시켜달라고 청원하여 일부는 목숨을 건졌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형수로서 원수까지 승진한 로코소프스키였다.
이러한 숙청은 대외적으로 소련의 군사력에 나쁜 인상을 주었고, 특히 독일군으로 하여금 붉은 군대를 쳐부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만드는데 이바지 했다.
히틀러는 1941년 6월 소련을 침공하면서 남부집단군I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에게 “귀관은 문짝을 걷어차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썩어 문드러진 건물이 폭삭 주저앉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소련의 군사력을 냉정하게 과소평가 했다고 한다.
Ⅴ. 총 평
소련군은 1939년 투하체프스키의 제거 후에 여단급 이상의 기갑부대를 모조리 해체하였다. 이로 인해 독일의 전격전에 대항할 수 있는 투하체프스키의 종심방어, 역습을 위한 예비대의 유지 등, 전통적인 군사적 방어책들이 무시되고 폴란드의 점령으로 인해 신장된 전 전선을 선형으로 방어하기 위한 엷은 방어막이 준비 되었다. 그러다가 늦기는 했지만 다행한 것은 1939년 말의 핀란드와의 전쟁에서 혼이 난 후 급속히 기계화부대를 증강시켜 1941년 봄에는 50개의 전차사단과 25개의 기계화사단을 장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갑부대의 운용은 조각조각 나뉘어져 5개 관구로 분산되는 바람에 역습이나 주요지역에 대한 종심저지 작전에 집중 운용되지 못하여 초기 전투에서 참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러시아 군의 실상은 병사들은 언제나 방어할 때는 완강하고, 공격할 때는 적극적이어서 매우 우수한 편이었으나 문제는 병사가 아니라 장군들에게 있었다. 역사적으로 무능한 지휘관들 때문에 너무나 고생을 하는 것이 러시아 군대의 팔자였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1941년 6월 22일은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한 1812년의 169년 후로, 동일한 날짜에 개시되었다. 초기 전투는 마치 도리깨로 곡식 단을 털듯이 격렬하고 신속히, 그리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독일은 570만 명의 소련군을 포로로 잡았는데 이 가운데 330만 명은 포로 상태에서 사망했다. 이는 대부분 1941년 초기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는데 만일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한 우수한 지휘관들이 제거되지 않고 독일식 전격전 이론이나 종심방어로 맞섰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전쟁의 승패는 몇 가지의 중요한 요소로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2,500여 년 전의 손자는 시계편(始計篇)에서 전쟁을 시작할 때 반드시 따져보아야 할 필수 요소로서 도(道), 천(天), 지(地), 장(將), 법(法)을 강조하면서 이를 알고 따르면 승리할 수 있다고 했다. 네 번째 요소인 장(將)은 장수의 자질을 말하는 것으로 소련은 전쟁을 목전에 두고 우수한 지휘관 대부분을 처단함으로써 장수의 자질 면에서 상대적으로 매우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어 패배를 자초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전장에서 우수한 지휘관은 엄청난 전력의 상승요인이 된다. 웰링턴 장군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만으로도 3개 군단의 증강효과가 있다’고 평한 적이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나는 양이 지휘하는 사자의 부대를 두려워한 적이 없다. 오히려 사자 한 마리가 지휘하는 양으로 구성된 부대가 두렵다’고 하면서 군사 지휘관의 중요성을 양과 사자를 대비시켜서 지휘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첩보공작은 너무 훌륭하게 성공하였으며 소련은 스스로 함정에 빠졌다고 할 수 있겠다.
첫댓글 "테러로 유발된 공포는 스탈린의 개인숭배의 초석이 되었다"는 말이 썸뜻하네요. 김정은의 노림수도....
세월이 지나면 장성택의 숙청 스토리가 또 밝혀지겠지요. 권력이란 원래 무자비한가봐요.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좋은 연구를 한 문두식동기,자료 올려준 구재림 동기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