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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행운의 법칙 스크랩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김박사 추천 0 조회 59 08.08.01 22: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설교 뱅크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빌립보서 2:1~11

<서론 짱-예수님의 복=인격적의 복=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한 자-매우 중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소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운명은 그 사람의 소원에 따라 결정됩니다. 무슨 소원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인격이 형성이 됩니다. 고상한 사람은 고상한 소원을 가지고 살고 저속한 사람은 저속한 소원으로 일생을 삽니다.

우리 마음속에 저마다 다 소원이 있는데 그 소원은 복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자기 자신에 대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슨 복을 받아야 되느냐? 그리스도의 복을 받아야 됩니다. 그리스도인다운 복, 그리스도가 받은 복을 내가 받을 때 바로 이 복이 그리스도인다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복받은 분으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받으신 분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가장 복을 많이 받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오 성자 예수여! 그 복을 내게 주소서. 오 성자 예수여! 그 은혜를 내게 주소서. 주께서 받으신 복을 내게 주소서." 이 소원을 갖는 것이 복이고 그리스도인다운 소원입니다.

예수님이 받은 복이 무슨 복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입니다. 그 복을 인격적 복이라고 말합니다.


지상에는 두 가지 복이 있습니다. 인격적인 복과 소유의 복이 있습니다.

소유의 복은 물질이나, 명예, 재산, 학위 등을 많이 갖는 복인데 이런 복받은 사람을 우리는 성공한 사람이라 말합니다.

인격의 복은 삶으로 얻는 복입니다. 마음으로 얻는 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 위대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습니다.

소유의 복을 받으면 남들이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인격의 복을 받으면 존경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 역사 속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받는 복을 받은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인격적인 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인격에 대한 복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이 끝날 때 소유는 다 떠납니다. 재산도 떠나고, 명예도 떠나고, 물질도 떠나는데 인격적으로 받은 복만 하늘나라까지 이어집니다. 죽은 후에도 남아있는 복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소유의 복이 없었습니다. 그는 물질을 가진 것도 아니요, 집을 가진 것도 아니요, 명예를 가진 것도 아니고 아무런 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격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은 이후에 죽은 것이 아니라 역사속에 길이 살아서 그 복을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보이시면서 "너희도 그 복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와서 소유의 복을 받지는 않습니다. 소유는 세상에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인격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받은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복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복은 마음에 담아 있습니다. 인격의 복은 마음에 담습니다. 세상의 복은 우리가 손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의 복은 마음에 담습니다.

성자는 성자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요, 악인은 악인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인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요, 악마가 악마인 것은 악마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수님이 되신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 최고의 신앙생활이요, 최고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독론을 가장 정확하게 담아놓은 헌장이 빌립보서 2장 5-11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배경설명>
빌립보는 마게도냐 왕 빌립이 자기 이름을 따라 빌립보라 불렀습니다.
이 지역은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고 그들의 공신들, 특히 퇴역 장성들을 위하여
특혜를 주었던 지역으로서, 많은 군인 가족들이 살았던 특수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도 상류사회를 이뤄 특히 염색술의 발달로 무역상들이 왕래하
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졌던 한 여인이 바울과 그 일
행을 영접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여인의 집이 바로 빌립보 교회의 모체
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그 여인의 이름이 루디아라고 하였습니
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전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많은 헌금으로 바울의 쓸 것을 도왔던 교회이었습니다.(빌4:15)
바울이 투옥되면서 감옥에 있는 바울을 위하여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어 그를 돌
보게 한 교회이기도 합니다.(빌2:25)
그러나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동안, 빌립보 교회에 불협화음이 생겨나기 시작하
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투옥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부정적으로 보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되지 못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권면하는 글을 보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서로 싸우고,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갈등이 있을 때 "너희가 화목하게 살기를 원하느냐, 너희가 하나 되기를 원하느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

<1절 해석>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 하나가 되기 위한 4가지 요소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한 네 가지 요소를 먼저 열거 하였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는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과 자비를 말합니다.

본문 2:1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 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

1)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하여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권면이란 말은 격려라는 뜻입니다. "권면"이란 단어는 "곁에서 부른 다"는 말에서 온 단어입니다. 격려하고 용기를 가지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임직식을 할 때 소위 "권면"의 순서가 있습니다. 장로로, 권사로, 혹은 목사 로 임직할 때 임직자를 위한 권면의 순서가 있습니다. 권면은 임직하는 사 람에게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말씀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시면서 "내가 정녕 너와 함 께 있겠다"고 권면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우시고 그에게 권면해 주셨습 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권면 해 주셨습니다. 권면은 믿음이 약하거나 시험에 빠진 성도들에게 대하는 태 도입니다. 이처럼 교인들 간에도 서로 주님의 말씀으로 권면해 주어야 합니다. 구역 장은 구역에 속한 성도들에게 말씀으로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칭찬과 격려 를 잘 해주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입니다.

