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톨릭 신학] 기도의 방정식(루카 11,5-13)
수학에서 방정식이란 미지수의 값에 따라 참 혹은 거짓이 결정되는 등식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X+2=5’라는 등식이 있다고 할 때, X의 값이 3일 때에 이 등식은 참이 되지요. 따라서 방정식을 풀 때는 X의 올바른 값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방정식 문제를 내시는 듯한 부분이 있습니다. 엉뚱한 소리처럼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는 우리들이 X의 올바른 값을 찾기를 원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수님이 내주신 방정식을 함께 풀어보고자 합니다. 문제의 종류는 ‘기도의 방정식’입니다.
루카복음 11,5-13은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1-4절)를 알려주신 이후에, 기도하는 이의 자세에 관하여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끊임없이 간청하라는 것’(5-8절)과
그러한 마음으로 ‘계속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듯이 기도하라는 것’(9-13절)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9-10절) 즉, 예수님은 우리가 끊임없이 찾고, 청하고 문을 두드리는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구절은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인 13절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이 구절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에는 이미 답이 나와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성령’이지요. ‘끊임없이 기도’(5-8절)할 것을, 그리고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마음으로 기도’(9-12절)하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느님께서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것(13절)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기도의 방정식을 만들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청하고 싶은 내용을 X라고 해 봅시다. 그에 더해서 기도하는 방법으로는 끊임없이 청하고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성령입니다. 이것을 수식화해 보자면, ‘X(우리의 기도 내용)+끊임없이 찾고 청하기=성령을 보내주심’이 됩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기도 내용인 X의 값을 찾아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끊임없이 찾고 청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실까요? 아마도, 개인의 명예나, 사적인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내용의 기도는 성령을 받기에 적절한 기도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가르치셨듯이,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기 위한 용기와 지혜를 청할 때, 하느님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믿나이다] (18) ‘사람의 아들’ 칭호
구원자 예수의 인성을 드러내는 칭호 ‘사람의 아들’
-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실 때 밝히신 칭호로 주로 자신의 수난과 죽음, 재림, 죄 사함의 권능에 대해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다. 초대 교회는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주님’과 연결해 메시아의 인성을 강조하는 ‘사람의 아들’ 칭호를 사용하였다. 프랑스 루르드 성모 발현 성지 십자가의 길.
성경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을 드러내는 칭호 가운데 ‘주님’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실 때 가장 자주 사용하신 칭호입니다. 신약 성경 안에 ‘사람의 아들’이란 말은 오직 예수님의 입에서만 나옵니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스테파노 부제가 순교하면서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 7,56)라고 한 말입니다.
스테파노가 순교 순간 본 이 환시는 사실 예수님께서 산헤드린, 곧 유다인 최고회의에서 심문을 받을 때 예고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르 14,62) 이런 의미에서 스테파노의 고백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실현됐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베드로 사도의 고백처럼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칭호는 ‘그리스도’(메시아), ‘주님’, ‘하느님의 아들’ 이 세 가지로 집중됩니다. 바오로 사도도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5-16)라며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사도 9,20)
이처럼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고백은 처음부터 사도들과 초대 교회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명하셨고, 부활하신 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여주신다고 선포합니다. 교회가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 사도의 고백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은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다”라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마태 16,17)
아울러 교회는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 신원을 드러내실 때 말씀하신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에도 주목했습니다. 첫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실 때, 앞으로 겪게 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하실 때, 또 세상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할 때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뜻에 따라 ‘사람의 아들’의 수난과 죽음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아들의 죽음은 ‘부활’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씀하시지요. ‘반드시 수난을 겪고 죽어야만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에 속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사람의 아들’이 큰 환난이 일어나고 우주의 표징들이 나타난 후 큰 권능을 지니고 영광 중에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고 하셨죠.(마르 13,26) 교회는 이 말씀을 근거로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심판자뿐 아니라 당신께서 선택하신 이들을 불러 모아 그들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오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밝히십니다. 이는 당신이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신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라는 이 말씀을 근거로 그 권한을 받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드러내는 칭호입니다. ‘사람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께 맡기신 사람들을 믿음과 따름의 길을 통해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겪고 아버지에 의해 부활하시어 영광스럽게 되시는 구체적인 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사도들이 이끈 초대 교회는 온전히 그리스도 신앙으로 ‘사람의 아들’을 고백하고 선포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실제 역사 안에서 지상의 삶을 산 인간, 나자렛 예수였습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통해 일생을 사신 분, 부활을 통해 역사상 절대 혼동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삶을 산 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지배자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해줄 유다인들의 메시아가 아니라 세상의 구원자로서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고자 인간 본성을 취하시어 강생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하시어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당신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부활하시어 우리 부활의 근원이 되시고, 하늘에 올라 아버지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시어 창조 이전부터 누리던 영광을 다시 누리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을 믿는 사람들을 이 영광에 참여하게 해주십니다.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42) 특별히 기도하는 성월 ②
묵주기도 하고 순교자·죽은 이들 기억하는 성월
순교자(殉敎者) 성월(9월)
순교자는 피로써 ‘하느님 진리를 증거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지내는 것은 순교 성인 103위 중 33위가 9월에 순교했으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이 9월 20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인들처럼 피를 흘려 순교하지는 못하지만, 이들의 삶을 본받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하느님 뜻을 따라 기쁘게 사는 모습입니다. 하느님을 증거하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진리를 따르며, 진실하고 순결한 삶을 살기 위해 당하는 여러 어려움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감수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묵주기도 성월(10월)
교회가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공적으로 지내기 시작한 것은 1883년 레오 13세 교황이 회칙 「최고 사도 직무」(Supremi Apostolatus Officio)를 통해 발표한 후부터입니다. 이 회칙에서 묵주기도 성월 지정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하느님 자비와 우리 자신도 이웃과 함께 구원되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기도입니다.
