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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미문화원 점거농성
← 함운경(2006)
1985년 5월 23일 학생운동의 반합법 투쟁기구인 삼민투쟁위원회 주도하에 서울의 5개대 남녀학생 73명이 연합으로 서울 미문화원을 기습 점거, 농성을 벌였다. 미문화원 도서관에 들어간 학생들은 '광주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사과하라'는 등의 구호를 내붙이고 주한 미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다 72시간만인 26일 스스로 농성을 풀고 나와 경찰에 모두 연행됐다.
이 사건으로 서울대 삼민투위원장 함운경 등 20명이 구속 기소됐고 사법사상 초유의 피고들의 재판거부사태, 묵비권 행사, 재판부 기피신청, 변호인단 전원 사임 등 재판과정 역시 파란으로 점철됐다. 이날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이후 운동권학생들의 공공기관 점거사태는 더욱 본격화돼 민정당 중앙 정치연수원 점거농성으로까지 이어졌다.
[1965년] ‘진통제 마약’ 메사돈 만든 제약사 급습
← 보건사회부와 마약감시반, 충북도경이 국도제약(청주시 북문로1가)을 급습해 압수한 ‘진통제 마약’ 메사돈.
1960년대 중반, 농어촌과 산간 벽지 등에서 갑자기 마약 중독자가 급증, 정부가 조사에 나섰으나 진통 주사제가 범람하는 것 말고는 딱히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주사제를 수차례 검사했지만 그때마다 알 수 없는 ‘제3의 물질’ 만 검출됐다.
배·머리가 아플 때, 나무하러 가거나 바다에 들어갈 때 한 대씩 맞은 진통제로 사람들의 몸은 서서히 망가져 갔다. 정부는 1965년 3월 현재 중독자가 1만5000명에서 2만명이라고 밝혔지만 전문가들은 최소 10만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보건당국은 1965년 5월에서야 비로소 그 물질이 메사돈임을 밝혀내고 제조업체 추적에 나섰다. 메사돈은 아편보다 진통작용이 2배 이상 강하면서도 가격이 저렴한 흰가루 마약이었다.
1965년 5월 23일 청주시에 있는 국도제약에서 진통제를 제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단속반이 현장을 급습, 메사돈을 주성분으로 한 진통 주사액 20만통을 압수하고 사장을 마약법 위반 혐의로 긴급 구속했다. 이 사건으로 16명의 업자가 구속되고 관련 공무원과 국회의원이 구속되거나 입건됐다.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한 파렴치한 장사꾼들의 속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조선
[2004년]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 붕괴 사고 발생
←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공항 지붕 붕괴 현장
2004년 5월 23일 오전 7시쯤 프랑스 파리의 북쪽 외곽에 있는 샤를 드골 공항에서 여객터미널의 지붕 일부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붕이 폭삭 내려앉으면서 터미널 건물이 완전히 반 토막 났다. 한국의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을 떠올리게 하는 대형 사고였다. 최소한 5명이 사망했지만, 이른 아침이어서 사고 규모에 비해 인명 피해는 적었다.
사고가 난 2E 터미널은 전해 6월 개통돼 완공된 지 1년도 안 되는 새 건물이었다. 에어프랑스, 대한항공 등이 입주해 있고 한국행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곳이어서 우리로서도 강건너 불구경하듯 넘길 수 없는 아찔한 사고였다.
프랑스는 샤를 드골 공항을 유럽의 허브 공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목표로 대대적인 확장 공사를 벌였다. 2E 터미널도 그 중 하나로, 7억5000만유로(약 1조원)를 들여 지었다. 철골조와 유리로 된 화려한 건물 외관은 첨단 디자인을 표방했다. 하지만 이번 사고로 ‘유럽의 허브 공항’이 되겠다는 프랑스의 원대한 계획도 한 방에 날아갔다./조선
[1999년] 송일곤 감독의 ‘소풍’ 칸영화제 단편부문에서 한국영화 사상 첫 수상
← 단편영화 ‘소풍’의 송일곤 감독.
칸 국제영화제 52년 사상 처음으로 한국영화가 상을 받았다. 1999년 5월 23일 제5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송일곤 감독의 ‘소풍’이 단편부문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소풍’은 실직 가장이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바닷가에서 동반자살하는 이야기를 다룬 내용으로 단편영화로는 드물게 35㎜ 필름으로 찍은 14분짜리 작품이다.
