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 모둠 선정 [고려왕조] 5 대 중요 사실
우선순위 |
중요 사실 |
선정 이유 |
1 |
936 |
후삼국 통일 |
궁예를 몰아낸 뒤 추대 형식을 빌려 왕위에 오른 왕건이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그 후 왕건은 대내외 안정을 이룬 뒤 그 힘을 바탕으로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 하였다. 그 후 왕건은 발해가 멸망 하였을 때, 고구려 계 유민을 비롯한 많은 이들을 포용하고 우대하였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이룩한 신라의 통일보다 더 발전적인 민족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
2 |
960 |
광종의 개혁 정치 |
광종이 즉위 했을 때는,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호족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취했던 혼인 정책 때문에 왕권이 불안하고, 호족의 세력이 강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광종은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과거제도를 시행해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 하였다. 이로 인해 고려는 이후의 성종 때 이르러 통치체제를 이룩할 수 있었다. 광종의 개혁은 이 후 고려의 문화적 정치적 안정의 기반이 되었다. |
3 |
1135 |
묘청의 난 |
이자겸의 난 이후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세력과, 묘청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 세력 간의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서경에서 대위국이란 나라를 세우고 난을 일으켰으나 1년 만에 진압 되었다. 묘청의 난은 단순한 난이 아니라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다. 신채호 선생은 이 싸움에서 묘청이 졌기 때문에 조선사가 진취적이고 독립적이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묘청의 난의 거시적으로 봤을 때 고려시대의 최고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
4 |
1170 |
무신정변 |
묘청의 난 이후 문벌 귀족 지배 체제의 모순은 더욱 깊어졌다. 지배층은 이와 같은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정치적 분열을 거듭하였다. 의종 역시 측근 세력을 키우면서 이들에 의존하고 향락에 빠지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고, 문신 우대와 무신 차별에 따른 무신들의 불만이 커졌다. 여기에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 받지 못한 하급 군인들의 불만도 고조 되고 있었다. 이러한 지배 체제의 모순이 정치적으로 폭발한 것이 무신 정변이다. |
5 |
1251 |
팔만대장경 완성 |
국보 제 32호로 지정된 팔만대장경은 초조대장경과 속장경이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된 뒤 1236년(고종 23) 당시의 수도였던 강화에서 시작하여 1251년 9월에 완성되었다. 팔만대장경은 몽고 침입기에 국민의 힘을 모으기 위해 조판되었고, 지금까지도 국보 제32호로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문화재라는 것에 의의가 있다. |
※ 다음 발표
가. 발표자 : 신동화
나. 범 위 : 조선왕조의 성립으로부터 양란 발발까지
다. 제 목 :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의 창제부터 반포에 이르기까지
라. 주요 내용(100字이상) :
훈민정음은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큰 유산입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함으로써 백성들이 보다 쉽게 글로 의사소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그는 한자 사용을 고집하는 권력층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반포하는 추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음 발표에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와 훈민정음 반포를 추진한 모습에서 공동 삶의 원리를 알아보겠습니다.
1. 발표 범위 : 제 5장 고려왕조
2. 발표 주제 : 무신들의 반란은 필연인가?
3. 관련 연표 :
연월일 |
한국사 |
세계사 |
비고 |
956 |
노비안검법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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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8 |
과거제도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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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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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의 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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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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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제국 탄생(~1806) |
1019 |
귀주대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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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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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투르크 제국 건국 |
1107 |
윤관, 여진정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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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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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 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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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
이자겸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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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5 |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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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0 |
무신정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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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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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마쿠라 막부 성립 |
1198 |
만적의 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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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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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 몽고 통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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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 |
몽고의 제 1차 침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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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0 |
삼별초의 대몽항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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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 |
고려 멸망, 조선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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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무신들은 문신들과 같이 고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치주의' 사회인 고려의 벽에 갇혀 사회적으로 열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군인들은 군인전을 받지 못했고 갖고 있던 토지마저도 관리들의 녹봉을 위해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당시 현실을 보면 그들의 반란은 자신들의 명예와 삶을 되찾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신정변으로 인해 고려의 지배권이 문신에서 무신들의 손으로 넘어간 것을 보면, 무신들이 문신들보다는 하위에 있었지만, 응집력은 무신들이 더 뛰어났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뒤, 무인들의 시대가 왔고 반대로 문신들은 무시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무인정권도 결국 막을
내리게 되는데요. 이는 문신들과 일부 무신들이 최충헌을 타도하기 위한 계략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저는 무신과 문신을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관계가 아닌 오늘날 여당과 야당으로 봅니다. 그들은 서로의 정치적 견해가 다르고 지지하는 사람이 다를 뿐, 결국 이 나라를 잘 살게 하려고 정치에 뛰어든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서로 헐뜯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깎아내리다가는 고려처럼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정당한 비판을 통해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박연숙 : 고려인의 자주 정신과 항몽 의식의 관점에서 무신정변이 시사하는 바를 밝히세요
삼별초는 강화도, 진도, 제주도의 순으로 근거지를 옮겨가며 끊임없이 몽고에 저항하였다. 삼별초는 고려 무인들의 몽고에 대한 항쟁 의식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신정변을 본다면, 실패할 수도 있었던 무신정변이 성공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무인들의 끈기와 의지, 그리고 저항정신이 바탕이 되어 무신정변 또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항상 정치적, 경제적으로 무신들은 문신들에게 뒤쳐져 있었고, 존중받지 못했고, 고려에서의 그들이 설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상황을 보고만 있지 않고, 자신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문신들만을 위한 고려사회에 저항한 끝에 무신 정권이라는
값진 성과를 얻었다. 이를 통해 그들의 자주성 또한 엿볼 수 있다.
고려인의 자주 정신과 항몽 의식의 관점에서 무신정변이 시사하는 바를 밝혀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