환희·빛·고통·영광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예수님 구원사업에 함께하신 성모님의 행적을 묵상하는 것은 예수님의 삶, 즉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 묵주기도는 염경기도(소리기도)와 묵상기도(마음기도)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기도입니다.
- 묵주기도는 ‘요약된 복음’이라 할 만큼 복음서에 나타난 구원의 신비가 핵심적으로 요약된 기도입니다.
- 묵주기도는 성모님과 교황들이 요청하신 기도입니다.
10월 구원의 도움을 주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우리를 성화해 성덕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노력합니다.
위령 성월(11월)
998년 프랑스 클뤼니 수도원 5대 원장 오딜로는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지내도록 수도자들에게 명했습니다. 이것이 널리 퍼짐으로써 11월 한 달 동안 위령기도가 많이 바쳐지게 됐습니다. 11월이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 성월로 정해진 이유입니다. 이후 비오 9세·레오 13세·비오 11세 교황이 위령 성월에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면 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면서 위령 성월 신심은 더욱 널리 퍼졌습니다.
교회는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고, 이튿날인 2일에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을 지냅니다. 이날 모든 사제는 3대의 미사(첫째 미사 - 특정한 죽은 이들을 위하여, 둘째 미사 - 연옥 영혼을 위하여, 셋째 미사 - 교황의 뜻대로 봉헌)를 봉헌할 수 있습니다.
11월 위령의 달에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성화에도 큰 도움이 되며,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합니다.
- 순례 교회·투쟁 교회(신전 교회) : 순례 교회란 천국을 얻기 위해 세속과 육신과 악의 세력과 싸우고 있는 지상 여정의 교회, 즉 현세 하느님 백성의 무리인 지상 교회를 가리킵니다.
- 정화 교회(단련 교회) : 이 세상을 떠나 영혼인 채로, 죄를 다 풀지 못해 연옥에서 단련 받고 있는 하느님 백성을 정화 교회라고 합니다.
- 승리 교회(개선 교회) : 죽을 때 죄도 없고 잠벌도 없거나, 연옥에서 단련을 다 받아 천국에 들어가 하느님 영광을 누리고 있는 하느님 백성들이 승리 교회입니다.
[빛과 소금] 믿음 · 희망 · 사랑 : 사랑의 촛불 밝히기 (1) 기초 편
희망의 희년을 보내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세 가지 덕, 믿음·희망·사랑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가늠해 볼까요?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경륜(經綸)’입니다.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경륜은 ‘창조경륜’과 ‘구원경륜’으로 나누어 언급합니다. ‘창조경륜’은 우주를 만드신 하느님의 경륜을 말하고, ‘구원경륜’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잃어버린 이후부터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경륜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녹아 있습니다.
사랑이 차고, 차서 넘치면 창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연인이나 배우자 혹은 자녀에게 자꾸 이것저것 만들어 주는 모습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꾸 무언가를 만들어 주고 싶어 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의 속성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삼라만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주신 ‘자유의지’는 그 사랑의 절정입니다. 왜 자유를 주셨을까요? 바로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단지 피조물이 아니라 당신 사랑의 파트너로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당신 앞에서 자꾸 주눅 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 앞에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우리에게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속삭이십니다.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보아라. 나는 네 눈을 쳐다보고 싶다. 나는 너와 사랑을 주고받고 싶어서 너를 만들었단다.”
우리는 사랑할수록 더 많이 소유하려 하고, 또 억압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 사랑의 파트너로 삼기 위해 배반의 가능성을 무릅쓰고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이 대목이 바로 하느님 창조경륜의 절정이요 백미입니다.
