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3,1.1) 말씀/ 시편 2: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 Happy Nee Year. 20023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신앙인의 초심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퍼시 비시 셀리가 쓴 ‘사랑의 철학’ 이란 시가 있습니다. 샘물은 흘러서 강물과 만나고강물은 흘러서 바다와 만난다하늘의 바람들은 달콤한 감정으로서로 영원히 어울린다.이 세상에 홀로 있는 것은 없다. 만물은 신성한 법칙을 따라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울리는데 그대와 나 어찌 함께 하지 못하랴? 보라, 산은 높은 하늘과 입맞추고파도는 파도끼리 서로 껴안는다 만약 누가 그의 형제를 업신여긴다면 누구라도 용서받을 수 없으리 햇빛은 대지를 얼싸안고 달빛은 바다에 입맞추는데 만약 그대가 나에게 입맞추지 않는다면이 모든 입맞춤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마지막을 보면 모든 만물이 신성한 법칙을 따라 움직이며 사랑의 입맞춤을 하는데 ,,,그렇지만 그대가 나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입맞춤’이란 사랑을 의미합니다. 별이 찬란히 빛나는 하늘에 있다 해도 나에게 그 사랑이 닿지 않는다면 그냥 수많은 별 중에 외로운 하나의 별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은 온 천하보다 더 위하다는 것입니다. 시편 말씀 2:12절에도 이 시와 유사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 여기서도 입맞추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라.이 말씀을 제목으로 삼아 처음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책입니다. 사실 개혁 전에는 사랑에 대해서 그저 입에 오르내리고 했지 사랑이 개인 삶에 있어서 신앙의 삶에 있어서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인지, 깊이 생각지를 못했습니다. 사랑이란 저에게 삶의 필요한 것, 신앙생활에 좋은 것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철옹성 같은 우리 선교단체에 많은 문제가 생기면서, 근본에 대해서 고민하고 생각하며 글을 쓰고 묵상하다 붙들게 된 것이 ‘사랑’ 이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사랑이고, 모든 신앙의 문제는 따지고 보면 사랑에서 빗나간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랑은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며 최고의 가치이고 중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눈에 시편의 ‘그 들에게 입맞추’라는 말씀이 레마 처럼 들어왔습니다. 그렇구나 예수님 사랑에서 빗나간 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예수님도 사랑 당연한 것이고, 이제 까지 배워 온 것이고 또 현재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인데 왜 끊임없이 문제가 생기고 있는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에 입맞춤이 어긋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사랑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예 당근, 주님을 사랑합니다.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죽는데 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지 않겠습니까?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하셨을 때에 베드로는 처음에 당당히 사랑한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세 번씩 질문하실 때는 근심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답변을 하지 못하고 주님이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것 같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정말 내가 사랑하는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는데 실상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세상 욕심이 더 많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형제를 미워합니다. 사실, 우리는 사랑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제대로 정식으로 공부를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주어들은 것들뿐입니다. 어떤 시인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사랑을 하게 되면 세상에 달라질 정도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데 왜 초등학교 때부터 사랑을 가르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실제로 학교 교과목에 아에 사랑 과목이 없습니다. 선택도 없고, 필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50 넘어 따로 스스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랑을 학과목에 넣는다면 선택인가요 필수인가요? 당연 필수이죠. 신앙에 있어서도 계명의 중심이고 정신이고, 모든 삶을 의미있고 가치 있게하는 것이 사랑인데 .. 이 사랑이 제대로 삼의 중심에서 작동을 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밝고 아름다워지고, 또 얼마나 삶이 행복해지겠습니까? 반대로 사랑이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제대로 작동 되지 못하면 그런 곳엔 반드시 위선이 넘치고 거짓이 판을 치고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은 반대로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저 조금 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쌩떽주베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이었으며 그 이상의 것이었다. 나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사랑이 있는 곳은 축복과 천국이고, 사랑이 없는 곳은 저주이고 지옥입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문제들은 들여다보면 사랑 문제입니다. 오늘 시편 말씀이 뭐라고 합니까? 그 아들에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라고 합니다. 사랑 안하면 하나님 진노가 급히 임하고, 길에서 망한다고 합니다. 너무나 심하다 싶어 고전 16:22을 보니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더 강력합니다. 