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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각지역 지명의 유래
서울
서울의 옛 지명은 '국내성', '남경', '한양', '경성' 등이었는데 서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적은 없었습니다.
서울이라는 단어는 한자어가 아니라 순 우리말인데요, 뜻은 "수도"입니다.
즉 서울이라는 말 자체가 수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울이라는 이 말은 조선 초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다가 남경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생겼습니다. 서울이란 눈 설雪 + 울타리 의 줄임말로써 그가 도읍을 정하러 다니다가 때가 겨울이라 다른 곳은 눈이 쌓여있는데 남경만이 볕에 눈이 녹아서 눈으로 울타리가 쳐진 것 처럼 보여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참고로 서울이라는 이름이 이 도시에 정식으로 붙여진 시기는 해방 후 '경성'이 '서울특별자치시'로 개명된 후 입니다.
이태원
이태원은 본래 조선시대 설치한 원(院)의 이름인데 이 원은 출장을 떠난 국가의 관리를 위해 나라가 마련해준 숙박시설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태원이란 조선시대 국립 호텔의 이름이지요.
그러다가 임진왜란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 일대에서 주둔하였는데 그 군대가 여승들을 겁탈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여승들은 아이를 낳아 이 곳에서 기르도록 나라에서 허락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름을 異胎院(다를 이, 아이밸 태, 집 원)으로 표기하였다 합니다.
용산
이 일대에 산이 있었는데, 산의 모양이 용을 닮아 이름을 용산이라 했다 합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산은 없습니다.
말죽거리
조선시대 지방과 서울을 오가는 여행자들이 이 일대에서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며 쉬어 간 곳입니다.
이괄의 난 때 인조가 도망가면서 이 일대를 지나다가 말 위에서 팥죽을 끓여먹고 떠난 바 있는데 이것도 유래에 대한 한 설입니다.
무악재
중국 사절단이 들어오던 고개. 말 한필이 겨우 헤집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험한 고개라는 뜻입니다.
혹은 무학대사의 이름에서 전해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되너미고개
되놈들, 즉 오랑캐들이 넘어오던 고개라는 뜻입니다.
미아리
불당곡의 미아사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용산구 보광동
신라 진흥왕때 보광국사가 세운 절이 있었습니다.이에 유래되었다 합니다.
광장동
넓은 마당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마당은 말이 여물을 먹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구파발
구파발이란 지명은 조선중기부터 공문서를 전달하기 위한 파발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지역은 옛부터 경의가도의 덕수원이란 국립여관외에 주막과 대장간이 많았다.
연신내
옛날 이곳은 산골 이었지만 한성부의 관할구역으로서 연서역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연서역은 조선초에 영서역이라고 칭하였는데 인조반정때 상단부사 이서가 이곳에 늦게 합류했다하여
영서역이 연서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흔히 이곳을 연신내라고 하는 것은 연서천을 이처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불광
불광동이란 지명은 이 근처에 바위와 절이 많았는데 그중 부처의 서광이 어린 불광사가 위치함으로 유래되었으며
이곳은 조선왕조때 한성부 관할구역으로,
수리봉 산밑에는 산돼지가 많이 내려와 농작물에 피해를 입은 저서현이라는 고개도 있다.
녹번
녹번이란 지명은 녹번이 고개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곳에서 홍제동으로 가려면 이 고개를 넘게 되는데 이 고개에서 약용으로 쓰이는 자연동인 <산골>이 나오므로 녹반현으로 부르게 되었다.
녹반현은 변음되어 녹번이 고개로 칭하게 되었는데 이 고개가 워낙 높고 험한데다가 숲이 우거져 혼자 넘어 다니기를 꺼렸다고 한다.
홍제
홍제라는 지명은 고려때부터 이곳에 홍제원이 있었기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홍제원은 서울 근교의 국립여관일뿐 아니라 조선말까지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그 규모가 컸다고
전해온다.
무악재
한양천도에 주요역할을 한 무학대사와 관련하여 무악현, 무악재라 칭하였으며
태조 3년 태조가 몸소 이곳에서 한양의 자세를 관찰한후 천도를 결심하였으며
또한 인왕산에 산세가 험준하여 호랑이가 많아 한양으로 입성할때 여러사람이 모여서 재를 넘었다 하여
모아재 라고도 하였다.
독립문
독립문역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이 세워져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문은 1897년 서재필 박사의 노력으로 영은문 대신 세운것으로 현재 사적 3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곳을 영천이라 부르게 된것은 악박골 약수가 유명했기 때문에 유래된것이다.
