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강쇠와 옹녀는 이상하게도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
변강쇠와 옹녀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들은 공연히 흥분한다.
조선조 말엽에 신재효(申在孝)란 소리꾼이 불렀던 ‘변강쇠가’를 판소리의 대가인 박동진(朴東鎭) 옹이‘가루지기타령’이라 고쳐 불렀다. 박 옹이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고, 부채를 폈다 오므렸다 하면서 이 노래를 부를 때, 이 타령을 듣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어깨춤이 절로 들썩인다.
전라도 고창현(高敞縣)의 관약방(官藥房)을 하던 신광흡의 아들 신재효가 한때, 관가의 아전(衙前)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지만 본시 소리를 잘 해서 판소리 여섯마당을 불렀으니 대단한 소리꾼이다.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벌가, 적벽가에다가 변강쇠가를 모두 불렀는데 그 중에서 가장 신나게 불렀던 타령이 ‘변강쇠가’였을 것이다. 그는 이‘변강쇠가’를 부를 때는 목에 핏대를 새우고 춤을 추면서 신명나게 불렀지 않았겠나.
그 시절에 기죽어 사는 밑바닥 백성들이 다른 타령으로는 신명을 못 느꼈지만 이 ‘변강쇠가’ 가락이 나오기만 하면 십년 묵은 체증(滯症)이 풀리듯 절로 흥이 돋았다. 지금도 영화 ‘변강쇠’(이대근 주연)를 봤다면 흥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변강쇠는 참으로 미련하고 우직하게도 생겼다. 그놈의 음흉한 상판을 보고 관객들은 야릇한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봤을 것이고 공연히 흥분했을 것이다.
평안도에는 조선 천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음녀(淫女)인 옹녀가 살았다. 소나무의 옹이처럼 단단하고 불이 잘 붙는 다고 옹녀라 했던가? 나이 열다섯에 시집을 갔는데 신방을 차린 몇 밤 만에 신랑이라는 자가 무슨 연유인지 죽었다. 이듬해 다시 시집을 갔다. 두 번째 사내도 또 죽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장가라고 온 사내마다 죽어 나갈까? 아무리 사내가 젊고 기운이 세어도 그녀의 옹찬 음기(陰氣)에는 당할 수 없었던 게다. 그런 옹녀인데도 염치도 없이 다시 시집을 갔다. 세 번째, 네 번 째 사내도 몇 밤 만에 죽어나가니 옹녀에게 청상살(靑孀煞)이 끼었는가, 상부살(喪夫煞)이 끼었는가? 이렇게 되고 보니 그 고을 사람들이 옹녀를 요사한 여자라 해서 마을에서 쫓아냈다. 옹녀는 할 수 없이 살던 곳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삼남(三南)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던 변강쇠를 황해도 청석골에서 만나게 된다. 둘은 서로 연때가 맞았는지, 궁합이 맞았는지 지리산 어느 골짜기까지 함께 내려와서는 살림을 차리고 살게 되었다. 변강쇠도 삼남에서는 강정남(强精男)으로 소문이 난 사내라 옹녀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천생연분이라 하겠다. 옹녀가 서방을 들일 때마다 그 서방이란 자가 죽어나가는 것은 필시 그녀의 옹이 같이 당찬 욕정 때문에 음실(陰室)에 빠진 사내들이 견디어 내지를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하기야 어느 사내인들 여자가 대어드는데 남자 구실 옳게 하겠다고 죽자 사자 힘을 뺐을 것이니 옹녀 같은 강음녀(强淫女)에게 당해 냈겠느냐. 모름지기 무엇이나 과하면 아니 되는 법. 복에 없는 색을 지나치게 탐하면 제 명대로 못 산다는 것을 사내들은 알아야 할 텐데. 그래도 변강쇠가 죽지 않고 옹녀와 붙어사는 것을 보면 강쇠 녀석이 옹녀보다 힘이 더 세었으면 세었지 덜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변강쇠란 놈은 믿는 것은 자기의 잘난 양물(陽物) 하나만 믿고 하는 짓거리가 참으로 가관이다. 대장부의 할 일이 자기 여편네에게 방사(房事)만을 잘 해주는 것으로 족한가? 가솔(家率)을 먹여 살릴 궁리는 하지 않고 투전판에서 놀음이나 하고 밤에 마누라를 즐겁게 한답시고 힘을 뺐으니 낮에는 낮잠이나 자고 게으름을 피운다. 옹녀가 보다 못해서 강쇠를 산에 가서 나무나 해 오라고 시켰더니 한다는 짓거리가 더욱 한심하다. 나무는 해오지 않고 이 마을 저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장승을 몽땅 베어 와서는 나무 해 왔다고 앞마당에 내려놓으니 그 하는 짓이 참으로 딱하다. 그러나 강쇠가 장승을 벤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지자 장승 중의 우드머리인 대방장승이 노발대발하였다. 대방장승은 팔도의 휘하 모든 장승들에게 급히 방(榜)을 놓아 몹쓸 병(病)을 하나씩 만들어 강쇠 놈의 몸에 심도록 엄명을 내렸다. 천지 사방에 있는 장승들이 모두 병 한 개씩을 만들어 그 놈의 몸에 심었으니 아무리 힘이 세고 강정(强精)이라 해도 그가 죽지 않고 배기겠는가. 사필귀정이라, 마침내 그가 병에 걸려 죽게 되어 숨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젊고 예쁜 마누라를 그냥 두고 가기가 아까웠던 모양이다.