쉽게 생각해보면 됩니다. 예수님을 절대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것이 그 절대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돈의 지배를 받고, 주님보다 자신의 명예 자존심을 더 사랑하면 자존심의 지배를 받고, 사람을 더 사랑하면 사람의 지배, 교회 건물이나 역사 사업을 더 사랑하면 사업가가 되는 것이고, 결과 분열과 다툼이 일어나고, 죄와 탐욕의 지배를 받아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입술로는 사랑한다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저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자라 인정하신 예수님을 죽이려하였겠습니까? 사랑이 잘 못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살인자가 되었고, 자신들만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한 것입니다. 사랑은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세 번째로 쓴 책이 ‘다윗의 열쇠’ 였습니다. 요한계시록 소아시아 교회에 쓴 편지를 분석하면서 주님이 사도들을 통해서 세우신 교회가 왜 타락했는지 근본을 살펴보니 사랑에서 빗나간 문제였습니다. 정확했습니다. 처음 에베소 교회를 보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 2: 2-5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겉으로 보면 에베소교회는 참 훌륭한 교회입니다. 심지어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신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는데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합니다. 지금 사랑한다고 하지만 처음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처음 사랑이 무엇입니까? 순수한 사랑, 예수님이 전부인 사랑입니다. 제자들이 처음에 주님을 따를 때 그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 부르심에 그물, 배, 부친 다 버리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에베소 교회는 그 처음 사랑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문제를 잘 모릅니다. 주님은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숙제를 내주십니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무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겼는지? 사람들이 하는 일의 수순이 그렇지 않습니까? 힘들 때는 그저 주님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좀 부요해지고, 갖추어지다보면 주님의 외에 좋은 것들이 보입니다. 건물도 보이고, 사람들도 보이고, 부흥하고 커가는 사역도 보이고, 세상 권위와 명예도 보입니다. 그러면서 주님 사랑의 본질은 뒷전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 형식과 외식 껍질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 의 대형교회 세습 문제도 그렇습니다. 문제들 중에 하나이지만 아들 사랑이 주님 사랑보다 더 크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회 이슈가 되고, 비난을 받아도 여러가지 편법을 써서 통과시킵니다. 그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예수님 사랑에 온도가 식어지면 그렇게 됩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책망 받지 않은 교회는 아주 작고 가난한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둘 뿐 이었습니다. 대형교회는 다 책망을 받았습니다. 한 교회 더 살펴보면 마지막 교회 라오디아 교회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는 것은 당시 온천 물을 비유한 것입니다. 당시 라오디게아에서 히에라볼리의 온천수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 온천수는 7km에 달하는 수로를 통과하는 동안 점점 식어서 라오디게아에 오면 미지근해졌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도시의 특성과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속성을 비유해서 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처음의 뜨겁던 신앙이 식어서 미지근해진 것입니다. 주님은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하십니다. 그런데 이들도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이들이 이미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보실 때 겉만 화려하였지 영으로는 아주 가련하고 가난하고 곤고하고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외적인 문제가 아닌 내적으로 사랑이 식어진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어디서부터 회개해야겠습니까? 무엇을 회복해야 다시 열심을 낼 수 있을까요? 다른 것 없습니다. 사랑의 온도를 높이면 됩니다. 우리가 일곱 교회를 다 살펴보지 못하지만 각 교회 각 신앙인의 일곱 가지 모습들이 다 다를지라도 근본은 다 똑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돈 문제, 사람문제, 권력 명예, 간음, 도적, 살인, 탐욕의 죄 문제 다 사랑에서 빗나간 문제입니다. 사랑의 근본을 바로 세우면 다른 것들 다 바로 잡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 사랑만 회복되면 다 회복 됩니다. 사랑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로마서 13장 8-10을 보시기 바랍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이렇게 사랑이 중요하다면 우리가 무엇을 붙들어야 겠습니까?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배워야 겠습니까? 사랑하는 법은 배우지 않고 계속 상 벌만 주고 다른 방법을 쓴다면 일시 방편밖에 안됩니다. 사랑을 모르면 다시 반복하게 됩니다. 감방에 죄수들을 보면 벌 받을 때 그 때 뿐 다시 감방에 들락날락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회복되지 않으면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 행실의 기준이 사랑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의 온도입니다. 사랑이 뜨거운 사람은 행동도 뜨거운 것이고, 미지근한 사람은 행동도 미지근하고, 차가운 사람은 행동도 차가운 것입니다. 