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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세계
현대 세계불교⑲
식민지시대와 승가재건
유럽열강 식민지 쟁탈전의 희생양이 되었던 실론불교
글 이치란 박사 (원응 보검)
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아시아불교평화회의(ABCP 본부 몽골) 한국회장
국제불교연맹 이사(IBC 본부 인도)
동방불교대학 전 총장
한국불교신문 전 주필
현: 해동불교대학장 / 강원불교대학장
(사) 종정협 부설 / 국제불교전법대학 총장
WFB 태국본부 전 집행이사 / 일붕신문 상임논설위원
매일종교신문 기고가 / 땅끝 어룡도 해수관세음보살 도량 당제산 여의암 회주
다나TV 영어경전 강의 / 세계불교 TV에서 ‘세계불교를 가다’ 소개
(http://www.haedongacademy.org)
스리랑카의 불교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역사적 굴절 또한 심각했다. 인도불교의 원형을 그대로 이어 받았지만, 이런 전통을 미얀마와 태국에 그대로 이식해 주고 근대에 이들 나라로부터 다시 역수입하는 등, 승단의 우여곡절은 아슬아슬하였다. 스리랑카 불교에 얼룩을 낸 데에는 유럽열강도 크게 한 몫을 하게 된다. 조용한 불교국가인 실론에 닻을 처음 내린 나라는 포르투갈로서 1505년이었다. 처음 닻을 내린 포르투갈이 파악한 바로는 실론 섬은 7개의 전국(戰國)으로 분할되어 대립하고 있었고, 외침을 막아낼 여력마저 없었다.
포르투갈은 이 아름다운 섬에 반했고, 아시아의 식민지 개척과 무역을 위한 교두보로서 안성맞춤이었다. 포르투갈은 1517년 콜롬보 항구 도시에 요새를 구축했고, 1592년에 이르면 섬의 전체 해안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중요 요충지를 요새화하고 통제를 가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신할라족들은 해안에서 점점 안으로 밀리면서 내륙 깊숙이 고지대에 있는 캔디에 수도를 정하고 방어에 임했다. 종교적으로는 많은 신할라족들은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당했고, 해안가의 무슬림들은 종교적 박해를 받으면서 내륙 고지대로 밀려나게 되었다.
스리랑카 무슬림은 남인도의 타밀족과 중동에서 온 아랍인들이었는데, 대체로 이들은 수니파에 속한다. 타밀어를 사용하는 타밀족은 남인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서 인도에서부터 이미 무슬림으로 개종한 뒤였고, 신할라 족과는 인종과 언어가 다른 민족이다. 스리랑카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하면서 신할라족과 대립하고 있다. 섬의 동북부 지역에 주로 분포해 있으면서 분리 독립운동을 요구하고 한동안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전선을 구축, 내전을 주도했다. 내전은 1983년부터 2009년까지 진행되었고, 스리랑카 정부군은 26년 만에 이 지역을 완전히 소탕, 제압했다.
아랍 이슬람은 중동국가에서 무역 때문에 실론 섬에 정착한 무슬림들로서 타밀어를 자신들의 언어로 받아들여서 지금은 혼합된 상태이다. 한편 다수를 차지했던 신할라족은 불교가 주류 종교였다. 불교도들은 포르투갈의 점령을 극도로 싫어했고, 이들을 격퇴하기 위해서 또 다른 외세인 네덜란드를 끌어들였다, 네덜란드 선장은 1602년 실론 섬에 상륙했고, 캔디 왕은 도움을 요청했다. 라자싱헤 2세 왕은 네덜란드와 1638년 조약을 맺고, 실론 섬 대부분의 해안을 점령하고 있는 포르투갈을 격퇴하고, 전 해안 지역을 캔디 왕에게 찾아주는 대신, 섬 전체의 무역독점권을 인정하가로 약속했다. 네덜란드는 1656년 콜롬보를 점령하고 4년 후에는 섬 전체를 통제할 수 있었다. 개신교도였던 네덜란드는 가톨릭교도들 을 박해했고, 불교 힌두 무슬림들은 그대로 두었지만, 포르투갈보다도 더 많은 세금을 부과했다. 네덜란드는 브리티시가 올 때까지 150년(1640–1796)간 섬을 지배하게 되면서, 네덜란드와 지역민사이의 혼혈족을 유산으로 남기게 되었다.
