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위빠싸나(vipassanaa)에 관한 용어는 매우 다양하며 단어들도 하나로 통일되어있지 않다. 위빠싸나에 관계된 용어는 원래 붓다께서 사용하시던 빨리어를 기준으로 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빨리어 하나에 대한 우리말 해석이 다양하고, 빨리어 표기에 있어서도 한국어 표준 맞춤법이 없기 때문에 약간의 혼란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몇 가지 외국어는 기본표기법이 정해 졌지만 빨리어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 각자가 나름대로 표기하고 있다. 여기에 한문으로 사용되는 불교용어와 영어로 된 용어가 있어서 더욱 복잡하다. 그러니까 빨리어, 한문, 영어, 우리말이란 네 가지 말이 섞여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빨리어는 붓다 당시의 마가다국의 방언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민들이 사용하는 언어였고, 상류계급은 산스크리트어(梵語)를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빨리어는 문자가 없으며 산스크리트어는 문자가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빨리어 경전은 붓다의 말씀을 결집을 통해 정리한 것이다.
이 경전이 초기 비구들에 의해 낭송되어 계승되어 오던 것을 스리랑카에서 자국어로 나뭇잎에 기록한 것이 최초의 빨리어 경전이다. 그 뒤 영국인들이 로마자로 표기한 것이 국제 빨리어(International Paali)로 통용되고 있다. 이것은 스리랑카어로 야자수 잎에 기록된 패엽경(貝葉經)을 모본(母本)으로 하여 영국에서 로마자로 빨리어 경전을 번역한 것이다.
빨리어는 붓다께서 직접 사용하신 언어이다. 또한 붓다께서는 제자들이 전법을 펼 때는 빨리어로 전법을 펴라고 말씀하셔서 제자들도 빨리어를 사용했다. 빨리어는 뜻이 매우 다양하여 주석서에 의해 해석되지 않으면 붓다 당시의 정확한 뜻을 알기에 어려움이 있다. 오랜 역사적인 세월을 거치는 동안 언어의 의미는 변질되기 마련이며 문화가 바뀌기 때문에 말의 뜻이 제대로 보존되기도 어렵다. 그리고 상징적으로 말한 말의 의미와 철학적 내용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말한 것들이라 불교경전의 해석을 주석서에 의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빨리어를 낭송할 때는 음률이 매우 아름답다. 미얀마에서 비구가 빨리어 경전을 밤새워 낭송하는 소리를 들을 때는 한편의 음악을 듣는 듯이 아름답다. 경전의 기록에 의하면 숲 속에서 빨리어 경전을 낭송하면 천인들이 매우 즐거워했다고 한다. 붓다의 열반 후에 초기부터 방대한 양의 경전을 이렇게 낭송해서 잊어버리지 않고 후대까지 전했던 비구들의 노력을 실로 눈물겨운 역사였다.
현재 보름에 한번씩 참회(포살)를 할 때 계율에 관한 경전을 외우는데 빠르게 진동하는 모터소리처럼 외우면서도 막히거나 틀리는 대목이 있으면 여기 저기서 지적하는 것으로 보아 한 비구가 경전을 외워도 다른 비구 모두가 마음속으로 함께 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빨리어가 사라졌지만 미얀마어의 상당부분이 빨리어의 파생어라고 한다. 마치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의 상당수가 한문인 것과 같다.
외국어 표기의 기본원칙은 소리나는 대로 적게 되어있다. 그러나 발음 자체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약간씩 다르게 표기되고 있다. 우선 빨리어(Paali語)를 표기하는 것도 빨리(Paali)라고 하기도 하고 빠알리(Paali)라고도 한다. 문자대로 표기하면 '빨리'이고 장음으로 표기하면 '빠알리'이다.
외국어는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지만 받침을 붙일 경우 된소리보다는 부드러운 소리를 선택한다던가 하는 방법들이 지켜지는 것이 현실적인 어려움이다. 한국어로 표기할 때는 가급적이면 외국어 표기보다 한국어 표기가 우선되어야 하겠지만 부득이 외국어 표기를 사용해야 할 때가 있어서 문제이지만 더 어려운 것은 다양한 빨리어의 내용을 우리말로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도 있다.