사랑이 진실 되면 행동도 진실 되고, 사랑이 형식적이면 행동도 형식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빵 가게를 운영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구워내는 빵은 크기가 매우 작아서 동네 사람들에게 비난을 샀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의 별명이 대포집사였습니다. 대표기도를 할 때 대포소리가 나도록 큰 소리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힘차게 기도했는데 사람들의 눈치가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느꼈습니다. 대포 집사님을 상한 마음으로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저를 싫어하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능력있게 살려고 힘차게 기도하는데 말입니다. 목사님은 진짓하게 권면해 주셨습니다. ”집사님, 기도소리는 줄이고 빵 크기는 늘리세요.” 우수운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삶의 문제도 따지고 보면 사랑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것입니다. 내가 굽는 빵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전달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그는 빵을 더욱 맛있게 만들 것이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선도 할 수 있고, 다른 가계보다 이윤은 조금 덜 하더라도 좋은 질의 빵을 만어 팔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보다도 이기적 자기 사랑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고르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한다고 하면서 부모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부모도 사랑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1800페이지나 되는 말씀을 우리에게 말하지만 모든 계명의 근본 정신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알면 다 아는 것이고, 사랑을 모르면 다 모르는 것이고, 사랑을 하는 사람은 다 하는 사람이고, 사랑을 못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고, 사랑의 성숙도만큼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보다 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가 2023년 하고싶은 일 해야할 일이 많이 있겠지만 더 많이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며 성장하는 새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사랑은 단지 감각적이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주는 행위이다.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살아있는 것을 주는 것이다.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즉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줌으로써 타인을 풍요롭게 만들고,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행동감을 고양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받으려 주는 것이 아니지만 남에게 주는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 된다. 그런데 묘한 것은 ...자기 안에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 어떤 모양이던 그에게 다시 돌아온다. 참으로 줄 때, 그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는 것은 생산적인 생명의 활동이다. 준다는 것은 또한 다른 사람을 주는 자로 만들고, 두 사람 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참여하게 한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아는 사람은 계속 주고 나누게 되는 것이고, 모르는 사람은 계속 움켜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던지 가만히 있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썩고 흩어집니다. 그런데 작은 것이라도 주는 것은 신기하게 무엇인가를 탄생케 합니다. 주는 자 받는 다 모두에게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심으로(요한 3: 16) 믿고 모든 사람들이 생명과 행복을 누리게 되었고,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은 또 사랑을 나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무엇인가 주는 능동적 활동입니다. 주고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기도하지만 너와 나 사이에 생명의 강이 흐른다는 뜻입니다. 강이 있는 그곳에는 생명이 자라고 기쁨이 넘칩니다. 저는 최근 큐티 말씀을 섬기면서 우리 교회가 우주적으로 사랑과 생명의 말씀을 먹이는 비죤을 보았습니다. 엘리아를 먹인 까마귀를 묵상하면서 주님의 까마귀가 되겠다고 하시는 분이 많아서 흐뭇하기도하고 감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주는 사랑에 대해서 그것이 은혜라는 것을 알기에 무엇이든지 있으면 나누어 주려고합니다. 그러다보니 택배도 많이 보내게 되고, 택배를 받는 사람이 친정아버지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지난번에는 택배를 받아들고는 친정 아바지는 아니고 고향 어머니가 보내즌 것같은 느김을 받았습니다. 김치 된장 고춧가루 깨소금, 영양제, 일회용행주까지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선물을 받아보네 하였습니다. 은영 집사님이 보내주신 것입니다. 저뿐 아니라 울산의 박창준 목사님. 김태구 목사님까지 주의 종들 쌀과 여러 가지를 섬겨주시는 것을 보며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렇게하니 다들 나도 까마귀가 되겟다고 합니다. 저는 우주교회 가마귀 군단을 창설해야 하는가 했습니다. 주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정말 은혜입니다. 무엇인가 주다는 것을 단지 그것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생떽쭈베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장미 한송이를 전해 줄 때 그것은 꽃만이 아니라 그 손에 향기가 묻어있다. 꽃만 아니라 사랑이 있고, 괌심이 있고, 더 나아가서는 생명도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독자 아들 예수를 보내주심으로 우리에게 사랑과 생명을 주시 것입니다. 이번 성탄에 하나님의 독생자를 주신 의미를 깊이 새기면서 생명의 꿈틀거리고 사랑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모두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