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 부분을 먼저 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기독교는 그 정체성을 성경에 기반을 둘 정도로 성경해석에 대한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아마도 기독교 신학에서 <해석학적 패러다임>의 문제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성경 역시 해석학의 문제로 귀결된다.
(*'성경'과 '성서'의 표현 차이는 무엇인가? 물론 뜻이야 같겠지만, 굳이 짚어낸다면 성경이라는 표현이 성서라는 표현보다는 좀 더 종교적 경외감이 배여 있다는 점일 게다. 이에 비해 성서라는 표현은 약간 객관적 거리를 두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인지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을 잘 관찰해보면, 보수 측은 성경이라는 표현을 잘 쓰는 반면에 진보 측은 성서라는 용어를 더 빈번하게 쓴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글에서 두 표현 모두 자유롭게 쓸 것이기에 미리 참조해두길 바란다.)
기독교에서 진보와 보수의 결정적 구분은 '성서해석'
언젠가 어떤 분이 나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자꾸 보수와 진보 운운하는데, 기독교에서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 있는 그 결정적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개인구원과 정치 사회적 구원의 유무? 에반겔리즘이냐? 에큐메니즘이냐? 혹은 기독교배타주의냐? 종교다원주의냐? 한국 기독교의 야사에는 이에 대한 답변을 가늠케 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언젠가 국내 진보 진영의 학자들이 보수 진영의 학자들에게 우리가 한 자리에 모여서 허심탄회하게 한국 기독교를 위한 대토론회를 크게 열자고 제의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보수 진영의 학자들은 처음에 거절했다. 그러자 진보 측은 다시 제의하길, 그렇다면 그냥 비공식적이라도 한 번 모여보자고 제의하자 보수 측이 이를 수락했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양 진영의 신학자들이 지리산에서 숙식을 하면서 한국 기독교의 일치를 위한 허심탄회한 토론 자리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여전히 보수와 진보의 화합으로 이어지지 못했었는데, 그렇게 서로 합의되지 못했던 그 결정적 지점은 개인주의니 사회변혁이니 에반겔리즘이니 에큐메니즘이니 배타주의니 종교다원주의니 하는 그런 지점이 아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성경해석 즉, 성서비평의 유무에서 서로 첨예하게 갈라졌다고 하였다. 참고로 이 에피소드의 출처는 그때 계셨던 교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바다.
'성경적'이라는 표현의 함정
성경해석에 대해 본격적으로 거론하기에 앞서 두 가지 사항만 짚고 넘어가자. 첫째는 '성경적'이라는 말에 대해서다. 흔히 기독교인들은 '성경적'이라는 표현을 무지하게 잘 쓴다. 이러한 '성경적'이라는 표현은 일반 신자든 목사든 누구든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무엇을 하든 성경적으로 하라고 말한다. 이 '성경적'이라는 표현은 '복음적' 혹은 '기독교적'이라는 말의 쓰임과도 흡사하게 기독교인으로서 지향해야 할 최상의 지점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똑같은 성경책 한 권을 두고서도 저마다 그 해석을 다르게 한다는 점이다. 어떤 때는 한 구절을 놓고도 그 해석이 서로 첨예하게 갈라진다. 심지어 같은 구절을 두고 번역본도 저마다 다르다. 킹제임스역본, NIV, RSV, 개역, 공동번역, 새번역 등 헤아릴 수 없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나는 히브리어, 헬라어 원문을 보길 권하며, 여의치 못할 경우 많은 번역들과 서로 대조해보면서 뜻을 찾아가길 권한다.
'성경적'이라고 하는 말의 함정에 대해 예를 들어보겠다. 성경이 쓰인 여성에 대한 입장이 그러하다. 현재 추세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점점 줄어들고 상호평등을 지지하는 교단이 늘어가긴 하지만,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진영도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다 . 실제로 성경 본문을 찾아보면 여성에 대한 비하가 허다하다(본 연재물의 '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7)' 글 참조. 믿기지 않는다면 직접 성경을 찾아보면서 대조해봐도 좋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이 말이다.