또한 영어로 된 책을 번역할 때 혼란이 있으며, 한문으로 사용되던 말들과 새롭게 한문식의 해석을 적용하는 경우에도 조어(造語)가 생기고 있다. 가령 알아차림 등으로 사용되는 빨리어 사띠(sati)라는 말이 한문으로는 염(念)이라고 표기되며 이것이 심념(心念)이라는 말로 부르며 그래서 다시 우리말로 마음챙김이란 조어(造語)가 생기게 된다.
원래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는 빨리어를 적정한 우리말로 옮기기는 어렵다. 둑카(dukkha)라는 괴로움이란 말도 괴로움이 정확한 뜻은 아니다. 불만족, 하찮으며 비어있는 것, 괴로움 등의 말이지만 그냥 편의상 고(苦) 또는 고통이나 괴로움이라고 사용하고 있다.
위빠싸나(vipassanaa)에 대한 표기도 위빠싸나, 위빠사나, 위빳사나로 다양하게 쓰인다. 이 말도 통일되어야 할 단어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영어식 표기인 비파사나는 빨리어 발음이 아니다. 빨리어 v는 ㅇ에 가까운 소리가 난다. 또한 이것을 한문으로는 비발사나(毘鉢舍那)라고도 하지만 역시 빨리어 표기가 아니다.
위빠싸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쓰이는 위빠싸나(vipasssanaa)와 사띠(sati)에 대한 용어해석을 살펴보자. 위빠싸나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또한 정확한 수행을 위해 이 두 가지 말의 뜻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위빠싸나(vipassanaa)는 위(vi)라는 접두사에 빠싸나(passanaa)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모음(母音) 앞에 접두사로 붙는 위(vi)는 분리, 다름, 여러 가지 등의 뜻을 가진다. 그러나 실제의 내용은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三法印)을 의미한다. 세 가지 법이란 붓다의 가르침에 핵심이 되는 가장 중요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후에 도장 인(印)자를 넣어 세 가지 법의 도장이란 뜻으로 삼법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위(vi)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
빠싸나(passanaa)는 직관(直觀), 통찰(洞察), 철견(徹見), 간파(看破), 응시(凝視), 관찰(觀察), 수관(隨觀. 계속해서 본다.), 꿰뚫어 본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모두 하나 같이 알아차림이 강력하고 적극적인 형태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빠싸나(vipassanaa)는 올바른 직관, 통찰력, 명확한 관찰, 여러 가지를 꿰뚫어 봄, 삼법인을 직관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상징적인 뜻의 위빠싸나는 신, 수, 심, 법이라는 사념처를 통찰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자신의 물질과 마음을 대상으로 통찰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념처 또는 위빠싸나라는 말은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은 수행방법으로 이 세상에 처음으로 새롭게 나타난 수행방법이다. 이 수행방법은 붓다께서 오랫동안 쌓은 바라밀 공덕의 과보로 인해 알게된 소중한 방법인 것이다.
위빠싸나는 어느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수행자만 하는 수행방법이 아니라 매우 보편 타당한 수행방법을 표현하는 말이다. 종교를 초월하고 고통받는 인간 모두에게 필요한 위빠싸나는 상좌불교의 전유물이 아니고 수행하고 있는 모든 수행자의 것이라는 것을 용어의 뜻에서도 감지할 수가 있다. 이처럼 위빠싸나는 수행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며 알아차릴 대상은 사념처인 몸,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인 것이다. 이러한 위빠싸나를 영어로는 통찰(insight)이라고 한다.
