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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詩 한 수, 연서(戀書)
尺素如殘雪(척소여잔설),
잔설처럼 하얀 비단 조각으로,
結為雙鯉魚(결위쌍리어).
잉어 한 쌍 만들었으니
欲知心裏事(욕지심리사),
내 맘속 일을 알고 싶다면,
看取腹中書(간취복중서).
그 배 속의 편지를 읽어보셔요.
―‘흰 비단 물고기를 만들어 친구에게 주다
(결소어이우인·結素魚貽友人)’
·이야(李冶·약 730∼784 · 8C · 盛唐代 女流詩人)
* 척소(尺素), 복중서(腹中書) : 편지.
* 쌍리어(雙鯉魚) : 그 시절에는 편지 겉봉에 잉어 두 마리를 그려 넣었다고 한다.
이야(李冶)라는 본명보다 계란(季蘭)이란 자(字)로 더 잘 알려진 여류 시인. 열 살 남짓에 출가하여 도교(道敎:Taoism)에 입문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당시 도사에 대한 예우가 특별한 건 없었지만 일부 권력에 가까운 도사들의 지위는 막강했다. 당 황실이 도교를 존숭하여 현종의 여동생 옥진공주(玉眞公主)가 도사로 출가할 정도였고, 이백이 벼슬을 얻기 위해 한때 두보와 함께 유명 도사를 찾아가 교분을 쌓기도 하는 등 도교의 사회적 지위는 상당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대부 집안에서 미혼의 딸을 도관(道觀)으로 내보내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야의 부친은 남다른 재능을 보인 딸이 지나치게 활달하고 자유분방하여 세상에서의 삶이 비뚜로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수행자의 길을 걷게 했다고 한다. 과연 출가 후 그녀는 도사로서의 수행 못지않게 당대 명사들과의 교류도 빈번하게 이어갔다.
그녀가 ‘내 맘속 일’을 한번 읽어보라는 시와 함께 편지를 보낸 상대는 당대의 유명한 승려 시인 교연(皎然). 평소 서로 시문을 주고받기도 하고 내왕이 잦았던 사이긴 했지만, 뜻밖의 연서를 받은 스님의 반응은 어땠을까. ‘천상의 여인 나를 떠보려고, 꽃으로 내 옷을 물들이려 하시네/불도를 수양하는 이 마음 흔들리지 않으리니, 지난번 꽃은 돌려드리리다.’(이계란에게 답하다·答李季蘭) 여도사가 편지 속에서 어떻게 사모의 정을 표현했는지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하나 둘 사이가 무덤덤한 관계려니 방심했을 스님의 답시에는 제법 재치와 운치가 엿보인다.
✺ 이야(李冶·약 730∼784)의 자는 계란(季蘭)이며 중국 절강성 서북에 있는 오흥(吳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거문고를 잘 타고 미모가 뛰어났으며 시적 재능도 뛰어나, 5~6세 어느 날 부친이 이야를 안고 있었는데, 뜻밖에 시를 읊조렸다는 것이다. … 때가 지나도/채워지지 않는 바구니/이내 마음/어지럽기만 하다(經未架却 心緖亂縱橫)…「장미를 읊다(詠薔薇)」라는 것이었다. 대번에 놀랜 부친은 부녀자답지 못한 행동이라며 내심 출가시키려고 결심을 했으나 이야는 가정에 매이는 것이 싫었다. 그 당시로서는 유교적인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도교道敎의 여도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야는 스스로 그 길을 택했다.
도교(道敎:Taoism)는 황제(黃帝), 노자(老子)를 교조로 하는 중국의 다신적 종교이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지(主旨)로 하는 노장철학(老莊哲學)의 류(流)를 받들어, 음양오행설과 신선사상(神仙思想)을 가미加味하여서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술術을 구하고, 부주(符呪), 기도 등을 행한다. 이러한 도교를 믿고 수행하는 사람을 일컬어 ‘도사’라고 한다. 이야는 도교를 구실삼아 도사가 된 뒤에 여러 남성들과 접촉하면서 자유 분망한 생활을 시작했다. 여성이라는 속박과 유교라는 관습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보다 자유롭고 당당해 보이고 싶었을까. 아니면 애욕의 화신이 되어 방탕하길 작심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관습을 거부하고 모든 속박에서 일탈하고 싶었을까.
✵ 그리움, 그리고 원망 (상사원相思怨)
人道海水深(인도해수심)
사람들은 바닷물이 깊다고 말하지만
不抵相思半(불저상사반)
내 그리움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리
海水尙有涯(해수상유애)
바닷물은 끝이라도 있을진대
相思渺無畔(상사묘무반)
내 그리움은 까마득히 끝도 없구나
携琴上高樓(휴금상고루)
거문고 옆에 끼고 누각에 오르니
樓虛月華滿(루허월화만)
누각에는 외로운 달빛만이 가득 하구나.