최근 시끌벅적대고 있는 '사형제 논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보수 기독교 단체인 한기총은 사형제를 지지하는 이유가 성경적으로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사형제를 반대하는 진보 진영 역시 성경을 얘기하지만 한기총과는 전혀 다르게 성경을 독해해낸다. 그 내용을 일일이 여기서 나열하진 않겠다. 이런 현상은 비단 오늘날의 경우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노예제를 정당화했던 그 근거 역시 성경에 기인한다. 반대로 노예제 반대 역시 성경에 기인하고 있다. 노예제 때문에 창세기 9장의 함의 저주 본문과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이 서로 부딪히기도 한다(<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살림) 참조). 같은 성경끼리 부딪치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철폐가 성경적으로 옳은가? 아니면 존속유지가 성경적으로 옳은가?
나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성경은 때로 사람을 살리기도 했지만 무수하게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물론 성경을 그릇되게 해석한 자가 사람을 죽였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뜻하는가. 즉 성경은 결국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죽임의 책'이 되기도 하고 '살림의 책'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성경은 무섭고도 끔찍한 책이었던 적도 많았었다.
'성경적'이라는 표현은 하나마나한 말
그렇기에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경적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하나마나 한 표현이며, 별로 쓸모도 없는 비생산적인 표현일 뿐이다. 성경적이라는 표현은 그냥 ‘가장 옳고 타당한 것’이라는 의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흔히 쓰는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표현은 '가장 옳고 타당해야 한다'는 말의 동의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으로 돌아가라' '성경에 기반하라' 등 이런 얘기들도 마찬가지로 죄다 하나마나한 말이며, 그저 '뜻에 맞게 잘해보라'는 뜻의 동의반복일 뿐이다. 실제로 우리에겐 저마다의 다양한 성서해석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상 가장 중요한 것은 해석상의 문제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가장 좋은 것인가?
성경의 숱한 오류와 불일치들(직접 성경을 찾아볼 것!)
중요한 점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 두 번째는 성경에는 오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다. 대다수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쓰인 오류를 모르거나 알아도 애써 인정치 않으려 한다. 이때 성서는 완전무오하다고 주장하면서 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자들이 곧잘 써먹는 레퍼토리 구절 중의 하나는 특히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언급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그런 식의 대응은 도무지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처사다. 도대체 자기 주장의 근거를 자기 주장에 둬버리는 처사가 어디 있는가? 게다가 디모데후서의 그 구절이 가리킨 성경이란 것도 본래는 당시의 구약의 경전을 말한 것이었지 디모데후서를 포함한 신약성서는 포함되지도 않았던 것을.
하지만 이런 저런 얘기할 것도 없이 기계적 영감설이든 유기적 영감설이든, 나 자신이 여기서 성경의 오류들을 직접 찾아서 보여주면 될 것으로 본다. 감히 말하지만, 성경에서 오류들을 찾아내는 것은 정말 '식은 죽 먹기'보다도 더 쉽다. 일단 앞서 말한 '성차별 전서'에서 추려낸 신구약 구절들만 봐도 그러한 오류의 사례들이 한 둘이 아님을 알 것이다.
▲ 성경은 특히 차별당하는 여성의 입장에서 볼 경우, 너무나 많고도 분명한 오류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예컨대 전도서 기자는 남녀를 비교하면서 "해답을 찾는 남자는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지만 여자들 가운데는 하나도 없다"(전 7:28)라고 말하고 있다. 명백하게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고 있는 성차별적 구절이다. 버젓이 하나님의 말씀인 양 담겨 있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한다. 이런 성차별적인 성경구절들은 성경 곳곳에 참 많다.
그럴 경우, 성경이 완전무오하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성차별적 인식과 태도는 매우 성경적이며 자연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여성을 비하하는 예장 합동측 목사의 기저귀 발언이 그저 나온 얘기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물론 성경에는 여성에 대한 오류 사례만 있지 않다.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모를 지경일 정도로 말이다.