위빠싸나는 통찰력을 의미하는 꿰뚫어 본다는 강력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수행은 궁극적으로 지혜를 얻어야 하는데 지혜를 얻기 위해서 대상의 모양을 보지 않고 빠라마타(paramattha. 실재. 성품)를 알아차리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에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위빠싸나는 이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열반에 이를 수 없는 오직 유일한 길이라고 붓다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통찰을 해야 지혜가 생기고 지혜가 생겨야 사물의 본성을 바로 알아 집착을 끊게 되고 이 과정을 거쳐 궁극의 열반에 이르기 때문이다. 또한 통찰해야 하기 때문에 깊게 집중하면 안되고 가볍게 찰나집중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깊게 집중을 하면 대상에 빠져서 고요함 밖에 없기 때문에 순간집중을 해야 한다. 이것이 위빠싸나와 사마타(samatha) 수행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위빠싸나라는 용어는 궁극적인 수행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것을 수행의 총론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실제의 수행을 할 때는 위빠싸나라는 뜻의 관찰이나 통찰이란 말을 잊어 버려야 한다. 목표는 있으되 바라는 것이 없이 해야 올바른 수행이듯이 실제 수행에서도 이 말이 매우 엄격히 적용될 때 비로소 바르게 수행을 하게 된다.
꿰뚫어 본다는 것은 수행의 기본설정인데 실제로 수행을 할 때는 꿰뚫어 보려고 하면 꿰뚫어지지 않는 것이다. 수행을 할 때는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아야 된다. 바라는 것이 없이, 없애려고 하지 않고, 분석하려고 하지 않고, 관찰하지 않고, 내가 본다는 생각 없이, 작용하지 않고 비작용으로 알아차려야 하는 것이다. 목표는 있으되 바라는 것이 없이 한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위빠싸나가 통찰이라고 하는 말인데 통찰을 하려면 사실은 통찰을 해서는 안 된다. 통찰은 알아차린 결과로써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다. 통찰이나 관찰이 된다는 것은 그냥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서 조건 없이 알아차려야만 비로소 통찰되어 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띠라고 하는 알아차림의 특성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관찰을 하거나, 통찰하려고 하면 바르게 수행하기가 어렵다.
통찰을 한다는 말의 내용은 꿰뚫어 본다는 뜻인데 무엇을 어떻게 알아야 꿰뚫어 보는 것일까. 진정한 의미에서 통찰을 한다는 것은 빤냐띠(pa~n~natti)라고 하는 것을 보지 않고 빠라마타(paramattha)를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빤냐띠는 모양, 명칭, 관념을 말한다. 이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으로 만들어서 아는 것이다. 빠라마타는 실재하는 것으로 몸과 마음의 성품을 말한다. 이것은 실제로 있는 것을 말하며, 열반을 제외하고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인데 바로 몸과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 마음과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빠라마타를 궁극적 진리, 또는 최고의 법으로 말하고 있다. 결국 위빠싸나는 궁극적으로 빠라마타를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총론적으로 통찰이나 관찰은 있으되 각론적으로 실제 수행에 임할 때는 알아차림(sati)을 해야 한다. 관찰하려고 하면 무리가 따른다. 그래서 이때는 사띠(sati)를 해야 한다. 두 가지 단어는 서로 비슷한 말 같지만 수행을 할 때는 관찰이 장애의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목표를 가지고 결과를 얻으려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수행을 하다보면 미세한 것 하나에도 걸려 넘어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고정관념이 바뀌려 할 때, 정신적으로 고요하거나 미세해진 상태에서는 검불하나에도 걸려 넘어질 수가 있다. 남의 말이나 환경, 그리고 자신의 수행방법 등 모든 것에서 각기 다르게 장애가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알아차릴 대상을 대하는 기본적인 인식이나 수행방법은 수행의 성공을 결정 짖는 열쇠가 된다.
다시 강조하면 위빠싸나와 사띠라는 말은 같은 의미이지만 미묘한 차이로 총론과 각론의 개념으로 나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위빠싸나를 하되 수행을 할 때는 사띠를 해야한다. 여기서 위빠싸나는 통찰, 또는 관찰이고 사띠는 알아차림이다. 목표는 있지만 목표는 의식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수행의 미묘함이다. 언어는 눈에 보이지 않게 고정관념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관찰을 하려고 할 때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가며 장애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관찰은 무엇인가 결과를 얻으려고 주시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수행을 하면 몸이 긴장하게 되고 관찰하려는 의지 때문에 눈으로 보려고 해서 머리가 아프거나 상기가 오기도 한다. 관찰하려고 하면 마음이나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않거나 사유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이런 장애 때문에 가볍게 알아차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언어의 덫이다. 깊은 집중이 아닌 가벼움이 있어야 대상에 함몰되지 않고 대상의 성품을 객관화해서 알아차릴 수 있다.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은 위빠싸나가 아니며 깊은 집중이고 주관적인 것이라서 고요함만 있고 지혜를 얻을 수는 없다.
