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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16-29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본문에서 모세는 네 가지 사실을 차례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베냐민의 출생과 라헬의 죽음입니다(16-20절).
2) 두 번째는 르우벤이 야곱의 첩 빌하로 더불어서 통간하는 폐륜입니다(21-22절 상).
3) 세 번째로는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22절 하-26절).
4) 네 번째로는 야곱이 자기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 사실에 대한 기록입니다(27-29절).
1. 본문 16절은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입니다.
우리는 말의 능욕이 성자 야곱에게 얼마나 혹심한 상처를 입혔으며 두 아들의 잔학 행위가 얼마나 그의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는지를 앞에서 읽었습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여러 가지 시련이 서로 얽혀져 있습니다. 그는 노년기를 통해서 이런 시험들 때문에 줄곧 심한 고통을 당합니다.
그 고통은 그가 애굽에 가서 자기 아들 요셉을 만나 새로운 기쁨을 얻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런 기쁜 일조차 그에게 극히 괴로운 시험이었습니다. 그것은 약속된 땅에서 추방되는 일이었고 그곳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할 것이었습니다. 이 다음에는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이 기술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장자 르우벤과 그의 처 빌하와의 근친상간이 나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그의 아비 이삭이 죽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의 아들 요셉이 채여 감을 입습니다. 그는 요셉이 맹수에게 갈갈이 찢겨 죽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끊임없는 슬픔으로 그가 기진맥진해 있는 중에 기근이 발생합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애굽에서 양식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이 거기서 구속을 당하게 되고 드디어는 그가 가장 사랑하던 베냐민조차 빼앗기게 됩니다. 그가 베냐민을 떠나 보낼 때는 마치 오장육부가 찢기는 듯한 아픔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곱이 극히 가혹한 투쟁과 끊임없는 재앙으로 연단받아서 보다 나은 생활에 대한 소망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헬은 오랜 여행의 피로로 인해 출산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때는 그들이 안식처에 도착하기 전이었습니다. 라헬이 죽은 것은 야곱의 슬픔을 적지 않게 가중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가 극히 사랑하던 아내를 여의게 된 데에는 아마 여호와께서 라헬에 대한 야곱의 과도한 애정을 징계하시려는 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레아가 경건한 부인이라는 사실을 보시고 그녀에게 불명예의 흔적을 남기시기는커녕 더 큰 미덕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라헬의 아름다움을 더 높이 샀습니다. 거룩한 사람 야곱의 이 잘못은 그의 아내의 죽음이란 쓴 약으로 치유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때때로 신도들에게서 자신이 주신 선물을 박탈하시는데 이는 그들의 편벽된 남용을 징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아주 대담하게 모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설혹 그들의 비행을 더 이상 묵과하신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그분의 참으심 때문에 더 엄한 정죄가 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택하여 부르신 백성들로부터는 범죄의 기회를 박탈하심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촉진시키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사를 계속해서 사용하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은사를 남용하지 않고 순수하고 건실하게 즐기도록 힘써야 합니다.
2. 본문 17-21절은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입니다.
