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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 金秀敏(1867 ~ 1909)】 "전국 의병들과 함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다."
동학농민운동과 의병 활동으로 일본에 맞선 김수민
의병 이끌고 일제 수탈 시설 공격···서울진공작전에 노력
1867년 경기도 장단군(長湍郡)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에 대한 기록은 알려진 바가 없다. 동학농민운동 시에 농민군 측 입장에서 활약하여 관헌으로부터 동학당으로 지목당하였다.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자 크게 분개하여, 동년 (음)8월 26일에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북면(北面) 솔량리(率浪里)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부근의 산포수와 농민에게 당시 국가의 사정을 말하고, 황실을 위한 의병이 되어서 일본군을 주살하고 국권의 회복을 꾀하자고 피력하였다. 용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사격술에 능한 명사수였고, 화약과 탈환까지 스스로 제조할 줄 알아 의병진 중에 명장으로 손꼽혀 휘하에 많은 농민이 모여들었다.
장단의 덕음동(德蔭洞)을 거점으로 군량을 모으고 보부상들로 정보대를 편성하여 적의 움직임을 탐지하도록 하였다. 의병의 복장도 송백(松柏)의 위장색으로 염색·착용하도록 하였다. 부호의 양곡과 의복을 징발하여 군용으로 충당하고 어려운 농민들은 철저히 보호하였다. 그리고 경기도 개성군 대흥산(大興山) 창고에 저장해 두었던 정부군 대포 30문, 소포 150문을 탈취하여 각 지역에 분산하였다. 이로써 무력적으로 상당한 기세를 가질 수 있었다.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 17일 개성(開城)수비대와 격전을 벌이면서 열은동(悅隱洞) 일대에서 농민군을 재규합하여갔다. 이 과정에서 척후장(斥候將) 김오룡(金五龍)은 마전(麻田)시장에 밀행한 마전분견소 순검을 총살하였다. 김오룡에게 개성 홍문동(弘門洞)에 잠복하면서 개성의 경찰 및 수비대의 동태를 정찰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결국 개성경찰서에 붙잡히고 말았다.
1908년 다른 의병부대와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특히 이인영(李麟榮) 부대와 연합한 후, 이인영·이은찬(李殷瓚) 등과 같이 경기도 내의 장단·마전 등의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20~30명 정도의 인원으로 유격대를 편성한 후, 4월 일본군 구화장(九化場) 헌병분견소를 기습 공격하여 일본군 헌병을 살해하였다. 이곳에서 노획한 병기와 탄약으로 의병 대열의 무장을 재정비·강화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장단·풍덕(豐德) 일대에서 재차 위력을 발휘하면서 일본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일본군은 장단·구화장·양합리(兩合里)·개성·풍덕의 각 수비대와 헌병 등과 협력하여 유격대를 추적했으나 의병부대는 능숙한 게릴라 전술을 전개하며 일본군에 타격을 입혔다. 그 후 의병부대는 점차 남하하여 10월 강화도를 기습 공격하여 재류 일본인을 처단한 후 강화도를 해방시켰다.
이에 놀란 일본군은 용산에 있는 일본군 보병 제13연대 1소대 30명을 강화도로 급파하여, 10월 강화도에 상륙하였다. 이때 정족산(鼎足山) 전등사(傳燈寺)에 웅거하고 있던 약 100명의 의병은 접근해 오는 일본군과 하루 밤낮에 걸쳐 격전을 벌여 이들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입혔다. 31일 증원부대 35명과 합세한 일본군은 11월 1일 광성(廣城)으로 재상륙하여 전등사를 향해 돌격하였으나 그곳에는 의병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고, 별립산(別立山) 산이포(山伊浦) 방면으로 수색작전을 벌였으나 역시 흔적을 찾지 못했다.
일본군은 실패를 만회하려고 대대적으로 강화도 의병 소탕작전을 계획하였다. 일본군은 11월 26일부터 3일간에 걸쳐 개성수비대 장교 이하 30명, 용산 주차 보병부대 장교 이하 70명, 해주(海州)수비대 장교 이하 34명, 연안(延安)수비대 장교 이하 7명을 동원하였다. 이들은 8종대(縱隊)로 나누어 강화로부터 제1일은 송산동(松山洞) 서문 밖 하일(河逸)의 선으로, 제2일은 인화선(寅火線) 종로(鍾路) 정포선(井浦線)으로, 제3일은 그 서쪽 교동도(喬桐島)·매음도(妹音島)에 걸쳐 대수색 작전을 전개하였다.