앎에 있어서 어떤 군더더기도 있어서는 안 된다. 대상은 다만 있어서 알아차리는 것이어야 한다. 처음부터 분석을 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냥 알아차릴 때 결과로써 자연히 분석되어지는 것이 지혜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만 부담이 되거나 하기 싫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차 한잔을 마시는 여유처럼 긴장을 풀고 편하게 그리고 맑게 알아차려야 한다.
이처럼 알아차림은 알고 말아야지 알아서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이 어렵다고 한다면 바로 이것이 어려운 것이다. 바라는 것 없이 그냥 알고 만다는 것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다른 삶의 새로운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지혜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속의 논리로 보면 바보 같지만 바보 같아서 지혜가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목표는 평강공주이고 실행은 바보온달처럼 해야 한다.
빨리어(Paali語) 사띠(sati)는 우리말로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기억, 알아차림, 주의 깊음, 주시, 의식, 인식, 염(念), 마음 챙김 등이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기억이란 말이다. 사띠를 기억이란 말로 번역은 하지 않지만 기억을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은 온전한 인식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나 기억이란 바탕에 입각해서 인식할 때 정상적으로 인식을 한다. 마음은 기억을 전제로 할 때 마음의 효능이 발휘된다.
사띠에서 말하는 기억은 과거를 기억하는 그런 의미를 내포한다는 뜻도 있겠지만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현재에 머무는 것이 위빠싸나 수행의 핵심이다. 그래서 항상 현재에 머물러 있는 행위가 사띠(알아차림)라는 것으로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띠(sati)는 마음이 일으킨 마음의 작용으로 선한 행위에 속한다. 마음이 마음을 새로 내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알아차리는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위빠싸나 수행을 한다는 것이다. 알아차림은 선한 마음의 작용이므로 알아차림을 하면 계율을 지키는 것이 되고 고요함을 얻어 지혜가 성숙되는 것이다.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탐, 진, 치가 붙을 수 없어서 그것 자체가 선업이고 계율을 지키는 것이 된다.
사띠(sati)는 이처럼 다양한 말로 표현되는데 기억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데 대체로 알아차리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알아차린다고 하는 사띠는 저 스스로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대상에 마음을 붙여주는 기능을 한다.
사띠는 깨끗한 마음의 작용으로 행(行)에 속하는 말이다. 행은 마음의 형성력, 또는 마음의 의지를 말하며 마음이 행위를 하도록 의도해서 일어난 것을 말한다. 그래서 동적인 것이지만 마음의 작용으로 분류된다. 이때의 알아차림이란 행은 마음이 대상을 자세하게 알 수 있도록, 그래서 대상을 깨어있는 마음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이 저 스스로는 아는 기능은 없다. 이렇게 대상에 분명하게 마음을 붙여놓고 아는 것은 오온의 행(行)이 아니고 식(識)이 아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때의 식은 아는 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띠를 알아차림이라고 하는데 대상에 붙이는 기능만을 한다고 볼 때 알아차림과 아는 마음을 합성해서 '주시하여 안다'는 표현이 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는 아는 마음은 생략되고 있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오온의 색, 수, 상, 행, 식은 각기 자체적으로도 무리를 이루지만 항상 크게 몸과 마음이라는 하나의 무리를 이루어 서로 공존하면서 서로의 역할을 하며 기능을 담당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조건지어진 것이라고 말하며 원인과 결과라고 말한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로써는 제대로 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인간과 자연에 관계된 모든 것에서 조건과 원인과 결과가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다른 어떤 창조적인 절대자의 힘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때의 알아차림에는 또 다른 마음의 작용인 혜근(慧根)이 붙을 수 있다. 혜근 역시도 깨끗한 마음의 작용 중의 하나이다. 알아차림으로 대상에 정확하게 붙게 하고 혜근까지 일어나게 하면 대상을 아는 식이 지혜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마음의 작용으로 지혜가 생성되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조화로써 아는 마음의 기능도 낮은 지혜에서부터 높은 지혜까지 다양한 지혜가 나게 된다.
