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운찬 칼럼] 신발 끈을 다시 매야 할 때다
중앙일보
입력 2022.12.14 00:34 업데이트 2022.12.14 01:18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위기의 파도 더 크고 높아질 내년
야당 협조 없이 위기 극복 어려워
경직적·독점적 권력구조 혁파해야
‘공정과 상생’을 정치 지표 삼아야
2022년 임인년, 호랑이해가 저물고 있다. 박빙의 승부 끝에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도 7개월째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여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및 그에 따른 세계적 인플레이션과 미국의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 북한의 빈번한 미사일 도발, 이태원 참사 등 갓 출범한 정부에 결코 녹록한 시간은 아니었다. 새해에는 위기의 파도가 더 높고 넓게 몰아칠 것이라는 전망에 우려가 크다.
미국의 고립주의 경향은 바이든 행정부 들어 더 강화됐다.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 is back).” 고립주의로 일관했던 트럼프식 외교와의 단절 선언으로 우방의 기대를 모았지만, 실상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상징하듯 ‘자국 우선주의’였음이 분명해졌다. 가치와 명분으로 포장한 바이든의 정교한 경제외교 정책은 노골적이고 거칠었던 트럼프 노선보다 우리에게 더 버거운 짐이 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의 ‘디커플링’에서 비롯된 신냉전이 어느 수준까지 진행될지도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디커플링의 위기와 신냉전의 공포가 우리에게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할 것이라는 점이다. 한반도 안보 리스크 또한 파국의 뇌관이 될 수 있다. 동북아와 한반도에 신냉전 체제가 현실화되어 안보 리스크가 증대된다면 우리 국민과 경제가 받을 압박은 추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할 것이다. 한반도 안팎으로 국익을 지키기 위한 지혜가 절실한 상황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마주 보고 달리는 폭주 기관차 같다. 타협과 양보가 발붙일 공간이 없어 보인다. ‘협치’가 추방된 지는 오래됐다. 책임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의 위기가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다. 양당은 공당(公黨)이 아니라 사당(私黨)화 됐다. 정치 위기의 중심에 윤석열 대통령이 있다. 대통령은 다양한 이해와 갈등을 수렴하고 해결하는 중심체다. 국회와 야당을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삼아 대화와 타협을 지속해야 한다. 지난 정권처럼 ‘5년 임기가 끝난 후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이다’라는 단임제의 함정에 빠져서도 안 된다.
전 세계는 지금 지구적 기후 환경의 변화, 4차 산업혁명의 도래, 양극화로 인한 공동체의 붕괴라는 중대 전환점에 있다. 지속적 발전의 기폭제가 될지, 수직 하락의 기점이 될지 단언하기 힘들다. 인간의 역사는 ‘단선적 진보’로 일관하지 않았다. 급격한 정치·경제·사회의 전환대열에서 소외되거나 탈락한 개인과 집단과 국가는 언제나 있었다. 우리의 정치·사회가 과연 이걸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거대 야당의 협조 없이 이 위기를 홀로 극복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국민과 야당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첫째, 권력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권력을 다른 정치 세력과 나누는 것은 어렵다. 국민 주권을 왜곡하고 협치를 가로막는 5년 단임 대통령제와 중앙집권적 권력구조 때문이다. 이런 경직적이고 독점적인 권력구조를 혁파해야 한다. 승자 독식의 선거법과 적대적 공생관계인 양당정치 체제를 바꾸는 정치개혁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둘째, 국정운영의 방식과 인적 구성의 변화다. 대통령 비서실과 내각을 대폭 개편하여 국민에게 쇄신의 메시지를 줘야 한다. 그것은 대통령 신뢰 회복의 최소한의 조건이기도 하다. 집권 여당의 체질 개선에도 나서야 한다. 확실한 비전도, 투철한 사명감도 없으면서 대통령의 일부 측근들이 호가호위하는 여당으로는 지금의 위기를 돌파하고 국가발전을 선도하는 역할이 애당초 불가능하다. 약자와 동행하는 정부, 국민과 함께하는 여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셋째, 경제정책의 기본 철학도 바꾸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경제운용 방식은, 겉으로는 시장 지상주의를 외치면서 뒤에서는 정부가 시장에 깊숙하게 개입하는 자기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모든 정부가 결국 경제정책을 통해 시장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장개입의 과정은 정당하고 공정해야 하며, 개입의 수단은 공개적이고 적절해야 한다.
특히 경제운용의 패러다임을 균형성장으로 전환해야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 정부의 시장개입을 정당화하는 논거인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의 이면에는 급속한 압축성장, 불균형 성장의 병폐가 자리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생산자와 소비자가 더불어 같이 발전하는 동반성장을 경제정책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 양극화는 사회의 역동성을 마비시키고 저출산 등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해 사회 전체를 파탄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바이러스다.
정치의 근본은 민생을 돌보고 현안을 해결하는 것이다. ‘공정과 상식’만으로는 고질적인 숙제를 풀 수 없다. ‘공정과 상생’을 새로운 지표로 삼아 새 출발을 할 때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신종여시 즉무패사(愼終如始 則無敗事)’라 했다. “시작할 때와 같이 끝맺음도 신중히 하면 실패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초심으로 돌아가 신발 끈을 다시 매야 한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