송 감독은 서울예전 영화과를 졸업하고 폴란드로 유학, 몇 년전 데이콤 광고 모델로 등장해 어머니와 통화하며 폴란드에서 눈물짓는 아들역으로 일반에 얼굴이 알려졌던 인물이다. 이미 ‘광대들의 꿈’으로 1997년 제3회 서울단편 영화제 우수작품상을 받았고, ‘간과 감자’(제4회 서울단편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등의 작품으로 폴란드 토룬 국제영화제와 이탈리아 시에나 영화제 등 해외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프랑스 단편 ‘스톱’과 함께 수상한 심사위원상은 이 부문 2등상에 해당한다. 단편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은 웬디 틸비와 아맨다 포비스의 ‘동 틀때’가 받았다./조선
[2000년] 시리아 북동부서 6000년전 도시 발견
← 시리아에서 발견된 유적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이전에 도시 문명이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6000년전 유적이 시리아에서 발견됐다. 미국 시카고대 근동연구소는 시리아 북동부, 고대 주요 무역루트에 있는 `텔 하무카르`의 거대한 흙더미를 파고 들어갔다. 그 결과 시가지 방호벽 등 6000년전에 복합적 형태의 사회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존재했음이 드러났다.
연구소측은 유물들을 분석한 결과 이 문명지가 남부의 수메르 문명과 같은 시기에 그러나 독립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은 얻었다고 2000년 5월 23일 발표했다. 하무카르 유적은 수메르 유적과 같은 시기인 6000년 경으로 추정되지만,여러 흔적으로 보아 하무카르의 도시문명이 수메르 이전에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번 발굴에서 최대의 성과는 6000년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3m-폭4m의 방호벽.이런 규모의 축조물은 문명이 시작된 증거로 간주된다. 또 방호벽 안에서 이글루 모양의 거대한 화덕과 조리용 토기, 동물 뼈,밀-보리-귀리 등 곡물 흔적이 나타나 사회생활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조선
[1949년] 서독 연방공화국 수립
← 꽃장식과 ‘만세’라고 적힌 플랜카드를 달고 베를린을 출발하는 하노버행 버스 제1호.
서독의 새로운 헌법인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이 1949년 5월 23일 공포돼 본을 잠정 수도로 하는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됐다. 이로써 동서분열 체제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이미 1946~1947년에 미국, 영국, 프랑스의 각 점령지역에 주의회가 탄생했고 행정책임이 독일측으로 이송됐다.
1948년에 들어서 3국점령지역의 통합과 연방정부의 수립이 협의되고 6월 통화개혁이 단행되자 소련은 베를린 봉쇄로 대응해 독일의 동서분단은 피할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9월부터 헌법제정의회가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잠정헌법으로의 ‘기본법’ 기초(起草)를 시작해 이해 5월 8일 채택했다. 8월 1일 최초의 연방의회선거가 행해져 9월에는 헌법제정의회의장을 맡은 기독교민주동맹의 아데나워를 수상으로 하는 연립내각이 성립됐다. 대통령에는 호이스가 선출됐다.
[1906년]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 사망
← 노르웨이의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헨리크 입센.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1906년 5월 23일 사망했다. 텔레마르크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의 파산으로 한때는 약방의 도제생활을 경험해야 했던 그는 독학으로 대학 입학을 준비하던 중 단막 희곡 ‘전사의 무덤’(1850)이 극장에 공연되자 진학을 단념하고 작가로 나설 것을 결심한다.
극장 지배인으로 생활하며 발표한 현대극이 인정을 받지 못하자 고국을 떠나 독일을 거쳐 이탈리아에서 고미술을 공부했다. 이때 발표한 ‘브랑’(1866)으로 명성을 얻자 ‘페르 귄트’와 10년의 세월이 걸린 세계사극 ‘황제와 갈릴레아 사람’ 등을 연이어 발표, 사상적 입지를 굳혔다. 1879년 발표한 그의 대표작 ‘인형의 집’이 출간되자 당대의 보수적 관객들은 가정과 결혼의 파탄을 부추기는 위험한 선동물이라며 비판했으나 "아내이며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여성으로 살겠다"는 노라의 전언을 통해 페미니즘 운동의 한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입센은 힘차고 응집된 사상과 작품으로 근대극을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사상과 여성해방 운동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다.
[1924년] 조선여성동우회 결성
1924년 5월 23일 서울 경운동 천도교 교당에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가 창립 총회를 개최했다. 발기인으로는 박원희·정종명·김필애·정칠성·김현제·홍순경·오수덕·우봉운·지정신·주세죽·최정삼·허정숙·이춘수 등 당시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이 참여했다. 창립 총회에서 조선여성동우회는 신사회의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을 함께 할 여성을 양성한다는 강령을 채택했으며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부인의 경제적 독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조선여성동우회의 활동은 1927년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를 총망라한 여성단체인 근우회로 이어졌다.
