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어떤 순간에 우리가 겪는 일은 정말 감사할 수 없는 일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항상 감사의 기준을 하나님의 시선에 두기 위해 노력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감사하라하신 성경말씀대로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멋지고 놀라운 이야기지만 사실 오천명이나 되는 대군중을 바라보면서 눈앞에 놓인 보리빵 다섯 조각과 작은 물고기 두 마리는 너무 작아보였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것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즉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유카리스트라는 말이 굉징히 흥이 나서 기분이 좋은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라면 예수님의 이 흥분된 감사의 기도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순간에 예수님이 감사하신 것이 무엇일까? 묵상하면서 우리 함께 은혜받고 우리들도 예수님의 감사를 본받는 신앙인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모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목회자들은 늘 교회의 부흥을 생각하기 때문에 당연히 교인들이 늘어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 그렇습니다. 많이 모이면 그만큼 많은 문제도 함께 생기는 것이니까요. 이 벳세다 들판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먹지 않아도 배부르신 것 같습니다. 얼마나 하시는 말씀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까? “멀리 가서 빵을 구하거나, 사람들을 마을로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줘라!”아니 제자들이 뭘 갖고 있다고 이 많은 사람들앞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실까? 목회자를 배부르게 만드는 것은 말씀을 사모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교인들을 볼 때입니다. 13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요한의 죽음에 대해 듣고 배를 타고 가시는데 무리가 그 배를 보고 예수님을 따라나왔습니다.
그 사람들의 모습이 주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들은 주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배를 타고 가는 예수님을 쫓아올 정도로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시안게임을 지켜 보면서 롤러스케이트 경기에서 우리 정철원 선수가 마지막 순간 승리의 세레머니를 하려고 두 손을 드는 순간에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발을 들이 밀었던 대만선수처럼 끝까지 열정을 다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박수를 보냅니다. 아마 정선수에게는 일생 지울 수 없는 귀한 교훈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정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즐겁습니다.
제가 간증했던 소년원 첫해 사역할 때 둘째날 저녁에 참담한 마음이 들어서 집에 오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은 고개를 숙인 채로, 성경을 찢어서 학을 접고, 비행기를 만들어 옆으로 던졌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목이 쉬도록 설교를 했지만 듣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당황해서 어떻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반면에 귀를 쫑긋하고 설교의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고 듣는 사람들 앞에서야 얼마나 신이 나고 힘이 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언덕위로 올라온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얼마나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했을까요? 시간 가는 줄로 모르고 말씀을 전하는데 어느새 저녁이 되었습니다.
저녁이 되도록 그 많은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고 먹을 것을 찾아 떠나지 않고 말씀의 단 맛에 빠져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얼마나 감사한지? 여러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모습, 은혜를 사모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주님을 기쁘기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 드리는 여러분이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여러분의 모습에 제가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뜨거운 열정을 다시 살려내기를 바랍니다. 열정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신 가족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한 사람이 길에서 만난 현자에게 물었습니다.
“어느 쪽이 성공으로 가는 길입니까?” 현자는 아무 말 없이 가던 길을 가리켰습니다. 길손은 성공이 가깝다는 생각에 기대감에 부풀어 서둘러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걷는 도중 갑자기 철퍼덕 하며 옷이 찢기고 넋이 나간 얼굴로 자신이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다리를 절며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현자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현자는 또 다시 아무 말없이 같은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길손도 고개를 끄덕이고 같은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철퍼덕 소리가 귀청이 떨어질 듯 요란했습니다. 기어서 간신히 돌아온 길손은 몸을 다쳐 화가 잔뜩 나 있었습니다. 그는 현자에게 소리를 지르며 왜 자신을 그 방향으로 보냈는지 설명해달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더 이상 손으로 가리키지 말고, 말로 해요!” 그제야 현자가 말했습니다. “성공은 그쪽이 맞습니다. 철퍼덕 소리가 난 그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열정 포트폴리오”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제 밤 중국에서는 안세영선수가 1세트후반에 철퍼덕하는 소리와 함께 부상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투혼을 발휘하며 마침내 자신이 세게 정상임을 증명해보였습니다.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지만 열정은 상황을 극복해 내는 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뜨거운 열정이 필요합니다. 지난주 한 청년이 추석에 못온 인사를 남편과 어린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청년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청년회장 시절, 공주로 아웃리치를 가기로 하고 인턴으로 원서를 넣었습니다. 