우리는 고대인들이 자손 특히 남자를 매우 원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라헬이 득남하면서도 이런 종류의 위로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그녀가 완전히 고통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라헬은 오직 자기 슬픈 출산과 자기 슬픔만 생각하며 고통 중에서 죽었습니다. 그녀는 이런 감정에서 아들 이름을 짖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나중에 잘못을 시정하였습니다
개명(改名) 은 야곱이 자기 아내의 과도한 슬픔을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기 아내가 불길하고 상스러운 이름을 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과도한 절망이나 슬픔은 원망과 함께 배은망덕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경을 당하면 우리 마음은 슬픔에 잠겨 하나님의 친절하신 행하심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친절하게 어느 정도 달콤한 위안을 우리 마음에 주입해 주셔도 우리 슬픔은 경감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슬픔은 은혜의 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라헬의 매장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거룩한 조상들은 미래의 부활에 대한 소망만 아니었더라면 그와 같이 경건한 정성으로 장례를 치를 수 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무슨 비상한 의무 이행에 신경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해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말한 취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매한 의식이 아니었습니다. 미래의 부활에 대한 생생한 상징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시에도 여러 곳에서 속된 타락자들이 많은 비용과 수고를 허비해 가며 죽은 자를 매장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매장은 자기 슬픔에 대한 공허한 위로로서 행해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원래 규례에서 타락하여 큰 잘못을 범했다고 하더라도 여호와께서는 이 의식을 자기 백성 사이에 완전히 남아 있게 하셨습니다. 더욱이 여호와께서는 이 장례 의식을 통해서 불신자들이 변명하지 못할 증거를 그들 중에 남기려고 하셨습니다. 교훈과는 별도로 모든 죽은 자의매장이 경건한 의무 중 하나라는 것은 사람에게 고유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은 인체가 썩지 않을 것을 위해 형성되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따라서 인체는 죽음에로 내려간다 해서 완전히 멸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세운 것이 상이든 비석이든 그것은 동일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기 후손 사이에서 영광의 표적으로 남을 수 있는 성채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성을 기울여 라헬의 묘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비석은 그가 내생에 더 열중했다는 것을 만대에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념비는 하나님의 섭리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돌아올 때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3. 본문 22- 27절은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23) 레아의 소생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요
(24) 라헬의 소생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소생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소생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 아비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 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거하던 헤브론이더라” 입니다.
1) 이제 여기에는 르우벤과 그의 서모 빌하와의 근친 상간에 대한 슬프다 못해 비극적이기까지 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빌하를 야곱의 첩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빌하는 그 가정의 안주인이나 그 재산의 공동 관리자로서 야곱에게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대로 침상에 관한 한 그녀는 야곱의 합법적 아내였습니다. 만일 타인이 야곱의 아내를 더럽혔다면 큰 수치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아들에게서 그런 모욕을 당하다니 이 얼마나 지독한 수치입니까? 빌하는 두 지파의 어미였습니다. 그런 여자가 간음으로 자신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근친과 통간했다는 것은 이만저만 불명예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큰 수치요 극히 가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천문에 어긋나는 죄였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 사이에서조차 용납 받지 못할 죄로 간주되었습니다. 참으로 사단의 놀라운 궤계에 의해서 이토록 큰 음욕이 거룩한 가정에 침투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이 아무 효력도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단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택함 받은 자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왜곡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 일을 달성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감추거나 아니면 최소한 모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수치스러운 사례가 교회에 잠입해 들어오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낮추십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더 주의 깊게 감시하고 더욱 열심히 깨어 기도하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는 다만 야곱이 이 죄를 알았다는 것만 기술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비애를 감추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무감각해서가 아니라 그는 슬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진 않았으므로 그의 슬픔이 너무나 커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모세는 이피제니아의 제사를 묘사한 화가와 같이 행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 화가는 작품에서 이피제니아의 아버지의 얼굴에 베일을 덮어 씌우는데 이는 슬픔을 충분히 표현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야곱 가정의 외면적 수치였습니다. 이 외에도 늙은 성자의 가슴을 찌르는 다른 불안거리가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 그의 행복의 총화는 자기 소생에게 있었습니다. 