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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61권, 세종 15년 8월 28일 무신 3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각도 감사에게 노인 공경에 마음을 쓰지 않으면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을 내전하다 각도 감사에게 내전하기를, "늙은이를 공경하는 것은 국가의 아름다운 일이라, 그러므로 지난 임자년에 처음으로 양로하는 연회를 베풀고 대소의 늙은 신하들에게 몸소 나아가 손수 대접하였는데, 각 고을 수령들은 나의 뜻을 몸받지 아니하고 비록 모이어 대접한다 하여도 혹은 친히 대하지 아니하고, 비록 친히 대접할지라도 찬수가 매우 소박해서 늙은이를 공경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으니, 이제부터는 만일 마음을 쓰지 않는 자는 수령이면 중죄로 논할 것이요, 감사도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하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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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61권, 세종 15년 윤8월 3일 계축 2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임금이 근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푸는데 노인에게 절하지 말라고 명하다 임금이 근정전에 나아가 양로연을 베푸는데 여러 노인에게 명하여 절하지 말라 하고, 4품 이상이 차례로 올라올 때 임금이 일어나서 맞고, 2품 이상은 전내에서 동서로 서로 향하여 자리잡게 하니, 동쪽에는 좌의정으로 치사(致仕)한 이귀령(李貴齡)과 검 한성 윤(檢漢城尹) 강의(姜毅)이고, 서쪽에는 검 한성 윤 유귀수(兪龜壽)와 검 판내시부사(檢判內侍府事) 김양(金亮)이며, 4품 이상은 월대 위에서 동서로 서로 마주 보게 하니, 동쪽에는 행 사직(司直) 이양달(李陽達) 등 5인과 전 소감(少監) 방유신(方有信) 등 5인이고, 서쪽에는 전 판군기감사 박계손(朴季孫) 등 4인과 전 부정(副正) 박영필(朴英弼) 등 6인이며, 5품 이하로 천인에 이르기까지는 전정 동서에 겹줄로 서로 마주보게 하니, 동쪽에는 전 사직(司直) 조의(趙義) 등에서 천인에 이르기까지 66인이고, 서쪽에는 전 중랑장(中郞將) 차막삼(車莫三) 등에서 천인에 이르기까지 65인으로 모두 합계 1백 55인이었다. 잔치가 끝나매 여러 늙은이가 술에 취하여 노래들을 부르면서 서로 붙들고 차례로 나갔다. 잔치 도중에 이귀령이 자리를 피하여 아뢰기를,
"신의 나이 88세이옵는데, 역대의 임금으로 오늘같이 늙은이를 공경한 분이 없었사옵니다. 전하께서 성대한 예의를 비로소 일으키시어 지난 해에 늙은 신을 옥뜰에 나오게 하시어 잔치를 갖추어 먹여 주시고, 이제 또 성대한 잔치를 베푸시고서 늙은이들의 오르고 내리는 데에 전하께서 일어서시어 대해 주시니, 신 등은 갚을 바를 생각하와도 어찌할 길이 없사옵고, 오직 성수의 무강하시기만 몇 갑절 빌 뿐이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거년에는 경의 용모가 수척하더니 금년에는 용모가 윤택하고 기력도 강건하니, 내가 매우 기쁘오."
하였다. 귀령이 또 아뢰기를,
"이번에 장수를 명하시어 파저강을 나가 치고서 온전한 군대로 승첩하였으니, 늙은 신이 몸으로 요(堯)·순(舜)의 융성한 시대를 만나서 엎드려 간우(干羽)128) 를 춤추는 기풍을 보게 되었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종께서 개국하신 이래로 사졸을 어루만져 길러서 사졸들이 알차고 튼튼하므로, 내가 조종들의 물려주신 포부를 이어받아 큰 공을 이룬 것이니, 이 어찌 나의 지어낸 바이리오. 실로 조종들의 신령한 도우심에 힘입은 것이지오."
하였다. 잔치 끝남에 이르러 또 아뢰기를,
"원하옵기는 신의 나이에 열두 해를 더하여 헌수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경의 아름다운 뜻을 알겠소."
