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선 아즈택, 아니 좀 더 제대로 말해 테노치티틀란, 텍스코코, 틀라코판의 삼도시 동맹과 틀락스칼라를 중심으로 뭉친 연합체는 원래는 같은 연합체였습니다. 현재 기록이 남아있는 치치메카 시기까지 거슬러올라가면 아스카포찰코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 도시국가 연합체가 멕시코 분지 일대에 형성되어 있었고, 테노치티틀란은 아스카포찰코의 예속도시였다고 하지요. 아스카포찰코의 테소소목 왕이 사망(1426년)하고 그 아들(코요아칸의 왕 막스틀라)가 테소소목 왕의 장자에게 도전하면서 내전이 벌어지자 이 연합체는 둘로 나뉘었고, 여기서 테노치티틀란은 장자측 편에 섰는데, 115일간 맞짱뜬 결과 장자측이 예상을 뒤집고(이쪽이 더 약했다 합니다) 승리하면서 예속도시에서 패권도시로 국생역전을 한 케이스지요.
갑자기 패권국 자리가 맡겨지니 혼자서는 감당 못해서 텍스코코, 틀라코판을 끌어들여서 삼도시동맹을 형성해 패권국으로 행세하려 했지만, 이 내전 과정에서 막판에 막스틀라 편에서 테노치티틀란 편으로 돌아서서 승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현재 남아있는 주요 기록인 익스틀릴소치틀의 '테스코코 왕국의 약사'에 따르면 심지어 얘네가 장자파 주력군 취급) 틀락스칼라는 테노치티틀란 중심의 연합체에 합류하는 걸 거부했고 우에호싱코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독자적인 연합체를 형성하면서 쪼개집니다.
2. 그리고 꽃 전쟁... 인데, 애초에 꽃 전쟁과 포로들의 인신공양, 인육 풍습 자체가 아즈택 등장 전부터 있었고, 기록상 여기서 가장 적극적인 국가는 찰코입니다. 그중 몇건은 인신공양도 안하던 것도 있더군요. 참고로 이 찰코는 치남파 일대의 도시국가 연합체로 아스카포찰코 중심으로 형성된 연합체와 종종 맞부딪쳤으며 테노치티틀란도 역시 아스카포찰코의 예속도시이던 시절 아스카포찰코의 명령에 따라 찰코와 몇번씩 부딪친 전적이 있지요. 포로를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써먹는 풍습은 처음부터 있었지만 인육을 식용하는 풍습은 찰코에서 왔고 실제로 이시기 인육을 먹는 대상으로 언급되는 건 찰코에게서 붙잡은 포로들 한정일 때가 많았습니다.
3. 뭐 일단 일반적인 꽃 전쟁은 그런 식이었고, 테노치티틀란과 틀락스칼라 사이의 꽃 전쟁은 1450년대에 있었던 자연재해가 기원으로 여겨집니다. 1450년 폭설로 건물붕괴 및 추위와 감기로 사망자 다수 발생, 3년간 가뭄으로 다수의 아사자 발생, 비축한지 10년 된 곡식까지 싹 다 풀어도 역부족. 1454년 일식과 전염병 발생 등 자연재해가 연달아 덮쳤고, 삼도시동맹은 그시기까지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틀락스칼라 연합체 도시국가들과 함께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서, 꽃 전쟁으로 인신공양해 신들의 노여움을 풀고 이 위기를 극복해보자는 식. 현재 이 일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테스코코 왕족 출신인 익스틀릴소치틀의 기록, 스페인 선교사인 두란의 기록, 틀락스칼라 출신인 무뇨스의 기록의 세 가지가 남아있는데 익스틀릴소치틀에 따르면 순전히 신들의 노여움을 풀자는 제사(심지어 제안자가 틀락스칼라쪽), 두란의 기록에 따르면 신들의 노여움도 풀 겸 군사훈련도 하자는 이중적 의미, 무뇨스의 기록은 종교적 의미 그런거 없고 테노치티틀란이 성장하면서 틀락스칼라에게 예속을 종용하니까 틀락스칼라가 거부하고 그게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하고 있지요. 소위 말하는 제5태양신화와 연계된 것이다- 이건 당대의 기록에는 없어요.
4. 꽃 전쟁은 일단 양쪽이 동일한 숫자를 맞춰야 했고, 매복한다거나 함정을 판다거나 하는 편법 금지, 전문 전사만 참여 가능, 참여 전사 한명당 최대 6명의 포로만 가능, 경상을 입은 사람만 포로 가능, 정해진 전장을 벗어나지 말것, 자신이 잡은 포로를 남에게 양도하지 말것 등등 정해진 규칙이 꽤 엄격했습니다. 두란의 기록에 따르면 대상국도 틀락스칼라, 우에호싱코, 촐룰라, 아틀리스코, 테코악, 틀릴리우키테펙의 여섯개 도시국가로 제한되어 있으며 그 이유는 이 여섯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자신들과 같이 나우아틀어를 사용하지 않는 야만족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는군요.
