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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산(錦山)의 보리암
하동 동쪽에 자리한 남해(南海)는 본래 바다 가운데 있던 섬이었다. 신라 신문왕 때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남해현은 바다 복판에 있는 섬으로서 진도(珍島), 거제(巨濟)와 함께 솔밭처럼 우뚝하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번성하여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아니하다. ······ 이 고을은 하늘 남쪽에 있는 훌륭한 지역으로서, 해산(海産)의 풍족함과 토산(土産)의 풍부함이 나라 쓰임에 필수가 된다. 그리고 진도와 거제를 부흥하는 것도 또한 기대할 수 있다. 정이오의 기문에 위와 같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남해는 뭍에서나 바다에서나 모든 물산이 풍부해서 왜구의 침략만 없다면 사람들이 살기에 모자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해로 건너가는 노량 바다에서 임진왜란의 마지막 싸움이 벌어진 것은 1598년이었다. 11월 19일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해전1)에 나아가 손수 북채를 쥐고 북을 두드려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날 그가 이끌었던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 150여 척은 왜선 500여 척을 불사르거나 바다 밑으로 가라앉혔다. 그러나 이순신은 왜구의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는데, 그때 나이 54세였다. 전투가 끝난 뒤 이순신의 시신은 노량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관음포에 며칠 동안 모셔졌다가 고향인 충청도 아산으로 옮겨질 때까지 3개월가량 노량나루(지금의 충렬사)에 가매장되었다. 그때부터 관음포는 ‘이(李) 충무공의 목숨이 이곳에서 떨어졌다’ 하여 이락포(李落浦)라 불렸고, 그 뒷산도 이락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이 묻혔던 자리에 빈 봉분을 만들고 충렬사를 지었으며, 1973년 사적 제233호로 지정하였다. 한편 남해는 고려 때부터 유배지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 초기에 안평대군, 한석봉, 양사언과 함께 4대 서예가로 알려진 자암(自菴) 김구는 기묘사화로 인해 유배를 와서 경기체가인 「화전별곡(花田別曲)」을 남겼고(화전은 남해의 옛 이름), 조선 영조 때 사람인 유의양은 1년 남짓한 유배 기간에 한글로 남해의 풍물을 묘사한 『남해견문록(南海見聞錄)』을 남겼다.
무학산과 마산
그리고 남해에서 1킬로미터쯤 배를 타고 건너면 닿는 자그마한 섬 노도로 유배를 왔던 사람이 서포 김만중이었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자이자 김집의 손자인 그는 아버지 김익겸이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유복자로 태어났다. 1665년(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김만중은 이듬해 정언(正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헌납(獻納), 사서(司書) 등을 거쳤다. 1679년(숙종 5)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1687년(숙종 13) 경연에서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로 인해 선천에 유배되었고, 이때 『서포만필』을 지었다.김만중은 “사람의 마음은 입에서 나오면 말이 되고, 말이 절주(節奏, 리듬)를 가지면 문학 작품이 된다”라고 하면서 조선 사대부들의 중국 문화 추종과 한문학 모방을 질타하였다.우리나라 시문은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우므로 설사 십분 비슷하다고 해도 그것은 앵무새가 사람 말을 하는 짓이다. 일반 백성이 사는 거리에서 나무하는 아이나 물 긷는 아낙네가 “아아” 하면서 서로 화답하는 노래는 비록 천박하다고 하지만, 만일 진실과 거짓을 따진다면 참으로 학사, 대부의 이른바 시(詩)니, 부(賦)니 하는 것들과 함께 논할 바가 아니다.
그는 이듬해에 왕자(후에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 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그가 이렇게 유배 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에 속하였기 때문에 치열한 당쟁을 피할 수 없어서였다. 현종 초에 시작된 예송논쟁에 뒤이어 경신환국, 기사환국 등 정치권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그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 김만중은 많은 시문과 잡록 그리고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의 소설을 지었다. 『서포만필』에서는 한시보다 우리말로 쓰인 작품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여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들면서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오직 이것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한편 노도와 가까운 양아리의 두모와 두모리 사이에 있는 바위를 서불제라고 부른다. 앞면에 화상문자(畵象文字, 한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문자)로 글을 새겨놓았는데, 전설에 진시황에게서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서복(서불)이 동남동녀(童男童女) 5백 명을 거느리고 가던 중 이곳 명지를 지나다가 자신의 자취를 후세에 알리고자 기록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초대 천황인 진무(神武)가 되었다고 한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화상문자라고 하며, 고고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73년에 남해군 설천면 모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노량해협을 잇는 남해대교가 완공되면서 남해군은 섬 아닌 섬이 되었다. 남해군에 자리한 금산에 보리암이 있다.