서로 말이 안 맞는 성경
성경에는 불일치의 사례들도 허다하다.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 4절 이하에 나오는 두 가지 창조이야기를 보면 서로 창조순서가 모순된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례 중 하나다. 노아홍수의 기사도 두 번 반복되는데, 창세기 6장 19절에는 모든 짐승들이 암수 한 쌍씩 방주에 들어가지만, 7장 2절에 보면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두 쌍씩, 공중의 새는 암수 일곱 쌍씩 방주에 들어가도록 하고 있다. 도대체 누구 장단에 맞춰야 하는 것인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족보는 서로 일치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널리 알려진 성경의 불일치 사례에 속한다.
놀랍게도 성경에는 하나님이 사탄과 동일한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사무엘하 24장 1절을 보면 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백성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부추기셨다고 나오는데, 역대기상 21장 1절을 보면 놀랍게도 똑같은 구절인데, 거기에는 사탄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다윗을 부추겼다고 나온다. 도대체 누가 시킨 것인가? 하나님이냐? 사탄이냐? 때에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을 사탄으로 살짝 둔갑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어떤 것은 성경을 쓴 기자가 착각해서 잘못 인용한 구절들도 있다. 마태복음 27장 9절에서 성서 기자는 예언자 스가랴가 11장에서 한 말을 예레미야가 한 말이라고 잘못 착각하고 있다. 아무래도 마태복음을 쓴 성서 기자는 예레미아 32장 6~9절의 내용과 잠시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마태복음 기자가 인용한 구약성경의 그 구절만큼은 예레미아의 것이 아닌 스가랴의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경은 생물학적 사실마저 왜곡하기도 하는데, 곤충 다리가 네 개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레위기 11장 20~23절). 하나님 혹은 레위기 기자가 곤충 다리를 잘못 세어 본 것인가? 이처럼 성경에 나타난 시시콜콜한 오류와 불일치의 사례들까지 죄다 따진다면 부지기수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쓰인 하찮은 토씨하나까지도 어떨 땐 매우 중요하게 보잖은가.
이런 세상에! 성경은 완전무오한 책이 아니었던가요?
성서에 대해 투명하고 솔직하게 대하라!
누구든 좋다. 성경이 완전무오하다고 보는 사람이 있으면, 이러한 오류와 불일치들에 대해서 제발 좀 온전한 설명들을 해보라. 보수진영의 캡짱 석학이 나와서 나와 공개토론을 해도 좋다. 이러한 온갖 오류와 불일치의 사례들은 위에 언급한 것 외에도 너무나도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만에 하나 우리가 이를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일단 성경에도 오류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함이 마땅한 것이고, 정직한 태도일 것이다. 성경의 오류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기는 싫다고 한다면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로 전락하든지!
원컨대, 나는 성서에 대해 제발 좀 솔직하게 대할 것을 권한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 위한 그 출발점이다. 혹자는 이런 오류들에 대해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에 '원본무오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의 오류를 말한 것이다. 여기서 갑자기 원본을 거론하는 것은 핀트가 어긋난 것이며, 역사적으로 원본이 발견된 사례도 없다. 이런 얘긴 논증 불가능한 것을 끌어들여 물타기 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원본 무오설은 적어도 사본 오류설만큼은 인정한다는 얘긴가?
혹자는 성경의 불일치와 모순은 그저 성서기자들 진술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예수 사건 하나를 두고 마태와 누가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서로가 보는 강조점의 차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차원이 있음은 나 역시 당연히 염두에 두고 있는 바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이 지금 들먹이고 있는 지점은, 한 사건에 대한 양립 불가능한 두 진술에 대한 지적들이다.
이를테면 마태복음의 예수는 적어도 헤롯왕이 죽기(B.C. 4년) 전에, 반면에 누가복음의 예수는 인구조사 때(A.D. 6년) 태어난 것으로 되어있다. 무려 십 년이 넘는 시간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이집트로 그리고 최종적으론 나사렛으로 간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따르면 요셉과 마리아는 이미 나사렛 사람들이었고(눅 2:39), 잠시 베들레헴에 들려서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오는 걸로 나온다. 이때 마태복음의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곧 이집트로 피신가지만, 누가복음의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40일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된다. 어떻게 한 인물이 동시에 전혀 다른 두 시간과 두 공간에 공존할 수 있단 얘긴가? 두 번 태어났단 얘긴가?