영국(Great Britain)은 나폴레옹 전쟁 중에 프랑스에 점령당한 네덜란드가 실론 섬을 프랑스에 양도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폴레옹 전쟁은 1803년부터 1815년까지 유럽의 동맹과 대립한 전쟁이다. 프랑스의 힘이 빠르게 커져 프랑스군을 이끈 나폴레옹은 한 때 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했으나 프랑스는 반도 전쟁과 러시아 침공에서 비참한 패배를 겪고 급속히 쇠락하게 되었다. 이어서 프랑스는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제2차 파리 조약(1815년)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종결되고, 나폴레옹은 실각했다.
이 전쟁은 또한 신성로마제국의 해체를 불러왔다.
동시에 프랑스의 점령으로 스페인이 약화되면서 스페인이 지배하던 식민지였던 라틴 아메리카에서 민족주의자들의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아미앵 조약을 맺고, 네덜란드가 점령한 실론 섬의 지역을 브리티시에 양도하도록 했다.
실론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1803년 브리티시는 캔디 왕국을 공격했고, 몇 차례의 전쟁에 끝에 1815년 브리티시의 직할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실론의 브리티시 식민지는 133년(1815–1948)간 지속되었다. 실론의 역사, 실론의 불교는 이처럼 유럽의 역사와 전쟁과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제 실론불교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실론불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브리티시 직할 식민지를 겪으면서 기독교 선교활동도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었다.
특히 포르투갈과의 전쟁 중에 불교 승가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1590년대에 이르면, 실론 불교승가는 최악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새로 입문하는 승려에게 수계해 줄 비구가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거의 2세기에 걸쳐서 불교승단은 공백기나 다름없을 정도로 불교승단은 말이 아니었다.
불교는 전통적으로 계맥(戒脈)에 의해서 법통이 이어지는데, 이것을 우빠삼빠다(Upasampadā)라고 하는데, 한역(漢譯)에서는 구족계(具足戒)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출가한 사람이 정식 승려가 될 때 받는 일종의 통과의례로서 계율의식을 말한다.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이며, 비구에게는 250계, 비구니에게는 348계가 있다. 불교에서 출가하는 것은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는 뜻이며, 구족계를 받게 되면 정식 승려가 된다.
이 구족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 이상의 법랍을 가진 비구가 최소한 3〜5명이 있어야 계단(戒壇)이 차려지고 정식으로 수계를 줄 수가 있다. 불교승가의 맥을 이어가는 매우 상징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조건을 갖춰야 한다.
실론 섬이 외세의 점령으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내륙의 깊숙이 천도한 캔디왕조는 불교를 국교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교도 왕과 신도는 있었지만, 승단을 구성하는 비구가 없을 정도로 승가가 피폐해져 버리자. 당대 키르티 스리 라자 싱하(Kirti Sri Raja Singha 재위: 1747〜1782) 왕은 승단복원을 위해서 노력했다. 왕은 즉위하자마자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의 도움을 받아서 시암(태국)에서 일단의 비구들을 초청해 와서, 비구계단을 재건하고 수계를 받게 하였다. 1753년에는 웰리위타 스리 사라 난카라 테로(1698〜1778)에게 실론 승가의 최고위직인 상가라자(승왕=종정)의 지위를 부여하고 승가를 재건하도록 했다.
2세기 동안 단절된 실론의 승단을 재건한 실론불교는 새 출발을 하게 되었고, 실론불교는 시암(태국) 승가에서 계맥을 계승해 와서 시암파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다. 실론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치아를 봉안하고 있는 국가이다. 키르티 스리 라자 싱하 왕은 실론 승가를 복원한 것만이 아니고 불치사(佛齒寺)를 건립했다. 인도에서 이운(移運)해 온 불치는 실론 왕통계승의 상징이요 국보로서 옥새 이상의 법보(法寶)역할을 했다. 이 불치를 보유해야 왕통(王統)을 인정받았다. 역성혁명기(易姓革命期)에는 누가 이 불치를 차지하느냐에 따라서 국권의 정통성이 좌우
되기도 했다. 실론불교는 인도불교의 원형성을 계승한 종가였지만, 내부타락이 아닌 외침에 의해서 타율적인 요인으로 승가가 부침했다. 승가재건에 있어서도 적당이란 없었다. 법통성과 정통성을 존중해서 합법적인 계맥의 계승을 통해서 승가를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사미승의 맥은 결코 단절된 적이 없었으며, 교학(敎學)의 학맥 또한 단절된 바 없었기에 현재에도 세계불교학의 종가로서 그 위상과 권위는 절대적이다.