[1950년] 미국 첩보요원 해리 골드 체포
← 로젠버그 부부
1950년 5월 23일 스위스 태생의 미국 첩보요원 해리 골드가 체포되면서 로젠버그 부부의 간첩 혐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1939년 무렵부터 공산당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40년 그는 미국육군 통신대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아내 에설과 함께 군사기밀을 소련측에 넘겨주었다. 이후 핵무기에 관한 정보와 데이터 등이 해리 골드를 거쳐 뉴욕 주재 소련 부영사인 아나톨리 A. 야코블레프에게 넘어갔다. 해리 골드가 체포된 직후 구금된 로젠버그 부부는 1951년 3월 6일 뉴욕에서 열린 공판에서 미국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방첩죄를 적용받아 사형을 선고받았다. 수많은 탄원과 사면운동이 벌어졌으나 로젠버그 부부는 싱싱 교도소에서 처형되었다.
[1707년] 린네(Carl von Linn'e) 출생
← 린네, A. Roslin이 1775년에 그린 초상화(부분)
1707년 5월 23일 태어남 / 1778년 1월 10일 죽음
린네는 생물의 종(種)과 속(屬)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데 필요한 일정 체계를 만든 스웨덴의 식물학자이며 탐험가이다. 그가 고안한 명명법은 속명과 종명을 나란히 쓰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생물학의 기본적인 분류체계로 사용되고 있다. 보좌신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에 이미 '꼬마 식물학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원예에 관심이 많았다. 스웨덴 웁살라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1730년 식물학 강사로 임명되었다. 동물계·식물계·광물계의 구분을 제시한 <자연의 체계 Systema Naturae>(1735)와 식물의 새로운 명명법을 제안한 <라포니카 식물상 Flora Lapponica>(1737)으로 식물학자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린네의 체계는 주로 꽃의 기관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또한 그 스스로가 인정했듯이 인위적이기는 하지만, 빠르게 식물들을 지정된 범주 속에 넣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최상의 생물 분류법으로 평가된다.
[1894년] 독립운동가·정치인 유림(柳林) 출생
1894. 5. 23 경북 안동~1961. 4. 1.
본관은 전주(全州). 본명은 화영(華永). 아호는 단주(旦洲). 이명은 월파(月波)·고상진(高尙眞). 아버지는 이흠(頤欽)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이다. 1915년 안동에서 정진탁(鄭振鐸) 등과 함께 부흥회(復興會)를 조직, 1917년에는 대구에서 김용하(金容河) 등과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참여한 뒤 만주로 망명해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과 군정서(軍政署)에 참여했다. 1921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신채호(申采浩)·김창숙(金昌淑) 등과 순한문지 〈천고 天鼓〉를 발간, 일제의 침략을 규탄했다.
1922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김규식(金圭植)·여운형(呂運亨) 등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담해 활동하다가, 타이완 청두대학[成都大學] 사범부 문과에 입학한 뒤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25년 대학을 졸업한 뒤 광둥[廣東]·상하이·우한[武漢] 등지에서 중국국민당의 좌파를 이룬 무정부주의자와 사귀고, 천두슈[陳獨秀]·천중밍[陳炯明] 등 사회주의 세력과도 접촉하면서 광둥 의거[廣東義擧]·우창 폭동[武昌暴動]에도 참가하는 한편, 김두봉(金枓奉)·신채호 등과 〈한글말본〉·〈깊더조선말본〉 등을 저술했다. 1928년 지린[吉林]에서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 신민부 교육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재만한인교육회를 조직해 교과서 편찬과 교원 양성에 힘썼다.
1929년 북만주에서 김좌진(金佐鎭)·김종진(金宗鎭)·이을규(李乙奎) 등과 민족진영에 대한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고자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그뒤 재만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의 산파역을 맡았다. 이해 11월 평양에서 열린 전국흑색사회주의자대회에 참석해 이홍근(李弘根)·최갑룡(崔甲龍) 등과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비밀리에 결성, 만주부 책임자로 피선되었다. 1931년 4월부터 검거선풍이 불어 최갑룡·이홍근 등 8명이 잇달아 체포되고, 그는 펑톈[奉天]에 의성숙(義誠塾)을 창립해 인재양성에 힘쓰던 중 체포되어 5년간 옥고를 치른 후 만기출옥했다. 다시 만주로 탈출해 한·중항일연합군 조직에 힘쓰고, 1942년 충칭[重慶]에서 '일개민족·일개정부·일개이념·일개집단'과 '당파는 합동연이(合同聯異), 정부는 공대균담(共戴均擔)'의 구호를 내세우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모든 혁명세력의 총집결을 호소했다. 1943년 임시의정원 경상북도 대의원과 임시헌장수정기초위원이 되었고, 다음해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다.
