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인 백제 땅에 절을 세우다니... 전등사의 역사우리나라 최초의 절, 전등사
남녘에서 시작된 꽃소식이 하루가 다르게 북상하더니 마침내 강화도까지 당도했다. 온 천지가 온통 뒤척이고 들썩인다. 햇볕이 잘 드는 담장 밑에는 제비꽃이 피었고 뒷산 양지바른 곳에 있는 진달래도 볼그스름하게 물이 들었다. 다시 봄이 왔다.
온 천지가 다 물이 오른 봄 세상이다. 어느새 내 발걸음은 전등사로 향했다. 동문을 지나 전등사로 들어서니 솔숲에 이는 바람이 청량하다.
전등사 동산의 매화 꽃송이들도 벙글고 있다. 톡톡 소리 없이 피어오른다. 봄기운을 주체할 수 없는 산새들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짝을 찾아 날아다니고, 한낮의 햇살은 전등사 마당을 일없이 기웃거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 전등사
전등사는 강화도를 대표하는 절이다. 마니산과 참성단을 비롯해서 수많은 역사 유적지와 깨끗한 자연 환경이 강화도를 빛내주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전등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 해에만도 수십 만 명이 전등사를 찾는다.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위치한 전등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전에 세워진 절이다. 서기 381년에 세운 절이라고 하니 역사가 자그마치 1600년도 더 되었다. 육지도 아닌 섬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 있다니, 어떤 연유로 누가 지었는지 새삼 궁금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고구려의 승려인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한다. 서기 381년에 강화도는 백제의 땅이었다. 다시 말해 강화도가 고구려의 땅이 된 것은 그로부터 100년이나 뒤인 장수왕 63년(475)부터인데, 그보다 훨씬 앞인 소수림왕 때 고구려의 스님이 백제 땅인 강화도에 와서 절을 세웠다니,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백제와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고구려의 승려인 아도화상이 백제 땅이었던 강화도에 들어와 절을 세울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또 전등사가 세워진 당시(381년)에 백제는 불교를 공인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절을 세울 수 있었으며, 더구나 적국의 승려가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의문을 가지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를 두고 역사의 지나친 과장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창건 연대를 올려서 불교와 전등사를 미화시키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백제는 중국의 동진과 가까이 지냈다. 동진은 불교국이었다. 백제는 동진을 통해 불교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그 당시에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던 백제는 삼국 중에서 가장 힘이 세었다. 그래서 고구려의 승려가 들어와서 절을 짓고 불교를 알리는 것에 대해 그다지 개의치 않았을 수도 있다.
백제 땅에 고구려 절이...
형식과 전범은 시류의 흐름보다 한 발 늦게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그때도 역시 그러했으리라. 비록 당시에 불교가 나라의 공인을 받지는 못했지만 민간에서는 이미 널리 퍼져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당시 사회, 문화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퍼져있는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의 강화를 꾀했다고 본다면 전등사의 창건 연대와 관련된 의문들이 납득이 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이었다. 그리고 37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인 성문사와 이불란사가 고구려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 두 절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381년에 세워진 전등사가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당시에 불교는 종교를 넘어 정치.사회 전반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가 불교를 정식으로 공인한 것은 384년(침류왕 1) 이었지만 그 이전에 이미 백성들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전등사의 창건 연대를 굳이 부정할 이유는 없을 듯하다. 나라의 공인은 받지 않았지만 이미 민중에 불교는 널리 퍼져있었고, 때문에 전등사의 건립도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전등사가 생기고 3년 뒤에 백제는 불교를 공인했다. 말하자면 전등사는 백제의 묵인 하에 고구려의 스님이 지었던 절로써, 고구려의 절이면서 동시에 백제의 절이었던 셈이다.
우리나라는 숱한 전란을 겪으면서 수많은 문헌과 사료들이 불타거나 없어졌다. 절에 대한 기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불교가 융성했기 때문에 절의 역사에 관한 기록인 사적기(寺跡記) 역시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란을 겪으면서 사적기들은 많이 사라졌을 것이고 더구나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문헌으로 남기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고려 시대의 전등사
전등사의 경우도 남아있는 기록은 별반 없다. '고려사'와 1934년에 간행된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 기대어서 전등사의 발자취를 알아보는 정도다. 그 책들에서 보면 고려 시대 고종과 원종 때 절을 보수한 기록이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려사에서 보면 고종 46년 때인 1259년에 삼랑성 동쪽에 가궐(假闕)을 지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가궐이란 임금이 대궐 밖으로 행차할 때 머물던 임시 궁궐을 말한다. 삼랑성 안에 있던 가궐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왕과 왕실이 재앙을 피하기 위해 지은 것이었다. 삼랑성은 전등사를 둘러싸고 있는 성으로 가궐은 전등사와 인접해 있다.