경복궁
(정부중앙청사)
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한후 새왕조를 상징하는 궁전을 1395년 창건했던 초기에는
비교적 소규모였으나 태종, 세종때에 이르러 증축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250년 후인 1869년
고종때 이르러서야 왕권확립 차원에서 오늘날의 규모로 재건립되었다.
안국
안국동은 조선초부터 이 일대를 안국방(安國坊)으로 정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이곳은 전일에 북촌(北村), 또는 '웃대'로 불리던 '서울 중의 서울'이었다.
조선초 성종때 월산대군의 풍월정이 있었으며, 조선말 고종과 명성황후가 혼례식을 올린 안동별궁이
인근에 있었다.
종로3가
종로는 조선왕조 500년동안 밤에는 인정(人定),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개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鐘樓)가 있어 유래된 것이다. 이거리에는 조선초부터 시전이 있었던 번화가였으 므로 일명
운종가로 칭한 서울의 중심가 였다.
을지로3가
을지로는 우리나라 위인중 한사람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붙인 것이다.
조선왕조때는 구리개로 불리던 이 길은 1914년부터 황금정(黃金町)으로 고친 적도 있다.
옛날 이 길은 종로 만큼 변화하지는 않았으나 관공서와 시전(市廛)이 들어서 있고 가내 수공업이
성한 곳이었다.
충무로
충무로는 임진왜란때 명장 충무공 이순신의 시호를 붙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건천동 즉 현재의 인현동1가 였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충무로로 지었다.
이곳은 남촌 또는 아랫대로 불리우던 지역으로 사육신의 힌사람인 박팽년 외에 많은 명사들이 살았다.
동대입구
동대입구역이 위치한 장충동(奬忠洞)은 광무 4년(1900) 을미사변때 순국한 사람들을 위하여
단을 꾸며놓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곳에 설치된 장춘단은 일제가 폐지하고 공원을 조성하였다.
약수
약수역은 1970년까지 약수동이란 행정구역 명칭이 있었으므로 유래된 것이다.
약수동은 신당 3동 지역에 위장병에 특효가 있는 약수가 있어서 유래된 것이다.
전에는 이곳에서 한남동 으로 가려면 높은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이 고개 이름을 버티고개라 칭했다.
금호
금호동은 옛부터 대장간이 많았으므로 "무수막"또는 한자음으로 수철리( 水鐵里)라고 칭하던것이
1936년부터 금호동이 되었다. 이곳은 지형관계로 농경지는 별로 없지만 옛부터 주민 들이 대장간,
복숭아 재배, 나루터 일에 종사하는 등 근검절약으로 생활수준이 높았던 곳이다.
옥수
옥수동은 이곳에 '옥정수'라는 우물이 유명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바위틈에서 나온 이 우물은 그맛이 뛰어나 왕에게 바치기도 했는데 1960년 도로공사때 매몰되었다.
압구정
압구정역은 조선조 세조,성종때 권신 한명회가 세상일을 잊기 위해 강가의 갈매기를 벗삼아 지내겠다는
정자 이름이다. 전일의 이곳은 돛단배 떠있는 "동호"와 강북의 원근 풍경 그리고 닥나무가 무성한 저자도
등이 펼쳐져 한 폭의 그림같은 절경이었다고 한다.
신사
신사동은 1914년 새말(新村)과 사평리(沙平里)의 두 마을을 합칠때 각각 첫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곳은 광주군 언주면에 속해 있을 당시에는 모래 벌판에 "새말" 나루터가 있던 한적한 곳이었으나
1963년에 서울시에 편입된 후 크게 변했다.
잠원
신사동은 1914년 새말(新村)과 사평리(沙平里)의 두 마을을 합칠때 각각 첫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곳은 광주군 언주면에 속해 있을 당시에는 모래 벌판에 "새말" 나루터가 있던 한적한 곳이었으나
1963년에 서울시에 편입된 후 크게 변했다.
고속터미널
반포동에 고속버스 터미널이 들어선 것은 1976년 9월 1일로 이곳은 서울역과 함께 서울의 관문이
되었습니다. 이곳을 반포동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개울이 구불구불 흐르기 때문에 서릿개 또는
蟠浦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盤浦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교대 (법원·검찰청)
교대역은 인근에 서울교육대학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이 역이 위치한 서초동은 예전에 서리풀이
무성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남부터미널 (예술의 전당)
서초동에 위치한 화물터미널로 인해 화물터미널역으로 되어 있었으나 화물터미널이 이전하고
이전장소에 남부시외버스 터미널이 들어와 남부터미널역으로 개명하였다.