참고로 저 물량제한은 아즈택 장기인 물량전을 봉쇄한 거고, 이게 의식적인 의미가 강함을 엿보이는 요소입니다. 찰코와 싸울땐 그런거 없었거든요.
5. 테노치티틀란과 틀락스칼라가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한 건 찰코가 아즈택에게 정복(1465년)당하면서부터입니다. 이 과정에서 테노치티틀란은 틀락스칼라를 북쪽으로 감싸면서 자연재해가 미치지 않는 해안선으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고(아즈택의 팽창에 자연재해는 굉장히 큰 요소를 차지합니다. 자연재해에서 몸을 피하고 다수의 도시국가들에게서 공물을 받아 버티기 위해서 말이죠) 여기에 틀락스칼라 연합체가 위기감을 느꼈거든요. 그렇게 되자 틀락스칼라측이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서 도시국가들을 선동해 아즈택에의 공물납부를 거부하는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기도 하는 등 아즈택의 팽창 저지에 나섰고 이에 아즈택은 예속 도시국가들이 개별적으로 틀락스칼라에 꽃전쟁을 걸게 하는 등 꽃전쟁 다굴로 틀락스칼라를 견제했죠. 이 시기부터 꽃 전쟁에 군사적 의미가 많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틀락스칼라의 군사력은 여전히 아즈택도 껄끄럽게 여길 정도로 강했고 이에 아즈택은 인신공양의 규모를 대규모로 키우면서 심리적 압박을 가하기도 했지요. 인신공양할 포로가 부족하진 않았습니다. 아우이초이틀 시기에 대외원정 성공으로 삼도시동맹의 영향권이 두배로 늘어나긴 했는데 덕분에 반란군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과팽창 상태였던 모양이니까요.
6. 그리고 마지막, 몬테수마 2세 시기에 아즈택은 틀락스칼라와 7차례의 전쟁을 벌입니다. 이시기쯤 되면 꽃 전쟁은 말이 꽃 전쟁이지 그냥 일반 전쟁화됐고 아즈택이 자신의 장기인 물량을 마음껏 뿜어내서 틀락스칼라를 압박했으며(첫 꽃 전쟁에서 아즈택이 10만 명을 동원했다고 합니다)틀락스칼라는 멸망의 위기가 찾아왔다고 공포에 빠지죠. 그런데 그 결과가...
1차전: 테노치티틀란 대패,
2차전: 테노치티틀란 대패,
3차전: 테노치티틀란 대패,
4차전: 무승부,
5차전: 테노치티틀란 대패,
6차전: 무승부,
7차전: 무승부,
여기다가 1차전 때 몬테수마 2세의 동생 둘하고(이중 하나는 몬테수마의 지위를 위협한 거 때문에 저지른 차도살인지계라고도 합니다만) 아즈택군 총사령관인 틀라카우에판까지 전사했고 거기에 대한 복수전(4차)이나 지난 전쟁에 대한 설욕전(2차, 3차, 6차)의 의미가 잔뜩 들어간 전쟁입니다. 뭐 이정도면 사실상 꽃 전쟁 명판만 달아놓고 니 뚝배기를 깨고 죽여버리겠다는 준 총력전이죠. 그리고 전쟁 패할 때마다 3도시동맹의 영향권 외곽에서 패권 자체를 위협하는 대규모 반란이 터지고 아즈택은 그걸 진압해야만 했고요.
여기서 인육농장론이 깨집니다. 니들 다 끝장내겠다고 전쟁하다가 몇번이나 패하고, 그렇게 질때마다 패권이 흔들릴 위기급 반란이 터지고... 이게 어딜봐서 인육농장입니까. 심지어 5차전때는 아즈택이 붙잡은 틀락스칼라 포로가 고작 80명이라고요. 뭐 이시기엔 판도상 포위상태가 되버린 틀락스칼라측이 공포심에 빠지긴 했습니다만.
7. 그리고 마지막. 코르테즈가 왔을 때의 아즈택, 말인데... 일단 몬테수마 2세 시기에 아즈택은 팽창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북쪽 타라스코 지역은 몇번씩 원정 시도했다가 모두 참패했고 남쪽은 산맥에 막혔거든요. 그런데 아즈택은 이미 지속적인 전쟁과 거기서 이기기 위한 개혁 과정에서 사실상 군사국가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신공양의 활성화, 대규모화 과정에서 사제집단이 비대화되고 관료조직화되면서 온갖 형식적인 인신공양 제사와 인신공양 제물로 만든 '섬뜩한' 물건들이 무지막지하게 나오는 것도 이때고. 소위 말하는 제5태양신화와의 연계도 이시기의 이야기. 그래서 사실상 정복할 곳이 틀락스칼라 정도밖에 안남았는데 일곱번 싸워서 잘 해야 비기기고 공격한 쪽이 뚝배기 깨지는 경우가 수두룩하게 나오는 판이니....
