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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계 : 부르주아 계급에는 부의 증가의 경향이, 피지배계급, 노동자들에계는 비참의 증가의 경향
2 단계 : 소수의 부르주아 계급 지배계급과 다수의 피착취계급인 노동자계급의 대립이 사회혁명에 이름
3 단계 : 사회혁명이 노동자에 의해 성취되고 나면, 계급없는 사회, 착취 없는 사회인 사회주의가 도래한다는 것
2. 계급없는 사회의 도래
결론 1 : 노동자들이 투쟁에서 필승
착취자인 놀고 먹는 자들은 피착취가 없으면 굶어 죽는다. 반면에 노동자의 경우에는 그의 물질적 생존은 자기의 착취자에 의존해 있지 않다.
결론 2 : 노동자들은 계급 없는 사회를 수립
계급은 개인과 같지 않다. 프롤레타리아들 사이에 이해가 서로 상충하면, 그들 사이에 분열이 생겨 몇 개의 새로운 계급으로 나뉘어져 서로 계급적 투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새로운 사회의 새 통치계급)
마르크스의 결론인 계급 없는 사회가 온다는 예언은 그 논증의 전제들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계급투쟁 그 자체는 피압박자들 사이의 영구적인 단결심을 반드시 산출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3.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인가?
마르크스 자신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아직까지 증명하지 못하였다.
방만한 자본주의는 새로운 역사적 시대, 정치적 간섭주의 시대, 국가의 경제적 개입의 시대로 이양되어 왔다.
현대 민주주의 경제체제를 공산주의 혁명의 10대 강령과 비교하면
4. 모든 외국이민자들과 반역자들의 재산을 압수할 것 → 상당한 정도로 실천
3. 모든 상속권의 폐지 → 무거운 상속세에 의해 대체로 실현
6. 통신과 교통수단의 국가적 중앙통제 → 대부분의 <작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실현
7. 국가가 소유한 생산도구와 공장의 수와 규모를 늘릴 것 → <작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실현되었는데 좋은 것인지 의문의 여지가 있음
10. 모든 아동을 공립 학교에서 무료로 교육할 것, 현행 형태의 모든 아동의 공장노동을 폐지하 것 → 첫번째는 어느 정도까지 실현, 두번째는 지나칠 정도로 실현
4. 사상과 역사발전
마르크스의 예언은 도덕적 격려의 위대한 원천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사회주의 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참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비참한 세계가 영원히 계속되든가, 더 좋은 세계가 드디어 출현하든가, 두가지 가능성 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안이 반드시 여기서 예언된 사회의 도래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직접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기술의 개발일 수 도 있으며, 점진적 공학 즉 민주적 간섭을 위한 방법의 개선일 수 도 있다.
5. 마르크스의 사상과 유럽의 최근 역사
중부유럽과 동부유럽에서의 마르크스주의 2대 정당이라 할 수 있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영향은 대단했으나 사회의 변혁과 같은 과업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중부 유럽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분열은 러시아혁명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일종의 비합리적인 신앙을 가졌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그것에 대해 회의를 품은 보다 합리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분열이다.
대공황 말기에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노동자들과 유리되었고, 그들의 기회는 사라져 버렸다. 파시즘의 대두
제 9장 사회혁명
자본주의는 그 수가 점점 줄어드는 부르주아의 부의 증가와 그 수가 점점 늘어나는 노동계급의 빈곤의 증가를 초래한다는 가정. 이 전제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제외한 모든 계급은 사라지며, 양 계급 사이에 점증하는 긴장의 결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점점 더 계급의식화하며, 단결력이 강화된다.
이러한 긴장은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으로 귀결될 것
1. 두 계급론의 타당성
자본가는 불경기 때는 자기의 많은 동료를 쓰러뜨린다.
하류 중산계급에도 비슷한 운명이 가로놓여 있다.
소매상인, 은퇴한 소매상인, 수공업자, 소작농, 이 모든 사람들은 차츰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다.
마르크스의 관찰은 칭찬받을 만하기는 하지만, 결함이 없는 것도 아니다.
공업노동자 계급의 단결이 빈곤의 증가의 필연적 결과는 아니다. (사회혁명이 승리를 거둘 때까지는 비참한 사황이 개선될 수 없다는 가정에서 노동자들의 시도가 거듭 패배만 당하게 된다면)
부르주아, 대지주, 기타 지주들, 농촌노동자, 새 중산계급, 산업노동자, 천민 노동자 등 다양한 계급 구조가 나타날 수 있다.