8·15해방과 함께 귀국해 1946년 우익의 비상국민의회 결성과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모두를 비판한 뒤, 독립노동당(獨立勞動黨)을 결성해 당수로 지내면서 〈노동신문〉을 창간했으며, 다음해 전국혁명자총연맹을 창립해 위원장을 지냈다. 당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한국문제 해결과 그에 이은 단독정부 수립 등에 잇달아 반대해 미군정과 이승만 계열의 최대 정적 가운데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1948년 대한국민의회 의장이 되었으나 국민의회의 몰락으로 다시 좌익계열을 제외하고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결성해 대표간사가 되었다. 1952년 부산에서 야당과 연합해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조직하여 이승만 정권의 영구집권에 반대했고,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무너지자 김창숙·장건상(張建相)·조경한(趙擎韓)·정화암(鄭華岩)·김학규(金學奎)·권오돈(權五惇) 등과 함께 조국의 완전한 자주·통일·독립을 쟁취하고자 혁신동지총연맹을 결성, 이 연맹의 공천으로 안동에서 입후보했으나 낙선했다. 1961년 4월 심장마비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65년] 독립운동가 신우현(申禹鉉) 출생
1865. 5. 23 평북 의주~1935. 3. 16.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자운(紫雲). 아버지는 효신(孝信)이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장원섭(張元燮)·조병준(趙秉準) 등과 함께 창성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9년 재기해 창성 헌병대를 습격한 뒤 만주로 망명해 교육사업에 힘썼다. 1919년 4월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圭)·조병준·전덕원(全德元) 등이 류허 현[柳河縣]에서 조직한 대한독립단에 가입했으나, 대한독립단이 기원독립단과 민국독립단으로 분열되자 조병준·김승학(金承學)·변창근(邊昌根) 등과 함께 민국독립단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1920년 남·북 만주 일대에 걸친 독립운동 통일전선이 요구됨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직속으로 광복군 참리부가 구성되자 내무사장(內務司長)에 임명되어 항일투쟁을 했다. 1920년초부터 〈독립신문〉이 재정난에 빠지자 안창호(安昌浩)·김승학 등과 자금을 지원해 계속 발행할 수 있도록 했다. 1921년 조병준·황학수(黃學秀)·김승학·백기준(白基俊)·승영준(承永俊) 등 여러 동지와 가족들을 대동하고 쑤이위안 성[綏遠省] 포두중탄(包頭中灘)으로 이주하여 배달농장을 만들고, 의민부(義民府)를 결성하여 부총재로 활동했다. 한편 배달학교와 대종교 수광시교당(綏光施敎堂)을 설치해 청년들에게 항일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대종교를 보급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03년] 사업가 장학엽(張學燁) 출생
1903. 5. 23 평남 용강~1985. 4. 17 서울.
진로 그룹 창업자이다. 1923년 3월 평안남도 진남포공립상공학교 상과(商科) 졸업 후 같은 해 4월 곡산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24년 10월 진천양조(眞泉釀造)를 창립한 후 대표에 취임했다. 1950년 12월에 월남하여 1951년 부산 동화양조, 1952년 부산 구포양조의 대표에 각각 취임했다. 이후 1954년 6월 서광주조(주)를 설립한 후 동(同)사 사장, 그리고 1961년 10월 서광산업(주) 회장, 1966년 6월 효성유리공업(주) 이사를 각각 역임했다. 1971년 3월 은탑산업훈장을 받았고, 1972년 7월 학교법인 우천(友泉)학원 이사장, 1972년 11월 도원관광(주) 대표이사를 각각 지냈다.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 유태인 학살범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
← 아이히만
독일의 나치스 친위대 장교 아이히만(Eichmann, Karl Adolf, 1906~1962)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및 독일 점령하의 유럽 각지에 있는 유대인의 체포, 강제이주를 계획 ·지휘하였다. 독일의 항복 후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도망하여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짜 이름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자동차 공장 기계공으로 은신하고 있다가 1960년 5월 이스라엘의 비밀정보 모사드에 의해 체포당하여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다. 1961년 12월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대전 중에 나치스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600만 명의 학살 책임을 추궁당한 끝에 사형판결을 받고 1962년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1937년] 석유왕 록펠러(Rockefeller, John D., 1839~1937) 사망
1937년 오늘 '석유왕'으로 이름난 미국의 실업가 존 록펠러가 98살을 일기로 사망했다.
1839년 미국 뉴욕주 리치퍼드에서 출생한 록펠러는 31살에 오하이오스탠더드석유회사를 설립해 급속히 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1882년에는 미국 내 정유소의 95%를 점유하는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를 조직했다. 록펠러의 회사는 1911년 미국 연방최고재판소로부터 독점적기업결합을 금지한 반-트러스트법 위반으로 해산명령을 받고 해체됐다.
