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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산업 형태의 이윤만을 생각했다. 이것은 산업 이윤이 양적으로 가장 크며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유일한 분야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사실로 볼 때 합당한 것이다. 하지만 자본과 이윤은 다른 형태로도 나타나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상업 자본과 상업 이윤으로서, 이것들은 실제로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
일찍부터 우리는 자본 순환의 속도가 자본가들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해 왔다. 또한 자본가들은 상업이나 유통 전문가들에게 자기 생산물의 처분을 완전히 맡기고 그 대가로 자기 이윤의 일부를 그들에게 넘겨줌으로써 이 순환을 가속시키려 한다는 것도 이야기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간 이윤 순환이라는 것의 정의와 그 공식을 생각해 보자. 이 공식은 이다. 여기에서 ‘C’는 투자 자본 총액을 나타내며 불변자본(c)와 가변자본(v)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변자본은 임금 지급에 투여되는 자본이다. 그러므로 이윤율은 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로 다르지만 자본의 합은 두 투자자본 총액 C´과 C´´이 있다고 가정하고, 또 그들은 똑같은 잉여가치율─예를 들어 100퍼센트─과 똑같은 유기적 구성을 가진다고 가정하자. 예를 들면,
그러나 C´은 1년에 두 번 순환하고 C´´은 한 번만 순환한다고 하면 1년 동안 C´은 20v의 두 배인 40s에 달하는 잉여가치를 생산할 것인 반면에, C´´은 20s의 잉여가치만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 C´의 이윤율은 가 될 것이고, C´´의 경우는 가 될 것이다. 이처럼,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면 자본 순환의 속도가 두 배 빨라짐에 따라 이윤율도 두 배가 된다. 자본의 순환이 빨라지면, 잉여가치가 더 빨리 실현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정 기간에 생산되는 절대 가치도 증가한다.
만약 산업 자본가가 자신의 생산물을 직접 배급하고 소비자에게 판매하려고 한다면, 그는 시간적·금전적 손실이 따르는 온갖 어려움에 부딪힐 것이다. 머지 않아 그는 모든 거래를 스스로 맡아 하려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경험을 통해 자본가들은 자신의 경쟁자들이 다양한 판로와 탄탄한 금융적 뒷받침을 받고 있는 사업가들이나 대규모 우편 주문 유통 체제를 갖춘 전문가들에게 의존함으로써 '자금 회수'를 더 신속하게 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이윤을 막대하게 증대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본가들은 적당한 몫을 상업 부문에 떼어 줌으로써 자본을 더 빨리 순환시켜 상당한 이점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선진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광대한 상업 부문이 형성되고 발전해 경제 전반에 촉수를 뻗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 상업 자본을 어떻게 분석해야 할까?
상업 자본가는 산업 자본가의 생산물 전부 또는 일부를 합의한 가격에 사들여 조금도 변형시키지 않은 채 더 높은 가격으로 다시 판매하는 전문가다. 이것은 생산 기업인과 중간상인이 합의한 가격을 통해서는 상품에 포함돼 있는 잉여가치의 일부만이 실현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산업 자본가가 차지하는 부분이다. 잉여가치의 나머지 부분은 중간상인에게 서비스의 대가로 남겨지는데, 이것은 상품이 최종적으로 소비자에게 판매될 때 비로소 실현된다. 상업 자본가는 자기의 사업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고 믿고 있는데, 이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상업 자본가 혼자뿐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도 상업 이윤과 산업 이윤을 다 '부가가치'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일 뿐이다. 상업 이윤은 실제로는 상업 자본이 전체 가치 중에서 먼저 차지하거나 추출한 가치다. 생산 부문 바깥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창조되지 않는다. 이것은 일정한 잉여가치를 산업 자본과 상업 자본이 나누어 가지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둘 사이에 객관적인 이익 충돌이 있음을 뜻한다. 동시에, 잉여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은 그들에게 공통으로 이익이 되며, 그것은 노동 착취의 증가를 뜻한다. 자본가 계급 내부에는 산업 자본과 상업 자본 간의 대립이 있지만, 이 대립은 계급 전체와 노동자 계급 사이의 주된 대립에 비해서는 부차적이다.