2.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과 폭력의 문제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은 역사적 개념. 자본주의 역사시대로부터 사회주의 역사시대로의 급속한 전환을 가르킴. 두 계급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내란을 함축 (반드시는 아니지만 피하게 될 전망은 밝지는 않다.)
사회혁명은 완전한 정치적 권력을 쟁취하려는 프롤레타리아의 연합전선인데, 그 목적 달성을 위해 폭력이 필요할 때는 그 사용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며, 적대자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다시 확보하려는 어떤 노력도 강력하게 저지하려는 시도. 분명히 하나의 폭동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포퍼는 폭력혁명은 민주주의 수립을 그것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포퍼가 의미하는 민주주의는 “백성의 통치”라든가 “다수의 통치”와 같은 애매한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에 대한 공적 통제를 허락해 주며 그 통치자들을 피통치자들이 해고할 수 있게 하며, 또한 통치자들의 의사에 반하는 개혁을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피통치자들이 할 수 있게 하는 일련의 제도적 틀을 의미한다.
폭력의 사용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는 다른 경우는, 일단 민주주의가 성취된 후에 민주헌법과 민주적 방법의 사용을 파괴하는 행위에 대한 저항의 경우이다.
3. 사회혁명에 대한 두가지 해석 : 급진파해석과 온건파해석
급진파(공산당원)
모든 계급적 통치는 필연적으로 독재 즉 폭군이다. 참된 민주주의는 계급없는 사회의 수립에 의해서만, 필요하다면 폭력에 의해서 자본주의 독재체제를 전복시킴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다.
부와 빈곤이 점증한다는 전제로부터 사회혁명의 불가피성은 도출되지 않음. 반역사태가 불가피하다는 것 뿐인데 그러한 반역사태가 곧 사회혁명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온건파(사회민주당원)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제도 아래서도 어느 정도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개혁에 의해 사회혁명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지배계급이 승복하지 않으면 폭력은 불가피하다.
예언의 논증의 유일한 기초인 계급적 적대관계가 증가한다는 가정을 뒤집는다. 타협에 의해 성취되는 점진적 개혁이 자본주의 제도의 완전한 파괴로 귀결된다는 논리적 필연성이 없다.
사회혁명의 진화론적 해석은 마르크스 논증을 첫단계부터 마지막 단계까지 파괴하고, 역사주의 방법만 남는다.
4. 엥겔스의 전술적 교리와 마르크스의 예언
급진파와 온건파,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는 “폭력의 문제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르크스주의 교설 안에는 서로 연관된 두 가지 애매성이 존재
역사주의 방법에 토대한 폭력에 대한 애매한 태도 (폭력의 애매성)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에 관해서 말할 때 나타나는 애매성 (권력추구의 애매성)
이 둘은 역사주의 방법의 모호성과 마르크스주의 국가이론에 뿌리박고 있다.
엥겔스의 전술적 교리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움직여 갈 때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과정을 따라가는 것이 좋으나, 불리할 때는 폭력 사용을 사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 본래의 사상과 얼마나 다른가? 성공적인 노동계급의 운동이 자본가에게 가하는 점증하는 압력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 ?
5. 사회혁명 전술론과 민주정치의 원리
부르주아의 반민주주의적 반동행위를 그 교설과 그 교리의 전술이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내란이 발생하고, 패배와 파시즘으로 귀결될 수 있다.
엥겔스의 전술적 교리가, 폭력의 애매성과 권력장악의 애매성이, 일단 중요한 정당에 의해 채택되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그 주요 정당이, 다음과 같은 규칙으로 요약될 수 있는 기능을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다는 견해를 신봉할 때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지배자(정부)는 피를 흘리지 않고 피지배자에 의해서 교체될 수 있어야 한다.
두 가지 정부형태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 정부와 폭군체제
헌법의 민주적 성격을 위협하는 변화만은 꼭 배제해야 한다.
소수의 완전한 보호는 위법자들에게까지 확대되어서는 안된다.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제도적 틀을 짜는 정책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들에게 모두 반민주적 경향이 잠재할 수 있다는 가정 위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파괴되면 모든 권리들도 파괴된다.
민주주의는 폭력 없는 개혁을 허락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모든 합리적 개혁을 위한 말할 수 없이 값진 전투장을 마련해 준다. 그러나 민주주의 보존이 이 전투장 위에서 이루어지는 전투에 있어서 최우선 순위의 고려사항이 아닐 경우, 민주주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에 반대되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정책은 노동자들에게 민주주의를 의심케 하는 정책이라고 특징지울 수 있다.