2)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하여서는 사랑의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영육간에 고통에 빠진 자들에게 사랑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고후1:3 이하에 보면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고난 가운 데 있는 자들에게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 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고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3-4)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다른 성도를 위로하는 것은 성도들을 하나로 묶는 끈과 같습니다. 병중에 있는 성도들이나 상을 당한 가정을 찾아가서 위로하는 것은 성도들 을 하나로 서로 연결시키는 끈이 됩니다. 웃는 자와 함께 웃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 위로가 됩니다. 우리교회 손범수 집사님이 진행을 맡아보시는 "사랑의 리퀘스트" 프로그램을 보면 우 리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소년 소녀 가장, 고치기 힘든 병에 걸려 고생하는 환자들, 지체 부자유한 장애인, 고아와 소외된 노 인들, 위로의 대상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3)교회가 하나되기 위하여서는 성령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떠난 인간적인 교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성령을 떠난 인 간의 교제는 파당을 조성할 뿐입니다. 축도를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성령의 교통, 교제하심"을 말합니다.

4)교회가 하나되기 위하여서는 긍휼과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이 긍휼과 자 비는 다른 성도에 대한 관심을 말합니다. 긍휼과 자비를 넓은 의미로 사랑이 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과 위로, 교제와 사랑은 바로 교회가 하나되는 요소들입니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피차 겸손하게 성도들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2절 해석>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마음을 같이하라 해석>
<같은 마음>을 품으려면 생각의 구심점이 같아야 합니다. 원(圓)을 그릴 때 구심점이 같아야 한 원을 그릴 수 있습니다. 구심점이 다르면 하나의 원이 그려지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구심점을 맞추어야 하겠는가(예-콤퍼스로 원을 그림)?

예수 그리스도께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다 마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은 생각이 같아야 마음이 같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각이 다르면 마음도 달라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다르면 마음이 같아질 수 없습니다.

<같은 사랑 해석>
<같은 사랑>을 나누려면 사랑의 대상이 같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상이 없는 사랑은 관념적 사랑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대상이 없는 사랑을 말할 때가 많았습니다.
성도의 사랑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마음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구심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성도를 대할 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런 것이 없으면 사랑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랑을 품으려면 희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도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들이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관념적 사랑에 머물 뿐입니다.
같은 마음, 같은 사랑을 가지려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

<한마음을 품어 해석>
교회에서 봉사생활은, <한 마음을 품고> 해야 합니다.
여기 "한 마음"이란 말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한 마음" 이란 <하나된 마음>이란 뜻입니다.

<하나된 마음>이란 같은 생각은 아닙니다.
생각이 같아서 하나 된 마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생각들은 다 각각 다르지만, 하나된 마음을 만들어내라는 뜻입니다.
"한 마음"이란 내 생각과 같은 것이 아니고, 내 뜻과 같은 것도 아닙니다.
내 마음과, 내 생각과, 내 뜻이 다 다르지만 "한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마음을 품고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의 의를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다툼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실현함에 있어서는 허영으로 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 성도들간에 생각들이 다르고, 뜻이 다르더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세상을 이기시고,
예수님의 마음이 세상의 모든 마음을 한 마음으로 만드는 유일한 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3절 해석>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하였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으로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다툼>이란 말을 원문에는 에피데이안( )인데 KJV 에서는 contention 이라고 번역하였고, RSV 에서는 selfishness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Contention 이란 "말다툼" "논쟁"이란 말인데, 모두 자기 본위의 생각대로, 말다툼이나 논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 본위의 이기적인 생각대로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각각 남을 자기 보다 낫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일을 하다 보면, 성격을 알 수 있는데 무엇을 하면서도 겸손하게 자기를 숨기면서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자기를 들어내면서 다투면서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물론 잘하자는 뜻에서 하는 말들이겠지만, 유독 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맡으면 자기 생각대로만 하려는 사람들, 그래서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거룩한 공회인 교회에서는 무엇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진실함으로 해야 합니다. 남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서로 서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4절 해석>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절 해석>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한 마음을 품을 수 있는 비결은 어떤 특정한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맞추라는 뜻입니다.