혹자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성경에 이러한 오류가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지 않다고. 물론 궁극적으로는 나 역시도 그렇게 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지금의 관건은 성경에 오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이 문제부터 우선 확실하게 먼저 짚고 나가려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에서 금이야 옥이야 지켜왔던 성서무오설이 정말로 틀린 것이라면, 그렇다면 오히려 성서오류설이 맞느냐? 라고 내게 반문할 것이다. 분명하게 답한다면 "그렇다"이다.
성경의 오류설에 대한 보수 측의 반론
이에 대해 보수 측 기독교인 존 C. 라일의 말처럼 어쩌면 이렇게 반론할 수도 있다. "성경의 기자들이 실수를 범할 수 있고 또한 모든 것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원칙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신앙의 기초에 있어서 그 어떤 확실한 것도 그 어떤 굳건한 것도 그리고 그 어떤 신뢰할 만한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안개가 하나님의 책 위에 내리깔려 모든 장들을 불확실성으로 감싸버릴 것이다. 성경의 기자가 언제 실수를 범하였고 언제 실수를 범하지 않았는지 그 누가 결정할 것인가?
어디에서 영감이 끝나고 어디에서 영감이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영감 받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다른 사람들은 영감받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내가 의존하고 있는 본문들이 필사자에 의해 삽입된 부분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나는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감동된 저자들의 손을 거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축자적으로 완전하며 실수가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나는 성령으로 감동된 저자들이 그들의 주제의 선택과 단어의 선택에 있어서까지 성령에 의해 무오하게 인도하심을 받았음을 믿는다."
언뜻 보기에 이 사람의 주장은 매우 신실한 신앙인의 것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러한 자의 생각은 매우 순진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서 진리를 찾아가는 그 과정의 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저러한 혼란과 불확실로만 귀결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해서 이것이 '무조건 믿음'이냐 혹은 '불확실성'이냐의 양자택일적 가능성으로만 기울지도 않을뿐더러 곧바로 신앙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또한 지금까지 숱하게 언급한, 피할 수 없이 명백한 성경의 오류와 불일치의 사례들에 대해 보수 진영의 신학자들이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도 여전히 궁금할 따름이다. 메첸, 핫지, 워필드, 린드셀 등등 이런 골수 근본주의자들이 뭘 알겠는가. 소위 복음주의권에서도 인기짱이라는 멍청한 프랜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가 제아무리 올바른 성경관 운운한대도, 내게는 그런 자들의 항변들이 너무나도 참을 수 없을만큼, 가소로운 아규로만 들릴 따름이다.
저들은 성경 안의 분명한 의문들에 대해선 전혀 눈을 감고 있는 소경들에 지나지 않는다. 분명히 말하지만, 저들은 제대로 된 온전한 설명들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진리 탐구의 다른 가능성들에 대해선 고려되지도 않는다. 결국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니 이들을 따르던 기독교 신자들도 어떻게 되겠는가. 죄다 무지의 구렁텅이에 빠질 뿐이다.
마침내 저들은 성경의 통일성 운운하면서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로 전락하게끔 만든다. 굳이 성경 안의 무수한 오류와 불일치 사례들에 대하여 보수 기독교인들의 궁색한 답변들을 찾는다면, 그저 '무조건 믿어라' '그 문제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인간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성경을 알 수 있을 뿐, 인간의 지식으론 알 수 없다', 뭐 그런 식으로 기울기 십상이잖은가. 이런 레퍼토리들은 참으로 지겹기 짝이 없다.
나는 성경의 오류 문제를 제대로 인정하고 들어가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무오류의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성경해석에 대한 이 글이 계속 연재되면서 충분히 알게 될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왜 성경의 오류와 함께 가야하는지를 말이다. 제발 부탁드리건대, 얄팍하게 성서를 논하지 말라!
