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결의 밭에서 수확량이 많으면 800두, 적으면 600두요 최하 400두다. 지주의 땅을 경작하는 농부는 1년 동안 고생하며 품팔이를 하여 겨우 여덟 식구의 식량을 구한다. 그러나 추수가 되어 지주에게 그 절반을 빼앗기면 600두를 거둔 자는 300두가 남게 될 뿐이다. 종자를 제하고 빚을 물고 그 세전의 식량을 제하면 남는 것은 100두다. 여기에 다시 국가의 조세와 극도로 무제한한 가렴잡세의 수탈이 있다. 불쌍한 백성들은 무엇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 목민심서 권5, 호전(戶典)
열병을 앓은 듯한 부동산 시장을 돌이켜보면 한바탕 꿈이 아니었나 싶다.
그 일장춘몽 속에서 어떤 이는 수천/수억을 챙겼을 테고 또 어떤 이는 앞이 안 보이는 절망에 빠졌을 것이다. 길고 길었던 꿈. 꿈속을 헤맬 때는 엄두가 안 나더니 이제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나니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왜 우리는 정신을 놓아야 했던가?
우리의 정신을 놓게 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동북아에 불거져 나온 이 땅의 토지소유제도를 추적하다보면 낫 한 자루 곡괭이 한 자루로 목숨을 이어온 백성들의 한을 느낄 수 있다. 성을 갈아 왕조가 들어서고, 먹고 살 만한 이들이 동서/남북/노소로 갈라져 밥그릇 싸움을 벌일 때도 백성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살아남는 것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곡식을 일궈낼 땅이 필요했다.
균전이든 정전이든 혹 (보다 이상적이라는) 여전이든 명칭이나 제도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내 땅이든 남의 땅이든 소유관계도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씨말이나 뿌려두고 조석으로 땀 흘려 부모를 봉양하고 새끼들 배 곯리지 않을 정도의 땅뙈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 땅에 들어섰던 왕조는 백성들의 그 작은 소원 하나를 들어주지 못했다.
허다한 성군과 정승판서들. 후세에까지 위명을 떨친 그네들이 시행한 토지제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 거죽만 남은 노부모와 부황 들린 자식들이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멍석에 말려 나갔다. 백성들은 하늘을 탓하고 나라님을 원망할 도리밖에 없었다.
“하늘이 백성을 낼 적에 먼저 전지를 마련하여 생령으로 하여금 먹고 살게 하였다.”
-여유당전서 1집 11권 전론(田論)
다산의 말처럼 어느 왕조시대에나 땅은 있었다.
충분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땅이) 턱없이 부족했거나 (백성이) 게으른 탓이었더라면 차라리 원통함이 적었을지도 모른다.
국권이 남의 손에 넘어간 후에도 백성들의 배고픔은 끝나지 않았다.
남의 나라 안방을 차지한 일본은 제멋대로 토지조사를 실시하고 조선 땅의 40%를 강탈했다. 제대로 된 농민을 이식하고 진보된 농법을 보급하고 식산사업에 이바지한다는 명목으로 동양척식회사를 세우고, 1만에 이르는 자국민의 이민신청을 받아 멱살 거머쥐고 우려낸 땅을 그들에게 헐값에 불하했다.
맨손으로 건너와 졸지에 땅 부자가 된 내지인들은 한술 더 떴다.
불하한 토지에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했고, 종자로 혹은 소출 전의 식량으로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두어 달 후 20%의 고리를 붙여 현물로 거둬갔다. 견디다 못한 30만 백성이 이 땅을 등지고 삭풍만 불어대는 북간도로 쫓겨 갔다. 나라 잃은 설움에, 헛품 판 자괴감에, 땅뙈기 없는 억울함에... 백성들의 한은 골수에 미쳤다.
얼마나 큰 한이 맺혔기에
먹물도 마르지 않은 땅문서를 겹겹이 베옷에 둘러 장롱 깊숙이 숨겨두었을까.
혹시 작금의 미친 듯한 열풍의 기저엔 굶주렸던 백성들의 한이 뿌릴 내리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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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글로나마 무글방지위를 가동해 봅니다.
IMF 직후
요동치던 부동산시장을 보며 2001년 한경닷컴에 썼던 칼럼인데...
21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부동산 시장은 별반 달라진 게 없군요. ^^
첫댓글 "서부 사막 여행을 하면서 애리조나 어느 곳에선가 달리던 차에서..."
안 가본 곳, 안 해본 것이 거의 없는
울 방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