자기의 생각이 다 있지만, 예수의 마음으로 자기 생각을 맞추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일입니다.
이것을 끝내 이루지 못해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가고, 신앙이 성숙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 점점 자기 생각이 줄어들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 생각과 내 주장이 그리스도의 마음과는 관계가 없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하
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매우 중요>
*** 본문외에 예수님의 마음 - 온유, 겸손, 사랑, 용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면에 있어서 본이 되시고 모델이 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그 본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11:29)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나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를 하는데서 예수님의 모범을 배워야 합니다. 골3:13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본문 빌립보서에서는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것은?

==========

<6절-8절 해석>
6절-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절-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절-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첫째, 겸손한 마음입니다.
(6절-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6절-"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와 "자기를 낮추시고-8절" 이것이 겸손입니다. "종의 형체를 가져-7절" 이것은 섬김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8절" 이것은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나실 때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말구유에 나셨습니다. 사실 때는 겸손에 바탕을 두고 섬김으로 사셨습니다. 마지막 죽을 때는 십자가에 달려서 만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마음이 무슨 마음입니까? 겸손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예수님의 생애는 겸손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실 때 목수의 아들로 말구유에 나셨습니다(마 13:55).
예수니은 머리둘 곳이 없는 가난한 일생이셨습니다(눅 9:58)
예수님은 천대받는 나사렛 출신이었습니다(요 1:46).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눅 7:34).
예수님은 학력이 없었습니다(요 7:15).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요 5:30).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신다고 했습니다(요 5:30).
예수님은 겸손하게 나셨고 겸손하게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내 마음에 품는다면 이 세상을 사는데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계곡이 깊어야 물이 많이 고입니다. 온갖 산속의 보화는 계곡 깊은 곳에 있습니다. 빈그릇이라야 물이 담깁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 하늘의 보화가 쌓입니다.(중요).


이 세상에서 감사하며 사는 자가 누구입니까? 겸손한 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마음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사는 겸손한 자만이 맛볼 수 있는 은혜입니다.

---------
⇒ 낮아질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 자기 관리를 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입니다.
⇒ 이 능력은 교양과 교육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 이 능력은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붙잡힘을 받을 때 가능합니다.
⇒ 성령은 스스로를 포기할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 성령은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쫓는 구습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 성령은 우리의 속 사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도록 합니
다.
⇒ 그 나라의 영광스러움을 보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게 합니다.
⇒ 그러기에 스스로를 낮추게 만듭니다.
⇒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스스로 자기를 낮출 수 없습니다.
⇒ 스스로 자기를 낮추는 마음!

바로 그 마음이 예수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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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절-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卑下)=겸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꼭 같으신 분으로 어디까지 낮아지셨는가를 말 씀하고 있습니다.

1)하나님과 동등 됨을 포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됨을 포기하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2)사람 가운데서도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섬기셨 습니다.

3)사람이 되시어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4)죽으시되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유대인에게는 저주받은 자의 표지였고, 이방인에게는 모든 형벌 중 가장 가혹한 것으로 중죄인이나 노예들에게 행했던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 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마음은 "사람들"과 같이 되는 마음입니다(즉, 섬기는 종의 마음입니다).
(7절-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말씀이 육신화 되었다고 합니다.
말씀이 육신화 되었다는 것은 말씀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현장
의 사람들에게 생활 속으로 들어와 작용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예수는 약한 사람들을 도왔다" "예수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
들 편에 서서 일을 하였다"고 그렇게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좀더 엄밀히 말하면, 예수는 약한 사람들을 도운 것 이라기 보다, 예수
는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일한 것 이라기 보다, 바로 약자가 되었고, 바로
힘없는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죄인을 구하려고 오신 예수는 바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입니
다.
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인들과 같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죄인들을 멀리 하지 않고, 죄인들 집에 들어가 죄인들과 같이 먹고 잤다
는 말입니다.


