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서의 대찰 치악산 구룡사(龜龍寺) @치악산은 강원도 원주시와 횡성군 사이 차령산맥에 있는 높이 1,288m의 산이다. 본래는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서 적악산이라 불렀으나 뱀에게 잡힌 꿩을 구해준 나그네가 그 꿩의 보은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전설에서 치악산(雉嶽山)의 이름이 유래한다. 주봉인 비로봉(1,288m)을 비롯하여 매화산·향로봉·남대봉 등 1,000m 이상의 산이 남북으로 뻗어 있다. (구룡사의 일주문 격인 원통문) 盡千劫而不古(진천겁이불고) 恒萬歲?長今(항만세입장금)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고 만세를 지나도 언제나 지금일쎄 치악산은 예로부터 군사 요충지로서 험준한 산세와 지리적 여건으로 천연의 요새였기에 영원산성을 비롯하여 금두산성·해미산성지 등이 있으며 사찰로는 구룡사를 비롯하여 상원사, 석경사 등 역사적 고찰이 있다. 치악산은 1984년에 총면적 182.1㎢의 치악산국립공원으로 승격되어 있다. 치악산의 으뜸 봉우리인 비로봉에서 학곡리 쪽으로 6km 떨어져 있는 구룡사는 신라문무왕8년(668)에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하였으며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 소속되어 있다. 구룡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창건에 얽힌 설화다. 원래 지금의 절터 일대는 깊은 소(沼)로서, 거기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의상이 절을 지으려 하자, 용들은 이를 막기 위해서 뇌성벽력과 함께 비를 내려 산을 물로 채웠다. 이에 의상이 부적(符籍) 한 장을 그려 연못에 넣자 갑자기 연못물이 말라버리고, 그 중 용 한 마리는 눈이 멀었으며, 나머지 여덟 마리는 구룡사 앞산을 여덟 조각으로 갈라놓고 도망쳤다. 의상은 절을 창건한 뒤 이러한 연유를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보광공덕탑) @또 다른 설화에 의하면 원래 대웅전 자리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는데 의상은 그 연못 자리가 좋아,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고 용들과 도술시합을 했다. 용들이 먼저 솟구쳐 오르자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고 산들이 모두 물에 잠겨버렸다. 용들이 흐뭇해하며 주변을 살피니, 의상은 비로봉과 천지봉에 줄을 걸어 배를 매놓고 그 안에서 자고 있었다. 다음은 의상이 움직였다. 부적을 한 장 그려 연못에 넣자 연못이 갑자기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고 용들이 뜨거워 날뛰었다. 그때 놀란 용 여덟 마리가 절 앞산을 여덟 조각내면서 동해로 도망치고, 한 마리는 눈이 멀어 계곡의 못에 머물렀다. 그래서 절 이름도 구룡사(九龍寺)라 했다. 전설이 어떠하든 창건 이후 도선(道詵)·무학(無學)·휴정(休靜)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세가 기울어지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지만 계속 사세는 쇠퇴하였으므로,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거북 구자를 사용하여 구룡사(龜龍寺)로 불러 그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룡사의 상징인 거북과 약사여래, 우측 입불상은 미륵불)
구룡사는 1706년(숙종 32) 중수되었다. 근래에서는 1966년 종영(宗泳)이 보광루를 해체 복원하였으며, 1968년에는 심검당과 요사를, 1971년에는 삼성각을, 1975년에는 대웅전을 보수 단청하였다. 구룡사는 668년(문무왕 8)에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지만, 신라 말에 도선(道詵)국사의 창건이라고도 전한다. 그 뒤 1706년(숙종 32)에 다시 건립되었는데, 이 건물은 이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지암(智巖) 등 4명의 승려가 공사를 주도하였으며, 성호(性湖)선사가 보광(普光)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765년(영조 41)에 낡고 무너진 것을 고쳐지었고, 1876년(고종13)에도 서봉(瑞峰)화상이 도편수를 맡아 고쳐지었다. 「치악산구룡사 보광루중건상량문 병서(雉岳山龜龍寺普光樓重建上樑文幷序)」에는 당시의 공사 내용이 기록되었는데, ‘병자년중창건(丙子年重創建)’이라고 하였다. 