그리고 실제로 산업 자본과 상업 자본 간의 부차적 대립은 보통 상업 이윤율이 앞에서 정의한 평균 이윤율에서 크게 동떨어진 채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해결된다. 만약 상업 이윤율이 산업 이윤율보다 실제로 훨씬 높아진다면, 산업 자본가들에게는 상업 부문에 투자해 자신의 생산물을 직접 소비자에게 배급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자본 투자 형태 사이의 경쟁은 각 부문 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부문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그 결과로 형성되는 평균 이윤율은 경제 전반에 적용되는 경향을 보인다.
산업 자본가들이나 상업 자본가들이 순전히 자신의 자본만으로 사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이자를 주고 돈을 빌려 쓴다. 대기업은 크고 작은 예금자에게 이자 낳는 대출에 대한 보답으로 증권 또는 채권을 발행한다. 예컨대 3,000단위의 돈을 가지고 있는 예금자는 특정 회사의 100단위짜리 채권 30매를 살 수 있는데, 그 회사는 3,000단위의 돈을 15년이나 20년 뒤에 상환하기로 하되, 차용 기간에 따라 해마다 7~8퍼센트의 이자를 주기로 약속한다. 대기업은 또 국가에서 대출(대개 싼 이자로)을 받기도 한다. 흔히 은행은 자신의 고객인 기업에게 중기(中期) 대출을 해주며, 기업이 받는 어음을 할인해 준다. 즉, 은행은 고객에게 어음 지급일까지의 기간에(보통 3개월에서 6개월) 어음 액면가대로 선불해주고, 이를 할인하거나 이자를 받는다. 지금까지 이자를 낳는 대출(장기나 중기 또는 단기)의 여러 형태에 관해 설명했는데, 이 대출은 모두 기업가들이 사업을 확장할 수 있게 해 준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받는 반대 급부인 이자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화폐 자체가 본래부터 화폐를 만들어 내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틀림없다. 화폐는 '새끼를 치지'않는다. 그렇지만, 만약 화폐가 생산 과정에 투자되는 자본의 형태를 띠게 되면, 그것은 잉여가치를 차지하고 이윤을 얻는다. 앞에서 에로 든, 3,000단위의 저축액은 장롱 속에 감추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것이 채권에 투자됐을 때만 8퍼센트의 이자를 낳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기업이 그 돈을 생산 과정에 투자하게 되고 여기서 이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해마다 지급되는 이자는 생산 자본인 원래 투자 총액이 발생시킨 잉여가치의 일부다. 그러므로 금리는 이윤율보다는 낫다. 만약 3,000을 빌린 자본가가 그것을 다른 돈과 함께 생산에 투자함으로써 20퍼센트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그는 8퍼센트를 투자자에게 제공하고 12퍼센트의 순이익을 남길 수 있다.
잉여가치는 오직 생산 과정에서만 창조된다. 그러나 산업 자본가는 그 일부를 상업 자본가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추가로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데 쓸 수 있는 현금을 보유한 사람에게 또 다른 일부를 이자로 나눠주기도 한다. 잉겨차기 분배 문제가 점차 커지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은 특히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잉여가치가 이해 당사자들 간에 분배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상업 자본가나 금융업자 외에도 이러한 이해 당사자들은 많이 있다.
이제 여기서, 그저 돈 만지는 것이 직업인 사람, 즉 금융업자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금융업자의 기능은 평균 이윤율보다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는 일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은 일반적인 평균 이윤율과 동일한 비율의 이윤을 실현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금융업자가 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역설은 사람들을 착각에 빠뜨린다.