수행에서는 알아차림이라는 계(戒)와 행(行)의 원인으로 결과로써 정(定)이 생긴다. 다시 정이 원인이 되어 혜(慧)가 생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혜(慧)가 있어서 알아차림이 일어나도록 하기도 한다. 뿐더러 알아차림에는 혜근(慧根)이 함께 하여 아는 식의 기능을 돕기도 한다. 이처럼 오온(五蘊)의 기능과 같이 오근(五根)의 기능도 서로 동반자적인 입장에서 상호 보조를 하고 있다.
사띠와 오온의 관계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경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안, 이, 비, 설, 신이라는 오근은 식(識)을 의지처로 하고 식은 사띠를 의지처로 하고, 사띠는 해탈을 의지처로 하고, 해탈은 열반을 의지처로 한다."
여기서 사띠의 중요성이 밝혀진다. 위빠싸나 수행을 한다는 것은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이라는 오온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이 오온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결국 이런 알아차림은 해탈의 길로 이르게 하고, 해탈을 함으로써 닙바나에 이르는 과정이 소상하게 밝혀진 것이다. 요약하자면 오온을 알아차려서 닙바나에 이른다는 것이 수행의 과정임을 단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빨리어로 사띠(sati)를 말할 때 염(念)이라고 하는 것은 한문표기이다. 그러나 알아차림은 쉬운 우리말이라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사념처(四念處)라고 하는 말도 우리말로는 '네 가지 알아차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띠(sati)라고 하는 알아차림을 영어로 표기할 때는 한층 복잡해진다. 빨리어 사띠(sati)로 사용하면 좋겠지만 현재 소개되는 외국어 자료가 모두 영어로 된 것이 많기 때문에 영어로 쓰이는 사띠(sati)라는 단어가 매우 많다. 우선 알다, 깨닫다 라고 쓰이는 어웨어(aware)가 있다. 그리고 주의 집중으로 쓰이는 마인드풀(mindful)이 있다.
원래의 영어로는 어웨어(aware)나 마인드풀(mindful)인데 19세기 영국의 빨리성전협회(PTS) 회장인 리즈 데이빗(Rhys Davids)이 불교적 관점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니스(ness)를 붙여서 어웨어니스(awareness)와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뜻은 같은 말이다.
사띠(sati)를 영어로 또 다르게 부르는 단어는 주목하다(noting), 지켜본다(watching), 관찰하다(observing), 알다(knowing), 깨어있다(wakefulness), 응시하다(contemplation), 주의집중(attentiveness)이란 단어를 다양하게 사용한다. 또한 보다(see), 보다(look)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본다는 루크(look)는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본다는 의미로 쓰인다. 본다라고 하는 루크(look)는 한문으로 직관(直觀)한다 할 때 볼 관(觀)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 중에 눈으로 보고 아는 것의 양이 절대적이라서 본다고 하는 것이지 수행을 할 때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아는 것이다. 실제로 정보는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여섯 구멍으로 들어온다. 정보가 이 여섯 구멍으로 들어오지만 아는 것은 모두 마음이 아는 것이다.
직관한다 할 때의 본다고 하는 것도 알고 본다, 또는 꿰뚫어 본다는 말로 이해해야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상을 본다라고 이해하지만 사실은 안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유익하다. 본다라고 하면 수행 중에 장애가 생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수행을 하다보면 다시 안다라는 단어보다 느낀다고 했을 때 더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본다, 안다, 느낀다라고 단계적으로 받아들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상의 영어로 된 단어는 모두 빨리어로는 사띠(sati)를 말하며 우리말로는 알아차림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금씩 내용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기도 하지만 모두 알아차림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어웨어니스(awareness)는 알아차림이란 뜻으로 사띠(sati)쪽에 가까운 말이다.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는 알아차림(sati. awareness)과 집중(samaadhi. concentration)의 합성어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어웨어니스(awareness)라고 하는 알아차림으로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고 하는 마음집중을 계속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무난할 것이다.