현대 세계불교⑳
실론근대화와 불교교단
중세시대 버마·태국에 전해주었던
상좌부 불교 전통 역수입
지난 회에서 식민지 시대의 불교를 대강 일별해 봤다. 조용한 섬나라 불교에 큰 충격을 주었던 유럽 열강은 식민지 확보를 위한 국익에 한 종교의 운명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오직 자기 종교가 아니면 이단이라는 오만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고, 이슬람에 대한 트라우마가 깊게 작용하고 있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711년부터 1249년까지 무슬림 통제아래에 있었다. 무려 5백 년간이나 식민지 경험을 했던 포르투갈은 실론에 무자비한 파괴와 점령, 무슬림탄압으로 정복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타격을 입은 것은 불교였다. 네덜란드와 협정을 맺고 외세의 힘에 의해서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2백 년간 쇠멸한 불교승단의 계맥을 시암(태국)으로부터 이식해 와서 재건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스리랑카에는 현재 3개의 대표적인 불교종파가 있는데, 시암 니까야(종파), 아마라뿌라 니까야, 라만나 니까야 등이 대표적이다. 시암 니까야는 태국(시암)에서 계맥을 이어온 종파이기에 시암종이란 명칭이 붙었다. 우빨리 테라는 시암(아유타야)에서 온 비구로서 캔디 왕조의 초빙으로 계맥을 전수해 주었는데, 네덜란드가 중계역할을 해주었다. 우빨리 비구는 일단의 비구들과 함께 1753년에 캔디에 와서 비 구계를 전수해 줬고, 그때만 해도 사미승과 행자승만 있었던 승가를 정화시키고 재건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2세기 이상이나 승단이 비정상적으로 관리되다 보니, 승원은 점성가들이 장악하고 그것이 불교인 것처럼 기복불교화(祈福佛敎化)되어 있었다. 일부 비구는 지주(地主)가 되고 처자를 은밀히 거느리는 등, 승단의 타락은 극에 달할 정도였다. 우빨리 비구는 승가를 정화시키고, 계율과 승원규칙을 새로 정립하고 승가복원에 애쓰면서, 부처님 치아사리 이운행진 축제를 복원하도록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런 정화운동에 노골적으로 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왕권의 비호와 새로 입문한 비구들의 노력으로 승단 정화가 이루어지고, 복원이 되었다. 현재 시암종은 6개의 지파로 나눠져 있고, 6천개의 사원과 2만 명의 비구가 소속되어 있다.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불교 종파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종파는 아마라뿌라 종파이다. 이 종파는 1800년에 버마(미얀마)에서 계맥을 이어와서 창종했다. 두 번째 종파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실론의 카스트가 배경이 되고 있다. 스리랑카 또한 인도문화권이다 보니, 카스트가 사회 저변에 깔려 있었다. 카스트 가운데 고비가마와 바쓰가마 카스트는 농업을 주로 하는 농민들이었다. ‘고비’는 쌀농사를 짓는 농부란 의미이며, 바쓰가마의 ‘바쓰’는 ‘쌀’의 의미이며 ‘가마’는 마을이란 뜻이다. 스리랑카 섬은 논이 적고 쌀이 귀하다보니, 상류층은 논을 소유하는 것이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여기서 긴 설명은 할 수 없지만, 농자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으로서, 사회계층의 상위였다.
비록 시암종이 형성되었지만, 해안가의 어업과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카스트가 비구가 되는 것을 시암종파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해안가의 어업과 해상무역을 하던 살라가마 카스트는 버마로 향했다. 살라가마 카스트는 해안가에서 계피를 재배해서 무역을 하고 어업에도 종사하는 카스트였다.