성서무오설 혹은 성서문자주의야말로 사탄의 교리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성서무오설 혹은 축자영감설 같은 성서문자주의 태도야말로 오히려 성경을 사탄의 바이블로 만든다는 사실을. 이것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성경을 생명살림의 책이 아닌 생명죽임의 책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특히 한국교회에서 성경의 오류를 얘기하면 금기시된다. 성서는 무조건 백퍼센트 역사적 사실이며 완전무오하다는 것이다. 성서문자주의가 최고로 편한 입장인 것이다. 만일 평신도가 성서비평을 알고서 머리가 커질 경우 목회자로선 여간 껄끄럽지 않을 수 없을 게다. 하지만 성경의 오류 문제는 이미 학계에선 일반화된 얘기다. 그것이 일반교회 안에서는 금기시되고 소통이 안 되고 있는 것뿐이다.
소위 말하는 복음주의(온건주의) 진영의 가장 치명적 한계도 바로 이 성서무오설에 대한 입장이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거나 지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죄 많은 세상과 역사 사회에 대한 관심은 가지고 있다. 기독교세계관 또는 성경적 세계관을 말하면서도 성경의 오류와 역사적 비평들에 대해선 명확한 검토를 보여주진 않는다.
얼마 전에 성대하게 치러졌다는 복음주의 진영의 행사였던 '성서한국' 단체의 신앙고백문을 보면 이들 역시 성서무오설에 기반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점도 별로 놀라운 사실이 못 된다. 성서한국의 성서 역시 태생적 한계를 지닐 뿐이며, 사실 이것은 복음주의 진영 전반의 치명적 한계와도 맞물려 있다. 또한 이것은 내가 'IVP'니 '두란노'니 '생명의 말씀사'니 하는 출판사 서적들을 대체적으로 유감스럽게 보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언뜻 보기에 저들은 신실한 것 마냥 '성경적', '복음적' 운운하지만 정작 알고 보면 저들이야말로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제대로 무지하거나 혹은 솔직하지 못하거나라는 얘기다. 제발 성경 안의 분명한 의문들과 오류들에 눈감지 말라! 결국은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로 전락되기 쉽다.
▲ 소위 복음주의 진영의 행사였던 '성서한국'도 결국은 성서무오설에 기반해 있다. ⓒ 뉴스앤조이
아무리 정치, 사회,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복음주의 진영이라고 하더라도 분명하게 성서무오설을 전제해버리면 그 역시 언제라도 보수 근본주의로 회귀될 가능성을 안고 가는 것이기에, 진보 진영이 이들 중도 진영을 두리뭉실한 집단이나 혹은 이들마저 느슨한 보수쯤으로 규정하는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사탄은 마침내 기독교를 선택했습니다!
이렇듯 나 자신이 지금까지 조금 심하게 얘길 내뱉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성서문자주의가 주는 폐해가 너무나도 끔찍하고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 매우 심각한 문제다. 성서무오설은 그리스도교를 좀먹는 매우 치명적인 '독 중의 독'이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예장(대한예수교장로회)과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이 역사적으로 갈라진 직접적 이유도 바로 이것과 관련한다.
당시 기장 교단을 세웠던 김재준 목사는 성서비평을 받아들였던 자였고, 보수적인 장로교단은 이를 용납하지 않은 채 축출해버렸던 것이다. 이때 한국의 보수 근본주의 신학의 대부였던 박형룡은 성서무오설의 잣대로 김재준을 축출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역사는 안다!
오늘날 예장통합 측의 장신대에서는 그 후로 뒤늦게나마 성서비평만큼은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당시로서 그 얘길 했을 때 김재준 목사는 장로교단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김재준은 성서비평이라는 학문의 자유와 사회역사 참여를 부르짖으며 한국 기독교 역사의 찬연한 진보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교단을 세웠던 것이다.