모든 발생된 악에 대한 책임을 사람이 아니라 민주주의 제도에 돌려 비난하는 정책
국민에게 국가를 국민의 것이 아니라 통치자의 것이라고 교육하는 정책
모든 일을 개선하는 유일한 방법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라고 국민에게 설득하는 정책
그러나, 이것은 민주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인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도외시한다.
“누가 국가권력을 행사하느냐”하는 물음은 “어떻게 권력을 행사하느냐”하는 질문과 “얼마만큼 권력이 행사되는냐”는 질문에 비해서 별로 문제가 안된다는 것을 우리가 배워야 할 때가 왔다. 보다 평등한 사회에로의 진보는 권력에 대한 제도적 통제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
6. .마르크스주의 혁명운동의 한 모습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현실적인 위협이 증가하는 마당에 호언장담이나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정치적 투쟁에서 사용되는 혁명의 위협이나 정치적 파업과 같은 수단이 민주주의의 방어를 위한 것은 정당화되지만, 공격 무기로 사용되면 반대 진영에 반민주적 경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야 만다.
파시즘은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의 마지막 저항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파시스트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싸우지 않았다.
제 10장 자본주의와 그 운명
1. 자본의 집중과 비참의 증가
첫 단계의 가정들은 자본주의 경쟁법칙과 생산수단의 축적법칙이다. 이의 결론은 부와 빈곤의 증가법칙이다.
경쟁에 기인한 축적은
자본가들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본을 더욱 더 축적하고 집적 하지 않을 수 없다. → 노동자들이 생산성을 증가시키게 됨 : 경쟁, 축적, 그리고 생산성 증가 (모든 자본주의 생산의 근본적인 성향)
더 많은 부를 여러가지 종류의 자본가와 자본가 계급에 집적한다. 그리고 자본가의 수가 감소되는 자본 집중의 움직임이 나타난다. : 집적과 집중
비참의 증가 : 고용된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의 증가, 수와 강도에 있어서의 증가를 포함. 또한 “잉여인구” 혹은 “산업예비군”이라고 부른 실업자의 수와 고통의 증가도 포함
실업자의 기능은 자본가가 고용된 노동자로부터 이익을 얻어내려는 노력, 즉 그들을 착취하는데 도움을 줌으로써 고용된 노동자에게 압박을 주는데 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비참의 감소를 견디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축적의 메커니즘은 자본가에게 경제적 압박을 지속적으로 가하는데, 그가 거꾸러지지 않으려면 그 경제적 압박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유 때문에 “자본주의는 개선될 수 없고 오직 파괴될 수만 있다.”
방만한 자본주의에 대한 기술로서의 마르크스의 이러한 분석에 대해서는 별로 커다란 이론을 제기할 수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을 예언으로 간주하면 좀 문제가 있다. → 입법에 의해 간여할 수 있는 여러가지 수단들이 있다. (과세, 상속세, 독점금지법, …)
2. 잉여가치설과 착취의 문제
노동가치설 : 상품의 가치를 그것의 생산(혹은 그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평균치로 정의
잉여가치설 : 노동가치설의 범위 내에서 “자본가가 어떻게 자기의 이윤을 만들어 내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려는 하나의 시도. 생산품의 제 값보다 적게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것뿐.
노동자의 노동시간 : 그가 받는 임금에 상응하는 값을 생산하는데 바친 시간 + 자본가에게 가치를 생산해 준 데 바친 시간 → 임금 + 잉여가치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파는 상품은 노동자의 노동시간이 아니라, 그의 노동력 전체이다. (노동력의 가치는 그것의 생산이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평균치)
자본주의 착취의 기초는 노동의 높은 생산성이다.
착취가 정의롭지 못한 것은 노동자에게 그의 노동력의 대가로 “공정한 가격”이 지불되지 않는다는 사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력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가난한 반면에, 자본가는 노동력을 대량으로 사서 그것으로부터 이윤을 얻을 수 있을 만큼 부유하다는 사실에 있다.
포퍼의 비판의 세가지 요점
마르크스의 가치론은 착취를 설명하는 데 충분치 않다.
상품을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 그 생산에 필요한 시간을 알 수 없다.
자유경쟁 아래서 가치법칙에 통제력을 부여하는 것은 공급과 수요의 메커니즘이다.
마르크스는 독점을 예외로 보았는데 옳은 견해라고 보기 어렵다.
착취를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추가적인 가정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가치론은 군더더기임이 드러나다.
