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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슈켄트Tashkent
저기 저만치 드높은 자리 누가 앉았다 떠난 자리에 내가 가서 앉을까 세상의 끝에서 달려와 애써 가꾸고 사랑하던 그 자리 어느 누가 이루지 못한 자리에 내가 가서 다시 앉을까 그는 어디론가 다시 바람으로 돌아갔으나 그가 놓친 바람소리와 그가 따르던 비단의 빛깔과 향기 내 홀로 찾아가서 그가 남긴 계절과 초원을 이어받을까 유목의 냄새와 한 마리 낙타의 등에 한 생을 맡긴 그의 발자국 위에 내가 선 자리 그리하여 오늘 내가 찾지 못한 나의 고향을 뒷날에 누가 다시 와서 내 가슴의 노래를 물려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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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타슈켄트Tashkent의 아침
타슈켄트의 아침은 상쾌하다
이국의 정취 물씬 풍긴다
이슬람과 모스크의 도시
그러나 미나렛의 자취는 생각만큼 요란하지 않다
우리 일행은 밤으로의 긴 여로를 통해
이역의 땅에 왔고
밤이 지나자 남의 땅을 찾아온 아침을 맞는다
바람 많은 땅을 사는 사람들은 얼굴이 달랐다
여러 바람에 풍화되어
투르크의 소리가 들리고
슬라브의 빛깔이 보이고
몽골의 근육이 짚이고
페르시아의 이마를 느끼고
더러는 카레이스키의 숨결도 들린다
유럽은 유럽의 음성이 있고
남아메리카는 남아메리카의 빛깔이 얼비치지만
중앙아시아의 바람소리는 사람마다 다르다
유라시아라 해도
유럽보다는 아시아에 가까운 족속들의 땅
유럽의 빛깔은 나를 외롭게 만들지만
유라시아의 빛깔은 나와 몰래 섞인다
언제 유목의 바람 속에
낯선 바람이 이토록 많이 섞였을까
이번 여정은
중앙아시아의 이른바
‘~스탄’ 자가 붙은 다섯 국가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스탄 stan’은 ‘~의 땅’ ‘~의 나라’라는 뜻
밤이 지나고 먼동이 트자
내 앞을 밝아온 것은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의 아침
그러니까 나는 ‘우즈베크 족속의 땅’에 온 셈
이제부터 나는 무시로
황량한 거대 공간에 한없이 던져져야 한다
저평지低平地도 있으나
대체로 천산과 파미르와 페르가나 고원의
만년설의 설원에 둘러싸인 고원지대에 가까운 땅
북으로 우랄
남으로 곤륜과 카라코람과 히말라야도
저만치 이웃이다
대지는 혹은 분지는
무한대로 뻗어간 대설원의 제자들이다
숨 막힐 정도의 광활한 건조지역
그러나 고봉의 빙하氷河나 융설수融雪水의 천혜로 하여
평원과 스텝지역을 두루 적시는
빙설의 강물 주야로 흐르는 곳
대평원의 오아시스는 인간의 젖줄
인간의 꿈은 여기서도 강을 따라 흐른다
고원을 버짐처럼 둘러싼 사막들
카라쿰과 키질쿰, 타클라마칸은 죽은 땅이 아니다
사람이 잠시 비켜났을 뿐
인간을 경원하는 동식물들이 살고 있다
지상에 죽은 땅은 없다
타슈켄트의 아침에 나는 고개를 들고
잠시 하늘을 우러른다
내 고향의 밤하늘처럼
이 땅에도 밤이면 꿈결처럼 별 돋는 곳
강물소리 쉬지 않아 인간의 노래가 깃드는 곳
나는 문득 환영幻影을 본다
히바 땅을 붐비는 대상隊商들을 본다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를 누비는 카라반을 본다
코부즈에 실린 음악소리를 듣는다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
바람소리 무성한 땅
유목의 음성은 아직도 즐비하다
비단이 아니라도 좋다
뽕나무가 아니라도 무슨 상관이랴
인간은 바람을 닮고
강물을 닮고
험준한 산령山嶺을 닮는다
인간의 핏줄 속에는 계절의 흔적이 있다
토지와 풀잎의 기억이 깃들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신성한 대지의 자식이다
중앙아시아 -
나는 지나간 시대의
저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인의 땅에 와 있다
스키타이와 파르티아와 호레즘의 땅에 와 있다
투르키스탄의 아침에 와 있다
사산왕조 시대 페르시아의 꿈은
지금 어디쯤 숨어 있을까
오스만 투르크의 깃발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호레즘의 번영은 어느 잡초 속에 묻혀 있을까
몽골제국은 어느 모래 속을 누워 있을까
티무르 제국은 어느 초원 속으로 잦아들었을까
저 숱한 오아시스 국가의 비단들은
지금 어느 바람 속을 불려갔을까
그리하여 우즈베키스탄 -
나는 지금 저 찬연한 이슬람의 깃발
수니파의 어느 물결 속을 휩쓸리고 있는 걸까
천산의 눈 녹은 물을
탐식하듯 남용하고 있는 목화 생산의 중심지
소비에트의 날들은 가고
저마다의 꿈을 이룰 시대는 찾아왔으되
우즈베크 족속도
카레이스키도
아직은 몸이 고단하다
근대화의 여망은 양날의 칼
무분별한 개간으로 땅은 메마르고
염도鹽度는 높아지고
목화생산으로 인한 강수량의 지나친 증발
화학비료의 과도한 사용과 산업폐수
말라가는 아랄 해의 슬픔으로 하여
유목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거대 지하자원인 가스와 석유는
축복일까 또 다른 재앙일까
낯선 남의 땅의 아침
우리는 우르겐치로 떠나는 비행기를 기다린다
간밤 우리는 이미 6540 킬로미터의 거리를 날아왔다
인천-다롄-톈진-베이징-호화호투-몽골 고비사막-
타클라마칸-알마티-타슈켄트
비행시간 일곱 시간 반을 이미 지나왔었다
야간비행, 나는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그러나 기내에서 밤이 지나고
타슈켄트의 아침이 밝자마자
우리는 다시 저 찬연한 전설의 도시
히바를 찾아가는 길
아니 차라리 나는
조로아스터의 불빛을 찾아가는 나그네
옛 성터에서도
무너진 궁궐에서도
제국의 영광과 부침
술탄의 야망과 영화에서도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조로아스터의 불빛을 찾아내리라
저 반짝이는 지혜의 등불만을 따라가리라
바람에 흐느끼는 비단의 살결을 따라
고요히 흔들리며 가리라
(이어짐)
첫댓글 대단하신 열정, 뭇시록을 따라 걷는 종교인처럼, 우리네 인생은 언제가지 지구상을 돌아봐야 할지, 그리생각하면 인생이 짬 잛기는 한데, 존경심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