또한 웃기지도 않은 '창조과학회'가 과학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것도 실상은 성서문자주의 태도에 기인한다. 즉, 저들은 성서무오설을 우선 전제해놓고서 거기에다 과학적 지식을 끼워 맞출 뿐이다. 그 궁극적 실체는 어디까지나 자연과학이 아니라 성서문자주의가 먼저 자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창조과학회는 근대 모더니티와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보수적 반동으로서 형성된 것으로, 애초부터 보수 근본주의의 맥락과 철저히 같이했던 단체이다. 근래에 회자되는 '지적설계' 패거리들 역시 이러한 맥락을 계승하고 있는 변형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언뜻 느끼기에 성서를 완전무오하다고 보는 입장이야말로 기독교의 하나님을 매우 굉장히 높게 숭앙하는 것같이 여겨지지만, 실은 이것이야말로 사탄의 놀라운 전략과 전술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같은 성서무오설의 임무는 놀랍게도 '신앙의 탈을 쓴 무지'로 안내할 뿐 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맹신이다.
잊지 말라.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다기보다 아예 기독교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겠지만, 보수 신앙인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어려서부터 다녀왔던 가까운 교회 목사님이 말씀하신 기독교가 우리가 믿는 기독교 세계와 신학의 전부인 줄 알고서 몸에 배여 왔던 것뿐이며, 그렇기에 그 실상은 속아왔던 것이었다. 그 자세한 내막들은 다음 글에서 보여주고자 한다. 평화가 평화의 이름으로 유린되듯, 성경은 성경의 이름으로 짓밟히고 오히려 그 뜻은 은폐된다.
솔직하고 건강한 합리성에 기반한 기독교를 위하여!
부디 하나님 앞에서도 혹은 성경 앞에서도 언제나 솔직히 대할 것을 권한다. 나는 확신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조건 믿습니다'라는 기도보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혼란스럽습니다'라는 기도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어여삐 보실 거란 점을. 왜냐하면 거기에는 진정성이 있기 때문이다.
'혼란'이란 지금까지 자족해왔던 세계에서 안심하고 있다가 미처 알지 못했던 보다 새로운 차원과 조우함으로써 빚어지는 과정일 뿐이다. 다시 말해 위기가 곧 기회란 말이 있듯이, 혼란 역시 새로운 성장과 도약을 위한 기회란 얘기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더욱 알기를 원하고 계신다.
미리 말해두지만, 성경에 대한 신뢰는 놀랍게도 그 오류마저도 신뢰하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의 글에서 기독교의 성경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경전인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내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서 말한다면 성경에는 다른 그 어떤 종교의 경전들보다도 더 놀랍고도 위대한 점이 담겨 있다고 본다. 성서는 닫힌 자들의 것이 아닌 열린 자들의 것이기에!
성서는 오류와 함께 간다! 나는 앞으로의 글에서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보다 더 심오하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설파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결코 말장난도 아니며 여기에는 진정한 성찰이 있음을 힘주어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숱한 오류와 모순 뒤에 계셨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그 오묘한 섭리를 함께 느끼기를 바라는 바이다.
앞으로의 글은 여러분들과 함께 올바른 성경해석 그리고 진리탐구의 방법을 같이 모색해보고자 할 것이다. 누구든지 좋다. 지금까지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성경해석에 대해 운운하는 모든 이론적 지식들을 총동원해도 좋겠다. 대체로 보수진영은 성서비평을 받아들이지 않는 반면에 진보진영은 받아들이고 있는 입장이다. 게다가 그 성서비평 연구에도 본문비평, 문헌비평, 양식사적 비평, 편집비평, 수사학적 비평, 구조주의 해석, 경전적 해석 등등 매우 많다.
