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永平府部雜錄 (柳城)
《水經注》:無終,柘水南逕,燕山上懸,巖之側有石鼓.去 地百餘丈,望若數百石囷,有石梁貫之.《水經注》言:右北平西北百三十里有無終城,亦非也. 攷右北平郡,前漢治平剛,後漢治土垠.酈氏所引. 《王充論衡》同《黃氏日鈔》,曰:此事每
載不同要,皆野人相承之妄言耳,即使二事偶同.而 太史公所述:本無其地,今必欲指一卷之石以當之,不已惑乎.玉田,漢無終縣.《漢書·地理志》:故無終子國浭水,西至 雍奴入海.《史記》:項羽封韓廣為遼東王,都無終.《後漢 書》:吳漢將二十騎先馳至無終.《三國志》:魏武帝用田疇之,言上徐無山,塹山堙谷五
百餘里,經白檀,歷平岡,涉鮮卑.庭東指柳城,徐無山在今玉田,則柳城在玉田之東北數百里也.《北齊書》:
顯祖伐契丹,以十月丁酉至平州,從西道趨長塹.辛丑至白狼城,壬寅至昌黎城.是昌黎在平州之東北.齊主之行急,猶五日而後至也.
《隋書》:漢王諒伐高麗, 軍出臨渝關至柳城.《唐書》:太宗伐高麗還,以十月丙午次營州,詔遼東戰亡士卒骸骨,並集柳城東南.命 有司設太牢,上自作文以祭之.丙辰皇太子迎謁於
臨渝關.關在今撫寧之東,則柳城又在其東,太宗之 行遲,故十日而後至也.《遼史》載:柳城,曰興中府,古孤竹國,漢柳城縣也.慕容皝以柳城之北,龍城之南福德之地,乃築龍城,構宮廟,改柳城為龍城縣,而遷都之,號曰和龍宮慕容垂復居焉.〈垂都鄴其子寶始遷龍城非垂也.〉後為馮跋所滅,〈高雲滅慕容氏馮跋
代高雲非跋滅慕容氏也.魏取之為遼西郡,隋平高寶寧,置營州, 煬帝改柳城郡.唐武德初,改營州總管府尋為都督府.萬歲通天元年,陷李萬榮.神龍初,徙府幽州.開元 四年,復治柳城.八年徙漁陽,十年還柳城.舊唐書奚
傳李大輔與契丹首領李大活,請于柳城依舊置營. 州都督府從之,後為奚所據.太祖平奚及俘燕民,將 建城,命韓知方擇其處...(하략). 容城의 龍山에 모용황 릉이 있음-전연록(북위)
주) 북제시대 창려는 현재의 하북성 중부 서수현,금나라때 현 창려로 옮겨짐.
중공사가들이 유성을 朝陽으로 보고있는 것은 틀리며 적어도 당나라 이전 기록을 참고하여야 제대로 볼수 있습니다. <통전> 권173에 8세기 지리적 시각을 엿볼 수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랍니다.
[通典] 주군전
고청주
안동부
安東大都護府,舜分靑州爲營州
置牧
宜遼水之東是也.春秋及戰國
竝屬燕秦二漢曰遼東郡東通樂浪
晉因之.
兼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평주에 안동도호부를 세웠는데 후위때
고구려가 그곳에 도읍이 있었다. ( -통감지리통석(송)과 동일 )
하북성 진황도 서북 30Km에 있는 옛 영평부성은 그냥 우리가 중국의 관광지로 지나칠 곳이 아니다. 백제의 비류왕으로 추정되는 공손도의 궁전이 양평(襄平)이 이곳에 있엇고 고구려 미천왕이 이곳에 진출하여 얼마안있어 전연 모용외와 모용황이 이곳을 점거하여 궁실을 짓고 고구려와 동진,등을 괴롭혔다. 유성을 용성으로도 불렀고 모용씨 일가의 릉이 이곳에 있다.
고국원왕이 묘용황과 이지역에서 일대혈전을 치루고 패하였으나 이후 광개토왕이 후연을 무너뜨리면서 북경평주를 차지하고 평양성을 짓는다. 장수왕때 북위와 대치하면서 잠시 동쪽으로 요양에 평양성을 짓지만 영평부 즉 유성이 고구려 평양성으로 유효하였고 이는 수나라가 개국하기 전까지 유효한 평양이었다.

