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신앙
(창 12: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사람들은 저마다 계획을 합니다. 계획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밥 먹고, 잠자는 시간도 정해서 지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계획한 대로 실천하는 사람도 적고, 계획한 것을 성취한 사람도 적습니다. 대부분 계획하지 않은 뜻밖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계획하고 살아갑니다. 계획은 성취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계획이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편안함입니다. 걱정되고 불안할 때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면 불안이 줄어들고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획한 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늘 뜻밖의 사건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길을 찾습니다. 실망하기보다는 새로운 것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또 다른 계획을 세우면 되는 것입니다.
계획은 희망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희망은 ‘간절함’입니다. 계획하는 사람은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함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간절함은 마음이 아니라, 온 삶을 던지는 것입니다. 카지노에서 자기에게 남은 돈을 모두 걸 때 ‘올인’이라고 한답니다. 희망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인생을 도박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간절함은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물론 ‘올인’한다고 해서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간절함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투신’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가진 것에서 편안함, 편리함, 안정감을 얻고, 기쁨을 얻습니다. 현재의 삶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이런 안정과 편리함을 던져 새로운 삶에 도전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으로 내 삶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도 있을 것입니다.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기복신앙은 자기 계획을 이루려는 신앙입니다. 자기가 신앙의 주체가 됩니다. 신은 내가 계획한 것을 들어주는 보조자인 셈이지요. 그리스도인도 기복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신앙입니다. 내 계획, 내가 원하는 것은 무시됩니다.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순종입니다. 복종은 좋든 싫든 판단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라면 순종은 좋은 일, 옳은 일이라고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복음을 전파합니다. 유대인 권력자들이 제자들을 협박하고 감옥에 가두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박해를 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하며(행 4:19-20) 계속 복음을 전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옳은 일이기에 자신의 온 삶을 투신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도,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내게 옳은 일이고, 좋은 일인 것을 믿을 때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복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벌 받을까 봐, 지옥 갈까 봐, 두려워서 예수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옳은 일이고, 좋은 일이기에 내 삶을 바꾸어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을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5:6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와 무조건의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은 나를 편안하게 해 주고, 안정감을 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작은 부족의 족장이었다고 하니 아쉬움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대로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편안함, 안정감을 포기하고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획이 확실하고, 이해할만한 것은 아닙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약속을 이루실 것인지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무엇을 기대하고 떠나야 할지 알 수가 없는데 순종은 쉽지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족장으로서 재산도 있을 것이고, 친척이 모여 살면서 안정감을 누렸을 것이고, 대대로 살아온 고향에서 편안함도 얻었을 것입니다. 조금씩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떠나라’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만족합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이 좋아 보인다면 ‘어떻게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인지 확인’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고향을 떠납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칠십오 세였습니다.
솔직히 아브라함의 결단을 믿음이라고 해야 할지, 무모한 도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동네 사람들도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그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모든 것을 포기하느냐’고 한마디씩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더 많은 복을 얻기 위한 순종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계산하는 신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포기한 것이 열이라면 얻는 것은 백이 될 것이라고 믿어서 떠난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얻기 위해 하나님 말씀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므로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어쩌면 요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이런 믿음을 맹목적인 신앙이라고 할지 모릅니다. 얻는 것보다 잃은 것, 포기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계산, 계획을 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순종은 미련하고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닫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할 때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완성하기 위해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순종은 가장 옳은 일, 선한 일을 이루는 길이 됩니다. 세상 일이, 혹은 내 인생이 내 계획대로 이루어져야 합니까?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도 많고, 때로는 뜻밖의 사건이 내게 꼭 필요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내게 가장 좋은 것인데, 내가 그 계획을 따르지 못해서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아브라함은 편안하고, 익숙한 고향에서 좋은 계획을 세우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역시 자신의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방법과 노력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하며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은 이 정도면 만족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우물 안 개구리 이야기를 잘 압니다. 어린 개구리가 호기심이 많아 우물 밖을 구경나왔습니다. 우물 밖은 우물 안과 너무 달랐습니다. 큰 나무, 큰 길, 많은 짐승들. 어린 개구리는 놀람과 두려움으로 다시 우물 안으로 들어가서 아빠에게 바깥세상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밖에는 엄청 큰 짐승이 산다고 말하자 아빠 개구리가 몸을 키우며 묻습니다. ‘이만큼?’ 배에 바람을 잔뜩 넣어 크게 하였으나, ‘아니, 그보다 더 크다’고 합니다. 아빠는 더 크게 바람을 불어넣어 키워보았지만, 상상할 수는 없고 결국 배가 터져 죽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기 생각, 자기 능력과 지혜라는 우물 안에 갇혀 있는지 모릅니다. 우물 안에서도 충분히 만족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불러내십니다.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을 자기가 이해하려고 합니다. 마치 아빠 개구리처럼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이해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우물 밖으로 나오면 모든 것, 새로운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떠나지 않으면서 이해하려고 하니 어렵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게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는 모든 것이 분명하고 확실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편안함을 느끼며 주저앉아 있을 때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라고 하십니다. 내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도록 불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옳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믿고, 날마다 기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