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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가 갖는 두려움과 하나님의 대적이 갖는 두려움의 차이
출 3:13-14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피조물, 즉 신의 창조물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 외에
어느 것 하나도, 그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며,
부모가 자녀를 낳듯, 씨가 발아해야 나무가 되듯
전부 원인이 있어야 발생할 수 있습니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신의 존재는 뚜렷해지기에
생명공학을 전공하여 폭 넓게 연구한 과학자들은,
다시 말해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제대로 공부한 분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유전자에 관련한 연구가 진행될수록 진화론은 불가능의 확률을 나타내며,
창조론이 갖는 논리가 더욱 과학에 가깝다는 증거가 갈수록 확연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수많은 미국 유명사립학교들의 교과서는 인류와 세상의 기원을
하나님의 창조로 가르치고 있지만
한국의 공교육은 여전히 ‘다윈이 상상하여 발표했다고 고백하며 후회했던’
진화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가장 두려운 존재입니다.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실 수 있는 유일한 초과학, 초자연적인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든, 맹수든, 질병이든 사람의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죽이지 못합니다.
사람의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분도 역시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기에
사실 가장 두려운 분은 하나님이 맞습니다.
마 10:28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은 신에 대하여 미지의 막연한 두려움을 품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극한의 위기에 빠졌을 때에도 사람은 다급하게 신을 찾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급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초월적 존재는 신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인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당연히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노아의 때에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으며, 롯의 때에는 불로 심판을 하셨고,
앞으로 모든 사람을 심판대 위에 한 명씩 올리실 분이시며,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현재 자신이 하나님과 화평한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이 인지되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두려운 마음을 품게 되는데 이 두려움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이해가 다소 더딜 수도 있으니
딱딱한 음식을 잘 씹어서 섭취하듯 천천히 곱씹어 읽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느끼는 경외의 거룩한 두려움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대적으로서 느끼는 공포의 두려움입니다.
예를 들어 아빠나 엄마가 아무리 화가 많이 났어도
나를 잔인하게 죽이진 않을 거라는 확신을 하고 있기에
꾸중을 듣긴 하겠지만 부모님에게 가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용서를 받고,
앞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면 다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그 두려움은
희망이 있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막강한 힘을 가진 대적이 나에게 크게 진노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나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거라는 확신이 든다면
그 두려움은 공포, 그 자체일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자가 느끼는 두려움과
자신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라는 생각이 드는 자가 느끼는 두려움은
근본부터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유일한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기에(존경하며 두려워함)
하나님을 두려워하긴 하지만
그래도 담대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 1:29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엡 3:12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어주셨기에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죄를 후회하면서 진심으로 회개하여 마음과 행위를 돌이킨 후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께서 명하신대로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기쁘게 따라가며,
예수님과 고난도 함께 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동시에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신 겁니다.
요 14:6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직도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하여 하나님 앞에 또 죄를 범했어도,
여전히 자기를 온전히 부인하지 못하였기에 옛 자아, 죄성이 살아있어
질긴 고집을 부리며 불순종을 하고 있어도
공포에 떨면서 절망으로 빠져들지 않고(가룟 유다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자포자기 하지 않고)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며 진심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해주심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품었어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희망이 있기에
다시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지만 회개하여 돌이켰고,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부끄러워하면서 도망치지 않고,
담대히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이나 자신 있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스스로 부인한 자들,
즉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영원한 절망과 죽음의 공포, 곧 지옥의 공포이기에
그 두려움에는 희망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 아래
영원한 멸망을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내용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대적일 수도 있는 사람이 분명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자신은 교회에 오래 다녔으니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신하며 안심하다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라는 절망적인 말씀을 들으며 멸망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공포만 갖고 있기에 늘 두려움에 떨면서
‘내가 오늘 어떤 행동을 했는가? 안 했는가?’ 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애초에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은 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입니다.
