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중랑천을 걸으며/靑石 전성훈
겨울에는 중랑천으로 간다. 작년 겨울 동안 중랑천을 걷다가 그만둔 지 9개월 만에 다시 중랑천을 찾는다. 중랑천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따뜻한 봄이 찾아오면 동네 뒷산 초안산을 찾아간다. 초안산 산책을 시작하며 봄이 완연히 무르익어 연둣빛이 만연한 초안산 모습을 보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되고, 아카시아 꽃향기가 온 산을 뒤덮을 무렵이면 내 마음은 초안산에서 싱아를 따 먹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한국동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던 배고픈 그때 그 시절 아이의 허기와 갈증을 풀어주었던 그 많던 싱아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가을이 되어 초안산 구석구석에 울긋불긋한 물감이 흐트러지게 물들일 때면, 왠지 모를 서글픔이 찾아오는 시간이 마음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지내다 보면 어느 틈에 북쪽의 찬 기운이 다가온다. 찬바람 속에 이따금 내리는 함박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을 때가 되면 초안산과 다시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땀을 비 오듯 쏟는 더운 여름철은 누구보다도 잘 견디는데, 찬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면 손발이 시리고 몸이 얼어붙는다. 누구나 겨울이 되면 활동하는 게 불편하겠지만 나는 유달리 겨울이 되면 그야말로 꼼짝 못 한다. 남들보다 일찍 내복을 꺼내입고 바깥에 나갈 때는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거나 목도리를 두르고 귀마개를 쓴다. 양력 생일이 한 해 마지막 날이고, 음력은 동짓달 보름이라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에는 어땠는지 기억에 없지만, 젊은 날부터 지금까지는 겨울철만 되면 어쩔 수 없이 쩔쩔맨다.
오랜만에 창동교 다리 밑으로 내려가 중랑천을 걸으니, 전과는 달리 그 모습이 조금 변한 듯하다. 전에는 보지 못하였던 운동기구가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몇 개뿐이었는데, 도봉구청에서 운동기구를 설치할 장소를 마련하고 추가로 여러 개를 배치해 놓은 것이다. 주민 복지시설이나 편의시설을 만드는 일은 어느 지방자치 단체에서나 무척 신경 쓰는 일이다. 도봉구 관할 중랑천 어딘가에도 새해에 황톳길을 조성한다는 말도 들린다. 창동교에서 녹천교까지 거리가 대략 850m 정도 된다. 자동차 도로와 연결된 제방 시설 공사를 하면서 경사면에 꽃밭을 만들어 놓아, 봄에서 가을까지는 다양한 꽃들이 제철에 맞게 피어 중랑천을 찾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마음의 평안을 주기도 한다. 녹천교를 지나서 월계1교까지는 꽤 먼 거리이다. 중간에 파크골프장을 만들어 놓아 노년의 건강을 위해 서너 명씩 짝을 이루어 공놀이를 즐긴다. 겨울철에는 잔디 보호를 위하여 개장하지 않았는데 며칠 전에 보니까 몇 사람이 모여서 운동을 하고 있다. 파크골프장 운영 방침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월계1교를 지나 경춘 철교까지 걸어간다. 오래전 고단한 삶을 사는 이들의 한숨과 땀을 그리고 꿈과 낭만의 냄새와 향기를 싣고 춘천 가는 보통 열차가 지나다니던 철길이다. 도시개발에 따라서 철길은 전철화하여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운행한다. 경춘 철길은 사람들이 즐기며 걸을 수 있는 곳으로 탈바꿈되어 아기자기한 구경거리와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겨울이 돼도 중랑천 터줏대감 까치는 여전하다. 까치는 무리를 지어 산다. 20~30마리의 까치가 떼 지어 날다가 먹이를 찾아서 땅으로 내려오고, 다시 높이 솟구쳐 커다란 나뭇가지에 앉아서 재잘거린다. 까치 떼와 백여 마리의 참새떼가 사이좋게 먹이를 찾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백로는 늘 혼자서 외로운 모습으로 고독을 즐긴다. 고독한 황제 백로 옆에서는 청둥오리 가족들이 한가롭게 물장난을 치면서 나들이를 즐긴다.
느긋한 마음으로 천천히 중랑천을 걸으니 몇 년 전 내 모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허리디스크 증세로 왼쪽 다리가 저려서 제대로 걷지 못하여, 창동교에서 녹천교까지 걷는데 몇 번이나 멈추어 서서 다리를 주무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던 그때 내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방태산 화타 선생의 “누우면 죽고 걸으며 산다.”라는 말씀에 동감하며, 디스크 시술을 해 준 의사의 충고를 따라서 오늘도 걷고 내일도 또 걷는다. 지금은 편하게 잘 걷고 있으니 정말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2024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