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27일 수요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
모니카 성녀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로, 332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오늘의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났다. 신심 깊은 그녀는 남편을 개종시키고, 방탕한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된 데에는 어머니 모니카의 남다른 기도와 노력이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회개의 길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387년 로마 근처의 오스티아에서 선종하였다. 모니카 성녀는 그리스도교의 훌륭한 어머니의 모범으로서 많은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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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예언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이다.
(마태 23,27-32)
you are the children of those
who murdered the prophets;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교회의 신자들에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며 게으름에 대한 경고를 한다. 또한 서간을 마치며 신자들에게 축복을 빌고 끝 인사를 나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적인 삶을 꾸짖으시며 회칠한 무덤에 빗대신다. 또한 그들은 이미 내적으로 예언자들을 살해한 조상들의 죄를 반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꿰뚫어 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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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삶이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시며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이 ‘회칠한 무덤’이라는 상징은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의 모습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을 적나라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이 말에서 우리는 메마른 마음, 생기 없는 일상의 삶을 아프게 떠올려야 합니다. 아픈 자각은 익숙함과 결별하고 생명력이 충만한 삶의 여정을 시작하는 용기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스위스 출신의 유명한 철학자 파스칼 메르시어는 한 나이 많은 교수를 주인공으로 한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매혹적인 소설을 썼습니다. 주인공 그레고리오는 기이한 우연을 거쳐 손에 들어온 한 포르투갈 작가의 책 머리말에 나오는 다음 내용에 홀리고 맙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는 곧바로 책을 내려놓고 시계처럼 철저했던 자신의 일상을 내버려 둔 채 불현듯 포르투갈의 항구 도시 리스본으로 가는 야간열차에 오릅니다. 처음에는 스스로도 이러한 여행을 시작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여행에서 돌아온 뒤, 이것이 메마름에 자족하는 것을 멈추고 충만한 삶을 향한 갈망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몇 년 전 흥미 있게 읽었던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올여름의 들머리에 보면서 나의 리스본은 어디인지 조용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번에도 나 자신을 돌아보는 여행, 일상의 참의미를 찾는 떠남이 필요했습니다. 익숙함을 떠나 나의 일상에서 낯설음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바라던 것이 참으로 의미 있는지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 나의 리스본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나누는 기쁨의 순간들로 빛나는 내 삶의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위선이라는 병의 치유(治癒)
-이수철신부-
아마 인간의 보편적 현상중 하나가 위선일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는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과연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 얼마나 될까요?
누구나 정도의 차이 일뿐 위선이란 병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위선 역시 하나의 영혼의 질병으로 간주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을 위선이라 한다면,
겉과 속이 같음을 진실과 정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위선의 병든 삶이 아닌,
진실의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아침 식사 후 산책 중
며칠 전 모종한 어린 배추들이
뿌리내려 자라나는 건강한 모습이 참 싱싱하여 예뻤습니다.
엉뚱한 곳에 한 눈 팔지 말고 내 삶의 현실에 건강히 뿌리내릴 때
비로소 치유되는 위선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현실에 뿌리내려
진실을 체험하며 흡수해 갈 때 영육으로 건강한 삶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우리 분도회의 모토가
위선은 물론 허무주의나 우울증에 대한 최고의 치유제입니다.
기도와 노동으로 삶의 현실에 뿌리내리는 것입니다.
기도와 노동에 충실하다보면
도저히 잔머리 굴리는 위선적 언행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하고 정직하고 단순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됩니다.
얼마 전 잔디밭의 풀을 잠시 뽑으면서 노동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노동을 통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함께 노동하면서 성미 급한 사람은
저절로 자기를 절제하게 되므로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특히 농사나 건축일은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에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믿음을,
때를 아는 지혜를 터득해 가면서
자기 완성과 자기실현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대로 수행으로서의 노동인 것입니다.
몸 노동을 통해서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분야에서 오랜 동안 노동에 종사해 온 분들에게서
저는 종종 수도자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뭔가 힘들고 불편하고 더딘 육체노동이
위선의 치유와 영신 건강에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건강히 양성된 사람들,
결코 바다이야기 같은 사행성 도박의 유혹에 빠져
인생 망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오로의 진솔한 고백이 심금을 울립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이런 자발적인 몸 노동이 없어
공짜와 요행을 바라며 돈을 헤프게 쓰는 겁니다.
정작 자기가 몸으로 일하여 건전하게 번 돈이라면
함부로 쓰지는 못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정말 기도와 노동의 사람입니다.