즉 희망이 있는 ‘사랑과 경외의 거룩한 두려움’, 그리고 ‘절망과 공포의 두려움’ 사이에서
누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누가 하나님의 대적인지가 이 내용의 핵심인 것인데
그 기준은 ‘사랑’ 입니다.
요일 5:1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 14:21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인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다른 모든 계명들을 다 지키고 나서 마지막에 도달해야 하는 최종관문 개념의 계명이 아니라
모든 계명의 시작점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먼저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들을 진심으로 깨달아
이제는 자신도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과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출발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첫걸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해주신 겁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지키기로 굳게 다짐한 사람은
자신의 고집과 욕심을 뒤로하고, 예수님의 계명을 최우선적으로 지킴으로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게 되고,
그 사랑을 증명한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께도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쉽도록 ‘예배’로 예를 들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하여
하나님께 매번 최고의 예배를 올려 드리는가,
아니면 천국에 가고 싶어서, 혹은 이 땅에서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종교적 관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의 차이입니다.
또한 우리가 추가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말의 진의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행위로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행위만으로는 전부 증명할 수가 없다는 내용입니다.
즉 제3자가 어떤 사람의 겉모습인 행위만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참된 자녀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다는
조금은 난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해가 쉽도록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사랑고백의 진실성 여부는
하나님과 자신만 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긴 하지만
아직은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기에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부끄러운 마음과 행위를 가졌다고 가정했을 때
그가 자신의 죄 행위에 놀라며, 즉시 진심으로 후회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인정하여 고백하고 회개한 후
그 이후로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기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라면,
또한 예수님과 고난도 함께 받는 것에 감사하면서 인내로서 열매를 맺는다면
그 사람의 사랑고백은 진심일 것입니다.
반면 B라는 사람은 평소 그 행위가 완벽에 가깝고,
따라서 주변 모든 이들의 인정을 받고 있지만
그는 자신이 천국에 가고자, 혹은 뭇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겉보기에만 완벽하게 자신을 제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라면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가장 사랑한다는 그의 고백은 진심이 아닐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속마음이 어떻든 외적인 행위만 완벽하면
그것이 믿음의 정점이며,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과거 바리새인들이 했던 심각한 오류인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심각한 죄를 범하며 살아가는 자가 생각하기를
‘사람의 행위가 어떻든지 하나님에 대한 마음만 진심이면 괜찮은 것’
(행위는 나빠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 이라며
자신의 행위를 돌이키지도 않고, 피 흘리기까지 싸울 생각도 없으며,
죄를 꾸준히 계속 반복하면서도 회개와 돌이킴과 후회와 변화와 성장이 없다면,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와 긍휼을 필요로 할 때마다
예수님을 등에 업고 그 그늘 뒤에 숨어서
하나님의 은혜만 쏙 빼먹고 도망가서는 또 죄를 통해 배반한다면
그는 명백히 교활한 도둑인 것입니다.
이 사람의 사랑고백도 거짓입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가장 사랑하고 있는 자인지,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있는 자인지 솔직하게 살펴보십시다.
이 부분에서 큰 도움이 될 만한 참고사항은
하나님과 나의 추억, 매일 이어지는 친밀한 교제의 유무 여부입니다.
현재 하나님과 나는 매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는지,
아니면 죄와 나태함으로 인하여 끊어져있는지,
하나님과의 소중한 추억들이 오늘의 나를 이끌어주고 있는지,
아니면 지옥의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구원 문제는 이미 다 해결되었다고 착각하면서
이제는 그저 이 땅에서의 출세와 성공과 부유함 등의 복을 받고 싶은 마음에
무당을 찾듯 교회를 다니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교활한 도둑으로 여기고 계시는데도
자신은 분명히 하나님과 친밀한 자녀라고 착각하는 것이며,
다음으로 위험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녀로 여겨주고 계시는데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에) 여전히 지옥과 죽음의 공포만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그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밀어내며,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와주실 그 날에
공중에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가장 건강한 영적상태의 신앙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진심을 가진 이가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하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며,
자신을 구해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사실에 매일 감격하며 감사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쁘게 지며,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고난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죄와 부단히 싸우고, 인내로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많은 추억들이 쌓여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거룩하신 절대자 하나님을 두려워하긴 하지만 공포는 없는,
‘거룩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것이 바로 ‘경외’, 즉 존경과 두려움입니다.