보리암경상남도 남해군 금산 남쪽 봉우리에 있는 보리암은 팔공산 갓바위, 낙산사 홍련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푸른 바다와 수많은 돌들이 섞이고 섞여 조화를 이루는 금산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사천시에 속한 삼천포에 이른다. 3번 국도가 시작되는 삼천포는 사람들에게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지다’라는 속담으로 더 알려졌지만, 한번 가본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빠져 다시 가고 또 가는 곳이다. 통영대전고속도로가 개통된 뒤 싱싱한 회를 맛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 삼천포는 남해를 잇는 다리의 개통으로 더욱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형승」조에 “남쪽 끝의 요충이다. 굽어보면 기름진 들녘이 펼쳐지며 여러 산봉우리가 아름답다. 이구산(尼邱山)이 우뚝 솟아 있으며 사수(泗水)가 가로질러 흐른다. 와룡산이 웅장하게 서려 있고 드넓은 바다가 아득히 펼쳐진다”라고 쓰여 있는 사천은 와룡산, 봉암산, 향노봉 등의 산들이 연달아 있고 향노봉 자락에 운흥사라는 옛 절을 안고 있다. 또한 사천군 곤명면 조장리에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 가던 주민 101명이 미군의 오폭과 총격으로 숨지거나 다친 역사적 상처가 남아 있다.
이곳 사천시 곤양면 용산리 와룡산 자락에 다솔사(多率寺)라는 큰 절이 있다. 소나무가 많은 곳이라고 여기기 쉬운 다솔사는 한자 이름대로라면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이다. 소나무 숲과 측백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다솔사로 가는 길은 한적하지만,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 길처럼 운치가 있다. 이 절은 신라 지증왕 4년(503)에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가 창건한 뒤 영악사라고 하였는데, 성덕왕 5년에 다솔사라 고쳤고, 문무왕 16년(676)에 의상스님이 영봉사라고 고쳤다가,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가 다시 다솔사라고 고쳤다. 그 뒤 1326년에 나옹스님이 중수하였고, 조선 초기에 영일, 효익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숙종 때 복원하였다.
다솔사사천시 곤양면 용산리 와룡산 자락에 다솔사(多率寺)라는 큰 절이 있다. 한자 이름대로라면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이다. 현재의 건물은 1914년에 일어난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재건한 것이다. 현존하는 절 건물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대양루와 대웅전, 나한전, 천왕전, 요사채 등 10여 채가 있다. 대양루(大陽樓)는 1749년(영조 25)에 건립되어 현재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2층 맞배지붕으로 건평이 106평에 이르는 큰 건물이다. 또한 1978년 2월 8일에 대웅전 삼존불상에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할 때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나와 적멸보궁으로 증개축한 후 불사리를 그 곳에 모셨다. 적멸보궁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열반에 들기 직전의 부처의 모습인 와불상을 모셨다. 응진전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고 스님인 만해 한용운이 머물며 수도하였던 곳이고, 소설가 김동리가 머물면서 소설 『등신불』을 쓴 곳이기도 하며, 또한 김법린, 최범술, 김범부 등이 은거하며 독립 운동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한편 다솔사 근처에서는 차나무(죽로차)가 재배되는데, 반야로(般若露)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명차다. 다솔사에 딸린 보안암은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석굴 암자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굴의 외형은 판상의 사암질 활석을 단층식으로 쌓아올린 분묘 형태이며, 평면은 방형이다. 석굴 입구에는 미륵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목조전실을 지나서 2미터 정도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석실이 나온다. 중앙에 장대석을 대좌로 하여 결가부좌한 석조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이 본존의 뒤쪽 좌우에는 각 8구의 석조나한좌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 석굴은 인공으로 조성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경주 석굴암과 군위 삼존석굴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삼천포대교경상남도 사천시 대방동과 모개섬 사이에 놓여 삼천포와 남해를 잇는 삼천포대교. 다리를 건너다보면 다도해가 그림처럼 눈앞으로 펼쳐져 보인다. 곤양군 금양면에 속하였던 노량리는 남해군 설천면에 인접한 바다의 목인데, 노들 또는 노량이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하동군 금양면에 편입되었다가 금남면에 속하게 된 노량은 400여 년 전에 이루어진 마을로, 한양에서 이곳으로 귀양 오는 선비들에게는 노량 앞바다의 물결이 마치 이슬방울이 모여서 다리(교량)를 이룬 것처럼 보여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고 해서 ‘노량’이라 부르게 되었
출처:(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남해금산[南海錦山]
정의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삼동면·이동면에 걸쳐 있는 산.