그의 후손에게서 온 세계의 구원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그의 두 아들은 불성실하고 피비린내 나는 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맏아들이라는 자는 이제 그들보다 더 악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은 더 혁혁하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보다 야곱의 아들들을 더 좋아하신 것은 그들의 가치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처럼 야비하게 행동을 하고 또 심하게 타락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택은 굳게 남아서 효력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우리를 교란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두려운 주문에 대해 자신을 강화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은 이를 자기 신앙 강화에 적용해야 합니다. 선량한 자라도 때때로 마치 은혜를 상실하는 듯이 실족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사죄의 소망을 제공하지 않으신다면 그런 파멸의 결과는 절망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주목할 만한 본보기는 르우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르우벤은 이런 악한 행위를 저지르고 나서도 교회에서 족장의 위치를 보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혹이 무지불식 간에 우리를 사로잡고 사단의 올무가 우리를 둘러싸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경외심과 경각심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각자가 근친간의 결합을 감행하도록 하기 위해 사악한 음욕의 본보기를 우리 앞에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로 하여금 정욕을 한층 강력히 증오하게 하시기 위해 이 비열한 죄를 수치스럽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또한 노바투스의 잘못을 논박합니다. 르우벤은 적절한 교훈을 받았었습니다. 그는 이른 유아기부터 자기 몸에 신적 언약의 상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거듭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놀라우신 자비에 의해 건짐을 받은 심연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바투스파와 그에 유사한 광신자들은 타락자의 죄 사함에 대한 소망을 끊어버릴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더 제약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대해 적지 않은 피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2)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에서 모세는 차례대로 야곱의 아들을 다시 세어보고 있습니다 모세는 르우벤을 그들 중에 제일 먼저 꼽고 있습니다.
이것은 르우벤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로 보다 큰 치욕을 당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든지 여호와께 받는 명예가 크면 클수록 그가 나중에 사단의 노예가 되며 자기 지위를 유기하는 경우에는 그가 받을 책망도 더욱 더 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삭의 죽음에 대한 설명에 앞서 이 인명록을 삽입하는 목적은 다음 장에서 언급하려고 하는 이두메아 자손과 야곱 자손을 구별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이삭의 죽음은 거룩한 종족의 분수령이 되어서 그들은 원천에서 흘러 나온 두 줄기의 시냇물처럼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양자 채택은 하나의 가지에만 제한되기 때문에 이 두 종족을 구별하는 일이 필요하였습니다.
4. 본문 28-29절은
“(28) 이삭의 나이 일 백 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입니다.
기사의 전후 관계에서 곧 나타날 것이지만 이삭의 죽음은 제 순서대로 기술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hysteron proteron 이란 표현과 친숙하였습니다.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서 죽었다는 말씀은 그가 자기 인생행로를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살만큼 살다가 떠나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이 그의 생존기간 뿐만 아니라 그의 감정 상태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에는 이삭이 자기 수명에 만족하고 평온하게 세상을 떠나갔다고 암시됐습니다. 어떤 노인들은 아주 늙어서도 청장년 때 못지 않게 생에 애착하며 한 발을 무덤에 두고도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복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가 오래 살았다고 느끼며 하나님의 은총과 자신의 수명에 만족하여 출발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나이를 많이 셀 수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노인들은 이런 식으로 자기 마음을 조정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선한 양심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피하지 않으려는 목적 의식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악한 양심은 두려움으로 악인을 추격하며 교란시키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에서와 야곱이 이삭을 장사하였다고 덧붙여서 말합니다. 그 당시에는 부활이 명백히 계시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첫 열매된 자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조상들은 의미 깊은 의식의 훈련을 훨씬 더 많이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죽음에서 멸망 모습을 보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씻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에서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생에서는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의 열매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장자 권리를 얻었던 야곱이 그 아버지 사후에도 여전히 에서에게 복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땅 위에서는 여호와 만이 방패시요, 상급이시라는 사실이 언약으로 혹은 비유적으로만 주어질 뿐입니다.
천국과 내세의 생명은 육신의 안목으로 볼 때에는 뒤로 미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위 일체 하나님이 계신 만큼 우리의 본향이 확실하기 때문에 지상에 사는 그리스도인마다 스스로를 나그네로 인정하면서 계속해서 본향을 찾아나가는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과 함께 그것이 우리에게 주실 최상의 상급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가 선진들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할 때에 실제적으로 우리 눈앞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