기둥 윗부분의 이익공식(二翼工式) 짜임과 화초를 새긴 초각(草刻) 형식으로 보아, 지금의 건물은 이때의 것으로 보인다. 1980년에 단청을 보수한 뒤, 1988년과 2008년∼2009년에 부재 일부와 건물 전체를 해체 수리하였다. <가람과 주변환경> 신라 문무왕 8년(668)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숙종 32년(1706)에 중건되었다고 전하는 구룡사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광루(普光樓)·삼성각(三聖閣)·심검당(尋劍堂)·설선당(說禪堂)·적묵당(寂默堂)·천왕문(天王門)· 종루(鍾樓)·일주문(一柱門)·국사단(局司壇) 등이 있다. @대웅전은 조선 초기 개축된 건물로서 여러 차례 중수하여 예스런 무게가 다소 감소되었으나, 내부의 닫집은 당시의 조각술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귀한 것이며, 못 하나 쓰지 않고 지은 건물이기 때문에 비록 낡았지만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보광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이층 누각이며, 이층 마루에 깔린 멍석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것이라고 전한다. @절 입구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부도군이 있고, 또 구룡사의 전설을 말해주는 거북바위와 폭포아래에 용소가 있고, 조선시대에 세운 황장금표(黃?禁標)가 있는데, 이것은 치악산 일대의 송림에 대한 무단벌채를 금하는 방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표지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사천왕문) <사천왕(四天王)>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는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의 천왕문(天王門)에 이 사천왕상을 봉안하고 있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인도 종교에서 숭상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그들은 수미산(須彌山) 중턱에서 각각 그들의 권속들과 살면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며 불법 수호와 사부대중의 보호를 맡게 되었다.
또, 사천왕과 그 부하 권속들은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세간의 선악을 늘 살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매월 8일에는 사천왕의 사자(使者)들이, 14일 태자(太子)가, 15일 사천왕 자신이 제석천(帝釋天)에게 보고하는 것이 중대한 임무의 하나가 되고 있다.
1)지국천왕(持國天王)이다. 동쪽을 수호하는 천왕이며 안민(安民)의 신으로서 수미산 동쪽 중턱의 황금타(黃金?)에 있는 천궁(天宮)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16선신(善神)의 하나이기도 한 지국천왕은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항상 인간을 고루 보살피며 국토를 수호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얼굴은 푸른빛을 띠고 있으며, 왼손에는 칼을 쥐었고 오른손은 허리를 잡고 있거나 또는 보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그는 휘하에 팔부신중의 하나로서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만 맡는 음악의 신 건달바(乾達婆)를 거느리고 있다.
2)광목천왕(廣目天王)이다. 서쪽을 방어하는 신으로, 수미산 중턱 백은타(白銀?)에 살고 있다고 한다. 광목천왕은 흔히 잡어(雜語), 비호보(非好報), 악안(惡眼)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그의 남다른 모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그의 몸은 여러 가지 색으로 장식되어 있고 입을 크게 벌린 형상을 함으로써 웅변으로 온갖 나쁜 이야기를 물리친다고 한다. 또 눈을 크게 부릅뜸으로써 그 위엄으로 나쁜 것들을 몰아낸다고 하여 악안·광목이라고 하는 것이다.
광목천왕의 근본 서원은 죄인에게 벌을 내려 매우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도심(道心)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의 모습은 붉은 관을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오른손은 팔꿈치를 세워 끝이 셋으로 갈라진 삼차극(三叉戟)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보탑을 받들어 쥐고 있다. 그의 권속으로는 용(龍)과 비사사(毘舍?) 등이 있다.