개설
한려해상국립공원(閑麗海上國立公園)에 속하는 금산(錦山)은 해발고도 705m로, 1974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명칭 유래
금산을 소금강(小金剛) 또는 남해금강(南海錦江)이라고한다. 또는 금강산을 개골산(皆骨山)이라 하는데 비유하여 금산을 개암산(皆岩山)으로 부르기도 한다. 본래 신라원효대사(元曉大師)의 기도처로서 보광산(普光山)이라 하였는데, 태조이성계(李成桂)가 등극하기 전에 이 산에서 수도하면서 기원한 결과 그 이상을 달성하여 왕좌에 오르게 되자 은혜를 갚기 위하여 비단 ‘錦(금)’자를 써서 ‘普光山(보광산)’에서 ‘錦山(금산)’으로 바꿔 부르게 된데서 지금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자연환경
금산(681m)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온통 기암괴석들로 뒤덮인 38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지질은 중생대 퇴적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기암괴석을 형성하여 금산삼십팔경(錦山三十八景)이라 불릴 정도로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정상에서는 남해에 있는 크고 작은 섬과 넓은 바다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어 삼남지방의 경승명산지로 손꼽힌다.
현황
정상에는 강화도 보문사, 낙산사 홍련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인 보리암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쌍홍문(雙虹門)·사선대(四仙臺)·음성굴(音聲窟)·상사암(相思巖) 등이 있어 해마다 많은 등산객과 관광객이 찾는다.
금산의 38경은 망대, 문장암(文章岩), 대장봉, 형리암, 탑대, 천구암, 이태조기단(李太祖祈壇, 이씨기단), 가사굴, 삼불암, 천계암, 천마암, 만장대, 음성굴(音聲窟), 용굴, 쌍홍문, 사선대, 백명굴, 천구봉, 제석봉, 좌선대, 삼사기단(三師祈壇), 저두암, 상사바위, 향로봉(香爐峰), 사자암(獅子岩), 팔선대, 촉대봉(燭臺峰), 구정암, 감로수, 농주암, 화엄봉, 일월봉, 흔들바위, 부소암, 상주리석각, 세존도, 노인성, 일출경 등이다.
참고문헌
『남해군지』(남해군지편찬위원회, 1994)
남해군청(www.namhae.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보리암
화엄봉 일출
화엄봉 일출
구름 덕분에 심심하지 않은 여명과 일출입니다. 제 생각에 금산 일출은 화엄봉에서 보는게 제일 멋있는것 같아요~
정상(봉수대), 보리암, 제석봉에서도 보았지만 화엄봉에서 보리암 뒤로 떠오르는 일출이가장 마음에 들더라구요 단,
동절기에만 저 포인트이고 그렇지 않을땐 해의 위치가 달라지기에 보리암에서 보시는걸 추천 드립니다.
쌍홍문
따스한 햇살에 쌍홍문에서 바라보는 전망도 정말 아름답습니다~
작년 여름, 쌍홍문 : 해골바위라고도 불리는데 일부러 작년에 찍은 사진으로 보여드립니다. 날씨 안좋을때의 사진인데
상주은모래해변 여긴 화엄봉에서 제석봉으로 가는길 전망대 뷰입니다.저멀리 상주은모래해변이 보이네요~
금산 산장 : 제석봉에서 바라보는 금산 산장. 여기 가실땐 꼭 현금 지참하세요~ 계좌이체도 가능하지만 사장님이 노부부이신지라 바로 확인가능한 현금을 선호하시더라구요 ㅎㅎ 저도 여기에서 일행들과 컵라면(4천)에 파전(1.1만),빵과 스프까지 야무지게 챙겨먹었습니다~😋
보리암
팔선대 : 상사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뷰입니다~ 이곳을 어두울때 지나가서 하나도 못본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느것 하나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곳입니다.
상사암 전망대 : 전망대에서 돌아 나와 헬기장 방향으로 조금만 진행하다보면 우측에 샛길이 하나 있는데 거기로 들어 가면 이러한 전망도 볼 수 있습니다.
부소암
보리암도 그렇고 부소암도 절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공사중으로 들어갈수는 없었네요. 마지막으로 금산을 찾은게 올 3월 중순이었는데 곳곳에 데크계단이 많이 생겼더라구요. 쌍홍문~ 보리암, 상사암 방향의 계단 보리암~ 화엄봉 계단 헬기장~ 부소암 계단 기억상에는 없던 계단들이 그사이에 만들어져 깜짝 놀랐네요. 어려운 길도 아닌데 너무 계단을 많이 만들어둔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편한것도 좋지만 자연 그대로가 더 좋거든요.
저 아래 두모마을 다랭이논이 보이시나요? 지금은 늦어서 아무것도 없지만 아래의 사진처럼 4월이면 유채꽃이 피고
10월이면 메밀꽃이 만발합니다~
두모마을 유채꽃& 메밀꽃 (참고용) 특히나 유채꽃 필땐 주변 벚나무까지 더해져 정말 예쁜곳이에요. 바다와 가까워서 산책하기에도 좋구요~ 돌아오는 봄에는 독일인 마을 대신 산행후에 이 곳을 코스에 넣어서 진행해보려 하니 따스한 남해의 봄을 즐기시고픈 회원님들함께하세요~😃
삼천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