고구려 전통 검은 관복을 입은 인물과 사신도가 새겨진 계주 석실고분 (중공은 발굴 내역 비공개)
하북 계현에서 고구려 상징인 삼족오가 새겨진 석실고분이 발굴되었음을 게재했으니 참고하길바랍니다. 薊縣과 이곳은 서로 가까운 곳인데 필경 고구려 중심의 반경내에 있다.
평양의 평양성은 요동백제의 두번째수도이고 첫번째 수도는 요녕성 遼陽으로 비정되며 明초에 이곳에 요동도사를 들여오면서 외성을 漢城이라고 기록했다. 수나라이전 남북조말기의 혼란상을 보아온 양원왕이 전쟁준비와 백제 신라를 제어하는 중심지로 平壤에 성을 구축한것으로 보여진다.
수나라가 처들어오자 양원왕이 하북 북경근방에서 수나라 군사를 저지하고 싸운 혈전지가 하북성 노룡으로 그곳에 수나라군사 해골탑인 경관을 쌓은곳인데 당태종이 그들의 무덤을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太宗伐高麗還,以十月丙午次營州,詔遼東戰亡士卒骸骨,並集柳城東南.命 有司設太牢.
이곳이 하북성 영평부 근처의 지명인 무종현이다.
수나라부터 당나라까지 무려 80년간에 걸친 침략과 전쟁의 끝은 보장왕의 항복으로 끝을 맺고 그가 죽은뒤 만들어진 묘갈명이 출토되어 그의 3대 자손까지의 이름을 알게되었고 그의 추증관직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과 다르다.
옳은것이 開府儀同三司工部尙書朝鮮郡王柳城郡開國公. 이었다.
양원왕이전까지 중국왕조에세 준 관작이름은 적어도 營.平(2주 혹은)諸州軍事 로 영주(북경 동부)와 평주(하북)을 관장하는 왕을 칭하였으나 양원왕 이후부터 遼東郡開國公 즉 영평 동쪽인 요녕성과 한반도를 관리하는 왕으로 인정한것으로 그 지배 범위가 축소되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망한후 보장왕(고보원)에게 수여한 작위는 양원왕이후 영양왕에게 준 요동군개국공도 아닌 柳城郡開國公에 한정되고 있어서 그의 관리 지역이 유성 즉 영평부에 한하고 있는것이다.

첫댓글 平州가 하북성도 石家莊市 平山지역을 낀 井陘~贊皇지역으로 추정합니다.
이 石家莊市 서남부 南佐鎭 지역이 옛 句茶國都城 지역이고,
이 남좌진 남린 南蘇향 서쪽에 고구려의 安平城 西安平城 河陽城이 있었고,
이 河陽(昔陽;崔嵩樂浪國地 樂陽) 남쪽에 公孫康이 曹操에게서 받은 封地 和順(曹操의北進上限)이 있고,
이 和順을 지나는 淸漳東源이 서쪽에서 東南流하는 淸漳西源과 澤城(遼澤城) 北隣에서 合水해
동남으로 계속 흐르다가 石城동린에서 濁漳과 合漳하여 安陽(安市)를 지나 古黃河로 흘렀습니다.
隋書의 麗隋戰史에 나오는 "겨우 (麗)遼西땅 武・厲・邏를 빼앗아 (隋)遼東郡과 懷遠鎭을 두었다."는 얘기가
바로 淸漳西源以西의 武鄕・黎城・潞城지역이 바로 (隋)遼東이자 (麗)遼西라는 것이고
懷遠鎭은 晉中市 修文鎭북방에 길바닥이름으로 그 이름이 남아있읍니다...
高句麗가 內部의 背反으로 命을 달리할 때까지 遼水(遼河)는 늘 그곳을 흘렀고
옛朝鮮 大夫余 北夫余 高句麗의 平壤도 끗끗히 그 자리를 지켰던 것으로 봅니다.
薩水가 沙河이고 靑川江은 沙河의 지류인 (小)淸河였던 것이죠..
광개토왕 고구려 평주가 찬황 동쪽의 하간 려성을 중심으로 했다고 보여집니다. 북경근처 계성아래에 려성도 있습니다.일리가 있는 말슴입니다. 본인은 중국사서 기준으로 말슴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