“ 마누라, 내 죽거든 자네는 수절을 하게나. 다시 다른 사내와는 관계를 말게나.”한다. 가장이란 자가 다른 유언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마누라가 다른 사내와 관계를 하지 말라는 당부만을 한다.
옹녀 대답하기를
“영감, 근심일랑 마옵소서. 내, 다시는 개가(改嫁)하는 일이 없도록 조신(操身)할 것이니 편히 눈을 감어소서.”했다.
그러나 요조숙녀처럼 혼자 공방(空房)을 지키고 살 옹녀인가? 죽은 서방 장사(葬事)를 혼자서 치르기가 어렵다는 핑계로 동리의 장정들을 불러들인다. 옹녀가 천하절색은 아니라 하드라도 그 고을에서는 빼어난 미모라 송장을 염하고 상여를 메겠다는 젊은 사내는 많았다. 이제 옹녀가 서방 없는 과부가 되었으니 이참에 그녀를 건드려볼 양으로 침을 흘리는 사내들이 찾아와 초상 일을 돕는답시고 강쇠의 시신에 손을 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내들은 며칠을 지나지 않아 모두 자빠져 죽어버리니 본시 제 죽는 줄 모르는 호롱불에 날라드는 부나비 꼴이다. 필시 죽은 강쇠가 저주를 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건너 마을에 사는 마음씨 좋은 뎁덕이가 와서 강쇠의 장사를 치른 것이다. 뎁덕이는 조금 멍청해서 옹녀에게 욕심이 없는지라 강쇠의 저주가 없었으니 죽음을 면했을 것이다.
변강쇠 같은 사내가 우리나라에만 있었겠나. 서양에도 강쇠만큼 힘자랑하고 다닌 사내가 있었는데 그 중에도 이태리의 카사노바(Casanova)라는 자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때는 한 이 백 년 전쯤, 카사노바는 귀족의 가문에 태어났고 공부도 많이 해서 법학박사라는 학식이 있는 사람이다. 한 때는 성직자(聖職者)가 되고 싶어 했다니 제법 거룩한 포부를 가졌던 사내다. 그는 얼굴이 잘 생기고 힘이 세었기에 수백 명(말로는 400명 정도)의 여자와 관계했으니 그도 대단한 사내다. 그가 상대한 여자 중에는 수녀도 있었다니 그의 정력도 세었겠지만 여자를 꾀는 수단이 대단하다. 이태리에만 그런 사내가 있었겠나. 스페인에서도 희극 ‘세비아의 난봉꾼’에 나오는‘돈 후안(Don Juan)’이란 사내는 많은 여자를 농락 했으니 세상 도처에 그런 사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강솨는 한 여자를 두고 힘자랑을 했지만 ‘카사노바나’나 ‘돈 후안’은 수 백 명의 여자와 관계했으니 수적으로는 강쇠보다 우세하나 그 관계란 시쳇말로 미풍양속을 해치는 부적절한 관계라 하겠다. 그러나 그들도 당찬 이 땅의 옹녀를 만났다면 몇 밤을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
여기서 변강쇠와 옹녀의 힘자랑은 그만하고 ‘변강솨타령’ 한 대목을 불러 보자. 아마 이 대목에서 소리 꾼 신재효는 더욱 신명이 났을 것이고 창을 하면서 입에 거품을 물었을 것이다.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천생음골(天生陰骨) 강쇠놈이 여인의 양각(兩脚)을 번 듯 들고,
옥문관(玉門關)을 굽어보며,
이상히도 생겼다. 맹랑히도 생겼다.
늙은 중의 입일는지 털은 돋고 입은 없다.
소나기 맞았던지 언덕 깊게 파이었다.
생수처(生水處) 옥답(沃畓)인지 물이 항상 괴어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음질음질 하고 있네.
만경창파 조개인지 혀를 삐쭉 내밀고서,
임실(任實) 곶감 먹었던지 곶감 씨가 장물이요,
만첩 산중 으름인지 제라 절로 벌어졌다.
연계탕(軟鷄湯) 먹었던지 닭의 벼슬 비쳐있다.
제 무엇이 즐거워서 반쯤 웃어 두었구나.
곶감 있고, 으름 있고, 조개 있고, 연계(軟鷄) 있고,
제사상은 걱정 없다.