彈著相思曲(탄저상사곡)
상사곡을 켜노라니
弦腸一時斷(현장일시단)
애타는 간장은 한순간에 끊어지구나.
―이야(李冶·약 730∼784 · 8C · 盛唐代 女流詩人)
✵ 부부 (팔지八至)
至近至遠東西(지근지원동서)
지극히 가깝고도 멀기 만한 동쪽과 서쪽이여
至深至淺淸溪(지심지천청계)
지극히 깊고도 얕은 푸른 계곡이여
至高至明日月(지고지명일월)
지극히 높고도 밝은 해와 달이여
至親至疏夫妻(지친지소부부)
지극히 친하고도 소원한 부부관계여.
―이야(李冶·약 730∼784 · 8C · 盛唐代 女流詩人)
✵ 달밤의 이별 (명월야유별明月夜留別)
離人無語月無聲(이인무어월무성)
떠난 사람은 말이 없고 달은 소리가 없건만
明月有光人有情(명월유광인유정)
밝은 달엔 빛이 있고 사람에겐 정이 있습니다
別後相思人似月(별후상사인사월)
이별 뒤엔 임 생각이 달과 같건만
雲間水上到層城(운간수상도층성)
물 건너 구름을 뚫고 하늘에 이르렵니다.
―이야(李冶·약 730∼784 · 8C · 盛唐代 女流詩人)
* 유별(留別): 떠나는 사람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 작별함
*층성層城 : 중국 쿤룬 산맥(崑崙山 山脈) 곤륜산崑崙山의 정상, 즉 하늘을 뜻함.
✵ 봄날의 회한 (춘규원春閨怨)
百尺井樓上(백척정루상)
백 척 난간 위에
數株桃己紅(수주도기홍)
붉게 물든 복사꽃 몇 그루
念君遼海北(염군요해북)
아득한 북녘의 임 그리는 신세
抛妾宋家東(포첩송가동)
홀로 버려진 몸이로다.
―이야(李冶·약 730∼784 · 8C · 盛唐代 女流詩人)
* 遼海北(요해북) : 요해, 요동의 남쪽으로, 먼 북방.
* 宋家東(송가동) : 이야 자신이 초사의 대가인 송옥에게 버려진 여인에 비유.
✵ 버들 (류柳)
最愛纖纖曲水濱(최애섬섬곡수빈)
연하디 연한 사랑스런 버들가지 굽이도는 물가로 늘어지고
夕陽移洞過靑蘋(석양이동과청빈)
골짜기로 옮겨진 석양은 부평초 사이로 지나간다
東風又染一年綠(동풍우염일년록)
동풍은 다시 한 해의 푸름을 물들여 주고
楚客更傷千里春(초객갱상천리춘)
초객은 아득한 봄에 더욱 서글퍼진다
低葉己藏依岸櫂(저엽기장의안도)
바닥의 잎새들은 물가의 노를 숨겨주고
高枝應閉上樓人(고지응폐상루인)
높은 가지는 누각 위의 사람마저 가리운다
舞腰慙重煙光老(무요참중연광로)
가늘은 버들가지도 굵어만 가고 아름다운 시절 다 지나가는데
散作飛錦惹翠裀(산작비금야취인)
흩어져 날린 솜 비단자락을 휘감아 도누나
―이야(李冶·약 730∼784 · 8C · 盛唐代 女流詩人)
* 靑蘋(청빈) : 부평초.
* 煙光(연광) : 좋은 시절의 아름다운 경치를 뜻함.
✵ 장미화 (薔薇花)
翠融紅綻渾無力(취유홍탄혼무력)
비취빛 잎새 붉은 봉우리 고개 숙일 적에
斜倚欄杆似詫人(사의난간사타인)
난간에 기대어 뽐내는 듯
深處最宜香惹蝶(심처최의향야접)
깊은 향기 나비 부르고
摘時兼恐焰燒春(적시겸공염소춘)
떨어질 땐 봄을 불태우는 듯
當空巧結玲瓏帳(당공교결영롱장)
허공에 둘러친 영롱한 휘장
著地能鋪錦繡裀(저지능포금수인)
땅에 펼쳐진 비단자리
最好凌晨和露看(최호능신화로간)
새벽이슬 머금은 요염한 자태
碧紗窗外一枝新(벽사창외일지신)
푸른 사창 밖에 새로 오른 한줄기
―이야(李冶·약 730∼784 · 8C · 盛唐代 女流詩人)
✵ 병문안 온 벗에게 (湖上臥病喜陸鴻漸至:호상와병희육홍점지)
昔去緊霜月(석거 긴상월)
지난날 무성히 서리 내린 달밤에 떠나가더니
今來苦霧時(금래 고무시)
이제 괴로운 안개 내리니 돌아 오셨구려.