서초동에는 정곡과 왕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정씨와 왕씨가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양재 (서초구청)
양재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교통, 우체역할을 하던 양재역이 이곳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이곳을 말죽거리라고 부르는 것은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을 지나 가다 유생들이 팥죽을
급히 쑤어 바치자 말위에 탄채로 팥죽을 들었다는 것으로부터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매봉
이곳은 본래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이었으나,
1963년 서울시에 편입 되었으며 독구리(지금의 도곡) 마을 사이에 약 95m정도의 매봉산이 위치하고 있다.
도곡
도곡의 유래는 마을뒤에 매봉산이 둘러있고 물아래쪽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돌부리라하던 것이
변하여 독구리, 독곡이 되어, 지금의 도곡이라 명명하였다.
대치
대치동 동명의 유래는 당시 자연부락 7,8개 마을중 큰고개 밑에 있는 한티(또는 한터) 마을을 한자명으로
대치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학여울
학여울이란 탄천과 양재천이 만나는 지점인 한강 갈대밭 부근의 옛지명이 대동여지도에는 鶴灘으로 '탄'을
한글로 풀어서 학여울이라 제정하였다.(여울:강이나 바다에서 얕거나 좁아 물살이 빠르고 세찬곳)
대청
현지 일원동 677번지 일대로서 일제때인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 확정때에
이지역에 있던 대청마을이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일원리와 합병되었던 곳 으로 대청역은 합병되기전
옛고을 지명으로 명명되었다.
일원
일원 동명의 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일원이라는 서원이 있었으므로 일원이 변하여 일언이라 한데서
연유하고 또한 이 근처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므로 본동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설 에는 이 마을의 사방이대모산에 가리워져 숨겨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일원동이라 불리어
졌으며 '일원역'은 이러한 유래가 있는 법적 동명을 사용했다.
수서
이지역의 서쪽에 한강물이 흐른다하여 수서리라 하였다하며 예전부터 일원동과 같이 변천 해 왔다.
또한 이곳은 조선 태조의 제7자 무안대군(방번) 내외 및 그 자손들의 묘소와 전주 이씨 장의 공파 묘소
700여기가 있어 궁말 또는궁촌이라 불렀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지방 유형 문화재 제 48호로 지정보호
하고 있다.
당고개
예로부터 당고개(일명:덕능고개)는 산짐승이 많아 나그네들이 몸을 보호하기 위해 돌을 들고 넘었으며
그돌을 쌓아둔 서낭당 터가 이곳에 있어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서낭제를 지낸다.
상계
불암산과 수락산의 골짜기에서 생겨난 '한천'이 중랑천으로 이어지고 이 한천의 계곡 윗부분을 상계라
일컫고 하부를 하계라 한데서 유래됨
노원
노원이란 명칭은 조선시대의 국립여관격인 원(院)터가 있었던 곳이라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하며,
서울 근교에서는 이와같은 홍제원, 이태원등이 있었다고 한다.
창동
창동이라는 지명은 본래 이지역 일대가 넓은 들판으로서 조선시대에 임금님께 곡식을 진상하던 곡물창고가
있었던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쌍문
쌍문이란 지명유래는 쌍갈래길에 이문이란 일종의 방범초소가 있어 '쌍갈무늬'라고 불리던 것이 변음된
것이라고 한다.
수유
수유리라는 지명은 인근의 우이천이 장마철이되면 흔히 물이 넘쳐 물결치는 모습이 아름답다 하여 수유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미아
'미아'라는 지명은 고려말기부터 부근 야산의 언덕에 있던 마을의 모습을 넓을 미(彌)와 언덕을 뜻하는
아(阿)를 합하여 부르던 것으로 원래는 삼각산 끝의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삼양동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미아삼거리
'미아삼거리'라는 명칭은 장위동과 종암동 그리고 돈암동으로 갈라지는 세갈래 길이 나뉘어 지는 지형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이 일대는 예로부터 밤나무숲이 많아 밤나무골 월곡 (月谷)이라는 지명이 전해지기도
한다.
길음
길음(吉音)이라는 지명은 일명 기레미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말은 본래 이 지역을 통과하는 정릉천이 흐르는 계곡마다 그 물소리가 맑고 고와서 좋은 노래소리가
들리는 동네라는 뜻으로 지금은 그 음을 따서 길음동으로 불려지고 있다.
성신여대입구 (돈암)
돈암동이란 지명은 되너머고개 즉 돈암현(敦岩峴)이 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현재는 미아리 고개라고 불리고 있지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되놈'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해 왔기 때문에
되너미고개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한성대입구 (삼선교)
삼선교(三仙橋)라는 지명은 이 지역 남쪽의 옥녀봉 봉우리에 하늘에서 내려온 세 선녀와 옥녀가 함께
어울려 놀았다는 전설이 오늘에까지 전래되고 있는데서 유래된 것이다.