사띠(sati)란 말 중에 의식(consciousness, 意識)이란 말도 있는데 이것은 알아차림의 의미보다 보통의 의식을 말할 때 쓰인다. 그러므로 평상시 그냥 아는 것을 의식이라고 한다. 빨리어로 위냐나(vi~n~na.na, 識)를 콘시어스니스(consciousness, 意識)로 풀이한다. 의식(意識)은 보통으로 아는 것이라서 알아차림(awareness)과는 다르게 쓰인다.
그러나 사띠(sati)라고 하는 알아차림은 새로 마음을 내서 각성(覺醒)된 상태에서 하고 있는 것을 알도록 해주는 것이다. 곧 정신차려서 하는 일을 알도록 해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보통의 의식보다 분명하고 깨어있고 집중된 상태에서 무엇을 하거나 할 때, 하고 있는 것을 자세하게 알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의 경우는 집중도 없고 무엇을 하는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서 하는 것인데 알아차림은 현재, 하고 있는 행위나 마음의 상태를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사띠(sati)라는 알아차림은 사띠(sati) 하나로써는 완전하지 못하다. 삼빠쟌나(sampaja~n~na, 正知)가 항상 뒤따라야 더 나은 사띠가 된다. 삼빠쟌나를 분명한 앎이라고 한다. 알아차림이 있지만 언제나 부족한 것이기 때문에 알아차림과 함께 항상 분명한 앎이 필요하다.
삼빠쟌나라고 하는 분명한 앎은 알아차림을 좀더 사려 깊고 심사숙고해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네 가지가 있는데 알아차림에 이익이 있거나 유용한 것인지, 시기 상황이 적절한지, 불필요한 대상이 아니고 알아차릴 대상의 범주에 있는 것인지, 어리석지 않게 삼법인의 지혜를 알고 있는지를 말한다.
위빠싸나 수행의 기본이 되는 경전을 사띠빠타나 숫따(satipa.t.thaana sutta, 念處經)라고 한다. 사띠빠타나는 사띠(sati)와 빠타나(pa.t.thaana)의 합성어인 사띠(sati)는 알아차림이라는 말이고, 빠타나 (pa.t.thaana)는 확고하고 움직이지 않게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확고하고 부동의 알아차림'이란 말이 사띠빠타나의 뜻이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염처(念處)라고 하는데 알아차림에 머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는 이를 '알아차림의 확립'이나 '면밀하게 알아차림'이라는 말로도 사용되기도 한다.
사띠빠타나 숫따(Satipa.t.thaana sutta)라고 하는 염처경(念處經)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무엇을 확고하고 긴밀하게 그리고 움직이지 않게 알아차려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신, 수, 심, 법이라고 하는 네 가지 알아차림이다. 이것을 사념처(四念處) 또는 네 가지 알아차림이라고 한다.
요약을 하면 통찰(洞察) 또는 관찰(觀察)인 위빠싸나(vipassanaa)는 몸,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이란 네 가지 알아차림(四念處)이라고 하는 사띠빠타나(satipa.t.thaana)를 통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통찰(洞察)함에 있어서 수행을 할 때는 사띠라고 하는 비작용적인 알아차림으로 수행을 해야 한다. 또한 언제나 사띠(sati)는 삼빠쟌나(sampaja~n~na)라는 분명한 앎이 항상 함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위빠싸나 수행의 기본개요이다. 그러므로 위빠싸나(vipassanaa)라는 뜻이나 사띠빠타나(satipa.t.thaana)라고 하는 알아차림의 확립, 또는 염처(念處)나, 사띠(sati)라고 하는 알아차림은 모두 큰 틀에서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세분화되어 다르게 사용되기도 한다.
첫댓글 섬세하게 개념정리가 아주 잘됩니다. 정말 생생하게 살아있는 법문입니다.감사합니다.
그동안 엉터리로 알고 있은것이 많았습니다. 사티와 위빠사나 의 차이도 이제 정확히 알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