첫째 의문은 금융 자본의 근원에 관한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금융업자들은 자기 사업을 위해 무엇을 사용할까 하는 것이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틀림없이 자기 자본을 투자해 중앙사무소와 지점을 세우고 고객용 카운터를 만든다. 예를 들어 어떤 은행이 그런 식으로 총계 100단위의 자기 자본을 투자했다고 가정하자. 그 은행은 카운터를 통해서 곧 자기 자본을 훨씬 초과하는 예금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예금이 곧 1,000이라는 액수에 달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은행은 소액 당좌예금에 대해서는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다. 고액의 저축예금과 정기예금, 보통예금 등에 대해서는 유동적이지만 결코 높지 않은 금리로 이자를 지급한다. 여기서, 여러 가지 저축예금에 대해 지급하는 평균 금리가 3퍼센트라고, 즉 1,000에 대해 30이라고 가정해 보자. 은행은 예금으로 받은 돈 중에서 극히 일부만을 인출에 대비해 지불준비금 형태로 남겨두고, 나머지는 자본가들에게 빌려줄 것이다. 만약 이 은행이 200을 지불준비금 형태로 남겨 두고 800을 평균 금리 8퍼센트로 빌려준다고 가정하면 은행이 받는 이자는 64가 된다. 연말에 은행의 이윤은 64(받은 이자)-30(지급돼 나간 이자)=34가 될 것이다. 산업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금융업자도 이 이윤을 처음에 투자했던 100과 연관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총이윤율은 가 된다. 이윤율은 자본가의 자본에 근거해 계산된다. 그러나 금융업자가 자본으로 운용하는 돈은 다른 사람의 돈이다.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자를 낳는 자본에서 이러한 자동적인 물신(物神), 스스로 팽창하는 가치, 돈을 낳는 돈은 잠재적으로 자체 팽창하는 가치이고, 그렇게[자체 팽창하는 가치로서] 대출된다. …가치를 발생시키고 이자를 낳는 것이 돈의 속성이 된다 …." 그러나 이 겉모습 뒤에서 자본이 이자를 생산한다는 신비화─"마치 사과나무가 사과를 생산하는 것과 같은"─가 모든 자본은 과거의 노동이 구체화한 것일 뿐이고 그러한 과거 노동의 가치는 산 노동(새로운 생산적 노동)과 접촉함으로써만 새로운 가치로 이전되고 통합된다는, 직접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본질적인 현실을 은폐하고 있다.
이자를 낳는 자본이라는 물신은 환상일 뿐인데도 모든 자본가들의 생각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 때문에 자본가들은 자신의 자본이 스스로 이자를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인해 아주 자연스럽게 모든 종류의 기업 이윤에서 두 가지 독립된 요소를 구별해 내려 한다. 첫째는 자본에 대한 이자이고, 둘째는 기업가 이윤이라고 불리는 이윤(총이윤에서 자본에 대한 이자를 뺀 것)이다.
어떤 자본가가 한해 동안 자본에 대해 20퍼센트의 순이익을 냈는데, 만일 이 자본을 다른 사람에게 대출했더라면 같은 기간에 7퍼센트의 이자를 얻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면, 그 자본가는 다음과 같은 확고한─그리고 잘못된─결론을 내릴 것이다. 즉, 자본은 7퍼센트의 이자와 13퍼센트의 기업가 이윤, 즉 경영에 대한 보상을 발생시켰다고. 그리고 자본가는 우수 경영 기업이 부실 경영 기업보다 더 많은 이윤을 낸다는 사실로써 이 경영에 대한 보상 또는 보답을 정당화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계급 대립─구체적으로 말해 직접 생산자인 노동자들과 생산수단의 지배자인 자본가들 간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체제 하에서 경영과 관리 기능은 감독·억압 기능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 되는데, 특히 계급 대립이 더욱 첨예해지거나 널리 확산될 때는 단순하고 순수한 억압 기능이 돼 버린다. 이런 맥락에서 경영과 관리는 평화로운 동질의 '집합적 노동자'의 노동 조직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자본에 대한 이자가 정당할 수 없는 것처럼, 기업가 이윤도 정당할 수 없다. 이 둘은 모두 자본의 노동 착취라는 근본 현실을 감추려는 계급[자본가 계급]의 사상적 구조물이다.
이제 이윤의 도 다른 형태, 즉 토지에 대한 지대를 이야기 하는 일이 남았다. 이것은 주로 역사적인 이유에서 논의된다.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산업 노동자가 증가하면서 농업 노동자(이들 중 상당수는 시간제였다) 수가 줄어들었고, 그에 따라 농업 토지 소유 문제가 덜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먼저, 토지 경작은 사회에 유용한 물질을 생산하고 만약 자본주의 생산양식 안에서 이루어지고 노동력이 임금으로 구매된다면 가치와 따라서 잉여가치도 창조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토지 자체는 하나의 생산요소이지만, 공기나 물과 마찬가지로 고유한 가치는 지니고 있지 않다. 그래서 모든 이용 가능한 토지가 자본주의적으로 이용될 때 비로소 자본이 될 수 있다. 역사상 그때부터 임대 토지는 산업 자본가에게 대출된 화폐가 이자를 발생시키는 것과 대략 비슷한 방식으로 지대를 발생시켰다. 그러므로 토지에 대한 지대는 이윤의 특별한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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