혜화
혜화라는 지명은 근세 조선의 도성8대문중의 하나로서 혜화문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혜화문이 위치했던 숲의 무성한 고개를 '동소문고개'라 했다 해서 동소문으로 불리어 졌었다고 한다.
동대문
동대문은 흥인지문의 속칭으로 도성 4대문 중의 하나이다. 보물 1호로 지정된 동대문은 조선초 태조때
세워졌지만 조선말 고종때에 완전히 해체하여 바닥을 높인다음에 건축한 것이다.
이 문을 특별히 옹성으로 쌓은것은 이곳의 지대가 낮아 외적을 방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동대문운동장
조선시대 군졸들이 무술훈련을 하던 훈련원 터였고 일제때는 육상경기장, 야구장,정구장이 완공되어
경성운동장으로 불리어졌고 해방후 경마장의 시초가 된 곳이며 또한 광희문 (시구 문)이 인접해있다.
충무로
충무로는 임진왜란때 명장 충무공 이순신의 시호를 붙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건천동 즉 현재의 인현동1가 였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충무로로 지었다.
이곳은 남촌 또는 아랫대로 불리우던 지역으로 사육신의 힌사람인 박팽년 외에 많은 명사들이 살았다.
명동
명동은 갑오개혁(1894년)때 처음 붙여진 이름으로 이는 조선초부터 이곳을 명례방이라고 한데서
유래된 것이다. 유행의 1번지로 일컫는 이곳은 한때 다방을 중심으로 '예술의 거리'로 알려져 있다.
회현 (남대문시장)
회현동은 조선말 고종때 처음 붙여진 이름으로 이는 전일의 호현동(好賢洞)이 반음되어 유래된 것으로
이곳에는 조선왕조때 정광필, 김상헌 형제등의 어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회현동(會賢洞)이라
불리어진 것이다.
서울역
광무4년(1900년)에 남대문역으로 출발한 서울역은 우리나라 철도의 대표적인 역으로 주요철도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이다. 1923년 경성역으로 개칭되었으나 광복후 1947년에 서울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사적 284호로 지정된 서울역사는 1925년에 지어진 건물로 서울의 관문이다
숙대입구 (갈월)
숙대입구역이 위치한 갈월동은 갑오개혁때 붙여진 명칭으로 칡이 무성하여 유래된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곳은 산줄기가 불룩하게 나와 있어 '부룩배기'라고도 불린다.
삼각지
현재 삼각지역이 세워진 곳은 옛날 한강, 이태원, 서울역방면으로 도로가 나있어 땅모양이 세모졌다고 하여
삼각지로 불리운 것이다. 이곳은 한강로1가 지역이지만 조선 중기 이후 에는 둔지방이라 칭해왔다.
신용산
용산의 지명은 백제 기루왕때 한강에서 두마리 용이 나타나 유래되었다는 설과 산줄기가 마치 용처럼
구불구불 뻗어 나갔기 때문에 불리어 졌다는 설도 있다.
서울의 경우 무악에서 부터 시작된 산줄기는 남쪽의 약현과 만리현을 지나 한강변에 와서 머리를 든 용과
같은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이촌
이촌동은 옛날부터 중지도와 상변에 살던 사람들이 큰 비만 오면 대피했기 때문에 이촌동 으로 되었다고 한다.
또한 1914년에 신촌리, 사촌리의 두 마을을 합쳤기 때문에 이촌동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동작
조선 왕조때 서울과 수원이남 지방을 잇던 동재기 나루 즉, 동작진에서 유래됨
총신대입구 (이수)
총신대입구(이수)역은 이곳에 이수교가 있으므로 유래된 것이다.
이수교는 배물다리를 한자음으로 고친 것으로 이 다리 남쪽에 배나무골이 있고 동쪽에는 한강물이
흐르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사당
사당동은 옛날 이곳에 큰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전해온다.
즉 이곳은 백제 중기 이후의 토기 생산지로 한강변의 백제요지로는 유일한 곳이다.
남태령
남태령은 서울과 삼남(호남,영남,충남)을 잇는 길목이었다.
관악산의 북동쪽 능선을 가로지르는 고개의 남서울쪽에는 우면산 정상이 각각 자리잡고 있다.
남태령의 이름이 '여우고개'로 불리고 있을때 조선시대 정조는 이 고개를 넘어 수원에 있는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자주 참배 했다고 함.
정조가 이 고개를 넘을때 시종들에게 이 고개 이름을 물었을때 남태령이라고 답했었다고 함.
그후 이 고개를 남태령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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