기도가 빠진 노동이라면 얼마 못가 영혼도 육신도 망가집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영혼의 기쁨이 노동에 스며들 때,
또 기도와 노동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노동은 거룩한 수행이 되어 영육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비로소 위선이나 우울, 허무주의의 병은 치유되어
진실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의 위선의 병을 치유해주시는 참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한상봉과 함께하는 수요묵상
‘박해가 많으면 성인도 많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신앙인의 진면목은 고난 가운데 드러나기 마련이다. 순교 성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신앙과 맞바꾼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중의 영광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사실상 성인으로 추대될 줄 알고 순교한 사람도 없다. 내 삶에 빛으로 다가온 결정적인 경험이 없고서야, 그 희망의 한끝이 없고서야 죽음은 여전히 두려운 절망이다.
소설가 김훈이 쓴 「흑산」에서 정약종이 토설한 말이 귀에 쟁쟁하다. “너의 이른바 천주가 실재해서 세상을 주관하고 있음을 네가 증명할 수 있느냐?” “증명할 수 있다. 쉬운 일이다. 어린아이가 웃으면서 걸어올 때, 나는 천주가 실재함을 안다. 그대들이 국법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가두고 때릴 때 저들의 비명과 신음이 천주를 증명한다. 그대들의 악행을 미워하고 또 가엾이 여기는 내 마음을 통해서 천주는 당신을 스스로 증명하신다.” 정약종은 서소문에서 참수되어 영원히 기억되었다. 어린아이의 티 없는 웃음에서, 가엾이 여기는 내 마음에서 하느님을 느끼는 사람, 그 사람은 이미 하느님 자비의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던 것인데, 그러니 죽음인들 두려울 턱이 없다.
김훈은 「흑산」에서 가장 애정을 느낀 인물이 평안도 정주 역참의 마부 ‘마노리’였다고 한다. 마노리는 말고삐를 잡고 북경과 조선을 오가며 교회의 메신저 역할을 했는데, 김훈은 이 사람을 “한국교회를 있게 한 보석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길 걷기가 단잠처럼 편안했다.”는 마노리는 “길에는 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이 있었고 주인은 없었다.”고 말한다. 지상에 머물 땅 한 평 없어도 행복할 수 있는 ‘순례자’였던 마노리의 자유로운 영혼에서 우리는 ‘순교’가 ‘영성’임을 깨닫는다. 이들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를 드러낸 예언자가 아닐까? 이 생생한 증언을 순교기념관이나 박물관에서 기념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지금도 부질없는 탐욕으로 지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이들에 맞서 싸우는 이들 가운데서 이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불행선언 (6,7)
-박상대신부-
권력(power)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딱 잘라 말하면 권력이란 아주 ‘위험한’, 그러면서도 아주 ‘필요하고 유용한’ 도구로서, 직무나 직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권력에 대한 많은 고찰이 있었다. 그러나 ‘정치의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권력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넓은 의미의 권력은 ‘물리학적 에너지’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의도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힘’(러셀)이다. 그러고 보면 권력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의도하는 바가 불순하거나 부당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악(惡)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로서의 권력이 아무리 중립적으로 선(善)하다 하더라도 목적을 정당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의 ‘결과’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런데 목적이 항상 결과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권력을 ‘선(善)이라고 생각되는 장래의 어떤 것을 획득하기 위하여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방법’이라고 정의한 홉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은 구약시대를 통틀어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율법을 보호하고 전수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이 지향하는 권력의 목적이 선(善)이었다고 하나 그 결과는 악(惡)을 초래하였다. 선의의 목적이 악을 초래한 결과를 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판단이다.(마태 23,16.17.19.24.)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엄중한 심판이 고조되는 가운데 오늘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치욕적인 불행선언이 잇따른다.
여섯 번째 불행선언은 율사들의 속에 가득 찬 위선과 불법을 향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사들의 ‘겉과 속’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신다. 무덤의 외부를 회칠하는 이유가 내부를 덮어버리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외부를 덮어버린다고 해서 내부가 달라질 리는 없다. 그것은 무덤을 아무리 아름답게 겉치장한다 하더라도, 화려한 겉치장으로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사람이 하려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속은 속이고 겉은 겉이다. 다소 옳게 보이는 겉모양이 속내를 가릴 수는 있으나, 예수님의 눈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분은 율사들의 속내에 가득 찬 위선과 불법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불행선언은 예수님 당대의 지도자들이 구약의 성자들과 예언자들의 죽음에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에 대한 고발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조상들과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과 차별을 두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 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30절)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로 이 주장이 그들 스스로를 살인자, 박해자의 후손임을 자백하는 것으로 지적하신다.(31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는 것’(31절)이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율사들과 바리사이에 대한 불행선언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더 심하고 치욕적인 예수님의 언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언변은 유다교의 총체적인 종말을 의미하며, 야훼 하느님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다. 어쩌면 겉과 속이 무덤의 겉과 속처럼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의 운명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