3)증장천왕(增長天王)이다. 이 신은 수미산 남쪽의 유리타(瑠璃?)에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위덕을 증가하여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구반다 등 무수한 귀신을 거느린 증장천왕은 온몸이 적육색이며 노한 눈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그의 모습은 대개 갑옷으로 무장하고 오른손은 용을 잡아 가슴 바로 아래에 대고 있고, 왼손에는 용의 여의주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4)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북쪽을 지키는 신으로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이라고도 하는데,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하여 다문이라고 한다. 그가 맡은 역할은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것인데 한때 불법에 귀의하여 광명신(光明神)이 되었으나, 본래 자신의 원을 지킨다 하여 금비라신(金毘羅神)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다문천왕은 왼손에 늘 비파를 들고 있다. 그는 수미산의 북쪽 수정타(水精?)에 살며, 그의 권속으로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있다. 보광루의 앞 편액은 <치악산 구룡사> 뒤편의 편액은 <보광루>다. 보광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이층 누각이며, 이층 마루에 깔린 멍석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것이라고 전한다. 강원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45호로 지정된 이 건물에는 중도리 안쪽에만 우물천장이 설치되었는데, 여느 사찰의 누강당(樓講堂)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다. 또한 맞배지붕에서 충량을 사용한 것도 이 건물만의 구조적 특징이다. 보광루에서 내려다 본 사천왕문 @대웅전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3칸의 겹치마 팔작지붕으로 다포식건물이다. 전각 안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는데 향촉지인을 한 현재불인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협시불로는 오른편에는 미래불인 아미타불과 왼편에는 과거불을 상징하는 약사불이 모셔져있다. 보통 약사여래불의 손에는 보합을 들고 있지만 이 탱화에서는 지인(指印)만 반대방향으로 하고 있다. 대웅전은 조선 초기 개축된 건물로서 동쪽을 향하고 있다, 여러 차례 중수하여 고찰(古刹)다운 면모가 다소 감소되었으나, 내부의 닫집은 당시의 조각술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귀한 것이며, 못 하나 쓰지 않고 지은 건물이기 때문에 비록 낡았지만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대웅전은 전면으로 보아 기둥 위에 공포(주심포)를 두고 주심포 사이에도 공간포를 2조씩 배치한 다포계양식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었다. 공포의 외부 제공은 앙서형이 중첩되었고 앙서 윗몸에는 각각 연꽃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내부 제공은 하나로 연결하여 당초무늬를 초각하였다. 특히 불상 위에 있는 닫집은 중층으로 되어 특이하다. 천장의 중앙부는 우물천장을, 둘레에는 빗천장을 가설하되 연꽃과 봉황, 구름무늬, 비천상 등을 채화하여 금단청과 함께 매우 화려하고 장엄하다. 이 불전은 공포 내·외부의 장식적인 조각솜씨 및 구조수법 등으로 보아 1900년대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76년 보수 단청하였다. 구룡사 대웅전은 강원도유형문화재 24호로 지정되었으나, 2003년 9월 30일 화재로 전소되어 2004년 1월 17일 지정해제 되었다. 구룡사 대웅전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보존돼 오던 중 2003년 9월 화재로 전소됐으나 강원도가 2004년 11월 5일 건축물 세부 사항에 대해 미리 제작해 놓은 실측보고서를 토대로 전통 불교양식에 맞게 원형으로 복원이 되었다. @구룡사 대웅전 주련 達摩何事踏江來(달마하사답강래) 東土山野春草綠(동토산야춘초록) 世尊因何兜率來(세존인하도솔래) 鹿園苑中百花香(녹원원중백화향)
