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 38권, 정조 17년 10월 8일 무진 2번째기사 병조 참판 임제원(林濟遠)이 상소하기를,
"(생략) 신은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복장 종류가 너무나 많은데, 군대 복장에 있어서도 융복(戎服)과 군복(軍服)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융(戎)은 군(軍)과 그 의미가 동일한 데도 굳이 구별을 두어 그 제도를 다르게 하고 이름을 융복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의의가 없습니다. 북포(北布) 온 필(匹)의 비단을 재단하여 대략 상고 시대의 의상처럼 만들고 또 절풍건(折風巾)에는 짙붉은 채색을 정교하게 칠해놓아, 넓은 소매에 넓은 채양이 이미 선명하고 아름다운데 또 치자물을 들여 장식하고 밀랍을 발라 꾸미니 모두 겉꾸밈만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갓을 쓰고는 세찬 비바람에 견디지를 못하고 이 옷을 입고는 말타고 달리기에 편리하지 못하여, 실제 사용하는 데는 온갖 방해로움만 있고 조금도 편리한 점은 없습니다. 이 제도가 《대전속록(大典續錄)》에 처음으로 보이는데,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찍이 《임진기문(壬辰記聞)》 가운데에서 고(故) 장신(將臣) 이일(李鎰)이 철릭[帖裏]과 종립(鬃笠)을 빌려 입고 썼던 일이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보면 의주 파천 당시 호위 신하들의 복색을 알 만한데, 당시를 상상해보면 진흙길에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갈 적에도 오히려 남색의 철릭을 입고 자색 입을 쓴 채 바람에 쭈그러지고 비에 젖어 늘어졌을 것이니, 만일 불행히도 갑자기 적과 만났더라면 그 복장으로 어떻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평상시 군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가 갑자기 전쟁을 만나 미처 변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옛날 효종(孝宗)께서는 무비(武備)에 관심을 두어 좁은 소매의 짧은 옷을 생각하셨다가 간신(諫臣)들이 상소하는 일까지 있었는데, 새로 큰 난리를 겪은 나머지 전쟁에 임하는 차림새를 갖춘 것은 깊은 생각과 원대한 계획으로 반드시 편리한 것을 헤아리고 알맞은 점을 고려하여서였던 것입니다. (생략) 신의 구구한 소견으로는 그래서 반드시 변경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다만 당장 재정을 축내야 하는 걱정과 앞으로의 신분 구별의 문제 등도 모두 생각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조정 관원 중에 생활이 좀 넉넉한 사람은 아주 적고 지극히 궁핍한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옷 한 벌과 갓 한 개도 힘을 다하여 겨우 마련하며, 또 어떤이는 임시로 빌려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략) 신의 생각으로는, 우선 시위(侍衛)하는 관원과 근신(近臣)만 모두 새 제도를 따르게 하고 뒤따르는 백관(百官)과 도성에 남아 있던 관원이 거둥을 맞이할 때의 복장은 아직 예전대로 하게 했다가 그 다음으로 어가를 따르는 관원들도 새 제도로 바꾸게 하고 또 그 다음으로 도성에 남아 있는 관원들도 모두 바꾸게 하면 2, 3년이 지나지 않아서 옛 복장은 절로 해지게 되고 새 복장을 점차 갖추게 되어 저절로 하나로 통일이 되고 재정도 크게 축내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군복 제도를 동일하게 고치면 높은 관원과 말단 벼슬아치가 구별이 없어지고 사대부와 군졸이 서로 뒤섞이게 될 것이니, 또한 귀한 이와 천한 사람을 표시해야 하는 뜻에 어긋납니다. (생략) 군교(軍校)의 복색에 있어서는 모두 예전대로 각각 자기 힘에 따라 하게 하고 꼭 단사(緞紗)나 저주(苧紬)의 등급을 따로 두지 말며 단지 정자(頂子)로써 식별하게 하는 것이 아마 시행상 편리할 듯합니다. 그리고 신이 생각하기에 참으로 제도가 그렇게 바뀌고 나면 철릭과 주립 등의 복색은 다른 데 쓸 곳이 없을 것이니 일체를 영원히 혁파한 뒤에야 비로소 한 사람이 두 가지를 마련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철릭에 있어서는 무신이 평상시에 입는 것이고 도신(道臣)이 관아에서 직무를 볼 때 입는 복색이므로 예전 대로 입게 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신의 이 상소를 내려보내 묘당으로 하여금 취사선택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상소에서, 철릭을 제거하고 군복을 착용하는 것이 실용적이고 재물을 절약하는 중요한 방법임을 강력히 말했는데, 고증이 해박하고 분석이 자세했으며 심지어 효종 때의 고사까지 인용하여 밝히면서 그대로 서슴없이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저번에 중신 이문원(李文源)이 연석에서 아뢰었을 때 그 말 끝에 즉시 승락을 못하고 따를까 말까 주저했던 것은 다만 풍속을 따라 다스려야 했기 때문에 여론이 어떠한지를 들어보고 싶어서였던 것인데, 경의 청이 또 이와 같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대신과 여러 재신들에게 널리 물어 의견 통일을 본 다음 품처(稟處)하도록 해야겠다."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