마치 슬기롭고 어진 왕을 존경하며 대하는 충신의 마음과도 비슷합니다.
늘 순전하게 사랑하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유지하는 것을 무엇보다 즐거워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명하시든지,
내 마음의 소망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으로 확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는 언제나 자유가 있습니다.
폭군 앞에서 공포에 떨며 죽기 싫어서 억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무한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요 8:31-36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더욱 사랑하기에
죄를 멈추지 않고 계속 범하고 있는 자는 스스로 죄의 종이 되는 것을 선택한 자이기에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지 못할 자이며, 자유함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에 대해 무한한 공포만을 품게 됩니다.
잠 14:27
(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시 33:8
(8)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후
공포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자들은
하나님과 서로 사랑하며 교제를 나누면서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
희망이 있는 거룩한 두려움, 즉 하나님에 대한 경외라는 생명의 샘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거하게 되는 원리입니다.
시 31:19
(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기에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피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큰 은혜를 받게 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없기에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만 인식하여
하나님께로부터 피하여 바위 밑에 숨으려는 자들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심판의 대상일 뿐,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닙니다.
요일 4:15-19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진리의성령교회 가족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고(구주로 영접하고)
그 분의 말씀을 즐거이 지키는 제자가 되어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고, 하나님께서도 그의 안에 거해주십니다(성령님의 임해주심).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공포라는 원초적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갖는 거룩한 두려움, 즉 경외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담대함을 품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자신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사람들을 가리켜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 자’라고 명명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 자유함을 얻고, 심판 날에도 담대함을 가질 수 있게 된 사람입니다.
반면 말씀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으며,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증거를 가진 사람인 겁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들, 우리 각 사람은
현재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랑과 진리로서 자유함을 얻어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하나님과의 소중한 추억들을 쌓으면서 순종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살펴보십시다.
한 마디로 나는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내 자신보다 더욱,
최고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지에 관해
고민해봐야 한다는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자발적으로 지키는 자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곧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으로 확정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문을 처음부터 계속 열어두고 계셨습니다.
즉 우리만 문을 열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껏 열어두신 문이 닫히기 전에 이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저와 여러분들이 마음에 깊이 새기고 즉시 삶에 적용함으로서
우리에게 먼저 최고의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와
이제는 서로 가장 사랑하는 진실하고 친밀한 관계가 되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공포와 절망의 두려움에 빠져들지 않고,
진실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 담대함과 경외로서
하나님과 끝까지 손을 잡고 구원의 길을 걸어감으로
종국엔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확정되는 최고의 인생을 완성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일 2:28
(28)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진리의성령교회 윤경훈 목사 올림
진리의성령교회 2023.09.17. 주일설교
감사와 다짐의 노래
214장 변챦는 주님의 사랑과
1. 변챦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한 보혈의 공로를 우리 다 찬양을 합시다 주님을 만나볼 때까지
2. 우리를 깨끗게 한 피는 무궁한 생명의 물일세 생명을 구원한 친구들 하나님 찬양을 합시다
3. 주님의 깨끗한 보혈을 날마다 입으로 간증해 담대히 싸우며 나가세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4. 십자가 튼튼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 머리에 면류관 쓰고서 주 앞에 찬양할 때까지
[후렴]
예수는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희게 하셨네
첫댓글 아멘!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매일매일 그분과의 추억을
쌓아서 언젠가 천국에 갔을때 그 추억을 하나님과 함께
돌아보며 나눌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유와 담대함 가운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시며
행복하게 구원의 길 걸으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