강쇠가 옹녀의 음물(陰物)을 보고 이렇게 타령을 했으니 참으로 소상히도 본 것이다. 이 타령을 듣고 입심 좋은 옹녀가 가만있었겠는가. 그녀도 걸쭉하게 한 소리 뽑았던 것이다.
이상히도 생겼네. 맹랑히도 생겼네.
전배사령 서려는지 쌍 걸낭을 느직이 붙여달고,
오군문(五軍門) 군뢰(軍牢)던가 복두(幞頭)를 붉게 쓰고,
냇물 가에 물방안지 떨거덩, 떨거덩 끄덕인다.
송아지 말뚝인지 털고비(털가죽)를 둘렀구나.
감기를 얻었던지 묽은 코는 무슨 일꼬.
성정도 혹독하다 화 곧 나면 눈물난다.
어린아이 병들었는지 젖은 어찌 게웠으며,
제사에 쓴 숭어인지 꼬챙이에 구멍 났다.
절 방의 노승인지 민대가리 둥글린다.
소년인사 다 배웠다. 꼬박꼬박 절을 하네. "
이쯤 되면 옹녀 입심이 강솨 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 않다. 아무래도 점잖은 자리에서 부르기에는 좀 민망한 소리가 아닌가?
이 잡소리 같은 ‘변강쇠 타령’을 박동진 옹은 왜 ‘가루지기타령’이라하고 불렀을까? ‘가루지기’를 ‘가로지기’로 바꿔보자. 아니면 ‘가로로 지기’로 바꿔 보자. 그래도 모르겠다면 유식하게 횡부(橫負)라 해 보자. 한자를 좀 아는 사람이면 무릎을 탁 칠 것이다. 가로 업고 가는 것이 무엇이냐. 그야 송장이지. 송장은 죽은 시체이니 옹녀에게 당해서 죽어나가는 ‘죽음’을 말하는 것일 게다. ‘변강쇠가’, 즉 ‘가루지기타령’도 결국은 사람의 죽음이라는 가락에 맞춰지는 ‘저승타령’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텝득이란 놈은 본시 심성이 어진지라 옹녀에게는 흑심이 없었으니 강쇠의 송장을 칠 수 있었고, 강쇠의 시체를 가로지기하고 산으로 올라가면서 협기 있는 변서방이라고 치켜세우는 노래를 한 곡 뽑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 변 서방은 협기 있는 남아로서
술 먹기에 접장이요, 화방(花房)의 패두(牌頭: 우두머리)시니,
간 데마다 이름 있고 사람마다 어려워한다.
꽃 같은 저 미인과 백년을 살겠다더니
이슬 같은 이 목숨이 일조에 돌아가니 원통하고 분한 마음,
눈을 감을 수 없어 뻣뻣이 선 송장이다.
텝득이가 뻣뻣이 선 송장을 가루지기 하고 만가(輓歌)처럼 타령을 불렀다. 아무리 사람이 강정(强精)이라 해도 한 번 가면 다시 못 일어서는 것이 사내의 양물이요,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 하는 것이 인생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분수를 알아 음양을 즐긴다면 자손 번창하고 남녀의 희열을 얻을 수 있을 것인데 요사이 사내들이 과욕으로 요상한 강정약(强精藥)을 남용하여 제 명을 못 기다려 지부명왕(地府明王: 저승사자)을 만나면 그도 어리석은 일. 팔자에 없는 과분한 미색은 너무 탐하지 말 것이며, 제멋대로 즐길 수 있는 쾌락이라 하여 과음(過淫)도 삼가야 할 것이다. 변강쇠는 여색을 탐하되 옹녀만으로 희열을 즐기면서 부부의 정분을 나눴으니 과음이라 해서 구지 나무랄 일은 못 된다. 제 마누라와 힘 있는 희락을 즐겼으니 그것이 어찌 잘못이라 하겠는가. ‘카사노바’나 ‘돈 후안’처럼 외도를 많이 한 사람들 중에는 매독이나 임질과 같은 몹쓸 병으로 죽은 이가 많았다고 했다. 그것은 절제 없이 많은 여인을 농간한 죄목으로 지부명왕이 생사부(生死簿)에 이름이 먼저 올려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온 세상에 ‘에이즈’라는 몹쓸 병이 만연해 있으니 그것이 힘이 있다고 하여 아무 곳에나 함부로 휘두를 일이 아니다. 변강쇠처럼 옹녀만을 사랑했다면 무슨 병이 걸리겠나. 설령 누구나 변강쇠처럼 힘이 있다고 하드라도 조강지처만을 잘 다독거려야 할 것이다. 견물생심이라 해서 이 곳 저 곳 주전벌이는 하지 말아야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고, 지부명왕도 늦게 만나 수복(壽福)을 누리면서 오래 오래 살 것이다. (2005. 11. 9.)
첫댓글 대단한 해학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