독실한 침례교도였던 그는 1890년대 동안 점차 관심을 자선사업으로 돌려 1897년 이후로는 전적으로 자선사업에 전념했다. 그는 1892년 시카고대학을 설립하는 데 6천만 달러를 기부하는 등 기여했고, 죽을 때까지 8,000만 달러 이상을 이 학교에 기부했다. 아들인 존 D. 록펠러 2세와 함께 훗날 록펠러대학교로 이름을 바꾼 록펠러 의학 연구소를 1901년 뉴욕 시에 세웠다. 1902년에는 일반교육원을, 그리고 1913년에는 록펠러 재단과 같은 주요 자선기관들을 설립했다. 일생을 통해 그가 희사한 금액은 총 5억 달러를 넘었고, 1955년까지 아들의 희사금을 합하면 총 25억 달러가 넘었다.
[1891년] 스웨덴의 소설가 라게르크비스트(Lagerkvist, Par, 1891~1974) 출생
벡셰 출생. 웁살라대학을 나와, 제1차 세계대전 이래 인생의 공허와 혼돈에 대한 ‘고민의 문학’으로 스웨덴 문학을 이끌었다. 1913년 프랑스로 건너가서 프랑스 표현파 ·입체파의 미술사조와 깊은 접촉을 가졌고, 또 A.스트린드베리의 후기 극작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극도로 응축된 비관적인 인생관을 표현주의적인 시나 산문으로 나타내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인간의 마음속 깊숙이 잠재하는 어둠의 힘에 직면하게 되자, 단순히 염세주의에 빠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제, 극복하기 위한 길을 찾는 것을 그의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이 무렵부터, 초기에 극소수인만을 대상으로 하던 그의 작품은, 그때까지의 염세주의와 실험적 작풍을 벗어나, 보다 긍정적이고 건설적으로 인생을 다루게 되었다.
자전적 소설 《진실의 나그네가 되어 Gast hos verkligheten》(1925)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유년기를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보냈으나, 1920년대에는 물질문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어둠의 지배력을 극복하는 인간의 정신력을 믿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기의 나치스와의 진지한 대결을 거쳐, 북유럽 문학계의 양심적 작가로 지목되었으며, 《형리(刑吏) Bodeln》(1933) 《난쟁이 Dvargen》(1944) 등으로 상징적인 시대의 문제와 고뇌를 부각시켰다.
이어서 예수 대신 십자가에서 풀려난 악당의 그 후 회심(回心)을 그린 《바라바 Barabbas》(1950)로 195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에도 고대 그리스를 주제로 한 소설 《무녀(巫女) Sibyllan》(1956), 방황하는 유대인을 주제로 한 소설 《아하스베루스의 죽음 Ahasverus dod》(1960) 등 종교적 문제를 다룬 작품도 많이 발표하였다.
시집으로는 《고민》(1916) 《마음의 노래》(1926) 《화톳불 밑에서》(1932) 등이 있고, 희곡으로 《혼이 없는 사나이》(1932) 《어둠 속의 승리》(1932) 《인간을 살게 하라》(1947) 등이 있으며, 에세이집 《극복된 삶》(1927)도 주목을 끌었다. 1940년에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되었고, 1941년에는 명예 문학박사 칭호가 수여되었다.
[1886년] 독일의 역사가 랑케(Ranke, Leopold von, 1795~1886) 사망
← 랑케(1877)
새로운 연구방법과 교수법으로 서유럽 역사서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신학 ·언어학을 수학하고, 1818년 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의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 중 처녀작 《라틴 및 게르만 제(諸)민족의 역사 1494∼1514》(1824)를 저술하였는데, 이것이 학계에서 인정을 받아 25년 베를린대학에 초빙되었다. 그 후 이곳에서 50년 간에 걸쳐 강의를 담당하면서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 사이 1841년 프로이센 국사편수관, 1859년 바이에른 학사원 사학위원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역사서술은 원사료(原史料)에 충실하면서 사실(史實)의 개성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그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할 것을 강조하고, 역사란 많은 사상(事象)이 상호 관련되어 발전된 그대로를 기술해야 하며, 또 각 시대에 존재하는 독자적인 개성가치를 간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객관주의는 역사학을 현실의 철학 ·정책에서 해방시켜 역사학 독자의 연구시야를 개척하였다는 점에서 공적이 크며, 이것이 그를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연유이다. 주요저서에 《종교개혁 시대의 독일사》(1845~1847) 《프로이센사》(1847∼1848) 《16~17세기 프랑스사》(1852~1861) 《16~17세기 영국사》(1869) 등이 있다.
