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헬레나 부인은 일찍 남편을 여의고 아들 하나와 삽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데 아들에 대한 희망으로 늘 밝은 모습입니다. 하루를 사제관을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는 겁니다. 공부도 안하고 말을 해도 대꾸가 없다는 겁니다. 답답해 죽을 지경이라 했습니다. “사춘기가 왔나 봅니다. 너무 걱정 말고 대충 넘어가십시오.” 그러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주일 학생 미사에 나온 아들을 잠시 만났습니다. 엄마의 걱정을 전했더니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겁니다. “그럴 리가 있냐? 네가 아직 깨닫지 못해 그렇지 엄마는 온통 네 생각뿐이다.” 이렇게 말했지만 아이는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인을 다시 만나 아이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펄쩍 뛰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무슨 말씀을 하셔요? 제가 사는 이유가 무언데요? 저 아이가 없으면 사는 이유도 희망도 없습니다. 울컥해진 부인을 달랬습니다.
“아무리 엄마가 생각한다 하지만 아들이 엄마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문제 있는 것 아닙니까? 아들을 사랑하는 걸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엄마의 사랑을 깨닫도록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랑한다고 마음먹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희생없이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아녜스 씨는 불자였습니다. 신자인 남편을 만나 성당에서 혼인했지만 10년 넘게 세례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주일이면 미사에 참여하고 성당 상황도 교리도 훤했지만 세례는 받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지 뭘. 굳이 세례를 받게 하시려고요? 세례받고 안 나오는 아들도 많은데 그 정도면 훌륭한 며느리 아닙니까?”, “아이고, 신부님을 처음 부임하셔서 잘 모릅니다. 사람들 칭찬처럼 그렇게 착한 며느리 아닙니다.” 할머니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세례를 미룬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혼자되어 살아온 할머니는 며느리만 찾는 아들이 야속했습니다. 섭섭함은 간섭으로 바뀌었고 부인도 마음이 산란해 세례를 자꾸 미룬 겁니다. 세상일은 노력하면 빨리 해결됩니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처받은 만큼의 시간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기다리면 결국은 ‘상처가 십자가’임을 깨닫게 됩니다.
본당을 떠날 무렵 아녜스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시어머니 문제는 여전히 숙제였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도를 계속하십시오. 노력은 한계에 부딪칠 뿐입니다. 기도하며 기다리면 어느 날 마음의 변화를 깨닫게 됩니다. 그게 바로 기적입니다.” 세례 받던 날 했던 말입니다.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그를 껴안았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감동합니다. 사랑은 진정 감동입니다. 감동을 주는 행동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 복음의 숨은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