나는 모호하거나 에둘러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지 건강한 합리성에 기반하면서 정정당당하고 솔직한 자세로만 임해주길 바란다. 부디 여러분들과 함께 여행을 떠남에 있어 지금까지의 고정관념들을 버리고, 사유의 지평을 생각지 못한 데까지 보다 더 확장하도록 노력하면서, 기존 성경관에 대한 근원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첫댓글매우 날가로운 지적입니다. 저도 성경을 읽다가 발견한 대목인데, 왕상15장 2절, 역대하 13장2절 & 역대하 15장 6절을 보면 유다왕 아비얌과 아사의 모친이름에 각기 달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오류에 대하여 목사님들께 질문을 던졌는데 답은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축자영감설은 아니라고 보여 집니다. 이어지는
제 견해를 밑에 리플로 달았으나 여기 한글 더적습니다. 정강길씨의 견해는 오히려, 성경무오설란것보다 더 않좋은 견해라고 보여지는군요. 그가 쓴글들을 읽다보면 알지만,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예수로믿을뿐, 그리스도로 믿지는 않는다는것 느낍니다. 그가쓴글에는 복음은 없습니다.그리고 문자그대로 믿을 말씀많습니다.
직접 칼럼을 찾아 읽어봤더니 마태는 요셉족보, 누가는 마리아 족보라고 변명을 해놓았더군요...이런 종류의 글은 성서학자들이 보면 웃을 일 같고요... 누가복음에 보면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하면서 족보를 시작합니다. 이 부분은 왜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나요? "마리아의 이상은 헬리요"라고 해야지~
첫댓글 매우 날가로운 지적입니다. 저도 성경을 읽다가 발견한 대목인데, 왕상15장 2절, 역대하 13장2절 & 역대하 15장 6절을 보면 유다왕 아비얌과 아사의 모친이름에 각기 달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오류에 대하여 목사님들께 질문을 던졌는데 답은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축자영감설은 아니라고 보여 집니다. 이어지는
글들 기대하겠습니다.
아주 아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앞으로 많이 많이 기대가 되네요...
제 견해를 밑에 리플로 달았으나 여기 한글 더적습니다. 정강길씨의 견해는 오히려, 성경무오설란것보다 더 않좋은 견해라고 보여지는군요. 그가 쓴글들을 읽다보면 알지만,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예수로믿을뿐, 그리스도로 믿지는 않는다는것 느낍니다. 그가쓴글에는 복음은 없습니다.그리고 문자그대로 믿을 말씀많습니다.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누가복음) ==> 문자그대로 믿나요?
지금다시보니깐. .. 더 분한마음이 드네요. 마태복음에 예수님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족보가 다른점. 국민일보 변순복교수 칼럼보면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결론은 이상할것 하나없고, 같은내용이다인데, 위에서는 그런글을 다생략하고 왜 다를까하고 의심만하고있군요.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을 때 문자적인 의미뿐 아니라 그 당시 상황을 바르게 비교 연구하는 것이 오해를 막는 길이다"==> 변순복교수의 바로 그 컬럼의 끝맺음 말이 참 우습군요.
문자그대로 믿다가도, 그런 명백한 문자적인 기록상의 오류가 나오면, 이런 표현을 쓰며 변명을 하다니...
직접 칼럼을 찾아 읽어봤더니 마태는 요셉족보, 누가는 마리아 족보라고 변명을 해놓았더군요...이런 종류의 글은 성서학자들이 보면 웃을 일 같고요... 누가복음에 보면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하면서 족보를 시작합니다. 이 부분은 왜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나요? "마리아의 이상은 헬리요"라고 해야지~
족보가 다르다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변교수님 말대로 성서저자의 강조점을 이해하면 그 뿐입니다. 별 변명을 다하면서 꿰어 맞추는 것이 이상한 것이라는거죠..
왜 다를까 하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자(로 추측되는)인 마태와 누가가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 본인이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 그당시 존재하던 서로 다른 전승을 채택해 올렸기 때문이죠....
국민일보 미션지에 왜 유대인들은 예수를 못믿나 칼럼보시면 자세하게 써있습니다. 오히려, 이분이 말하시는것보다 더 자세히 써있습니다. 성경은 정확합니다. 저는 그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변순복교수님은 이스라엘로 유학파로, 정말 확실히 말해줍니다.
성경은 일점일획이라도 변개 되어서는 안되는 일
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