相逢仍臥病(상봉 잉와병)
상봉은 하였으나 병들어 누워 있으니
欲語淚先垂(욕어 루선수)
말하고 싶어도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려.
强勸陶家酒(강권 도가주)
억지로 권하는 그대의 술잔에
還吟謝客詩(환음 사객시)
사령운의 시를 읊어 대신하려 하오.
偶然成一醉(우연 성일취)
우연히 한바탕 취해 볼 뿐
此外更何之(차외 갱하지)
이밖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소.
―이야(李冶·약 730∼784 · 8C · 盛唐代 女流詩人)
이야가 병중에 있을 때, 찾아 와 준 육우에 대한 감개무량한 마음을 표현한 시이다. 건중(建中) 원년인 780년에 《茶經(다경)》이 세상에 나오자 육우는 기뻐하며 태호의 개운관(開雲觀)으로 그녀를 찾아갔고 뜻밖에도 그녀는 병중이었다. 그러나 ‘여중시호’답게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육우의 방문을 환영하며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 광릉의 친구에게 (恩命追入留別廣陵故人:은명추입유별광릉고인)
無才多病分龍鐘(무재다병분용종)
재주 없고 병들어 시들어 버린 내 이름이
不料虛名達九重(부료허명달구중)
뜻밖에도 궁궐에까지 알려 졌다는 군.
仰傀彈冠上華髮(앙괴탄관상화발)
조심스레 관을 털어 머리 위에 얹고
多慙拂鏡理衰容(다참불경리쇠용)
수줍게 거울 닦아 시든 얼굴 단장했지.
馳心北闕隨芳草(치심북궐수방초)
마음은 달려가 궁궐 안 풀꽃을 따르고
極目南山望舊峰(극목남산망구봉)
눈은 아련히 남산의 옛 봉우리를 바라보았지
桂樹不能留野客(계수부능유야객)
계수나무도 은거하던 나를 머무르게 하지 못하고
沙鷗出浦謾相逢(사구출포만상봉)
갈매기도 물가로 나와 다시 만날 약속을 하더구먼.
―이야(李冶·약 730∼784 · 8C · 盛唐代 女流詩人)
작자가 궁궐로 들어가게 되면서 광릉에 사는 옛 친구에게 남긴 시이다. 당시에 이미 유명했던 시인의 이름을 전해들은 천자는 시인을 궁으로 불러들였고 왕명을 받아 입궁하게 되면서 광릉에 있는 옛 지인에게 남긴 시로 궁궐에 가기 전에 설레는 마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우정 어린 마음 등이 깃들어 있다. 시인은 몇 개월간 궁궐에 머물렀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야(李冶·약 730∼784 · 8C · 盛唐代 女流詩人)는 자는 계란(季蘭)이며, 오흥(吳興) 출신으로 아름다운 용모를 타고났고, 어려서부터 거문고를 잘 탔으며 시적 재능이 뛰어났다. 5,6세 즈음 어느 날, 아버지가 정원에서 그녀를 안고 있는데 이야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經時未架却 , 心緖亂縱橫’
때가 지나도 채워지지 않는 바구니,
이 내 맘 어지럽기만 하다.
5,6세에 불과한 어린 나이에 ‘詠薔薇 (장미를 읊다)’ 라는 시를 지어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부녀자답지 못한 행동”이라 여기며 어린 딸을 출가시키려고 했다. 당시 사회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길을 도사가 되는 길뿐이었다.
도사가 된 뒤, 그녀 역시 어현기와 비슷하게 여러 남성들과 교류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다. 도를 지나친 자유분방함과 개방적인 성격 때문인지 혹자는 그녀를 이렇게 평가하기도 한다.
‘선비에게는 백 가지 행실이 있고, 여인에게는 오직 네 가지 덕이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계란은 그렇지 못하다. 겉모습은 웅장한 듯 하나 쓴 시는 방탕할 뿐이다.’
고중무(高仲武)는 이야와 친했던 사람으로는 육우(陸羽)와 유장경(劉長卿)이 눈에 띤다. 육우는 이야가 병들어 누웠을 때, 진정 그녀를 이해하며 찾아왔던 친구였고, 유장경은 이야를 “여류 시인 중의 호걸이다.”라고 추켜세웠다. 호탕하고 개방적인 그녀의 성격은 궁궐까지 알려졌고 덕택에 그녀는 궁중에 들어가 후하게 대접받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그녀는 반란군에게 잡혔다고도 하는데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그 설이 진짜인지도 알 수 없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반란군의 장수에게 시를 지어 올린 것이 발각되어 덕종(德宗)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 〈이준식의 漢詩 한 수(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3년 12월 15일.(금)〉, Daum∙Naver 지식백과/ 이영일 ∙ 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 ∙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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