달마는 무슨 일로 강을 밟고 왔는가. 동토의 산과 들이 봄빛에 푸르기 때문이다> 세존은 어인 일로 도솔천에서 왔는가. 녹야원 가운데 백화의 향이 만발하기 때문이다. @구룡사 삼장탱화 삼존불 뒤에 조성된 이 탱화를 삼장탱화라 한다. 이 삼장탱화는 복사본이다. 원본 탱화는 1977년 강원도향토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월정사성보박물관의 건립으로 인해 1999년 7월 월정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삼장탱화는 천장보살(天藏菩薩), 지지보살(地持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그 권속을 그린 불화로, 그 도상의 유래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지장보살 신앙이 심화되고 확대되어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서만 형성되어 발전한 독특한 도상으로 알려져 있다. 천장보살의 권속은 진주 (眞珠), 대진주(大眞株)보살 및 천부중(天部衆)이고, 지지보살의 권속은 용수(龍樹), 다라니(陀羅尼)보살 및 신중(神衆)이고, 지장보살의 권속은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그리고 시왕(十王) 등이다. @대웅전 오른쪽에는 신중탱화와 감로도가 조성되어 있다. @ 감로도(甘露圖) <불설우란분경>을 그 근본 경전으로 삼기 때문에 <영가단 탱화> 혹은 <감로탱화>, <감로왕도(甘露王圖)> 또는 <감로왕탱화> 라고도 한다. 감로왕은 서방극락의 주불인 아미타불이다. 이 그림은 조상숭배 신앙이나 영혼숭배 신앙의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윗부분에는 아미타불 일행이 지옥 중생을 맞으러 오는 장면과 지옥 중생을 극락으로 데려가는 보살의 모습이 그려지고 아랫부분에는 지옥이나 현실의 여러 가지 고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신중탱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여러 선신(善神)을 도상화한 그림을 신중탱화라 한다. 많은 신들을 배치하여 그리므로 다양하고 복잡한 구도를 그리는 신중탱화는 일반적으로 제석(帝釋)과 하늘의 군사인 천룡(天龍)과 무장한 신중들을 배치한다. 그리고 이 신중탱화의 역할은 그 범위를 넓혀 참배자의 심성에 내재한 온갖 잡신을 쫓음으로써 인간심성에 청정함을 갖게 하여 이것이 또 다른 호법(護法)과 호신(護身)의 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오층석탑 불음각이다. 일반사찰에서 말하는 범종각이다. 종과 북, 운판과 목어가 걸려있다. 지장전(地藏殿) 지장전(地藏殿)은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일컫는다. 염라대왕 등 10왕을 모신 전각인데 주존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다. 이 세상이 아닌 어두운 세계인 명부 세계(冥府世界)의 왕인 염라대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명부전이라 하며, 또한 염라대왕 한 분만 아니라 지옥에 있어서 죄의 경중(輕重)을 정하는 열 분의 왕(十王)을 모신 곳이라 하여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현재 이들 시왕을 모시지 않고 빈 공간을 두고 있는 것은 불사 중인가 보다. 시왕중 제1 진광 대왕, 제2 초강 대왕, 제3 송제 대왕, 제4 오관 대왕, 제5 염라 대왕, 제6 변성 대왕, 제7 태산 대왕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각 7대왕이 심판을 맡으며 그 뒤 백일에는 제8 평등 대왕, 소상 때는 제9 도시 대왕, 대상 때는 제10 오도전륜 대왕이 차례로 생전에 지은 선업과 악업 등 잘잘못을 심판한다고 한다. 명부 시왕을 모신 주좌(主座)에 지장보살을 모시는 일이 있는데 이 경우에도 지장전이라는 이름 대신 명부전, 시왕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예가 많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 안에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 하며, 유명계(幽冥界)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고려 말까지는 지장전과 시왕전이 독립된 전각으로 각각 분리 독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불교를 말살하려는 억불정책 속에서도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죽은 부모를 좋은 세계로 보내기 위한 불교신앙과 의식만은 그나마 인정을 받게 됐다. 그 결과 망인의 형벌 및 새로 태어날 세계를 결정하는 심판관인 시왕과, 망인을 자비로써 인도하는 지장보살과의 결합이 보다 쉽게 이루어져, 각각 독립된 채 존재했던 지장전과 시왕전을 명부전이라는 이름으로 결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변화는 대략 조선 초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사바세계에 미륵불이 출세할 때까지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여 그들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토록 하는 부촉(付囑)을 받았다. 지장보살의 하화중생(下化衆生)에 대한 서원(誓願)은 지옥문에까지 이르러 명부시왕의 무서운 심판에서 인간을 구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지장보살의 모습은 일반 불상과는 약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즉 머리는 두건(頭巾)을 쓰거나 삭발한 승려형의 2가지이다. 한 손에는 석장(錫杖)을 짚고 있다. 