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0일 토요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현명한 이를 보면 그와 같아질 것을 생각하고
어려서 내가 중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참고서를 사기는 정말 하늘의 별을 따듯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지금처럼 공부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자료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고서를 산다는 것은 교과서를 사기도 어려운 시절에 정말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헌 참고서를 사거나 선배들에게 빌려서 완전히 까맣게 되도록 보고 또 봐야 했습니다. 나는 대학을 완전히 포기했기 때문에 참고서를 살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또 욕심내지도 않았습니다. 매일 도서관에서 고전이거나 명작을 빌려다가 읽고 반납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습니다. 내 친구들은 아주 어렵게 산 참고서를 그냥 자나 깨나 끼고 살았습니다.
한 번은 그 참고서를 내가 빌려서 보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참고한 다음에 되돌려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밤늦도록 보고는 아침에 되돌려 주기 위해서는 정말 시간이 아까웠습니다. 그 때는 친구들이나 선배들은 그런 말을 잘 했습니다. 책을 외우기 어려우면 밤에 잘 때 베고 자면 그 내용을 전부 머릿속에 외워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참고서랑 영어사전을 고이 싸서 베고 잤습니다. 영어사전을 들고 다니며 외우다가 한 페이지를 다 보면 염소처럼 뜯어서 먹었습니다. 그러면 단어들이 소화되면서 뇌에 그대로 박힌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속설처럼 그렇게 쉽게 외워지지 않아서 실망한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성구갑을 크게 하고 성경의 말씀을 새기고자 많이 써서 이마에 두르고, 팔찌처럼 차고 다니며, 그 말씀이 몸에 배어들어갈 것으로 알고 있었다면 그건 큰 오산이었을 것입니다. 참고서를 항상 베고 자고 영어사전을 베고 잤어도 실제로 머리에 들어와 내 지식이 되고 양식이 된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무리 염소처럼 다 외웠다고 뜯어 먹었어도 하나도 외워지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성경의 구절을 성구 갑으로 차고 다녀도 또한 줄줄이 암송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전혀 말씀과 다른 행동이었고, 가르침과 다른 형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위선자로 주님은 그들을 닮지 말라고 강경하게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겸손하게 섬기는 사람으로, 낮은 자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교회는 이제 더욱 겸손해지고, 사람들은 더욱 낮은 자로 살아야 할 때입니다. 낮은 자로 사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님은 재삼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논어의 이인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왈; 견현사제언, 견불현이내자성야.’
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현명한 이를 보면 그와 같아질 것을 생각하고, 현명치 못한 이를 보면 속으로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다.>
사실 논어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고, 새롭게 결심하고 자신의 패러다임(Paradigm)을 전환한다고 하는 것은 가히 성인들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의 그 위선적이며 교만한 삶을 보고 나를 반성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주변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보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보고 나를 반성하여 내 삶을 바꾸는 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새로운 삶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내가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나는 정말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해보면 아찔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은 바오로 서간을 열심히 묵상하고 있습니다. 기왕이면 성경을 쓰면서 그 말씀을 새기기 위해서 우리말로 쓰고, 영어로 쓰고, 다시 중국어로 써봤으면 좋겠습니다. 전에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한 번 시도해 봤습니다.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한 장을 다시 쓸 뿐인 데도 그 말씀이 전혀 새롭다는 것입니다. 매일 조금씩 쓰면서도 쓰는 즉시 잊어버리고 맙니다. 암송하기는 정말 어렵고, 그 뜻을 새기기도 정말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새겨 내 삶에 영향을 주지도 아니합니다. 성경을 묵상한다고 하면서도 언제나 겉만 맴도는 내 현실을 한심스럽게 바라봅니다.
젊었을 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런 일들이 지금은 나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말씀이 생활이 되지 못할 때 말씀은 이미 내 주변을 맴도는 공염불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로 교단에 섰고, 강의를 했고, 스승으로 대접받으며 뽐내며 살았습니다. 부끄러운 자신을 반성하면서 할 수 있다면 이제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역시나 어렵습니다. 제자들을 대하기도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염소처럼 다시 영어사전을 뜯어먹고 싶은 열정이 샘솟기를 기도합니다. 읽은 것을 마음에 새기고 믿고, 새겨 믿은 것을 가르치고, 가르친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평생의 소망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 행동에는 전혀 옮겨지지 않습니다. 섬기는 낮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43,1-7ㄷ
천사가 1 나를 대문으로,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데리고 나갔다.