[1790년] 프랑스의 군인, 탐험가 뒤몽 뒤르빌(Dumont d'Urville, J. S. C., 1790~1842) 출생
← Maurin이 그린 그림을 보고 Emile Lassalle이 제작한 동판화
1790. 5. 23 프랑스 콩데쉬르누아로~1842. 5. 8 뫼동 근처.
남태평양(1826~29)과 남극(1837~40) 탐험대를 이끌면서 많은 섬을 발견해 이름을 붙였고, 그때까지 써오던 해도(海圖)를 크게 고쳤다.
1820년 지중해 동쪽의 해로를 조사하러 나섰다가 에게 해의 밀로스 섬에서 발견한 그리스 조각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밀로의 비너스'를 프랑스로 가져오는 공을 세웠다. 1822년 그는 세계일주 항해에 나서 1825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다음 임무는 1788년 남태평양에서 실종된 탐험가 장프랑수아 라 페루즈를 찾는 일이었다. 이 항해에서 그는 뉴질랜드 일부의 해도를 만들었고, 피지 제도(諸島), 로열티 제도, 뉴칼레도니아, 뉴기니, 암본, 반디먼스랜드(지금의 태즈메이니아), 캐롤라인 제도, 셀레베스 등을 차례로 탐험했다. 1828년 2월 산타크루스 제도의 바니코로에서 라 페루즈의 배가 부서진 것으로 보이는 잔해를 발견한 후 1829년 3월 25일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이 항해를 끝내고 남태평양 해도를 광범위하게 고쳤으며 멜라네시아·미크로네시아·폴리네시아·말레이시아 등의 군도(群島) 이름을 붙였다. 또한 1,600여 개의 식물표본과 900개의 암석 표본, 그가 만난 섬사람들이 쓰는 언어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 1829년 해군대령으로 진급했고 1830년 8월에는 추방된 샤를 10세를 영국으로 데려가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1837년 9월 툴롱을 떠나 남극으로 항해했다. 이번에는 1823년 제임스 웨델이 갔던 남위 74°15′ 지점보다 더 멀리 항해하기를 바랬다. 마젤란 해협 탐사를 마친 뒤 그의 함대는 남위 63°29′, 서경 44°47′에서 빙하를 만났으나, 얼음을 뚫고 나갈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빙하를 뚫지 못하게 되자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555.6㎞를 나아갔다. 다시 서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사우스오크니 제도와 사우스셰틀랜드 제도에 닿았고, 조인빌 섬과 루이필리프랜드를 발견했으나 괴혈병 때문에 칠레의 탈카우아노에서 쉬어야 했다. 그뒤 태평양을 건너 피지와 펠루 제도(지금의 팔라우 제도)·뉴기니·보르네오 등을 거친 뒤 동경 120°~160°의 아직 탐험되지 않은 지역에서 자기극(磁氣極)을 발견하고자 다시 남극으로 향했다. 1840년 1월 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남쪽의 한 해안을 발견했는데, 뒤르빌의 부인 이름을 따서 아델리 해안이라 불렀다. 탐험대는 1841년말 프랑스에 돌아왔으나 그는 이듬해 철도 사고로 아내·아들과 함께 죽었다.
주요저서로는 〈'아스트롤라브호(號)'의 항해, 1826~1829 Voyage de la corvette "l'Astrolabe" 1826~1829〉(1830~34)·〈남극과 오세아니아 항해, 1837~1840 Voyage au Pole Sud et dans l'Océanie, 1837~1840〉(1841~54)가 있다.
[1498년] 이탈리아의 도미니크회(會) 수도사,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Savonarola, Girolamo, 1452~1498) 화형 당함
← Fra Bartolomeo가 그린 그림, 피렌체에 있는 Museo di S. Marco 소장
북이탈리아 페라라 출생.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들어가 공부하고, 1491년 피렌체의 성마르코수도원장이 되어, 교회혁신을 위한 설교와 예언자적 언사로써 신도들을 지도하여, 시민의 정신적 지도자와 같은 지위에 올랐다. ‘하느님의 노여움’이라고 그가 예언한 1494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원정은,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신벌(神罰)로 받아들여졌으므로, 프랑스인들은 이와 결탁하여 민주정치와 신재정치(神裁政治)를 혼합한 헌법으로 피렌체를 통치하려고 하였다.