시왕은 무엇에 근거한 것으로 시왕에게 공양하고 죄업을 참회하는 칠재의(七齋儀)를 행함으로써 죽은 뒤에 좋은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명부전은 사찰 내의 불전들 중에서 그 격이 한 단계 떨어지므로 건물의 크기나 양식도 주불전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 보통이다. 전각 내의 배치에서도 차이가 난다. 즉 대웅전 등에는 중앙의 불단 위에 불상을 봉안하나 명부전에서는 중앙에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왼쪽에 도명존자(道明尊者)를, 오른쪽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봉안하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동자상.판관(判官) 2인.녹사(錄事) 2인.장군 2인을 ㄷ자형으로 배치하게 된다. 가운데 이 건물은 옛적에는 연화정이라는 정자였는데 지금은 찻집으로 변했다. 삼성각 안에는 칠성단과 산신 그리고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다. 관음전 관음보살이 주원융통(周圓融通)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보살을 모신 당우로 관음전이 많이 세워진 까닭은, 관음이 모든 환란을 구제하는 보살일 뿐 아니라 그의 서원이 철두철미하게 중생의 안락과 이익에 있고,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력(神力)으로 중생을 돕기 때문이다. 관음전 내에는 왼손에 연꽃이나 감로병을 들고 연화좌 위에 앉은 관음상을 안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나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양류관음(楊柳觀音), 보관 위에 11개의 다른 모습을 가진 십일면관음, 그 밖에 해수관음(海水觀音)ㆍ 백의관음(白衣觀音)ㆍ용두관음(龍頭觀音)ㆍ천수관음(千手觀音) 등을 모시기도 한다. 후불탱화(後佛幀畵)로는 <양류관음도>, <백의관음도>,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千手千眼觀世音菩薩圖)> 등, 봉안된 관음상의 유형에 따라 봉안하게 된다. 또, 관세음보살의 협시(脇侍)가 되고 있는 남순동자(南詢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은 조각상으로 봉안하기가 어려우므로 거의가 후불탱화에만 나타나고 있다. 응진전(應眞殿) 응진전(應眞殿), 나한전(羅漢殿)이라고 함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羅漢)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이라고 한다. 그리고 500나한, 즉 부처님의 500제자를 모신 전각은 나한전(羅漢殿)이라 부른다. 나한전(羅漢殿)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건물이다. 부처님에게는 열여섯의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 Arhan)의 약칭으로 그 뜻은 성자(聖者)를 의미한다. 아라한은 응공(應供). 응진(應眞)의 자격을 갖춘 분들이다. 응공은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분들을 의미하며, 응진은 진리로 사람들을 충분히 이끌 수 있는 능력의 소지자를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나한전을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한다. 나한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존으로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봉안돼 있다. 그 좌우에 열여섯 분의 나한이 웃고, 졸고, 등을 긁기도 하는 자유자재한 형상이 배치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한의 숫자가 500명인 경우가 있다. 500이란 숫자는 부처님이 열반한 후에 마하가섭이 부처님 생전에 설법하신 내용을 모아 정리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을 때 모인 비구가 500명인 데서 유래하였다. 이들은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한 분들로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장차 성불하리란 예언을 받은 분들이다. 나한전의 불단은 대웅전과 같은 불전(佛殿)과 달리, 좁은 폭의 불단을 ㄷ자형으로 배치하여 석가모니 부처님과 나한을 차례로 배치하였다. 대웅전 등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불단 대신에 헝겊으로 막은 소박한 불단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일반 법당의 불상 위를 장엄하는 화려한 닫집은 보이지 않는다. 닫집이 없이 소박하게 한 것은 해탈의 경지에 이른 석가모니 부처님에 비하여 깨달음의 정도가 낮은 아라한을 주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건물평면의 간략함 외에도 나한전은 사찰의 중심에 배치되는 주불전에서 떨어진 위치에 자리하며, 건물의 외양도 주불전에 비해 격이 낮은 맞배 형태의 건물인 경우가 많다. 조사전 (구룡사 보호수인 은행나무. 수령200년.1982년 지정) (원통문) |
출처: 현림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