11월 26일 약 20명의 유격대원은 정두동(亭頭洞)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이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려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은 7명 중 4명의 사상자를 내고 서북방으로 후퇴하였다. 유격대원 외에 대부분의 의병은 이미 승선하여 황해도와 주변 섬으로 이동한 상황이었으므로, 결국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 투입은 헛수고로 끝나고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1909년 적성(積城)에서, 그리고 3월에 강원도·충청도·황해도 일대에서 연기우(延基羽)·하상태(河相兌)·이진룡(李鎭龍)·한정만(韓貞萬)·이인순(李仁淳)·정용대(鄭用大) 등과 더불어 활약하였다. 휘하에는 많은 의병이 운집했고, 의병 활동 중 일부 의병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인식(李仁植)·김거복(金巨福)·이창근(李昌根)은 징역 5년, 최기서(崔起西)는 징역 7년, 좌익장이던 전복규(全福奎)는 유형 5년 형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이후 적의 동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효율적인 항일전을 전개하고자 차부(車夫)로 가장하고 서울에 잠입하였다. 1909년 3월 상순에 서울 북문으로 들어와 이화동(梨花洞)에 있다가 제동(齊洞)으로 옮겨 거주하였다. 당시 신분을 감추려고 경성구세군(京城救世軍)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울에서 무라다 소총 60정을 구입하여 의형제 관계였던 의병장 연기우(延起羽)에게 40정을 주었고, 나머지 20정은 자신의 의병부대의 화력 강화를 위해 사용하였다.
1개월 후 고양군(高陽郡) 하도면(下道面) 소화리(小花里)로 근거지를 옮긴 후, 8월 14일 화전리(花田里)에서 경성필동헌병대(京城筆洞憲兵隊)에게 발각되어 일제에 붙잡히고 말았다. 일본군 헌병사령부에 감금되어 취조 중 일본군이 신문하자, “죽이든 살리든 속히 할 것이지 나에게 장황한 질문은 하지 말라”하고 거절하였다. 그 후 서대문감옥에 투옥되었고, 탈옥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1909년 11월 22일 경성공소원 형사부에서 확정 판결을 받아 12월 17일에 교수형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67년 경기도 장단군(長湍郡)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에 대한 기록은 알려진 바가 없다. 동학농민운동 시에 농민군 측 입장에서 활약하여 관헌으로부터 동학당으로 지목당하였다.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자 크게 분개하여, 동년 (음)8월 26일에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북면(北面) 솔량리(率浪里)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부근의 산포수와 농민에게 당시 국가의 사정을 말하고, 황실을 위한 의병이 되어서 일본군을 주살하고 국권의 회복을 꾀하자고 피력하였다. 용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사격술에 능한 명사수였고, 화약과 탈환까지 스스로 제조할 줄 알아 의병진 중에 명장으로 손꼽혀 휘하에 많은 농민이 모여들었다.
장단의 덕음동(德蔭洞)을 거점으로 군량을 모으고 보부상들로 정보대를 편성하여 적의 움직임을 탐지하도록 하였다. 의병의 복장도 송백(松柏)의 위장색으로 염색·착용하도록 하였다. 부호의 양곡과 의복을 징발하여 군용으로 충당하고 어려운 농민들은 철저히 보호하였다. 그리고 경기도 개성군 대흥산(大興山) 창고에 저장해 두었던 정부군 대포 30문, 소포 150문을 탈취하여 각 지역에 분산하였다. 이로써 무력적으로 상당한 기세를 가질 수 있었다.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 17일 개성(開城)수비대와 격전을 벌이면서 열은동(悅隱洞) 일대에서 농민군을 재규합하여갔다. 이 과정에서 척후장(斥候將) 김오룡(金五龍)은 마전(麻田)시장에 밀행한 마전분견소 순검을 총살하였다. 김오룡에게 개성 홍문동(弘門洞)에 잠복하면서 개성의 경찰 및 수비대의 동태를 정찰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결국 개성경찰서에 붙잡히고 말았다.