2 그런데 보라,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았고, 땅은 그분의 영광으로 빛났다.
3 그 모습은 내가 본 환시, 곧 그분께서 이 도성을 파멸시키러 오실 때에 내가 본 환시와 같았고,
또 그 모습은 내가 크바르 강 가에서 본 환시와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4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5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6 그 사람이 내 곁에 서 있는데, 주님의 집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7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
축일8월 20일 성 베르나르도 (Bernard)
신분 : 수도원장, 교회학자, 신학자
활동 지역 : 클레르보(Clairvaux)
활동 연도 : 1090-1153년
같은 이름 : 버나드, 베르나르두스
테셸랭 소렐(Tescelin Sorrel)과 몽바르(Montbard) 영주의 딸인 복녀 알레타(Aletha, 4월 4일)의 아들인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는 부르고뉴(Bourgogne) 디종(Dijon) 근교의 가족 성(城)인 퐁텐(Fontaine)에서 일곱 아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샤티용(Chatillon)에 가서 공부하면서 청운의 꿈을 펼치고 있었으나, 1107년 어머니의 죽음으로 많은 충격을 받고서 수도생활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원래 시토회의 설립자 3명 가운데 한 명은 아니었지만 흔히들 그를 시토회의 설립자로 부른다. 그가 새로운 수도회인 시토회에 입회한 해는 1112년 4월인데, 그 때 그는 자기 형제 4명을 비롯하여 모두 30명의 친척, 친구들과 함께 베네딕토회 규칙의 엄격한 해석을 따르기 위하여 1098년에 설립된 시토회에 들어갔다. 그들은 원장이던 성 스테파누스 하딩(Stephanus Harding, 4월 17일)으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1115년에 성 베르나르두스는 성 스테파누스 하딩의 지시에 따라 12명의 수도자와 함께 부르고뉴와 샹파뉴(Champagne)의 경계지역에 있는 클레르보라는 고립된 계곡에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파견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엄격한 규율 때문에 약간의 어려움에 봉착하였으나, 그의 높은 성덕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때 그 수도원의 이름을 발레 답신트에서 클레르보로 바꾸었고, 당시 68개의 시토회 수도원의 모원으로 만들었다.
그 후 성 베르나르두스는 자신의 학덕과 지덕을 활용하여 수도원의 외부 일을 처리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중의 하나가 되어 통치자와 교황의 자문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대립교황인 아나클레투스 2세의 요구에 대항하여 1130년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Innocentius II) 선출의 합법성을 지지하였다. 또한 그는 로테르 2세를 황제로 인정하도록 롬바르디아(Lombardia)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140년부터 그는 공적으로 설교하는 일을 시작하여 놀라운 명성을 얻었다.
1145년에는 전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수도자였던 에우게니우스 3세(Eugenius III)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는 교황직의 의무에 대한 글을 교황 앞으로 보내어 로마(Roma) 교황청의 남용을 자제하고, 교황이 항상 목전에 두어야 할 종교적 신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교황 에우게니우스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랑그도크(Languedoc)에 파견하여 알비파(Albigenses) 이단을 대항하여 설교토록 하였고, 프랑스와 독일에 제2차 십자군 원정의 열기를 북돋우는 특사로 임명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활동과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성한 저술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서한과 "아마(Armagh)의 성 말라키아의 생애" 그리고 "신애론"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자신의 수도자들에게 행한 강론은 "아가"로 묶었다. 그는 자신의 저술과 설교에서 성서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는 이유를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아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저서와 신심은 오늘의 신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그는 다양한 기질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꿀처럼 단 박사'(Doctor Mellifluus)란 칭호를 얻었다. 1153년 8월 20일 클레르보에서 선종한 그는 1170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에 의해 시성되었고, 교황 비오 8세(Pius VIII)는 1830년에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그는 스콜라 학파 이전의 신학자이며, 때로는 '마지막 교부'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문장은 꿀벌통이고 양봉업(자)의 수호성인이다.
오늘 축일을 맞은 베르나르도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