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무릎에 2개, 왼쪽 어깨에 한개. 세차례의 무릎수술과 한차례 어깨수술을 한 흔적이다. 오른쪽 어깨는 지난 4월 쇄골을 잡아주는 어깨인대가 끊어져 흉할 정도로 쇄골이 튀어나와 있다.
92년 8월 독일 2부리그인 부퍼탈에서 오른쪽 무릎의 십자인대가 끊어졌다. 바이에르 레버쿠젠의 아마팀에 있다가 부퍼탈로 옮기면서 4경기에서 3골 2도움을 기록한 나는 두려울 게 없었다. 그러다 다섯번째 경기에서 무릎을 다쳤다. 옆에서 들어온 태클에 걸려 넘어졌는데, 무릎과 허벅지 사이의 뼈가 바깥쪽으로 확 나갔다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수술 직후 의사가 "6개월 정도 축구를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마취가 풀렸을 때는 심하게 말해 '무릎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독일에 간 나는 부상이 아니더라도 타향살이가 힘들었다.
밥을 직접 해 먹어야 했는데 그때의 기억 때문에 요즘도 부엌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부상 때문에 괴로웠지만 1부리그에 대한 꿈이 커 축구를 그만둘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닥터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재활에 전념했고 6개월 만에 그라운드에 다시 섰다.
부상에서 완쾌된 뒤 두번째 경기 만에 같은 무릎의 연골이 파열돼 2차 수술을 받았다. 거동을 못하던 나는 연골수술을 하기 직전에 만난 지금의 아내(정지원씨·당시 어학연수 중)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내는 서울에 있던 장모에게 꼬리곰탕 만드는 법을 물어보기도 했다. 장모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괘씸해했다고 한다.
독일에서의 2년은 가장 힘들었다. '독일을 향해 소변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93년 국내로 돌아와 포항에 입단했고 크리스마스에 결혼했다. 사람들은 "하늘이 독일에 운동하러 보낸 게 아니라 짝을 만나게 하려고 보낸 것 같다"고 말했다. 95년 K리그에서 8경기연속 득점을 한 나는 96년 올림픽팀과 대표팀, 소속팀에서 60여경기를 뛰며 무릎을 혹사한 탓에 97년 5월 또 십자인대가 끊어져 수술을 받기 위해 다시 독일로 향했다.
10여개월 만인 98년 3월 성남과의 아디다스 개막전에서 복귀전을 치렀다. 당시 대표팀의 차범근 감독을 비롯해 모든 관심이 내게 쏠렸는데, 2골을 넣어 우여곡절 끝에 살아났다. 4월1일 한·일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린 나는 '이제 월드컵에서 펄펄 날면 소원을 이루겠지…'하고 기대했다. 아프지 않다면 잘할 자신이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안 될까. 월드컵 직전인 6월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GK와 부딪쳐 또 무릎을 다쳤다. 절망적이었다. 월드컵을 벤치에서 지켜봐야 했다.
아버지 건강이 좋지 않아 벌어놓은 돈도 없는 데다 프로축구 최고 연봉인 1억2,000만원을 받기 시작한 시점에 입은 부상. 에이전트사인 이반스포츠 이영중 대표가 일본행을 제의했다. 그것은 한 줄기 희망이었다. 98년8월 세레소 오사카로 옮긴 뒤 99시즌 득점왕에 올랐다. 가시와 레이솔에서 뛴 2000년 말에는 습관성 어깨탈구를 치료하기 위해 수술대에 올랐다.
히딩크 감독 아래서도 부상은 잦았지만 끈질기게 버텼다. 98년 월드컵에서 잘했다면 벌써 대표팀을 은퇴했을지 모른다. 한국 나이로 서른다섯의 공격수가 월드컵에서 뛴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다. 이번 월드컵 직전 은퇴를 선언한 것은 마지막 투혼을 펼치겠다는 '의지'였다.
폴란드와의 1차전에서 선취골을 넣고 첫승을 올린 지난달 4일. (고)정운이형과 (서)정원이 등 주위에서 전화가 왔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네. 끝까지 망가지지 않고. 아주 잘됐고 고맙다"는 말을 나눴다. 16강이면 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4강까지 올랐다.
사람들은 내가 운이 나쁘다고 하는데 부상이 많아서 그랬지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다. 황새클럽 등 주위에서 걱정을 해 줘 좋은 결과가 나왔다. 마지막에 이렇게 잘할 수 있는 사람을 불운한 스트라이커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