교회 내부개혁에는 많은 사람이 동조하였으나, 1497년의 사육제(謝肉祭)에서는 시민의 사치품과 이교도적 미술품 및 서적을 불태운 이른바 ‘허영의 소각’을 비롯한 과격한 방법을 취함으로써 크게 반감을 샀다. 프랑스군이 철수한 뒤, 반대세력이 우세해지고 교황 알렉산드르 6세와의 불화, 프란체스코회와의 대립 등으로 지지 기반을 잃어 다른 2명의 도미니크회 성직자와 함께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사보나롤라는 사실상 성직자들의 부패에 대항해 싸웠고, 이 가운데 알렉산데르 6세는 극단적인 한 예에 불과했다. 그는 로마 교황권 자체와 싸우지는 않았고, 언제나 복종과 존경을 표시했다. 종교개혁자였으나 철저히 가톨릭교도이자 토마스주의자였다. 그의 저서에는 이러한 그의 신앙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그리스도교 변증학을 명쾌하게 해설해 놓은 〈고난의 승리 Triumphus crucis〉이다. 실현된 환상들과 예언들을 기록한 〈계시 목록 Compendium revelationum〉은 여러 나라에서 판을 거듭했다. 설교는 다른 사람이 받아 적은 것들 몇 편이 현존한다. 사보나롤라가 죽은 뒤 그에 대한 숭배의식이 생겨 오랫동안 전승되었다. 교회가 성인으로 시성한 사람들 중 필리프 네리와 카테리나 데 리치 같은 이들은 그를 성인으로 존경했다. 성무일도에는 그에게 드리는 기도가 실렸고, 그가 행했던 기적들이 기록되었다. 그는 그림과 메달에서 '베아투스'(beatus)라는 이름으로 묘사된다. 〈성인전 Acta sanctorum〉에서 그는 〈praetermissi〉에 나온다. 1952년 탄생 500주년 기념식에서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는 문제가 다시 거론되었다.
[1977년] 시인 이산 김광섭(金珖燮) 사망
1927년 와세다대학 조선인동창회지에 시〈모기장〉을 발표한 뒤, 〈해외문학〉·〈문예월간〉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본격적인 시창작은 1935년 〈시원〉에 주권을 상실한 우리민족의 좌절과 절망을 읊은〈고독〉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시집으로 〈동경 憧憬〉(1938)·〈마음〉(1949)·〈해바라기〉(1957)·〈성북동 비둘기〉(1969)·〈반응〉(1971) 등을 펴냈다. 그의 시세계는 크게 초기·중기·후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는 해방 이전으로 일제강점기의 우수와 불안, 비애와 절망 그리고 식민지 현실에 대한 관념적 저항을 노래했다. 중기는 시집 〈마음〉과 〈해바라기〉를 펴낸 시기로 지적 관조의 시, 옥중시, 조국해방을 노래한 시,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과 향일성(向日性)의 의지를 읊은 시이다. 여기서 관조의 시는 현실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자연에의 몰입으로 나타나며, 옥중시는 일제 말기 자신의 옥중체험을 바탕으로 인생무상을 노래한 것이다.
후기는 시집 〈성북동 비둘기〉와 〈반응〉에서 볼 수 있듯이 공동체적 삶의 재발견 및 사회문명 비판의식, 생의 달관과 화해, 평화에의 추구가 중요한 시적 주제를 이루고 있다. 이 시기에는 이전의 불투명한 관념의 세계가 현실과 결부되면서 구체성을 띠게 되는데, 이같은 특징은 병상에서 깨달은 자연·인생·문명에 대한 통찰을 읊은〈성북동 비둘기〉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마지막 시집 〈반응〉은 시인의 지적 의지로부터 나온 '사회시집'(社會詩集)이다.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70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과 국민훈장 모란장, 1973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7년 대한민국건국포장 등을 받았다.
[1934년] 미국 은행강도 보니와 클라이드 사살
← 보니(왼쪽)와 클라이드
1934년 5월 23일, 포드자동차를 타고 미국 루이지애나주 깁스랜드 부근 고속도로를 질주하던 남녀가 잠복해 있는 경찰들이 무차별로 쏜 87발의 기총소사 세례를 받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남자는 벌집이 된 차 운전석에서 한 손에 총을 든 채, 여자는 무릎에 기관총을 얹혀놓고 양 무릎 사이에 머리를 수그린 채 죽어있었다.
두 사람은 미주리주ㆍ오클라호마주ㆍ텍사스주에서 1년 9개월간 주유소ㆍ시골은행ㆍ간이식당 등을 휘저으며 12명을 살해하고 강도행각을 벌여온 은행강도 클라이드 배로와 그의 애인 보니 파커였다. 같은 시대의 전설적 갱스터 존 딜린저가 한 번의 강도짓에서 7만 4000달러를 훔친 것에 비하면 1500달러를 넘지 않은 두 사람의 강도짓은 좀도둑 수준이었지만 대공황기에 서민의 착취기관이었던 은행을 공격함으로써 권위와 질서에 도전한 상징으로 인식됐다.