결국 인신공양 제물은 거의 다 반란군 포로에서 나왔더군요. 그런데 아즈택의 그 인신공양 규모를 생각하면 그 인신공양 제물을 충당할 정도로 반란군이 쏟아졌다는 건 뭐... 거기다가 삼도시동맹체였던 초중기 아즈택이 몬테수마 2세 시기에 테노치티틀란 단독패권으로 완전히 바뀌려 하면서 텍스코코, 틀라코판의 반발이 슬슬 눈에 보일 정도였고요.
여기서 코르테즈가 딱 하고 나타난 거죠. 이후는 뭐... 틀락스칼라나 반 아즈택 반란군들이 코르테즈 중심으로 뭉치고 테노치티틀란 단독패권 시도에 반발한 텍스코코와 틀라코판까지 코르테즈에게 붙으면서 패권국을 시도하다가 고립된 테노치티틀란은 멸망하고, 스페인 부왕령의 시대가 됩니다.
출처는 한국외대 중남미연구소 중남미연구 제35권(2016) 되겠습니다.
첫댓글 스파르타도 그렇고, 나치나 일제나 북한도 그렇고, 선군정치화된 군국주의는 외통수의 말로를 걷게 되지요.
외부세계(유럽)에 알려진 끔찍한 아즈텍은 외통수에 걸린 상태였고, 그 시기의 역사가 전 역사로 확대되어 보인건 아즈텍 입장에서는 불운이겠습니다.
..만 뭐 억울하다고 할 수는 없겠죠. 망조가 든 시기의 나치 역사가 전 역사 이미지를 대표한다 해서 이전 역사나 그 이미지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을겁니다.
하물며 십만 해골탑을 실제로 쌓아놓았던 것은 저 동네에서도 아즈텍 뿐이었으니..;;
십만 해골탑이 왜 문제가 될까요... 영국은 아일랜드 기근으로 200만이 굼주려 죽었고 인도독립 항쟁에서 천만다위의 세력을 갈아 엎었으며... 벨기에는 콩고의 주민을 백만단위로 죽였습니다. 징키스칸은 바그다드를 숙대 밭으로 만들었죠... 근대에 들어선 식민제국의 만행은 아즈텍의 식인에 비할 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근대이전 즉 근세시기 유럽에서 마녀사냥과 종교전쟁으로 도시가 숙대밭이 될때 입니다. 즉 역사적으로 봐서 당시대의 야만성에 비해서 아즈텍이 지탄을 받을 만큼 야만성이 극악한 것도 아니죠.. 그리고 아즈텍의 신성의식이 사람을 주식으로 삼는 시기도 아닌데 그게 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의문입니다.
@대명궁 물론 현재의 이성적 판단으로 과거의 행위를 정당할 필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에서 일어나 일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 혹은 침략의 구실이 정당화 되는 것은 분명하게 비판받아야 합니다. 인신공양 풍습의 야만성을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차후 그들이 받은 역사적 고통에 침략자들의 정당성의 구실로 사용되는 것은 언어도단이자 근거 없는 비난입니다. 미국에서 조차 클럼버스데이가 퇴출위기에 있듯이 .. 스페인의 신대륙 친입에 그 정당성은 줄 순 없습니다.
@대명궁 스페인의 악행과 아즈텍의 악행은 별개입니다.
아즈텍이 악하다 하여 스페인을 선하다 볼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저는 스페인의 선악을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왜 스페인을 옹호하는 것처럼 반박하시는지 의아하군요.
오히려 저는 나치, 일제, 북한, 스파르타 등 '군국주의화'된 여타 문명과 비교했는데 말이죠.
해당 문명들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키우거나 적을 만들었고, 이는 다시 군비를 증가시키는 부메랑으로 돌아왔으며,
다시 사회를 경직시켜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여타 대처방법을 근본적으로 봉쇄시켜버렸습니다.
이 시점에서 '외통수'가 발생하죠. 본문의 7번에 해당합니다. 반란이 이어지고 섬뜩한 물건이 쏟아지고..
@Draka 또한 문화상대론을 들어주셨는데, 그를 인정하기 위한 전제는 '그것이 인간종이라는 보편성에서 벗어나있는가'에 있습니다.
(전쟁을 제외한)살인과 식인은 인간이라는 종의 사회성을 말살시킵니다.
나를 '먹이'로 보거나 나에 대한 '살해 의도'가 분명한 개체들과 사회를 구성하는건 불가능하죠.
그것을 개인에서 집단으로 확대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을 제외'한 '보편적인 인간종'을 '먹이'나 '제물'로 대하는 시점에서 문화상대론을 적용할 여지는 인류학적으로도 '전혀' 없습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는 아즈텍을 제외한 여타 문명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관점이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