자유 노동시장과 만성적인 과잉노동 공급만 가정한다면, 착취현상을 설명하는데 필요 충분한다
마르크스의 가치론은 본질주의 이론, 즉 형이상학적 이론이다.
가격의 배후에는 무엇인가 있는데, 그것은 객관적이고 실재하는 참된 가치이고, 가격은 그것의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이 모든 생각은 플라톤의 관념론의 영향을 뚜렷이 보여 준다.
3. 저임금과 사회혁명
노동임금은 기아임금을 상회할 수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착취의 현상을 설명하려고 한 마르크스의 노력은 가장 큰 존경을 받을 만 하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관찰한 상태가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고는 변화되지 않는 영구적인 것이며, 그것은 차츰 더 악화되어 갈 것이라고 예언한 것은 잘못되었다.
방만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간섭주의의 새로운 체제(노동조합, 단체교섭, 파업 등)로 전환되었다.
4. 경기순환과 간섭주의적 정책
마르크스 분석의 커다란 의의는 그가 살던 시대와 우리가 사는 시대에까지도 잉여인구가 있다는 사실
포퍼는 마르크스의 잉여인구와 경기순환론 이론을 조금 수정하여 제시(경기순환론을 비판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기계를 생산의 단순한 확장을 위한 기계(고용의 증가를 가능케 하는)와 생산성을 강화하기 위한 기계(노동자를 불필요하게 만드는)로 구분
산업의 팽창 → 산업예비군(잉여인구)의 노동시장 흡수 → 노동임금 상승 → 노동자를 자유롭게 하는 종류의 기계들이 생산 → 고용 감소 → 내수시장 붕괴 → 산업예비군 증가 → 임금 하락 → 저임금에 따른 수지 개선으로 생산 시작 → 생산확장을 위한 기계 도입(저임금으로 인하여 생산성을 강화하는 기계는 아직 수지에 맞지 않음) → 고용확대 → ...
사회적 문제로서의 경기순환의 의의를 강조한 것은 마르크스의 위대한 공헌의 하나. 그러나, 마르크스가 경기순환 위에다 세우려 했던 예언은 비판받을 수 있다. 마르크스는 불황은 노동자들의 고통의 강도에 있어서 점점 악화되어 간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아무런 논증도 제시하지 않았다. 이는 주된 논점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통제되지 않은 자본주의는 연구하였으나 간섭주의는 꿈도 안꾸었다. 그러므로 그는 경기순환에 대한 체계적인 관여의 가능성을 연구하지도 않았다.
마르크스 시대 이후에는 세계 어디에서나 고용된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향상되어 왔다. 그리고 고용된 노동자의 실질 임금은, 불경기에는 임금보다 물가가 급격히 하락하기 때문에 증가하기까지 하는 경향이 있다.
5. 생산성 증가와 이윤율의 문제
축적은 자본가에게 강력한 경제적 압박을 가하게 되는데, 자본가는 자기가 망하지 않으려고 그 압력을 노동자들에게 넘겨 준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파괴될 수 있을 뿐 개혁될 수 없다. (이윤율은 하락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에서 논증)
상업자본 = 불변자본(부동자본) + 가변자본(임금자본)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만 이윤을 얻을 수 있다. 즉 임금자본에서만 이윤을 얻을 수 있다. 생산성 증가의 일반적 추세가 말해주는 것은 부동자본은 그 임금자본에 비례해서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총자본이 증가해도 그에 상응하는 이윤의 증가는 없다. 다시 말해서 이윤율은 하락한다.
자본가는 무엇 때문에 그가 싫든 좋든 노동자에게 떠넘기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경제적 압력 아래서 허덕여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의 수입이 떨어지지 않고 반대로 올라간다면 진짜 위험은 없다.
6. 제국주의론의 타당성 검토
팍스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 어린아이들의 노동은 마르크스가 예언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노년기의 특징이 아니라, 자본주의 유년기의 현상이다.”라고 했다.
마크르스와 엥겔스는 보조가설을 동원하여 비참의 증가법칙이 왜 실현되지 않았는가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이윤율의 하락추세, 그와 함께 비참의 증가는 식민지 착취의 영향, 보통 말하는 대로 하면 “현대 제국주의”에 의해 저지되었다는 것이다. 식민지 착취는 경제적 압력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본국의 산업 프롤레타리아보다 더 취약한 식민지 프롤레타리아에게 넘겨주는 방법이다.