몽골의 침입을 피해 1232년에 강화도로 천도를 한 후 1270년에 개경으로 돌아갈 때까지 39년 동안 강화는 고려의 수도였다. 당시 고려는 불교 국가였으니 왕은 전등사로 행차도 했을 것이다. 지금도 대통령이 행차를 하게 되면 그 주변을 보기 좋게 다듬고 정비하는 게 수순이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왕이 가궐을 방문할 때 바로 근처에 있던 전등사도 역시 들렀을 것이다. 기록에는 은유적으로 표현이 되어 있지만 정황상 그때 전등사 역시 보기 좋게 정비가 되었을 듯하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264년(원종 5)에는 전등사에서 대불정오성도량(大佛頂五星道場)을 4개월 동안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의 온갖 재난을 물리치고자 하는 큰 불교 행사를 넉 달 동안씩이나 전등사에서 열었다고 하니 당시 전등사의 사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옥등을 바친 정화궁주
전등사의 원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다. 그러나 고려 충렬왕 때 정화궁주가 대장경과 옥등(옥등)을 전등사에 시주한 이후로 전등사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 충렬왕이 태자였을 때 태자비였던 정화궁주는 충렬왕이 몽골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를 정비로 맞이하자 별궁으로 물러나게 된다. 정화궁주는 모든 슬픔을 종교로 승화시켜 전등사를 새로운 사찰로 중건하였다.
숭유억불정책을 펼쳤던 조선시대에도 전등사는 조선 왕실의 아낌을 받으며 더욱 성장했다. 숙종 때인 1678년에 전등사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고 이후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게 된다.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 문서를 선원각에 보관하였다. 이후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의 큰 스님에게는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이었던 도총섭이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조선 말기에는 전등사가 국난을 극복하는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1866년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했을 때 양헌수 장군은 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삼랑성 안에 진을 치고 기다리다가 그들을 패퇴시켰다. 전등사 대웅전 안의 기둥과 벽에는 당시 병사들이 부처님의 가피를 기원하며 자신의 이름을 적어놓은 흔적을 볼 수 있다.
전등사도 다른 고찰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화재를 겪었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도 큰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렸으나 다시 지어서 옛 모습을 되찾았다. 나부상(裸婦像)의 전설로 유명한 대웅전도 이때 중건되었다. 1726년에는 영조가 전등사에 행차하여 '취향당'이라는 편액을 써주기도 하였다. 왕이 친히 행차하고 나라의 지원을 받을 정도였으니 당시 전등사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호국도량 전등사
전등사에는 수많은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다. 역사가 오래된 절답게 유물들과 그와 연관된 역사적 사연들도 많이 있다.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을 비롯해서 보물 제179호인 약사전,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범종 등, 수많은 보물과 국가 사적, 문화재 등이 경내에 산재해 있다. 또 삼랑성 역사문화축제를 비롯해서 사찰체험을 할 수 있는 템플스테이 등, 대중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행사를 수시로 개최한다. 전등사는 과거에도 중요한 절이었지만 현재에도 대중들을 위해 치유와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전등사를 둘러싸고 있는 정족산의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성이다. 전등사가 세워지기 이전에도 이미 이곳은 대중들이 깊이 믿고 우러러보던 의지처였다. 그곳에 절이 세워졌으니 어찌 예사롭게 볼 수 있겠는가. 전등사는 절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이미 절이었다고 봐도 어쩌면 무방할 듯하다.
천육백 년 전 고구려의 아도화상은 불법을 전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적국인 강화도로 왔다. 고려의 정화궁주는 옥등을 바쳐 불법이 널리 퍼지기를 소망했다. 숱한 전란과 왕조의 부침 속에서도 전등사는 늘 우리 민족과 함께 했다.
봄날의 한때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전등사 경내가 분주하다. 절 마당 한쪽의 느티나무 아래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는 사람들이 빙 둘러 앉아있다. 어린 아이의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젊은 부부는 허리를 숙이며 연신 아이와 눈맞춤을 한다. 인솔하는 선생님의 뒤를 따라가는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도 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두 부부가 조용히 경내를 둘러본다. 이 모든 사람들을 전등사는 가만히 품어준다.
가지각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로 풍경 소리가 날아든다. 그 사이를 불법의 향기가 조용히 스며든다. 등불을 밝히듯 불법을 널리 펼쳐 세상을 밝혀 주었던 전등사는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문득 고개를 드니 뒷산의 소나무들이 대웅전 쪽으로 갸웃하고 있었다. 출처: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93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