기억에서 사라져가던 두 사람이 되살아난 것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 아서 펜이 감독하고 페이 더너웨이와 워런 비티가 열연한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원제 보니와 클라이드)가 개봉되면서였다. 반전시위와 히피문화가 꿈틀거리던 1960년대 말의 심리상태와 맞물려 젊은이들은 공권력을 조롱하는 주인공들의 무한 질주에 열광했고 두 사람의 화끈한 인생에 매료됐다. 내일 없는 질주, 1930년대 대공황기를 살아간 젊은이들의 모습이었다./조선
[1954년] 이승만 대통령,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라’는 담화발표-불교분규 격화
← 불교 분규 격화
불교의 주도권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비구승과 대처승 간의 싸움이 점차 격화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5월 23일 담화를 발표 "사찰은 독신승 만이 지켜야 하며 일제 잔재인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라"고 지시했다. 당시 전국 사찰의 9할은 대처승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담화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비구승-대처승 양측은 첫 유시가 발표되자 정화회의를 열었으나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했고, 끝내 대처승들이 소유하고 있던 태고사를 비롯, 각 절들을 뺏고 빼앗기는 힘겨루기를 계속했다. 11월 25일 조계사에서 양파가 충돌하고, 12월 13일에는 비구니 5백여명이 서울시내에서 데모를 벌였다. 12월 16일엔 대통령이 불교정화를 촉구하는 담화를 다시 발표했지만 양파의 대립은 더욱 격렬해졌다.
이 대통령은 1955년 6월 16일 네 번째로 대처승 사찰철수촉구 담화를 발표했고 10월초에 가서야 비구승은 전국 4백50개 사찰을 차지할 수 있었다./조선
그밖에
2007년 보건복지부 장관에 변재진 차관 내정
2007년 한국계 미국 팝 가수 에이머리 새 앨범 홍보차 방한
2007년 유시민 보건복지부장관 후임에 변재진 현 차관 내정
2007년 한국계 혼혈 미국 팝 가수 에이머리 앨범 홍보차 방한
2005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중국 공산당 초청으로 방중
2005년 몽골 새 대통령에 엥흐바야르 前총리 선출
2005년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 박성용씨 별세
2004년 한국전에 첫 참전했던 미군 스미스부대 특공대장 찰스 B 스미스 별세
2004년 ‘90경기 무패’ 멕시코 영웅 프로복서 차베스 은퇴경기서 판정승
2004년 광주과학기술원 변영로 교수, ‘이코노미 증후군’ 예방알약 첫 개발
2001년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충성메모’ 파문의 당사자 안동수 법무장관, 취임 43시간 만에 경질
2000년 이한동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99년 미국 81세 노령 산악인, 국립공원 요세미티 엘캐피탄봉(2307m)에 올라 사상 최고령 등반기록 수립
1999년 독일 대통령에 요하네스 라우 선출
1997년 모하메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 당선
1996년 북한 공군소속 이철수 대위,미그19기를 몰고 귀순
1996년 인천 국제공항 터미널 기공식
1995년 2002년 아시안게임 부산개최 확정
1994년 로만 헤르초크 독일 대통령에 당선
1984년 김일성 소련 방문, 흐루시초프와 회담
1982년 이란군 호람샤르 탈환
1982년 프레이저 호주수상 내한
1979년 카르스텐스 서독 대통령에 피선
1975년 월남난민 태운 청룡호 부산에 입항
1973년 대법원 공해에 첫 배상판결 (영남화학에 320만원 지급 판결)
1969년 문교부 외래어 한글표기 원칙발표
1961년 최고회의 언론기관을 정비
1956년 SEATO 본부 방콕에 설치
1951년 중국-티베트, ‘티베트 평화해방의 방법에 관한 협의(17조 협약)’ 조인
1950년 터키 총선, 27년 만에 1당독재 종식하고 정권교체
1950년 한국은행법 시행령 공포
1946년 38선 월경 금지
1946년 극예술연구회 발족
1923년 조선야구협회 창립
1917년 생물학 발전에 공헌한 강영선 출생
1916년 한말 의병장 임병찬 옥사
1915년 극작가 함세덕 출생
1915년 이탈리아 일차대전 참전
1915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1912년 중국 철도투자를 위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의 4국 차관단 결성
1908년 미국의 물리학자 바딘 출생 - 1956년 트랜지스터 발명, 1972년 초전도이론 개발으로 벨상 수상
1907년 대한매일신보 한글판 창간
1734년 근대적 최면술의 선구자 독일의 메스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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