엥겔스는 영국을 가리켜 “모든 나라 가운데서 가장 부르주아적인 나라”라고 개탄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체코슬로바키아,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그리고 미국 같은 나라들은 식민지 착취의 영향이 없었거나 적어도 그 가설을 뒷받침하기에는 그 영향이 아주 보잘 것 없는데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적 간섭주의가 노동자들에게 높은 생활수준을 확보해 주었다.
네덜란드, 벨기에와 같이 식민지를 착취하는 나라들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체코 등과 같이 식민지를 착취하지 않는 나라를 비교해 보았을 때, 산업노동자가 식민지 소유에서 이득을 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7.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전술적 운동
사회민주당원들은 비참의 강도가 증가한다는 이론은 조용히 내버리고, 모든 전략을 비참의 범위가 증가한다는, 즉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수적인 힘이 계속 증가한다는 가정위에 세워져 있다. 이것이 산업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유이다.
노동자의 수가 증가추세에 있다는 것을 어떤 통계도 보여주지 않는다.
민주적 노동자 정당의 존재는 농민이나 중산층을 대변하는 다른 정당과 타협하며 때로는 협력할 용의가 되어 있을 때만 완전히 정당화될 수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비참의 증가이론을, 노동자들의 일시적인 부르주아화의 원인이 일단 제거되면 노동자들의 비참의 범위와 강도도 증가하리라는 것을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그들의 정책에 “내적모순”을 크게 심화시켰다.
노동자들의 이런 저런 투쟁들은 실패할 수 없으며, 유일한 결과는 계급의식의 증가이다. 그러나 반대로 개선하는 투쟁이 성공한다.
노동자들의 처지를 직접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투쟁은 하되,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나기를 은근히 바란다. 결국 모든 합리적 논증을 적대시하는 신비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제 11장 예언에 대한 평가
1. 마르크스의 경기순환론의 목적
현대 사회의 경제적 추세에 관한 관찰로부터 예언적 결론을 도출하려는 그의 정교한 노력이 실패한 이유는 역사주의 그 자체에 있다. 즉, 우리가 역사적 추세같이 보이는 것을 오늘 관찰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일에도 같은 현상으로 나타날 것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역사적 추세, 생산수단의 축적과 노동생산성의 증가 추세는 우리가 문명을 지속하는 한 계속 되리라고 본다.
경기순환론은 어려운 주제라 긴 논의를 펼 의도는 없다. 그러나, 생산성의 증가는 경기순환론의 중요한 요소여서 이와 관련된 가능한 사태(시나리오)들을 기술하였다. (긍정적인/부정적인 사태들)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이루게 하는 유효한 장치로서의 자유시장의 제도가 왜 불황, 즉 과잉생산이나 과소생산을 막는 데 충분하지 못한가를 설명하는 이론, 다시 말해 시장에서의 매매행위가 인간행동의 원치 않는 사회적 결과로서 경기순환을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론, 마르크스의 경기순환론은 바로 이것을 겨냥하고 있었다. 매우 값어치가 있고 높이 평가될 만 하다.
생산성 증가 추세, 경기순환도 계속 된다. 이런 사태가 계속되면, 간섭주의적 경기순환대응책과 더불어 자유시장 체제에 대한 여러가지 제한조치가 대두한다. 이런 사태 발전은 경기순환이 방만한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초래할 요인들 가운데 하나라는 마르크스의 예언과 일치한다.
2. 마르크스 사상의 빛과 그늘
이렇게 크게 성공적인 중요한 예언을 놓고서는 역사주의의 빈곤을 말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
그를 성공으로 이끈 것은 역사주의 방법이 아니라 제도적 분석법임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자본가가 경쟁때문에 생산성을 증가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 경기순환론과 잉여인구론, 계급투쟁설 모두 제도적 분석에 의한 것이다. 이 분석들에 있어서 역사주의적 개념(역사발전 법칙, 단계 등)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반면에 역사주의적 결론, “발전의 필연적 법칙들”, “뛰어넘을 수 없는 역사의 단계들” 등과 같은 예언은 어느 하나도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되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에는 분명히 종교적 요소가 있다. 노동자들이 말할 수 없는 비참과 모멸 속에 빠져 있던 때에 마르크스의 예언은,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운동이 온 인류를 위해 마련하고 있는 위대한 미래와 거기에서 그들이 지니는 사명감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켰다.
마르크스의 신조 안에 있는 예언적 요소는 냉정하고 비판적 판단력을 추방해 버렸으며, 이성의 힘으로 우리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산산조각을 냈다. 남아 있는 것은 헤겔의 주술적 철학이며, 이제 열린사회를 위한 투쟁을 마비시키려고 위협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