살라가마 카스트는 수십 명의 젊은 사미들을 태우고 버마로 배를 띄워서 당시 꼰바웅 왕조(1752–1885)의 수도였던 아마라뿌라에 도착, 일정기간 수행을 한 다음, 비구계를 받고 실론에 돌아와서 아마라뿌라 종파를 설립하게 된다. 현재 아마라뿌라 니까야는 21개의 지파가 있으며, 주로 스리랑카 해안가 지역에 사찰을 갖고 있다. 다음은 라만나 니까야 종파이다. 이 종파는 1864년에 버마에서 계맥을 전수해 왔다. 이 종파는 카스트 배경보다는 불교 수행에 초점을 맞춘 종파이다. 이 파의 비구들은 주로 숲속의 수행파 비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태국, 미얀마와 스리랑카의 숲 속 수행자 전통을 계승한 종파이다.
구계를 전수해 줬고, 그때만 해도 사미승과 행자승만 있었던 승가를 정화시키고 재건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2세기 이상이나 승단이 비정상적으로 관리되다 보니, 승원은 점성가들이 장악하고 그것이 불교인 것처럼 기복불교화(祈福佛敎化)되어 있었다. 일부 비구는 지주(地主)가 되고 처자를 은밀히 거느리는 등, 승단의 타락은 극에 달할 정도였다. 우빨리 비구는 승가를 정화시키고, 계율과 승원규칙을 새로 정립하고 승가복원에 애쓰면서, 부처님 치아사리 이운행진 축제를 복원하도록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런 정화운동에 노골적으로 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왕권의 비호와 새로 입문한 비구들의 노력으로 승단 정화가 이루어지고, 복원이 되었다. 현재 시암종은 6개의 지파로 나눠져 있고, 6천개의 사원과 2만 명의 비구가 소속되어 있다.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불교 종파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종파는 아마라뿌라 종파이다. 이 종파는 1800년에 버마(미얀마)에서 계맥을 이어와서 창종했다. 두 번째 종파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실론의 카스트가 배경이 되고 있다. 스리랑카 또한 인도문화권이다 보니, 카스트가 사회 저변에 깔려 있었다. 카스트 가운데 고비가마와 바쓰가마 카스트는 농업을 주로 하는 농민들이었다. ‘고비’는 쌀농사를 짓는 농부란 의미이며, 바쓰가마의 ‘바쓰’는 ‘쌀’의 의미이며 ‘가마’는 마을이란 뜻이다. 스리랑카 섬은 논이 적고 쌀이 귀하다보니, 상류층은 논을 소유하는 것이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여기서 긴 설명은 할 수 없지만, 농자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으로서, 사회계층의 상위였다.
비록 시암종이 형성되었지만, 해안가의 어업과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카스트가 비구가 되는 것을 시암종파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해안가의 어업과 해상무역을 하던 살라가마 카스트는 버마로 향했다. 살라가마 카스트는 해안가에서 계피를 재배해서 무역을 하고 어업에도 종사하는 카스트였다.
살라가마 카스트는 수십 명의 젊은 사미들을 태우고 버마로 배를 띄워서 당시 꼰바웅 왕조(1752–1885)의 수도였던 아마라뿌라에 도착, 일정기간 수행을 한 다음, 비구계를 받고 실론에 돌아와서 아마라뿌라 종파를 설립하게 된다. 현재 아마라뿌라 니까야는 21개의 지파가 있으며, 주로 스리랑카 해안가 지역에 사찰을 갖고 있다. 다음은 라만나 니까야종파이다. 이 종파는 1864년에 버마에서 계맥을 전수해 왔다. 이 종파는 카스트 배경보다는 불교 수행에 초점을 맞춘 종파이다. 이 파의 비구들은 주로 숲속의 수행파 비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태국, 미얀마와 스리랑카의 숲 속 수행자 전통을 계승한 종파이다.
