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란 그런 것
한동안 꿈을 꾸지 않다가 어젯밤에 모처럼 꿈을 꾸었다. 어제 내가 그 도시의 초입을 다녀와서일까? 지난 날에 살았던 꿈의 시작은 그 도시의 재래시장 5일장이 배경이었다. 그곳은 재래시장 치곤 소박한 그저 인근 주민들의 먹거리, 입을거리를 제공하는 규모의 시장이다.
초등학교 뒤 예전 자주 지나쳤던 귀여운 강아지를 파는 곳에서 한동안 눈요기를 하다 내가 몇번 사먹긴했지만, 장사 수완없어 잘팔릴것 같지않은 뻥튀기 할아버지의 리커앞 골목을 지나 대로변으로 들어섰다.
한방의원 앞에는 몸이 아프다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몇군데 시장을 떠도는 장돌뱅이 후배가 있다. 한때는 가족 먹여 살린다며 작은 식당을 한다더니 그것도 여의치 않아 접어야 했단다.
반갑게 맞이하는 후배네 좌판 곁에 앉아 여러 상인들의 장사 모습을 지켜보았다. 쉴새없이 손님을 부르는 사람, 자신의 상품을 손질하는 사람, 끼리끼리 대화를 나누는 사람, 멍하니 지나는 군중만 바라보는 상인도 있었다.
후배와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 먹자골목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야외 솥단지에서 하얀김이 쏱아져 나오고, 웃고 있는(?) 돼지머리와 굵은 다리가 드러나 보였다. 오전 11시, 아직 너무 이른가? 내가 좋아하는게 돼지국밥에 생탁 한병이니 어디 들어가 자리를 잡을까? 망설이고 있는데 가계 안쪽에서 누군가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ㅇ선생님~!" 그런데 아니 그 사람은...
그 장면에서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분은 다름아닌 나와 동갑이었던 교수였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S대 법대를 나왔는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고, 학생들과 회식을 하면 돈을 먼저내어 버려 상대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와 교류는 적었지만, 대화에 마음이 편하였다. 그런데 그분은 일찌기 세상과 이별했다.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났을까? 그분과 막걸리잔 권하던 그때가 엊그제 같다.
꿈은 내가 그곳에 살며 5일장을 자주 둘러보았고, 기억이 강하기에 언젠가 그곳을 지나치며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 것 같다. 참 가슴 따뜻한 인연이었다.
인연(因緣)이란 과연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또는 어떤 사물과 관계되는 연줄이고, 그 인연이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면 악연(惡緣),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단어가 붙으면 필연(必然)이 된다.
이때쯤 어느 가수의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인연이라는 것은 하늘 만이 그걸 알수 있는 것~(가수 하동진의 '인연')'...
인연이란 가깝고도 멀다. 길거리를 가다 스치듯 인연을 맺고, 죽음이란 마지막 단계에서도 인연이 생긴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못박히는 예수와 우편(오른쪽 십자가) 강도가 그 좋은 예이다.
인연은 바람직하게 이어가야한다. 그렇지 못하면 뜻하지 않게 악연으로 변한다. 우리는 이별의 순간에 서로를 증오하는 안타까운 광경을 보아왔다.
나이가 들수록 스쳐가는 인연보다 쌓아온 인연, 내곁의 남의 사람을 챙기는 것이 중요해진다. 인연의 양보다 그 깊이를 더 소중히 여기는 진정한 의미의 인연으로 남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연을 조심스레 말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렇다고 인연을 맺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삶을 자기 스스로 감당하라는 의미다. 아래는 인연에 관한 법정스님의 말이다.
'함부로 인연을 맺지마라.
진정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은 구분해서 인연을 맺어야 한다..
진정한 인연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좋은 인연을 맺도록 노력하고..
스쳐가는 인연이라면
무심코 지나쳐 버려야 한다.'
내가 자주 써먹는 글귀, 불교 범망경(梵網經)에서의 인연 맺은 사람끼리의 만남 ‘겁(劫)’...
겁은 천지가 한 번 개벽하고 다음 개벽이 시작될 때까지의 시간을 뜻한다.
1000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낙숫물이 집채 크기의 바위를 뚫는 시간이며, 100년에 한 번씩 내려오는 선녀의 옷자락에 사방 40리 크기의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다.
사람끼리 옷깃이 한번 스치려면 500겁, 부부가 되려면 7000겁, 부모 자식의 인연이 되려면 8000겁, 형제자매의 인연에는 9000겁이 각각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들 사이의 인연은 몇겁이나 쌓인걸까?
나는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정리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행복과 불행은 그때가서 느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인생의 종말에 자신이 살아온 인연과 삶을 진단하고, 남은 궁금증에 자신의 삶이 끝남을 아쉬워할 것이다.
나는 그 마지막 궁금증을 없앤답시고 살아 온 인연의 발자취를 돌아다 보려 노력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주변은 당연하고, 잠시라도 머물렀던 추억의 장소,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옮겨 다녔던 집, 어머니의 친정 고향, 누나가 시집 갔던 동네, 뿐만 아니라, 군대생활을 할때 훈련받고 옮겨 다닌 부대, 하여간 나의 기억속에 궁금증이 남아 있는 곳이라면 그곳을 다시 방문하고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산다는 건 세상 거의 모든 것이 인연으로 맺어져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비슷한 인물(사물)을 수없이 만나면서도 혈연 아닌 유독 특정 인물에 정을 더 느끼는 것은, 법망경에서의 옷깃을 스친 500억겁을 훨씬 뛰어넘는 숨은 인연이 더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하늘이 맺어준 인연,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길 일이다.
인연은 상대적이 아닐수도 있다. 스쳐간 인연은 같을지라도, 그것을 얼마나, 얼마동안 가슴속에 품고 있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결국 포용력이 넓은 사람이 그 인연을 오랫동안 간직하게 되는 것이 된다.
문득 나이가 들수록 관계의 넓이는 좁아지고, 깊이는 더한다는 '사회정서적 선택이론'이 떠올랐다. 부평초(浮萍草)처럼 한곳에 머물다 하나 둘 흩어져 가는 인연들이 처연하다.
이러다 깊은 밤중 자다가 내가 나의 혼(魂)을 부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우리는 아직 죽음보다도 더 지독한 인연에 얽매여 웃고 울며 살아간다. 그것이 인생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