하고, 귀령이 그대로 물러나갔다. |
세종실록 69권, 세종 17년 7월 28일 정유 6번째기사 1435년 명 선덕(宣德) 10년 관직을 제수한 노인에게 사모 품대를 착용토록 하다 예조에 전지하기를,
"나는 노인을 공경하는 뜻이 옛날의 제도에 기재되었던 까닭으로, 나이 90세가 된 사람에게는 이미 관작을 주었는데, 대저 이미 관작이 있다면 마땅히 장복(章服)이 있어야만 될 것이니, 만약 관대(冠帶)를 갖추지 않는다면 다만 의장(儀章)에만 결점이 있을 뿐 아니라, 관작을 임명한 실상도 없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는 경중과 외방의 대소 노인의 관직을 준 사람에게는 그 품질(品秩)에 따라 사모(紗帽)와 품대(品帶)를 착용하도록 하되, 만약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강제로 시킬 필요는 없으니, 이것을 경중과 외방에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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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71권, 세종 18년 1월 15일 신사 3번째기사 1436년 명 정통(正統) 1년
한창수·오승·원상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내리다 판돈녕부사 한창수(韓昌壽)와, 숭정 대부 참찬 오승(吳陞)과, 판중추원사 원상(元庠)에게 안석과 지팡이[几杖]를 내려 주었다. 창수에게 내리는 교지에는,
"인은 어버이를 살피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정사[政]는 노인을 공경하는 일을 먼저 해야 되니, 이것은 제왕의 성대한 전례(典禮)이며 고금의 일정한 규정이도다. 경은 명벌(名閥)의 기구(箕裘)003) 이며 왕가의 폐부(肺腑)이도다. 공경으로써 윗사람을 섬기매 일찍부터 충순(忠順)의 기풍을 나타내었으며, 검소로써 몸을 지키며 평소부터 교만 사치의 습관은 끊어 버렸었다. 번굉(樊宏)004) 의 삼가고 조심함과 같은 점이 있으며, 조광국(趙廣國)005) 의 겸손과 공손에 양보함이 없었다. 관질(官秩)을 높은 반열에 올려 주매 척리(戚里)에 모범을 보이었다. 늙은 나이는 이미 70세를 넘었으니 특별한 대우를 마땅히 달존(達尊)006) 에 더해야 될 것이니, 이에 전상(典常)을 따라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노라. 의척(懿戚)에게 융숭한 은혜를 베푸는 것은 내가 어찌 사정으로 하겠는가. 고년(高年)에게 존경하는 예절을 더하는 것은 옛날의 방법이다. 아아, 덕을 귀하게 여기고 나이를 높여서 나라와 함께 다 즐겁게 되기를 기약하며, 성품을 수양하고 심신(心神)을 화평하게 하여 영구한 세대에 늙지 않기를 바라노라."
하고, 오승에게 내린 교지에는,
"대신이 이미 노성(老成)의 덕이 있으매, 임금이 마땅히 은수(恩數)의 융성함을 더하게 되도다. 이것은 곧 일정한 규정이니 나의 사사로운 은혜가 아니다. 경은 몸가짐이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며, 타고난 성품이 진실하고 순수하였도다. 충근(忠勤)함은 일찍이 대대의 조정에 나타나서 시종토록 변함이 없었으며, 연치(年齒)는 이미 70세가 넘었으되 덕행에는 결점이 없었도다. 참으로 방가(邦家)의 구인(舊人)이며 낭묘(廊廟)의 숙망(宿望)이매, 진실로 특수한 은총이 아니면 어찌 달존(達尊)을 표창하겠는가. 이에 성주(成周)007) 의 구장(舊章)을 상고하고, 양한(兩漢)008) 의 고사(故事)를 거용(擧用)하여, 특별히 경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내리노니, 노년에 도움이 있기를 바라노라. 아아, 노인을 공경하고 현인을 높여서 보좌(輔佐)의 이익을 힘입고자 하니, 몸을 편안히 하고 힘을 도와서 장수(長壽)의 복을 영구히 받을 것이다."
