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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단편 고전소설 > 한문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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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지원 |
창작연대 | 조선후기 |
원문 수록 |
방경각외전,
동야휘집,
청구야담 작품해설 |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문장가인 연암 박지원의 한문단편소설.
≪연암집 燕巖集≫권8 별집(別集) <방경각외전>에 실려 있다. 정선군에 어질고 글 읽는 것을 좋아하는 양반이 살았다. 그 고을에 군수가 새로 부임하면 반드시 그의 집에 찾아가 경의를 표하였다. 그러나 양반은 몹시 가난하여 해마다 관청의 환곡을 빌려 먹은 것이 천석(千石)이나 되었다. 관찰사가 그 고을을 순시하다가 환곡의 출납을 살펴보고는 그 양반을 가두게 했다. 군수는 양반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겼으나 아니 가둘 수도 없었다. 한편 양반은 밤낮 울기만 할 뿐 무슨 뾰족한 방책을 내지 못하였다.
이 때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그 고을의 서민부자(庶民富者)가 양반을 찾아가서 환곡을 대신 갚아 주기로 하고 양반을 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군수는 문서를 작성하지 않고 사사롭게 양반을 사고 팔면 송사의 단서가 된다고 하며 고을 백성을 관아에 모아놓고 군수 자신이 매매 증서를 작성했다. 첫 번째 문권은 양반으로서 지켜야 할 수많은 행동지침을 열거하고 만약 이를 어기면 양반은 이 증서를 관청에 가지고 와서 양반권을 회복할 수 있음을 밝혀 놓았다. 이에 서민부자는 증서의 내용을 좀더 이롭게 고쳐줄 것을 요구하였다. 군수는 두 번째 문권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내용은 포악 무도한 양반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내용이었다.
문권 작성 도중에 서민부자는 하도 기가 막혀 혀를 내밀고는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 맹랑하구료. 나를 도적으로 만들 작정이오.” 하고는 머리를 내저으면서 가버렸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양반의 일에 대해서 입에 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양반전>과 같은 내용의 글이 ≪동야휘집 東野彙輯≫권 5와 ≪청구야담 靑丘野談≫권3에 <상관조부민매반 償官租富民買班>, <수관조부민매양반 輸官租富民買兩班>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그런데 이 이본들은 <양반전>의 자구(字句)를 약간 변개하여 수록한 것이다.
<양반전>의 작품 배경은 조선 후기라는 역사적 전환기에서의 신분변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방경각외전> ‘자서(自序)’에 의하면, 단지 문벌과 세덕을 팔아먹는 장사치와 다름없는 양반답지 못한 양반을 풍자하기 위해 쓰여진 글이라고 했지만, 이 작품에서 축적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분상승을 꾀하려는 서민계층과 경제적 빈곤으로 말미암아 양반의 신분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몰락양반 사이에서 야기되었던 해괴한 양반매매사건을 그려냄으로써 18세기 역사적 전환기에 격화되고 있던 신분변동 양상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양반전은 조선조 영 정조 때의 대 문호이며 실학파 북학파의 대가인 연암 박지원이 지은 <연암외집>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양반전은 그의 초기 작품으로 한문본을 한글로 옮긴 것이다.
양반전은 당시 양반사회의 형식적이며 위선에 찬 무능력한 양반들의 생활을 풍자하고 비판한 작품이다.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가기도 어렵게 지내면서도 매일 책이나 읽고 손님 접대와 군수를 초대하여 어울려 놀기만을 일삼는 양반, 끼니를 해 먹을 양식이 떨어지면 스스로 농사를 짓거나 하여 일을 하여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관곡을 타다 먹는 무능력한 양반들의 생활을 풍자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일반 상민들이 양반들로부터 얼마나 많이 학대를 받으면서 그 양반을 동경하고 있는지도 잘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연암은 특히 자신도 양반계급 출신으로서 다른 이들과 서로 사귀어 지내왔으면서도 엄격하고 지존한 양반들을 혐오하고 있는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양반계급을 근본적으로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이 계급의 위선적인 생활에 비위가 거슬려 노골적으로 풍자한 것이다.
강원도 정선군의 한 마을에 어떤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 양반은 성품이 어질고 글읽기를 매우 좋아했다. 이 고을의 우두머리인 군수가 새로 부임할 때면 반드시 이 양반의 집을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것이 하나의 예의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양반은 워낙 집이 가난하여서 해마다 나라에서 관리하는 양곡을 꾸어다 먹었다. 그렇게 여러 해를 지내다 보니 어느덧 관가에서 빌려 먹은 양곡이 천 석이 다 되었다.
