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꽃 이불 / 고정희
얘야, 인생이 추울 때 꺼내 덮을 수 있는
명주솜 이불 두어 채 마련하자꾸나
네가 아무리 당당하게 살아도
혼자 가는 뒷모습 한없이 춥구나
어머님이 살아생전 마련해주시마던
명주솜 이불 자리 그대로 비워둔 채
홀연히 저 세상 떠나셨지요
청천 날벼락 같은 그 슬픔의 자리
찬바람 숭숭한 그 자리에, 그대
오른손이 모르게 은밀히 놓아주신
장미꽃 이불을 처음 꺼내 덮었습니다
내 인생이 추워서가 아니라
이 이불 속에 서리서리 펼쳐주신
그대 곡진한 사랑 음미하고 싶어서지요
이 이불 위에 피고 지고 다시 피는
한 세상 따뜻함 품고 싶어서지요
장미꽃 수 천 송이 잔잔한 이불 밑에
우리 동행하는 뜻 나란히 잠든 밤은
서천 서역국 달그림자 쪽으로
수란잎이 벙그는 밤입니다
장미 향기 수만리 은은한 이불 밑에
우리 함께 가는 길 나란히 누운 밤은
가난한 지붕마다 별들이 내려와
사랑의 보석을 깔아놓은 밤입니다
장미 바늘로 누빈 안식의 이불 밑에
이쁜 우리 꿈 나란히 꽃핀 밤은
등이 추운 것들 나란히 나란히
쓸쓸한 마음들 나란히 나란히 걸어 들어와
동쪽 바다 밑에서 해 하나씩
건져올리며
따뜻하고 따뜻하게 얼싸안는 밤입니다
- 고정희, 『아름다운 사람 하나』(도서출판 푸른숲, 1996)
카페 게시글
진달래詩선
장미꽃 이불_ 고정희
구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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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7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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