구원경륜은 어떠할까요? 하느님께서는 구원경륜으로 강생구속(降生救贖)이라는 기막힌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저들이 이토록 나를 만지고 싶어 하고, 보고 싶어 하고, 느끼고 싶어 하니, 그들 눈높이에 맞춰 보자.” 하며 당신께서 사람이 되시어 오신 것, 곧 강생(降生)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눈높이를 맞춥니다. 진정한 사랑은 같이 아파하고 같이 느끼며 같은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위에서 그냥 뚝뚝 떨어지는 사랑은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반면 그 사람과 같은 눈높이에서 그와 함께할 때, 상대는 감동 받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어디까지, 또 얼마만큼 사랑하시는 걸까요? 그 사랑의 신비를 우리는 온전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맛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에페 3,17-19)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7) 교회는 신비다, 「교회헌장」 제1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제1장의 제목은 “교회의 신비”입니다. 공의회는 교회를 설명하면서 구원 역사 안에 펼쳐진 ‘하느님의 신비’라는 관점에서 교회를 바라봅니다. 신약 성경에서 ‘신비’란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가 때가 차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밝혀진 구원의 실재를 가리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신비이고, 교회 역시 신비인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한에서 신비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이루는 공동체가 가시적이고 역사적인 존재인 교회 안에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신비로 보는 견해는, 이미 「교회헌장」의 형성 과정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수에넨스 추기경과 필립스가 제출한 초안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공의회 이전까지는 호교론적인 시각에서, 특히 종교개혁 시대의 반종교개혁 시각에서, 교회를 하느님에 의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합법화된 통치 체제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렇게 가시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던 교회론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거부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안을 작성한 위원회는 「교회헌장」의 서문과 제1장의 제목을 ‘교회의 신비에 대하여’(De mysterio Ecclesiae)라고 붙이고, 그 해설에서 교회가 단순히 외적인 모습으로만 서술되지 않고 믿음의 대상으로 소개되어야 한다는 점이 제목에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위원회는 신학 용어로서의 ‘신비’란 단순히 베일에 가려 알 수 없는 어떤 추상적인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이 시대에 말하는 ‘신비주의’라는 말의 뉘앙스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구현되는, 하지만 신적이고 초월적이며 구원을 주는 실재를 가리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마르 4,11)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가 드러내는 신비, 곧 구원의 실재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신비라는 말은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 자주 등장합니다. 바오로에게 신비란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1코린 2,7)이고, 이 지혜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1코린 1,23) 안에서 실현됩니다. 따라서 바오로에게 하느님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구원의 실재이고, 이 “하느님의 신비는 곧 그리스도”(콜로 2,2)입니다. 바오로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신부(新婦)인 교회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바오로는 아내와 남편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신랑)와 교회(신부)의 결합을 “큰 신비”(에페 5,32)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바오로에게 신비란 하느님의 감추어진 구원 경륜을 실현한 그리스도이며, 신비인 그리스도는 그와 결합한 공동체인 교회 안에 현존합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신비”를 「교회헌장」의 첫 자리에 두었습니다.
[사회교리에서 희년을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며
지금이야 OTT(Over-the-top) 서비스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지만 제가 학교 다니던 그 시절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TV에서 방영해 주지 않는 최신 영화나 만화를 보기 위해서는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야 했었죠. 그래서 당시엔 동네마다 꽤 많은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영화는 늘 ‘대여 중’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죠. 오색찬란한 옷을 입고 외계에서 온 악당들을 무찌르는 영웅들의 이야기였는데, 제 또래 사이에선 굉장히 인기가 많았거든요. 영웅들이 우여곡절 끝에 서로 힘을 모아 무지개 광선으로 괴물들을 물리치는 그 통쾌한 장면을 볼 때마다 저의 심장은 늘 두근거렸었죠. 소년들에게 그것은 ‘정의(正義)’,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착한 영웅들이 나쁜 괴물들을 무찌르는 것. 바로 그것이 정의였죠.
그런데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알게 되더군요. 착하게만 산다고 세상이 정의로워지는 것은 아니구나. 물론 착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아름다울 것입니다. 하지만 정이 넘치는 아름다운 사회와 정의로운 사회가 동의어는 아니더군요. 20세기 초, 독일에는 과연 ‘나쁜’ 사람들만 득실거려서 그렇게 유대인들을 괴롭혔을까요? 그보다 앞선 18세기 말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과연 ‘착한’ 평민들이 ‘나쁜’ 귀족들을 물리친 정의로운 사건이었을까요? 착한 사람이 많은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개개인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복잡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정의로운 사회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고민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정의는 윤리적인 덕으로서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807항)
우리 교회가 바라보는 정의로운 사회란 과연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는 것이 ‘당연한’ 사회입니다. 착한 일을 한 사람이 바보 취급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을 받고,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이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는 사회, 바로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입니다. 이러한 당연한 것들을 위해 사람들이 싸우지 않아도 되는 사회, 바로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올해 희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희년의 중심에는 ‘해방’이 있죠. 이 해방은 바로 악습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잘못된 사회 구조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리고 이는 바로 ‘정의’로의 귀환을 의미합니다. 희년을 살아가는 오늘,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받아야 할 몫을 당연히 받는 그러한 정의로운 사회를 꿈꿔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