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소년>
니콜라 디가르드 글. 케라스코에트 그림/ 피카주니어
백승남(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고립에서 자유로 - 다른 아이들처럼 되고 싶었던 종이 소년 이야기
종이로 만들어진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아이들과 섞이지 못하는 외톨이 아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표지를 넘기면 ‘연약한 영혼들에게’라는 헌사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종이로 만들어져서 언제든 찢어질 수 있는 ‘연약한 아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연약한 영혼을 상징하는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 종이로 만들어져서 이 아이는 뭐든 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지요. 연약한 아이기 때문에 굳어 있지 않아요. 연약한 아이라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존재의 역설이 느껴집니다.
종이 소년은 남들과 다르다고 괴롭힘을 당합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엄마에게 소년은 대답합니다. 종이로 만들어져서 다른 아이들이 괴롭힌다고,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한 아이가 되고 싶다고요.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우리 아가, 엄마는 네 모습 그대로 널 사랑한단다.”라고 말해줍니다. 이제 소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엄마가 내 곁에 있어서 다행이에요, 라고 할까요? 아니, 오히려 소년은 분노합니다.
“내가 무슨 일을 겪는지 엄마가 어떻게 알아요?
엄만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이잖아!
난 종이로 된 아이라고요, 다른 아이들처럼 되고 싶어요!
발이 시커멓게 될까 봐 겁내지 않고 불 위를 뛰어넘고 싶어요!
구깃구깃해지는 대신 푸릇푸릇한 멍이 들고 싶다고요!
빗속에서도 우글쭈글해지지 않고 신나게 놀고 싶어요!”
다른 아이들처럼 되고 싶다는 ‘종이’ 아이의 절규에 마음이 저릿합니다. 엄마와, 다른 아이들과 같은 종족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잖아요. 우리 아이가 한창 아플 무렵, 소리치며 분노하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아들은 10대 초반에 발병한 희귀 난치 질환으로 오랜 투병 생활을 해야 했는데요. 일상생활에 숱한 제약이 따르다 보니 종이 소년처럼 분노를 터뜨릴 때가 더러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축구도 달리기도 실컷 하고 싶다고요. 밤새도록 놀고, 먹고 싶은 것도 양껏 먹어보고 싶다면서요. 그저 평범한 일상을 바랄 뿐인데 그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며 뛰쳐나가던 아들의 모습과 종이 소년이 겹쳐집니다.
그래도 슬픔의 감정에만 갇혀 있지 않고 화내고 소리치며 갈망을 표출하니 다행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스스로 길 찾기를 시도하는 방식일 수 있으니까요.
그때의 제 아들처럼 종이 소년도 집을 박차고 나와 달려갑니다. 마침내 참나무 둥치에 몸을 부딪히고, 같은 종인 나무가 주는 이해와 공감을 느낍니다. 엄마가 해주지 못한 공감과 위로를 나무에게서 받은 소년은 힘을 얻고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종이는 접을 수 있으니까 늑대가 되어 숲의 끝까지 달려가 보고, 원숭이가 되어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다니고, 용이 되어 마을 위를 날기도 합니다.
종이 소년을 보다가 ‘고립성’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유럽의 민담>(막스 뤼티 저)에서 민담 주인공들의 대표적 속성으로 꼽는 고립성은 ‘절실하게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한 상태’를 말한다고 해요. 판타지나 SF의 주인공들도 해당될 텐데요. 고립성은 보는 시각에 따라 인물을 무언가 결핍된 가여운 존재로 볼 수도 있고, 오히려 새로운 것들과 결합할 가능성이 많은 존재로 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막스 뤼티의 말을 빌리자면 “민담 속 등장인물은 고립 때문에 모든 것과 접촉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판타지 SF계의 대모라 불리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 어슐라 르귄의 말도 생각납니다. ”창조물이 생명을 가지려면 사실은 동시에 열두 가지 배타적인 존재일 수 있어야 한다.” (<밤의 언어> 어슐라 르귄 저)
그러니까 소년은 종이 인간이면서 늑대일 수 있고, 동시에 원숭이, 용, 새일 수 있는 거지요. 지금은 제가 그림책을 공부하는 사람인데요. 작품을 쓸 때는 작가, 학생들과 글쓰기 할 때는 선생님, 해금 연주할 때는 연주자가 되는 것처럼요. 더구나 ‘종이’ 소년이니 접기를 통해 얼마든지 다른 존재로 자유자재 변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도 종이 소년으로 주인공을 삼은 선택은 탁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신이 다른 존재로 동시에 변신할 수 있는, ‘결합 가능성으로 열린’ 존재라는 걸 깨달은 소년은 더이상 다른 아이들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꾸지 않습니다. 수많은 가능성을 품은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힘이 생긴 거지요.
이 장면이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는 그림으로 잘 보여집니다. 이 장면뿐 아니라 그림의 색감과 분위기가 소년의 감정 변화에 따라 계속 달라지는데요. 색채가 밝지 않은 수채화의 빛깔이 소년이 분노하고 절규할 때는 더욱 짙어졌다가, 다른 존재로 변신할 때는 점차 노랑, 녹빛이 섞이며 밝은 색채로 바뀌어 갑니다.
그린 이가 부부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작가소개를 보고 어떻게 부부가 공동작업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나눠 작업하는 걸까? 서로 이야기 나누고 토론하다 다투기도 하지 않을까? 그러면 함께 작업을 계속하고 싶을까? 등등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는데요. 그만큼 작가들의 깊은 사유와 논의를 거쳐 탄생한 그림책인 거 같다는 생각입니다. 민담의 심층 구조나 심리 치유기법 등과 연결해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을 거 같고요.
남들과 다르다면 누구나 종이 소년이 될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픈 아이, 마음이 아픈 아이, 혹은 개성이 강하거나 자신만의 특별함이 넘치는 아이일 수도 있습니다. 남들과 다르다고 배척당하던 아이가 자기를 긍정하며 두려움에서 용기로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새처럼 날아가는 종이 소년의 마음은 진정한 자유와 해방감 아니었을까, 하고 헤아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