어느 날 관찰사가 각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관곡을 조사했다. 그런데 이 정선 고을에 와서 보니 크게 부족했다. 관찰사는 대단히 화가 나서 호령했다.
"도대체 어떤 놈의 양반이란 자가 나라에서 쓸 양곡을 이렇듯 많이 축을 냈더란 말이냐! 당장 그를 잡아다 옥에 가두도록 하여라!"
관찰사의 엄명을 전해들은 그 양반은 꾸어다 먹은 양곡을 갚을 방법이 없어 밤낮으로 울기만 했다. 오희려 그의 아내는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
"보세요, 제가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당신은 평생 글을 읽기만 좋아하고 꾸어다 먹은 관곡을 갚을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나 참으로 딱한 노릇입니다. 항상 '양반 양반'만 찾아대더니 그 양반이란 것은 결국 한푼 값어치도 못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때 마침 그 마을에 있는 부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부자는 비록 재물은 많으니 출신은 상민이었다. 그 부자는 집안 사람들과 이렇게 의논하여 말했다. "양반이란 아무리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위엄이 있고 존귀한 신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비록 부자라 하지만 상민의 신세로서 양반들로부터 늘 천대를 받으며 지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마침 우리 고을에 어떤 양반이 하도 가난하여 꾸어다 먹은 관가의 곡식을 갚지 못하여 그 형편이 매우 난처하게 된 모양이다. 그리하여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는 돈이 넉넉하나 미천함으로 이 양반이란 신분을 사서 양반 행세를 하면 어떻겠는가?"
그러자 집안 사람들 모두 좋게 여겨서 모두 찬성하였다. 이리하여 다음날 아침에 그 양반을 찾아가서 말했다. "양반어른이 관곡을 갚지 못해 딱한 신세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소인이 어르신께서 빚을 진 관곡을 모두 갚아드리고 대신에 그 양반 신분을 양도받고싶어 찾아왔습니다."
양반은 관곡을 갚지 않으면 당장 감옥에 갈 처지여서 쾌히 허락했다.
그리하여 그 부자 상민은 그날로 관가에 가서 양반이 빚을 진 천 석의 양곡을 모두 갚았다.
군수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궁금하여 다음날 그 양반을 찾아가 물으니 옛 양반은 황급히 벙거지를 쓰고 잠방이 바람으로 땅에 엎드려 쩔쩔매면서 말했다. "이제 소인은 양반이 아닙니다. "군수가 놀라서 양반의 소매를 잡고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대관절 어찌 된 일이오? 영문이나 압시다. "그러자 양반은 더욱 황송해 하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려 말했다. "황송하옵니다. 소인이 빚을 진 관곡을 갚을 길이 없어 그 부자에게 양반을 팔아서 관곡을 갚았습니다. 하오니 이제부터는 저 건너 사는 부자가 바로 양반이옵니다. 그러하오니 소인이 어찌 양반 행세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군수는 이 말을 듣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 부자 상민이야말로 군자며 양반이오. 부자이면서도 인색하지 않으니 의로움이 있다 하겠소. 사람이 어려울 때에 급히 달려와 구해 주었으니 의 어려움을 급하게 여겨 구해 주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어진 마음을 가진 것이라 할 것이오. 이러니 그가 참으로 양반이라 하겠소. 하지만 비록 개인끼리 사사로이 양반의 신분을 사고 팔았으니 관가에서 인정하는 증서를 만들지 않으면 훗날 소송거리가 되기 쉬운 일이오, 그러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증서를 만들기로 합시다. 군수인 나도 그것을 인정하는 도장을 찍겠소."
"군수님의 너그러우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군수는 즉시 관아로 돌아가 그 고을 안에 사는 모든 양반들과 농사를 짓는 양민들, 그리고 공장이와 장사치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러 양반의 매매증서를 읽었다.
