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렬이란 무엇인가?
항렬이란?
친족가운데서 세대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인데, 어떤 사람의 자손 가운데서 세대수가 같아서 형제뻘 되는 사람들을 같은 항렬이라고 하며,
그들의 아버지벌 되는 사람들을 아버지항렬, 아들벌 되는 사람들을 아들 항렬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은 재래로 이름을 지을때 《항렬자》,
즉 《돌림자》를 썼다.
이 《항렬자》에 근거하여 성과 본이 같은 사람끼리 이름만 보고도 대체로 항렬을 가릴수가 있었다.
지금은 이름 지을때 《항렬자》, 즉 《돌림자》를
쓰지 않고 각각 제맘대로 짓는다. 하지만 연세 많은 분이 집안에 계시는 경우, 아직도 항렬자를 따져서 이름을 짓기도 한다.
○ 성씨란 무엇인가?
옛날에는 평민들을 가리켜 한자말로《백성》이라고 하였는데, 그뜻인즉《백가지 성씨를 가진 사람들》 이란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나오기 썩 오래전인 원시사회나 노예사회, 봉건사회 초기때만 해도 성씨가 많지 않았고, 그 성씨는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지배계급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성이 없는 평민들은 《천민》 혹은 《상놈》이라고 불리였으며, 이름은《돌쇠》나 《똥애》처럼 아무렇게나 지어 부르는 것이 고작이였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하면서 인권평등의식이
강조되고, 인격존중이 하나의 사회적 원칙으로 됨에 따라 호적등록을 하면서 점차 누구나 성씨를 갖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경우, 이름앞에 붙이는 성씨는 일반적으로 같은 족속을 나타내는 칭호인데, 한문투를 따서 보통 무슨 《씨》, 무슨 《가》라고 한다. 이를테면 《허》란 성을 부를때면 《허씨》, 혹은 《허가》라고 한다.
○ 우리민족 성씨는 몇가지 되는가?
《백성》이라고 하지만 실지 우리 민족의 성씨는 100가지를 훨씬 초과해 수백가지에 달한다.
옛날《세종실록 지리지》에는 265성이 기록되여 있고, 그후에 나온《증보문헌비고》에는 496성으로 근 5백가지를 헤아리고 있다.
1975년 한국 국세조사에서는 249가지 성으로 되어 있으며, 김씨가 전체 인구의 21.9%, 이씨가 14.9%, 박씨가 8.5%, 최씨가 4.8%로 한국 총인구의 근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한자가 들어오기 이전에 고대사회에서 우리 고유말로 된 성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아직 고증할 문헌기록이 없다. 우리민족 역사문헌으로서 가치가 가장 큰 문헌중의 하나인 《삼국사기》에서는 사람 이름 앞에 출신지방의 이름을 붙여서 혈연관계 혹은 지방소속관계를 밝혔다.
이를테면 옛날 백제왕실의 성인 《부여》
같은것이다.백제왕실은 고구려왕실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자연 이 두 왕실의 출신지방이 같은 《부여》였기 때문이다.
백제왕실에는《부여》란 성외에도 사, 연개, 협, 해, 진, 국, 목, 백 등 큰 성이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성은 《고》씨인데, 고구려에는 이밖에도 장, 양, 리, 오, 두, 왕, 등 큰 성이 있었으며, 이런 큰 성을 가리켜 우성이라고 불렀다.
신라왕실의 성은 박, 석, 김이 위주였고, 그외에 최, 안, 설, 남, 손, 정, 배,리, 등성이 있었다.
○우리민족 성씨는 어째서 한자성씨인가?
역사문헌에 나오는 성씨들은 대부분이 왕실귀족의 성씨였지 백성들의 성씨는 아니였다.
《삼국사기》에 고위계층 즉 왕실이나 귀족들 가운데서는 성씨가 점차로 보급되여 가고 있었으나, 평민들은 성이 없었다.
때문에《삼국사기》에 나오는 숱한 평민들은 이름만 나오고, 성이 적혀 있지 않다. 고구려의 온달, 신라의 계백과 관창, 고구려의 창조리, 백제의 도미, 신라의 솔거,지은 등 평민들에게는 그것이 성씨인지 이름만인지 알기 어렵다.
특히 고구려의 성씨에 대해서 살펴보면 위에서 예를 든 왕실의 성씨들을 내놓고도, 을지문덕,연개소문, 명림담부 등의 을지, 연개, 명림 등 성씨가 나오는데,
그 뜻이 아마 당시 고구려의 고유어로 되어 있는것 같고, 한자를 그대로 쓴 성이 아닌듯 싶다.
조선에서 한자성을 널리 쓰기 시작한것은 아마도 후신라때 부터라고 보는것이 타당할것 같다.
왜냐하면 그때가 바로 중국과의 군사, 정치, 외교래왕이 전의 다른 어느 시기보다 잦았을 뿐만 아니라, 후기신라 귀족들의 한자말이 열도가 올랐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은 당시 신라의 지명을 모두 한자식 이름으로 고쳤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신라의 귀족들은 모두 한자성을 붙였다.이로부터 고려, 이조에 이르기까지 한자성이 위주로 널리 퍼졌고, 왕실이나 귀족들내에서 한자 성씨를 숭상하고,그 유래를 신비화 했거나, 또는 한자성씨를 국가의 공로자에게 상으로 주는 이른바 《사성》이라는 제도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평민들은 언제부터 성을 가지게 되였나?