하고, 원상에게 내린 교지에는,
"나이와 덕이 다 높으매 이미 달존(達尊)의 아름다움이 있었고, 인정과 의리가 더욱 도타우매 마땅히 총수(寵數)009) 의 융숭함을 더해야 될 것이다. 경은 평온하고 조용하여 허식이 없었으며, 겸손하고 공손하여 지조가 있었도다. 태조의 알아주심을 만나 척리의 은혜를 우대하여 받았고, 내 몸에 이르러서는 추반(樞班)의 귀한 벼슬을 특별히 제수하였도다. 70세가 이미 지났으되 덕을 지킴이 더욱 견고하니, 이에 작질(爵秩)을 고쳐 높은 데에 승진시키고, 겸하여 안석과 지팡이의 내림을 더하노라. 경은 혹 붙잡고 기대어 기체(氣體)의 온화함을 기르게 하고, 이미 편안하고 강녕하여 장수의 복을 영구히 받을 것이다." 하였다. |
세종실록 71권, 세종 18년 3월 26일 임진 3번째기사 1436년 명 정통(正統) 1년
허조가 사직을 원하나 허락치 않다 ..(생략) 윤허하지 아니하고 비답(批答)하기를,
"현인(賢人)을 높이고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제왕의 큰 규범이요, 의리에 따르고 사정(私情)을 잊는 것은 신자(臣子)의 큰 절개이다. 마땅히 안위(安危)의 기탁(寄托)을 명심(銘心)하여야 될 것인데, 어찌 거취의 계획을 경솔히 하는가. 경은 강의(剛毅)하고 정직한 자질을 타고 났으며, 자상(慈祥)하고 편안한 덕을 품고 있었다. 학문은 고금을 통달하고 기국(器局)은 경륜(經綸)을 품었도다. 도는 임금의 그릇됨을 바로잡을 만하고 행실은 풍속의 쇠퇴함을 격려할 만하였다. 사대(四代)의 임금을 보좌하되 시종 한결같은 성심이었다. 같이 조심하고 함께 공경하는 대신의 도량을 가졌으며, 예절을 의논하고 풍악을 만들어 이에 선정(先正)의 기풍을 따랐었다. 하늘이 충량(忠良)을 내려 주시어 이 세상을 잘 다스린 데에 이르게 하니, 진실로 진신(縉紳)의 모범이며 국가의 시귀(蓍龜)이다. 지난번에 쇠병(衰病)으로 재차 물러가 휴직하겠다는 청을 진술했으나, 이미 내가 임무를 맡겨 성과(成果)를 책임지우는 뜻을 저버렸고, 또한 어찌 경이 힘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는 충성을 다하기를 바랐겠는가. 그러나, 융숭히 예우(禮遇)하는 그 뜻을 감히 어길 수가 없어서 한관(閑官)에 처하여 조알(朝謁)을 덜고, 의약(醫藥)을 가까이 하여 정신을 수양하게 하여, 장수의 복을 받아서 보필의 이익을 영구히 힘입으려 하였으니, 도리어 사직의 중임을 맡긴 것인데 어찌 훈척의 신하가 아님을 싫어하겠는가. 연치(年齒)는 비록 높더라도 시청(視聽)만은 밝고 자세하며, 육체는 비록 파리하더라도 아직 근력은 편안하고 튼튼하매, 만년(晩年)을 온전하게 하여 공명(功名)을 보전하려 하니, 경의 자신의 처신으로는 사면함도 좋겠지마는, 좋은 계책을 아뢰고 큰 일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 나의 기대하는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경은 몸을 보전하고자 하고 나는 임무를 맡기고자 하니, 몸과 나라가 어느 것이 중하고 경하겠는가. 경의 현명(賢明)으로써 마땅히 선택할 바를 알 것이니, 나의 의지함의 간절함을 본받아 그대의 경제의 방법을 힘쓸 것이다. 사직하는 것은 마땅히 윤허하지 않겠다." 하였다. |
세종실록에서 노인 공경을 언급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노인을 공경하는것에 대한 세종의 아름다운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인 이귀령이
"원하옵기는 신의 나이에 열두 해를 더하여 헌수하나이다."라고 한 말도 멋진게
88+12=100
즉 오래살라는 축수를 보낸것입니다.
그러고 허조에게는 우리는 이미 역사커뮤니티들에서 자주 언급됬던
윤허하지 않는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첫댓글 늙은신하들:제발 은퇴시켜주세요ㅠㅠ
세종 : 하지만 난 노인 공격!
ㅋㅋㅋㅋㅋㅋㅋ 노인공경을 빌미로 가두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