"건륭(乾隆) 십년 구월 모일에 증서를 만들었다. 관가에 빚진 천 석의 양곡을 갚기 위하여 양반을 팔기로 한다. 그 값이 천 석이다. 원래 양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글만 읽는 사람은 선비라 하고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대부가 된다. 덕이 있는 사람이면 군자가 된다. 무관은 서쪽 반에 서고 문관은 동쪽 반에 서는 까닭에 이를 양반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 원하는 대로 하나를 고르도록 하라. 그리하여 양반이 되면 나쁜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고 예부터 내려오는 좋은 뜻을 본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양반은 새벽 네시만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을 켜고 눈은 콧날 끝을 슬며시 내려다보고 무릎을 꿇고서 얼음 위에 표주박을 굴리듯이 술술 막힘 없이 내려 외워야 한다. 배가 고파도 참아야 하며 추운 것도 견디어내야 하며 입으로 가난하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머리에 쓰는 관은 반드시 소맷자락으로 쓸어서 바르게 쓴다. 손을 씻을 때 주먹을 쥐고 문지르지 말 것이며 양치질을 해서 입내음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인을 부를 때는 긴 목소리로 부르며 걸음을 걸을 때는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걷는 법이다. 글씨는 깨알처럼 잘게 써서 한 줄에 백 자씩 써야 한다. 손에는 돈을 만지지 말고 쌀값을 묻지 말아야 한다.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아야 하며 밥을 먹을 때에도 의관을 정중히 쓰고 먹어야 하며 맨머리로 먹어서는 안 된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양반이 지켜야 하는 법도가 따로 있다. 국물을 먼저 떠먹지 말아야 하며 물을 마실 때에도 넘어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며 수저를 놀릴 때에도 소리를 내어서는 안되며 냄새가 나는 생파를 먹지 말아야 한다.
술을 마실 때에는 수염을 적시지 말며 담배를 피울 때에는 불이 이지러지도록 연기를 들이마시지 말아야 한다. 속이 상하는 일이 있어도 아내를 때리지 말아야 하며 화가 난다고 해서 그릇을 집어던져 깨지 말아야 하며 주먹으로 아이들을 때리지 말고 종을 꾸짖을 때도 '죽일 놈'이라는 상스러운 말을 하지 말아야 하며 소나 말을 나무랄 때에도 그 주인을 욕하지 말아야 한다.
병이 나도 무당을 부르지 말며 제사 때에도 중을 불러다 제를 올리지 말아야 한다. 춥다고 화로에 손을 쪼이지 말며 말할 때에는 침이 튀지 않게 하며 소를 잡아먹지 말아야 하고 돈을 놓고 놀음을 하지 말아야 한다. 무릇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행실이 양반과 틀림이 있을 때에는 이 증서를 가지고 관가에 가서 재판을 할지어다."
이렇게 글을 쓴 증서에다 정선 군수가 이름을 쓰고 좌수와 별감도 증인으로 서명했다. 통인을 시켜 도장을 찍는데 그 소리는 커다란 북을 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도장을 찍어놓은 모양은 밤하늘에 별들이 널려 있는 것과 같이 빛났다. 호장이 이 증서를 다 읽고 나자 부자 상민은 한참 동안 슬픈 표정으로 있다가 말했다.
"도대체 양반이란 이런 것들뿐입니까? 제가 알기에는 양반은 신선과 같다고 하여 천 석이나 되는 양곡을 주고 산 것인데 썩 내키는 것이 없습니다. 좀더 이롭게 고쳐 써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군수는 증서를 다시 고쳐 쓰기로 했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에 네 종류의 백성을 만들었다. 이 네 가지 중에서 가장 귀한 사람은 선비인데 이를 양반이라고 하여 모든 점에서 이로운 것이 많다. 양반은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지 않아도 살수가 있다. 또 조금만 공부를 하면 크게는 문과에 오르고 작아도 진사 벼슬은 할 수 있다. 가난한 선비가 되어서 시골에 가서 살아도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으니 이웃집 소가 있으면 자기 논이나 밭을 먼저 갈게 한다. 또한 마을 사람들을 불러내어 자기 밭의 김을 먼저 매게 하는데 어느 누구든지 양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코로 잿물을 먹인다. 또한 상투를 붙들어 매고 수염을 자르는 등 갖은 형벌을 가하여도 감히 원망할 수 없는 것이니라."
부자는 이러한 증서의 내용을 귀 기울여 듣다가 질겁을 하여 말했다. "아이구 군수님 이건 너무 맹랑합니다. 저를 도적놈으로 만들 셈이란 말입니까?"하며 머리를 설레설레 젓고는 한평생 다시는 '양반'이란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반전 [兩班傳] (네이버고전문학사전, 2004. 2. 25.,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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