1908년 다른 의병부대와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특히 이인영(李麟榮) 부대와 연합한 후, 이인영·이은찬(李殷瓚) 등과 같이 경기도 내의 장단·마전 등의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20~30명 정도의 인원으로 유격대를 편성한 후, 4월 일본군 구화장(九化場) 헌병분견소를 기습 공격하여 일본군 헌병을 살해하였다. 이곳에서 노획한 병기와 탄약으로 의병 대열의 무장을 재정비·강화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장단·풍덕(豐德) 일대에서 재차 위력을 발휘하면서 일본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일본군은 장단·구화장·양합리(兩合里)·개성·풍덕의 각 수비대와 헌병 등과 협력하여 유격대를 추적했으나 의병부대는 능숙한 게릴라 전술을 전개하며 일본군에 타격을 입혔다. 그 후 의병부대는 점차 남하하여 10월 강화도를 기습 공격하여 재류 일본인을 처단한 후 강화도를 해방시켰다.
이에 놀란 일본군은 용산에 있는 일본군 보병 제13연대 1소대 30명을 강화도로 급파하여, 10월 강화도에 상륙하였다. 이때 정족산(鼎足山) 전등사(傳燈寺)에 웅거하고 있던 약 100명의 의병은 접근해 오는 일본군과 하루 밤낮에 걸쳐 격전을 벌여 이들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입혔다. 31일 증원부대 35명과 합세한 일본군은 11월 1일 광성(廣城)으로 재상륙하여 전등사를 향해 돌격하였으나 그곳에는 의병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고, 별립산(別立山) 산이포(山伊浦) 방면으로 수색작전을 벌였으나 역시 흔적을 찾지 못했다.
일본군은 실패를 만회하려고 대대적으로 강화도 의병 소탕작전을 계획하였다. 일본군은 11월 26일부터 3일간에 걸쳐 개성수비대 장교 이하 30명, 용산 주차 보병부대 장교 이하 70명, 해주(海州)수비대 장교 이하 34명, 연안(延安)수비대 장교 이하 7명을 동원하였다. 이들은 8종대(縱隊)로 나누어 강화로부터 제1일은 송산동(松山洞) 서문 밖 하일(河逸)의 선으로, 제2일은 인화선(寅火線) 종로(鍾路) 정포선(井浦線)으로, 제3일은 그 서쪽 교동도(喬桐島)·매음도(妹音島)에 걸쳐 대수색 작전을 전개하였다.
11월 26일 약 20명의 유격대원은 정두동(亭頭洞)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이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려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은 7명 중 4명의 사상자를 내고 서북방으로 후퇴하였다. 유격대원 외에 대부분의 의병은 이미 승선하여 황해도와 주변 섬으로 이동한 상황이었으므로, 결국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 투입은 헛수고로 끝나고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1909년 적성(積城)에서, 그리고 3월에 강원도·충청도·황해도 일대에서 연기우(延基羽)·하상태(河相兌)·이진룡(李鎭龍)·한정만(韓貞萬)·이인순(李仁淳)·정용대(鄭用大) 등과 더불어 활약하였다. 휘하에는 많은 의병이 운집했고, 의병 활동 중 일부 의병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인식(李仁植)·김거복(金巨福)·이창근(李昌根)은 징역 5년, 최기서(崔起西)는 징역 7년, 좌익장이던 전복규(全福奎)는 유형 5년 형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이후 적의 동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효율적인 항일전을 전개하고자 차부(車夫)로 가장하고 서울에 잠입하였다. 1909년 3월 상순에 서울 북문으로 들어와 이화동(梨花洞)에 있다가 제동(齊洞)으로 옮겨 거주하였다. 당시 신분을 감추려고 경성구세군(京城救世軍)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울에서 무라다 소총 60정을 구입하여 의형제 관계였던 의병장 연기우(延起羽)에게 40정을 주었고, 나머지 20정은 자신의 의병부대의 화력 강화를 위해 사용하였다.
1개월 후 고양군(高陽郡) 하도면(下道面) 소화리(小花里)로 근거지를 옮긴 후, 8월 14일 화전리(花田里)에서 경성필동헌병대(京城筆洞憲兵隊)에게 발각되어 일제에 붙잡히고 말았다. 일본군 헌병사령부에 감금되어 취조 중 일본군이 신문하자, “죽이든 살리든 속히 할 것이지 나에게 장황한 질문은 하지 말라”하고 거절하였다. 그 후 서대문감옥에 투옥되었고, 탈옥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1909년 11월 22일 경성공소원 형사부에서 확정 판결을 받아 12월 17일에 교수형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