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수 南仁樹 & 최삼숙 崔三淑
남인수 南仁樹
1918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했다. 처음 이름은 강문수(姜文秀)이다.일설에 의하면, 최씨 집안에서 태어나 처음 이름이 최창수(崔昌洙)였으며, 북한 인민배우 최삼숙이 그의 조카라고 하나 확실하지가 않다. 그의 학력은 1932년 진주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했음이 일제시대 학적부를 통해 확인된다.
진주지역에서의 '노래자랑 1등'소문이 서울에 까지 퍼진다.
1936년 가수로 데뷔할 때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 남인수다.
남인수의 친모 장하방은 처음 최씨 집안(진주시 미천면 미곡리)으로 출가하였으나 남편의 사망으로 진주 하촌동 드무실에 사는 강영태의 소실로 들어가 낳은 아이가 강문수(예명 남인수)라는 설.
1936년 김상화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눈물의 해협〉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고, 1938년 데뷔곡을 이부풍이 개사한 〈애수의 소야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약 20여 년간 타고난 미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물방아 사랑〉, 〈꼬집힌 풋사랑〉, 〈감격시대〉, 〈항구의 청춘시(靑春詩)〉,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청노새 탄식〉, 〈낙화유수〉, 〈남아일생〉, 〈일가 친척〉,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청춘 무성〉, 〈고향의 그림자〉, 〈고향은 내 사랑〉, 〈이별의 부산정거장〉, 〈청춘 고백〉, 〈추억의 소야곡〉, 〈산유화〉, 〈울리는 경부선〉, 〈무너진 사랑탑〉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약 1천 곡에 가까운 노래를 불렀고, "가요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개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인생의 애달픔, 유랑의 슬픔 등을 그린 노래였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은 시에론레코드에서 취입한 데뷔곡으로 큰 반응을 얻지 못했던 〈눈물의 해협〉의 가사를 바꿔 다시 부른 노래였다.
1935년 말에서 1936년 초 경에 시에론(Chieron)레코드사의 가수로 선발되었고, 1936년 2월 「눈물의 해협」으로 데뷔했다. 1937년 오케(Okeh)레코드사로 이적, 1938년 이부풍(李扶風) 작사, 박시춘(朴是春) 작곡의 「애수의 소야곡」으로 명성을 얻었고, 1943년까지 전속가수로 130여 곡을 발표했다. 한편 1938년 발표된 「기로의 황혼」은 치안방해의 명목으로 가두연주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는데, 1965년 월북작사의 이유로 방송금지곡 1호로 지정되었다.
1942년 「강남의 나팔수」(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편곡)를 비롯해 조선군보도부(朝鮮軍報道部)에서 지원병 제도를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영화 「그대와 나[軍と僕]」(감독 허영)의 동명 주제가인 「그대와 나」(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편곡) 등을 불렀다. 태평양전쟁 말기 음반제작이 중단된 1944년 이후로는 약초(若草)가극단 등에 소속되어 무대에서 활동했으며, 1944년 9월 부민관에서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의 「성난 아시아[怒りの亞世亞]」에 출연했다.
해방전후의 수많은 이념적 갈등....대구 사범학교 출신이었던 친형 '최창도'의 월북문제로 국가보안법의 대상자가 되기도 했으며, 여순 사건을 배경으로 한 노래 "여수야화"(1949)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다.최창도의 딸은 1970~80년대 '북한의 이미자'라 불렸던 최삼숙. 그리고 최삼숙의 딸은 2016년에 발생한 '류경식당 종업원 집단 탈북 사건' 의 명단에 이은경으로...
광복 이후 음반 제작이 많아, 여러 악극단에서 무대공연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음반 제작이 재개된 1947년 이후 「가거라 삼팔선」 등을 불렀고, 1948년에는 아세아(Asia)레코드사를 통해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1949년 발매된 「여수야화」의 경우 정부와는 다른 입장에서 ‘여순(麗順)사건’을 다루어 판매금지를 당했다. 6·25 전쟁 중에는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 소속으로 군 위문활동을 했다. 이후 오리엔트(Orient)레코드사를 비롯한 다수의 음반회사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 「추억의 소야곡」 등 다수의 곡을 발표했다. 1957년 대한레코드 가수협회를 창설해 초대 회장이 되었고, 1960년 전국공연단체연합회 회장, 1961년 한국무대예술협의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인기만큼이나 스캔들도 많았다. 반듯한 용모를 가진 전형적인 신사 스타일...판소리 명창이자 민속무용가였던 공옥진과는 동거한 적이 있음이 밝혀졌으며, 월북해서 사망한 프로듀서 김해송의 아내이자 김시스터즈의 엄마였던 가수 이난영과는 유부남이었지만 사실혼관계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진주와 목포를 오가는 '유명 미망인과 유부남의 부적절한 애정행각'에 대해 연애금지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고의 '혈서지원' 등 친일 가요 ,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여러편의 영화주제가 등을 불러 친일 인명에 오르기도...
1962년 6월 26일,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의 장례식엔 애수의 소야곡이~~~
묘소는 경상남도 진주시 하촌동에 있는 진주강씨 묘역에 있다.
남인수 애수의 소야곡
https://www.youtube.com/watch?v=wpCItL4dX_o
최삼숙 崔三淑
1951년 6월 15일 개성에서 최창도의 딸로 태어났으며, 최창수(남인수) 의 조카딸. 현재 최삼숙은 평양 동대원구역 신리동에 거주하는게 확인되었다.
평양방직공장에서 방직공으로 일하면서 예술 소조원으로 활동하다가 전국노동자예술축전에서 1위로 입상, 1971년 영화 및 방송음악단에 가수로 입단했다.
이후 70~80년대 긴 전성기를 누리며 북한 최고의 여가수라는 명성을 지녔었다. 물론 그 시기동안 인기를 끈 가수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최삼숙은 활동기동안 2800여곡을 독창곡으로 형상화했고 북한 영화음악 부문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다.
당시 북한 영화 주제가의 절대다수를 차지했으며, 90년대 들어 새로운 가수들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90년대까지 영화음악에서 우위를 차지한 유명가수였다.
이 당시 태동한 보천보전자악단도 최삼숙의 노래들을 많이 커버했다.
가족 : 배우자 이철민 (1947년생, 원유공업부 소속) 과 딸 이은경( 2023년 이지안으로 개명)
1982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1995년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 성악지도교원으로 발탁된게 알려졌다. 그리고 아무소식 없다가 2015년 추억의 노래에 출연했다.
그리고, 2016년 그녀의 딸 이은경(1979년생)씨가 해외 북한식당 종업원으로 근무했다가 집단으로 탈북한 일원 중의 한 명임이 드러났다.
아 내조국(1985, 영화 '은비녀' 주제가)
https://www.youtube.com/watch?v=vnu1UpXvXkA
대표곡
최창도 부부는 남한에 두 딸을 두고 월북하여 북에서 딸(최삼숙)과 아들을 두어 3녀 1남의 자녀가 있다.
그의 맏딸은 프랑스로 이주, 1990년대 북한을 방문하여 북의 부모와 북의 형제를 상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