======
예수님은 그 마음이 사랑이셨기에 남을 인정하고 그리고 섬기는 종을 다른 사람을 받들어 주셨습니다.
교만은 섬김을 받으려하고 겸손은 섬기려 합니다. 겸손은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려고 즐거움으로 종의 멍에를 맵니다.
주님은 섬김으로 사셨습니다. 섬김은 남을 위해주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가는 곳마다 섬깁니다. "저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도와줄까" 이런 생각을 갖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마음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자기를 희생하는 마음)이었습니다.
(8절-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버립니다. 예수님의 복이 어디 있었습니까?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복을 받기 원한다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하나의 씨앗이 싹을 내기 위해서 껍질을 벗습니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해 자기 꽃잎을 떨굽니다. 열매는 씨앗이 되기 위해 스스로 썩습니다. 애벌레는 나비가 되기 위해서 비단으로 된 자기 무덤을 뒤에 남깁니다. 새로운 삶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희생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자기를 낮추는 겸손, 섬김, 순종, 희생의 마음은 자기를 비우는 별세의 마음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님 마음이 내 마음이 됩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복이 무슨 복입니까? 예수님 인격이 내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매우중요)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복은 예수님의 인격을 담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이 귀히 여기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귀히 여기시는 자는 축복들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회사에 가서도 귀히 여김을 받는 존재가 되십시오. 귀중히 여김을 받는 자녀가 되십시오. 귀중히 여김을 받는 남편과 아내가 되십시오. 섬기는 자, 겸손한 자, 자기를 희생하며 사는 자를 귀중하게 여깁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믿고 누리게 된 구원이 우리 편에서는 값없는 선물인 은혜이지만, 하나님 편에 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나무에 매달려 죽게하신 엄청난 희생이 치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희생의 정신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가급적 자기를 희생시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3D 기피 현상이 초래된 것입니다.

요즘 회사나 일터에서 희생정신을 이야기하면 그는 전근대적인 사람으로 따돌려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할 말이 있습니다.

『아무런 대가를 치루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Ministry that costs nothing accomplishes nothing〕 (J.H. Jow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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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을 입은 몸이었기에 치욕의 십자가를 앞에 두고는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내 원대로 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전적으로 아
버지의 뜻에 복종하였습니다.
즉, 성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낮추고,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이 된 것은 바로 성부 하나님
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게 한 것은 성부 하나님이었습니다.
전적으로 맡기고 사는 마음!
이것이 예수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서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 맡기지 못하고 사는 삶입니다.
예수의 사람들이라고 하면서도 예수의 마음으로 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
로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예수의 마음으로 한다는 것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입니다.
⇒ 죽기까지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이란 말입니다.
⇒ 말씀대로 포기하지 않고 충성되게 자신을 지켜 나간다는 의미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기가 그렇게 어려워들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때때로 나의 생각과 반대인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름을 남기고 싶은 경우들 때문에 말씀대로 순종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화>
어느 성악을 전공하는 분의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이 소프라노의 음역을 가진 크리스천 청년이 미국 유학 중이었습니다.
주임 교수 밑에서 지도를 받는데, 그 교수의 말이 교회에 가는 것은 좋은데,
성가대를 하지 말라고 하더랍니다.
찬송가와 같은 음역이 낮은 노래를 부르면 다듬었던 목소리를 버리게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유명해지려면 교수의 지시대로 따라야 하겠는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 형제는 일찍 가정에서부터 신앙교육을 받은지라, 고민 고민하
다가 결국 그 지도교수 밑에서 지도를 못 받을지라도, 내가 어떻게 성가대를 포
기할 수 있으랴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 교수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없다해도 주일에 성가대에서 찬송을 부르지 말라
는 것은 수용할 수 없습니다" 결국 교수와는 헤어졌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눈물이 나더랍니다.
마음에 갈등도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된 지위였지만, 스스로 자기
를 낮추어 사람들이 되었는데...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 스스로를 말씀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부흥 집회시 특송 순서를 맡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불렀던 감정과는 다르게 신앙적 고백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눈물이 나는 것을 참아가면서 자신이 은혜의 감격 속에 불렀습니다.
온 회중이 눈물 바다가 되고 큰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그에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내용인 즉, 전에 지도 받았던 교수보다 더 명성이 높은 교수로부터 한번 보자
는 청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 교수 밑에서 다시 지도를 받아 유명한 오페라 가수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얘기입니까!
오늘도 유명해지기 위하여 예수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전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도리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게 하십니다.

<9절-11절 해석-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심>

9절-이러므로 하나님이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절-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절-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예수 그리스도의 승귀(昇貴)
그러나 이렇게 겸손해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높여 주셨다 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어 주셨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여주셨습니다(9절).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게 하였습니다(10절).