그런데 합격을 하고보니 출근하는 날이 아웃리치를 가는 날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그날 아침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 사표내고 아니 한번도 근무를 안했으니 못하겠다고 하고 나오려고요.”목사가 겁이 더 많습니다. “야 그래도”“아니요 하나님께 한 약속이 먼저입니다.”이은혜성도 이야기입니다. 결론은 해피엔딩이었습니다. 기가막혔지만 그 회사에서 아웃리치를 다녀올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며 예배와 기도에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주님의 감사의 제목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부족하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부분 감사는 넘치게 주실 때 감사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부족하게 받고 감사하다고 해 보신 적은 있으신가요? 100만원이 필요해서 기대하고 갔는데 봉투에 10만원이 들었다. 감사할 수 있을까요? 사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역설적인 감사입니다. 사람의 기준, 세상의 기준의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의 감사입니다. 어느 회사의 신입사원 채용시험 면접에 이런 문제가 나왔습니다. ‘만약 당신이 폭풍우 몰아치는 밤에 운전을 하고 있는데 버스정류장에 당장 병원에 가야 될 것같이 아파 보이는 할머니와 당신의 죽을병을 낫게 해준 생명의 은인인 의사, 그리고 꿈에 그리던 이상형 여인 이렇게 세 사람이 서 있고 그중 한 명만 차에 태울 수 있다면 누구를 태울 것입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누구를 선택할지와 그 이유를 들어보고 가장 현명한 신입사원을 뽑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00여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합격한 지원자의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생명의 은인인 의사 선생님께 차를 드려서 그 할머니를 빨리 병원에 데려가게 하고 저는 이상형 여인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겠습니다.”
비바람이 불어 닥치는 그 상황 속에서 자동차를 고집했다면 한 사람만 선택밖에 할 수 없었겠지만, 자동차를 포기하는 순간 그 세 가지를 다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버림이 주는 놀라운 선물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들 때문에 많은 것을 받지 못하고 살지 않습니까? 우리의 작은 두 손에 너무 많은 것이 들려있어서 하나님이 주시려는 수많은 선물을 다 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만약 우리 손이 비어있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다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의 감사에는 이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세상에 누가 오병이어를 앞에두고 5천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양이 얼마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먹어야 하는지는 문제가 안됩니다.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신앙은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을 강건하게 만듭니다. 어리석은 사람을 지혜롭게 만듭니다. 부족한 사람을 넘치는 사람으로, 악한 사람을 선한 일군으로 만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의 세 친구는 타는 풀무불속에 던져지면서 고백했습니다. 단3:16절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 무불에 던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는 왕의 신에게 절하지 아니하겠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습니다.”그리 아니하실자라도 라는 고백은 죽어도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속에는 우리가 가진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병이어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부족해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해라! “약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해라. 그렇게 믿음으로 기도할 때 그 부족함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유대사회에서 혼주가 포도주를 부족하게 준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망신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마리아는 아들 예수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냉랭하게 거절하는 예수님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인들에게 당부합니다. “그가 시키시는대로 순종해라.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행해라.”마리아는 예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항아리의 물이 포도주로 변하여 부족한 포도주가 넘치고 향기로운 포도주로 변하였습니다.
“부족하니까 감사합니다.”고백하면 그 부족함을 당신의 능력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할수록 우리는 감사로 하나님앞에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일을 볼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 감사의 믿음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일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기도에 믿음이 담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하소연이나 한풀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가 특권이요, 축복의 선물임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기도할 수 있음이 우리에게는 큰 복입니다.
예수님은 감사로 기도하셨고, 제자들을 통해서 그 작은 것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그 순간에도 제자들은 의심했을지 모릅니다. “아니 이 작은 것을 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눈다고?”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눠도 나눠도 빵과 물고기가 계속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먹고도 12광주리를 채울만큼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의 기대이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통해서 부족함앞에서도 감사로 기도해야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감사의 기도가 넘치는 응답으로 나타난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부족하게 주신 이유가 우리를 어려움에 처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서 더욱 풍성한 것을 누릴 수 있게 하시기 위함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영혼들과 함께 함이 기쁨이요, 감사요, 부족하게 주셔서 믿음으로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