교세는 약하지만, 주로 숲 속 사원에서 경전을 독송하면서 명상을 주로 하는 선승들이다. 스리랑카의 불교계는 시암종파의 비구들이 주도하고 있으며, 대부분 큰 사찰들은 시암종파이다. 아마라뿌라 종파의 비구들은 외교적이다. 무역업에 종사하던 배경을 갖고 있는 이들은 일찍이 유럽선진 문명에 눈을 뜨고 근대교육에 적극적이었다. 라만나 종파의 수행자들은 선승(禪僧)으로서의 숲 속 사원이나 암자에서 소박하게 명상 수행을 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고 있다.
실론 승가의 복원과 정화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네덜란드가 끼어 있다.
네덜란드는 인도, 동남아시아 지역으로의 경제적 진출을 위해 1602년 동인도 회사(東印度會社,
Dutch East India Company)를 세웠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자카르타에 총독정청(總督政廳)을 두어 포르투갈, 영국 세력을 쫓아내고, 17세기에는 동양무역에 우월적 지위를 확립, 당시 세계 최대의 무역회사로 성장하여 일본 무역을 사실상 독점했다.
기독교를 탄압하던 도쿠가와 막부는 로마 가톨릭 교회 전교를 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대신, 선교활동을 하지 않았던 네덜란드를 유일한 거래상대로 개방했다.
조선에 억류된 하멜(1630-1692)은 동인도 회사에 고용되었던 선원이었다. 한양에서 하멜과 비슷한 경로로 조선에 표류하여 훈련도감 근무자로서 귀화한 박연의 통역을 이용하여 국왕을 호위하는 부대원으로서 체류는 허락받았으나, 탈출하여 《하멜표류기》와 《조선왕국기》를 남겼다. 일본은 데지마(出島)를 1636년에 건설, 1641년에서 1859년 사이에 대 네덜란드 무역은 오직 이곳에서만 독점적으로 허용했다.
일본이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만 교류를 허락한 이유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관심사는 일본과의 무역으로 이익을 남기는 것이지, 전도(傳道)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학(蘭學)은 에도 시대 네덜란드를 통해서 들어온 유럽의 학문, 기술, 문화 등을 통칭해서 이르는 말이다. 시암의 아유타야 왕국은 처음엔 포르투갈과 나중엔 네덜란드와 영국과 교역을 했다.
나가사키 데지마에 복원한 네덜란드 상관. 다시 실론불교 이야기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실론불교인들의 불교 승단 살리기 운동은 처절했다.
실론은 단절되어가는 불교승단의 계맥과 전통을 잇기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감수했고, 뼈를 깎는 아픔을 감내했다. 중세시대에 버마와 태국에 전해주었던 상좌부 불교 전통을 그대로 역수입해 온 것이다. 스리랑카 비구들에게서 느끼는 보이지 않는 열등감은 바로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태국이나 미얀마의 비구들의 보이지 않는 긍지는 인도 원형불교의 맥을 자신들이 계승하고 있다는 신념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미얀마 불교와 태국불교의 원형성은 스리랑카 보다는 더 인도원형 불교에 가깝다고 느낀다. 또한 태국불교보다는 미얀마 불교가 더 원형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수코타이에 이식됐던 실론 승가는 아유타야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으나, 버마의 공격으로 무참하게 파괴되었고, 방콕 불교는 태국스타일의 상좌부 불교로 재탄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얀마 불교는 실론승가의 전통이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리랑카에서 관찰되는 3개 종파에서 느껴지는 촉감은 조금씩 다르다.
시암종에서는 태국 아유타야 불교전통이, 아마라 뿌라 종파와 라만나 종파에서는 버마 불교의 원형성이 그대로 느껴진다. 여기서 인도의 원형불교를 어느 나라가 더 잘 보존하고 있느냐고 했을 때, 버마불교에 주목하게 된다. 버마족은 티베트족과 뿌리가 같다. 두 나라 다 인도의 원형불교를 보존하고 있는데, 근본불교는 버마(미얀마)가 실론을 경유하여 계승하고 있고, 티베트는 인도 후기 대승불교(밀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적통종가들이란 점이다.
티베트-버마어는 인도유럽어족인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와 어족(語族)이 다르다. 그럼에도 빨리어는 버마가, 산스크리트어는 티베트가 자기화 시켜서 종교 경전어로 일상화시켰다는 점은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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