하늘 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3)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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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최고의 복이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는 복입니다. 그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 복은 자기를 비운 자에게 줍니다. 자기를 비웠다는 말은 자기를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죽였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자기를 비운만큼 주님의 마음이 담겨져서 그 인격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 자기 감정, 자기 생각, 자기 이기적인 것을 다 비워야 됩니다.

주님의 마음(겸손, 섬김, 희생)을 담으면 겸손해집니다. 섬깁니다. 늘 감사합니다. 그리고 희생적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봉사합니다. 이때 그 인격은 존경받고 귀히 여김받는 인격이 될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앞의 설교 내용 요약-짱>

예수님이 받은 복이 무슨 복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입니다. 그 복을 인격적 복이라고 말합니다.


지상에는 두 가지 복이 있습니다. 인격적인 복과 소유의 복이 있습니다.

소유의 복은 물질이나, 명예, 재산, 학위 등을 많이 갖는 복인데 이런 복받은 사람을 우리는 성공한 사람이라 말합니다.

인격의 복은 삶으로 얻는 복입니다. 마음으로 얻는 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 위대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습니다.

<1절 해석>
** 하나가 되기 위한 4가지 요소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한 네 가지 요소를 먼저 열거 하였습니다.

1)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하여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2)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하여서는 사랑의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영육간에 고통에 빠진 자들에게 사랑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3)교회가 하나되기 위하여서는 성령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4)교회가 하나되기 위하여서는 긍휼과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2절 해석>
<마음을 같이하라 해석>
<같은 마음>을 품으려면 생각의 구심점이 같아야 합니다. 원(圓)을 그릴 때 구심점이 같아야 한 원을 그릴 수 있습니다. 구심점이 다르면 하나의 원이 그려지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구심점을 맞추어야 하겠는가(예-콤퍼스로 원을 그림)?

예수 그리스도께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다 마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같은 사랑>을 나누려면 사랑의 대상이 같아야 합니다. 성도의 사랑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주님도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들이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된 마음>이란 같은 생각은 아닙니다.

내 마음과, 내 생각과, 내 뜻이 다 다르지만 "한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마음을 품고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의 의를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3절 해석>
***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

Contention 이란 "말다툼" "논쟁"이란 말인데, 모두 자기 본위의 생각대로, 말다툼이나 논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 본위의 이기적인 생각대로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각각 남을 자기 보다 낫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매우 중요>
*** 본문외에 예수님의 마음 - 온유와 겸손, 사랑, 용서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11:29)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말씀하셨습니다.
골3:13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6절-8절 해석>
***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7절-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절-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첫째, 겸손한 마음입니다.
(6절-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6절-"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와 "자기를 낮추시고-8절" 이것이 겸손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마음은 "사람들"과 같이 되는 마음입니다(즉, 섬기는 종의 마음입니다).
(7절-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종의 형체를 가져-7절" 이것은 섬김입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이 사랑이셨기에 남을 인정하고 그리고 섬기는 종을 다른 사람을 받들어 주셨습니다.
교만은 섬김을 받으려하고 겸손은 섬기려 합니다. 겸손은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려고 즐거움으로 종의 멍에를 맵니다.
주님은 섬김으로 사셨습니다. 섬김은 남을 위해주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가는 곳마다 섬깁니다. "저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도와줄까" 이런 생각을 갖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마음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자기를 희생하는 마음)이었습니다.
(8절-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에 죽기까지-8절" 이것은 희생입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자기를 낮추는 겸손, 섬김, 순종, 희생의 마음은 자기를 비우는 별세의 마음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님 마음이 내 마음이 됩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복이 무슨 복입니까? 예수님 인격이 내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매우중요)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복은 예수님의 인격을 담는 것입니다.


<9절-11절 해석-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심>

9절-이러므로 하나님이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절-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절-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예수 그리스도의 승귀(昇貴)
그러나 이렇게 겸손해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높여 주셨다 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어 주셨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여주셨습니다(9절).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게 하였습니다(10절).

하늘 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3)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11절).

=========

<결론>
최고의 복이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는 복입니다. 그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 복은 자기를 비운 자에게 줍니다. 자기를 비웠다는 말은 자기를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죽였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자기를 비운만큼 주님의 마음이 담겨져서 그 인격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 자기 감정, 자기 생각, 자기 이기적인 것을 다 비워야 됩니다.

주님의 마음(겸손, 섬김, 희생)을 담으면 겸손해집니다. 섬깁니다. 늘 감사합니다. 그리고 희생적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봉사합니다. 이때 그 인격은 존경받고 귀히 여김받는 인격이 될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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