일반 평민들이 성씨가 없이 이름만 붙여 불리운 것이 조선역사 반만년에 깔리운 하나의 상황이였다.
고려文宗(기원1047년)때부터 비양반 가정에서도 자기성을 가질수 있었다고 하지만 극히 제한적이였으며, 지어 이조말기에 이르러서도 성이 없는 평민들이 상당수준으로 존재하였다.
근대에 들어와서 전국적 범위내에서 통일적으로 호적등기를 하게 되자, 성이 없던 평민들은 여러가지 경로를 통하여 성씨를 가지게 되였으며, 조선의 전 국민이 비로서 성씨를 다 쓰게 되었다.
○본이란 무엇인가?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성씨를 귀중하게 여긴것은 성씨가 봉건사회에서 혈연관계, 즉 핏줄을 상징하는 외에도 계급적 차원에서 신분의 귀천을 상징하는 표시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유교가 국교로 됨에 따라, 남존여비와《3강5륜》사상이 풍조로 되었다.
따라서 혈통관념이 보다 강하게 성씨에 깃들게 되었으며, 정통이냐, 아니면 갈래이냐 하는것을 무섭게 따지게 되였다.
그에 앞서 한 성씨안에서도 시조가 누구냐 그리고 그 시조가 발상한 고을이름이 어떠냐에 따라 《본》이란 개념이 생기게 되였고, 엄격이 그것을 준수하여 벌써 조선초기에 귀족들은 한자성 앞에다가 발상지명을 덧붙여《전주리씨》,《밀양박씨》하고 불렀다.
시조의 발상지는 출신지역이 될수도 있고, 또 벼슬하여 받은 봉지일수도있다.사실 고대에 있어서는 성씨 자체가 발상지 이름으로 된것이 적지 않다.
그리하여 이름앞에 선조의 발상지(원래의 성)을 붙이는것이 거의 통례로 되었는데,
한자성씨가 보급됨에 따라 발상지 이름이 따로 《본》이란 명칭으로 성씨앞에 붙게 되였다.
그후 한 종족에서도 그누가 벼슬하게 되면 따로 가보를 창설하고, 성은 원래의 성을 그대로 쓰고,
본은 자기의 봉지명으로 고쳐서 따로 기록하기
시작하였는데, 주요하게 자기의 공덕, 혹은 근친의 공덕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되여 같은 성씨에 여러가지 본이 생겨나게 된것이다.그때로 부터 본이란 기실 한 가족의 발상지만 대표하게 되였으며, 지금은 같은 성씨의 다른 종친을 구분하는 의거로 많이 이용된다.
이것을《본관》, 혹은 《관향》, 《향관》
이라고도 한다. 사회, 역사적 변천으로 하여 본관의 이름이 지금은 없어졌거나, 또는 다른 이름으로 바뀌여 진것도 허다하다.이를테면 연주 현씨, 문화 류씨, 가주 한씨, 반남 박씨, 무송 윤씨 등이다.
《연주》는 평안북도 영변의 옛지명이였고, 《문화》는 신천군안의 옛고을이였으며, 《가주》는 정주군 가산고을의 별칭이고,《무송》은 고창군 무장고을의 별칭이며, 《반남》은 나주군 소속에 있던 별칭이다.
하지만 이런 변천은 성씨의 본관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상기 본관의 개념이 바로 혈연갈래를 가르는데 두고 있기 때문에,
그냥 옛날지명을 그대로 부르면서 연속되어 왔던것이다.
○본 안에 또 파가 있다던데.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본이 가장 많은것은 김씨였는데, 499본에 달하였고, 이씨는 451본에 달하였으며, 최씨는 326본에 달하였고, 박씨는 309본에 달하였다. 장씨는 245본, 임씨 216본, 조씨 200본 등의 차례로 선보인다.
본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적으로 벼슬을 한사람이 많다는 방증이 된다.
조선후기부터 시작하여 같은 본끼리도 서로 멀고 가까운 현상이 많아졌는데, 족보를 캐어 같은 본안에서 그 문벌이 누구의 자손인가? 그리고 자기 혹은 타인과 어떤 관계인가를 밝혔다. 하여 본안에 또 파가 생겼다.
○ 성씨유래를 캐어보는 의의
우리 민족이 성씨를 쓴지도 이미 천년도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민속학적인 의미에서 볼때, 대대로 성을 물려 주면서 피줄의 흐름을 이어온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이며, 조상들의 지혜로운 유산이다.
때문에 일제가《동조동근》을 강요하면서 창씨개명까지 협박했던 그 살벌한 민족수난의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자기의 성씨를 잊지 않고,
따라서 자기가 조선민족임을 잊지 않고 줄기차게
살아왔던 것이다.
글로벌화된 오늘날에 와서 종친이요, 한 성씨요 하는 혈연개념이 희박해질수도 있고, 또 그 어떤 다른 목적에 이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민속학적인 각도에서, 성씨의 유래를 캐여보는것은 역사 지식방면에서 도움이 될수 있을 뿐만 아니라,민족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하고, 민족의 응집력을 강화하는 측면에서도 도움이 될수있다.
세계가 날로 좁아져서 마침내 지구촌이라는 개념으로
이 세계를 평가하는 오늘날,우리가 자기의 민족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자기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새겨보며, 자기의 사명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방면에서도, 모두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